이란의 권력은 어떻게 분열되는가?

혼란스러운 억압 세력

2023-01-31     스테판 A. 뒤두아뇽 l 종교사회학자

완강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시위대에 맞선 이란 정부 당국은 강경책을 택해 평정을 되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종교계 일부에서는 권력과 분쟁 사이에 중재 메커니즘의 부재를 아쉬워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작가 요세프 브로드스키(Joseph Brodsky)는 저서 『독재』에서 “독재자를 택할 거면 가장 늙은 사람을 택하라”고 말했다.(1) 그 이유는, 노쇠한 자신의 몸을 걱정하느라 국가 업무를 덜 걱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알리 하메네이(Ali Khamenei)에게도 적용될까?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전직 대통령이자 1989년부터 최고지도자로 군림해온 그는 올 봄이면 85세가 된다.

지난해 9월 16일, 쿠르드족 여성인 마흐사 아미니(Mahsa Amini)가 지도 순찰대(이란의 이슬람 종교 및 도덕 경찰-역주)에 의해 의문사를 당하자, 이란 전역에서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2) 시위 속에서, 이란 지도부는 일련의 사태를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0월 26일, 시위대에 실탄을 발사하기 전 몇 주동안 공권력은 무너진 듯했고, 테러집단의 공격으로 이란의 성지는 피로 물들었다. 이란 곳곳에서 당국의 강경 진압에 저항하는 시위가 일어난 가운데, 설상가상 10월 27일, 이슬람 무장단체 IS는 시라즈(Chiraz)의 샤체라그(Chah-Tcheragh) 모스크에서 총격 사건을 일으켰다. 

이란 정부 당국이 공권력을 투입해 시위를 과도하게 진압하며 사상자가 속출하자 하메네이에게 강경 진압의 직접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3) 이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다. 하메네이 반대파 중에는 수니파인 몰라비 압둘하미드 이스마엘자히가 있다. 이란 남동쪽 끝 발루치스탄주(州) 자헤단(Zahedan)의 성직자인 그는 지난해 9월 30일, 시내에서 평화 시위를 벌이던 시민 중 91명(공식 집계는 35명)이 죽임을 당한 ‘검은 금요일의 학살’을 규탄했다.(4)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이란에서는 시아파가 엄청난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으나, 수니파는 비주류로 밀려나 있다. 두 종파 간의 분열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일각에서 두려워 할 정도로 여러 도시에서 통제불능 상태의 폭력 시위가 목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교계가 대책 없이 수수방관했다면, 무장세력과 경찰 특히, 국민의 치안을 담당하는 혁명수비대(IRGC, 이슬람 체제 수호를 주요 임무로 하는 이란 최정예 부대-역주)와 산하조직인 바시즈 민병대는 자헤단의 ‘검은 금요일의 학살’에서처럼 극단적인 폭력진압을 내세웠다. 

다수의 관찰자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하나는 군대의 조직적인 진압이 이뤄졌다는 점(몇몇 민중 시위는 전쟁 무기 발포의 대상이었다)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의 사복경찰을 동원한 침투 공작에도 불구하고 아미니 사망 40일이 되는 날, 시위가 수차례 일어났다는 점이다.(5) 곳곳에 있던 경찰은 비무장한 군중 앞에서 결국 물러났다.

 

정부가 SNS를 차단한 이유

정부와 시위대 간의 이 명백한 대립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중 하나는 혁명수비대의 오랜 징병 및 운영 방식이 극심한 지역 차별을 초래한 것이다. 가령, 평시에 혁명수비대 대원들은 출신 지역 내 부대에서만 주로 복무했다. 수도 테헤란과 국경지대는 타지 출신 인사를 배정했다.(6) 혁명수비대 대원들의 장점인 끈끈한 유대감은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년) 또는 시리아 내전(2012년~현재) 같은 전시에 아주 유용했다. 2003년 지자체 선거에서 혁명수비대가 승리를 거둔 후, 이 유대감 덕분에 혁명수비대는 지방 정치, 경제 및 단체(스포츠 동호회 등은 혁명수비대의 버팀목이 됐다)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반면, 혁명수비대는 같은 지역 출신의 군인들과 주민들간의 유대 관계 탓에 시위대의 진압을 어렵게 하는 단점도 있다. 이란 국민들은 지난해 9월 중순부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군대와 군의 과잉진압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고, 이란 스포츠계(특히 축구계)는 시위를 지지하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SNS 차단이라는 대책을 내놨다.

 

중무장한 특수부대들

시위대의 항의는 거세졌고, 주둔군에 대한 신뢰는 추락했다. 그러자 정부는 혁명수비대 산하 중무장한 몇몇 특수부대와 경찰, 그리고 재래식 군대(2016년 봄부터 시리아에 이미 주둔하고 있고 혁명수비대의 후원을 받는 공군 65여단의 공수부대가 대표적인 사례)를 동원했다.(7) 지도자 하메네이와 측근들은 지난 1979년 팔레비 왕조가 경찰 조직의 탈퇴와 군대의 불만 및 사기 저하로 붕괴된 사실을 반면교사로 기억하고 있다. 또한, 자신들의 정권은 국민에게 인기 없는 정권이고 수적으로 증가하는 사회단체들 속에 고립돼 있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듯하다. 그래서 특수부대를 동원한다던가 아니면 그중에서도 중무장한 정예부대를 진압에 투입하는 것이다.

이 특수부대들은 민병대 조직을 가지는데, 그중에는 레바논의 헤즈볼라(Hezbollah, 레바논의 이슬람교 시아파 교전단체이자 정당조직-역주)와 이라크의 인민기동부대(Hashd al-Sha’bi)가 있다. 혁명수비대와 이슬람 민병대 간 유착관계를 알려주는 예시가 있다. 혁명수비대 산하 최정예 부대인 쿠드스군의 전직 사령관 솔레이마니(Soleymani, 2020년 1월 미군 드론 폭격으로 사망)의 딸 제이납 솔레이마니는 군대 강화를 위해 민명대 헤즈볼라 당원과 결혼하면서 레바논에 2백만 달러를 지원했다고 고발당했다. 혁명수비대와 산하조직은 내부 개혁을 통해 조직을 정비해나갔지만, 이맘 후세인(Imam Hussein, 예언자 무함마드의 손자로 3대 시아파 지도자-역주)에 대한 숭배를 혼합한 초국가주의가 채택되면서 또다시 이데올로기적 도착증에 빠졌다.(8) 

2021년, 보수파 후보 에브라힘 라이시(Ebrahim Raisi)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정권에서 ‘개혁파’ 세력을 완전히 축출했다.

‘체제순응적’인 시아파는 지역 불균형을 등한시하는 이 민병대들의 과잉진압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이 상실될 것을 우려한다. 또, 만약 시위대 진압에 유사 군조직이 투입될 경우, 자신들에 대한 전면적인 배척 현상이 나오지 않을까 우려한다. 전직 혁명수비대 사령관 모흐센 레자이가 설립한 타브낙(Tabnak, 이란 인터넷 신문-역주)처럼 혁명수비대와 가까운 매체들도 같은 우려를 표명한다. 타브낙은 지도 순찰대의 개편 및 협상, 이슬람 공화국의 개혁을 촉구하며 지역 헌병대의 폭력(혁명수비대와 바시즈 민병대의 주요 학살을 정당화하는 방식)을 비판했다. 바박 네가다리(Babak Negahdari) 국회 연구소 소장(10월 31일)과 특히 변호사연합(11월 1일)도 정부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냈다.(9) 그 사이, 이란 내 여러 지역의 모스크에서 강제 진압에서 희생된 이들의 사망 40일 기념 추모식이 진행됐고, 추모식에서는 이맘 후세인의 추모에서 영감을 받은 시아파 의식과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는 외침이 뒤섞였다. 카스피해 연안의 바볼(Babol)에서의 사건이 그랬다. 지난해 10월 31일, 어린 밀라드 자레(Milad Zare) 사망 40일 추모식이 유튜브 채널 쿠체(Koocheh)에서 생중계됐다. 가슴을 주먹으로 치는 것은 아슈라(Achoura, 이슬람 시아파 최대 종교 기념일-역주)때, 독실한 남자 신도들이 하던 자해 의식에서 따왔으며, 680년 카르발라(Karbala) 참사에서 이맘 후세인의 시신이 살인자들에 손에 유기됐을 때의 비통함을 표현한다. 수많은 이란 사람들은 1979년 혁명 당시 이란 경찰에 의해 사망한 시위자들에 대한 추모식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기억하고 있다.

 

“독재의 최대기간은 20년” 

이런 상황에서, 자헤단 ‘검은 금요일의 학살’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지 경찰 책임자의 해임이나 대학교 구내식당에서 남녀 동석 허용 같은 회유책이 정부가 원하는 효과를 가져올지는 미지수다. 혁명수비대 장군이자 교통부 장관이었던 로스탐 카세미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둘째 부인과 함께 말레이시아 여행 도중 찍힌 사진들처럼 몇몇 행동들이 오히려 국민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정예 특수부대 및 국제 민병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지도자의 거만함과 파렴치함은 지난 늦가을 그의 걱정거리가 오직 ‘시간 벌기’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동맹국이 된 러시아와 중국의 지지를 받으며, 시리아 내전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위축돼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그는 모든 걸 할 준비가 돼 있다. 독재 정부의 속성을 잘 알 아는 브로드스키는 “독재의 평균 기간은 15년에서 최대 20년이다. 20년을 초과하면 필연적으로 잔학함에 빠지게 된다.”며 경고했다. 독재자 호메이니(Khomeini)는 1989년 자신의 사망 직전, 경찰의 ‘절대’ 섭정(motlaq)론을 적용해 이 잔학함에 대한 구실을 만들기도 했다.

호메이니의 영향력과 초국가적 민병대에 대한 의존도를 물려받은 권력의 잔혹함, 그리고 혁명수비대의 재정비로 인해 사회적 긴장은 고조됐다. 점점 더 과도한 폭력양상을 띠는 권력의 분열증은 2022년 11월 초에 나타났으며, 이란의 존재를 전적으로 위협하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글·스테판 A. 뒤두아뇽 Stéphane A. Dudoignon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 산하 종교 및 비종교 사회학 그룹 연구소(GSRL) 소장. 저서로 『Les Gardiens de la révolution islamique d’Iran : sociologie politique d’une milice d’État 이슬람 혁명수비대: 국가 민병대의 정치사회학』( CNRS Éditions, 2022)이 있다.

번역·송아리
번역위원


(1) 1980년 원문 발췌. 프랑스어 번역본은 『Loin de Byzance 비잔틴에서 멀리 떨어진』(번역: 로랑스 디예르), Fayard, 1988.
(2) Mitra Keyvan, ‘Les Iraniennes allument un brasier social(한국어판 제목: 이란의 젊은 여성 시위, 히잡 반대에서 정권 타도로 확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22년 11월호. Pierre Ramond, ‘Dix points sur l’embrasement iranien 이란 사태에 관한 열 개의 관점’, <Le Grand Continent>, 2022년 9월 22일.
(3) 페르시아어 연설, www.khabaronline.ir, 2022년 10월 24일.
(4) Radio Farda 재방송(페르시아어), 2022년 10월 12일.
(5) 숏클립 영상 유튜브 채널 Koocheh의 실시간 뉴스 기사.
(6) Les Gardiens de la révolution islamique d’Iran : sociologie politique d’une milice d’État 이슬람 혁명수비대: 국가 민병대의 정치사회학, CNRS Éditions, 2022.
(7) 소련 출신의 이란군 전문가 유리 리아민의 블로그(러시아어), https://imp-navigator.livejournal.com/743624.html, 2018년 7월 8일.
(8) Saeid Golkar, 『Taking back the neighborhood : the IRGC provincial guard’s mission to re-Islamize Iran』, Policy notes, Washington Institute for Near East Policy, 2020년 6월 18일.
(9) www.tabnak.ir 및 www.khabaronline.ir에서 각각 중계.

 

 

사정거리 안의 쿠르드족
 

지난해 11월 중순, 쿠르드족 주요 거주 지역인 이란 북서부에서 이란 정부의 강경 진압이 있었다. 전투 장갑차를 앞세운 군대와 경찰이 마하바드(Mahabad) 마을을 포위했다. 다수의 쿠르드족은 이들이 시위대에게 실탄을 발사했다고 증언했다. 지난해 9월, 지도 순찰대에 체포돼 의문사한 마흐사 아미니가 바로 이 지역 출신이다. 그녀의 죽음은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의 시발점이 됐다. 

같은 시기, 이라크 내 쿠르드 자치구에 고립된 분리주의 조직이 이란군의 포탄과 드론 공격을 받았고, 이라크 정부는 이 공격을 이라크 주권에 대한 침해로 규정하면서 항의했다. 시위대에 대한 강경 진압, 이란 쿠르드민주당(KDPI)과 코말라당(Komala, 이란 내 쿠르드계 조직-역주)처럼 국경선 너머 이라크에 정착한 반정부 쿠르드 조직에 대한 이란의 공격에는 추가적인 목표들이 뒤따랐다. 

첫째로, 이란 내 쿠르드 자치구가 이란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걸 막는 것이다. 마하바드 쿠르드 자치공화국(1946~1947)과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분리주의 지역에 대한 기억이 이런 태도에 분명히 영향을 미쳤다.(1) 1979년부터 1982년까지 국가 질서의 회복과 이란 쿠르드민주당의 권리 주장에 대한 이슬람 공화국의 소탕작업은 강경 진압과 수천 명의 목숨에 대한 대가였다. “이란에 민주주의를! 쿠르드 자치구에 독립을!”(2)

둘째로, 이란 정부는 이런 반정부의 존재를 수단화시킴으로써 반정부 시위가 내부의 적인 쿠르드족이 만든 불안정한 상태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이라크에 정착하고 이란에서 ‘테러리스트’로 간주되는 정당들과 관련 있다. 동시에 이스탄불에서 발생한 테러 공격으로 튀르키예 정부는 시리아와 이라크 내 쿠르드족을 대상으로 ‘발톱과 검’ 작전을 개시했다.  

 

 

글·아크람 벨카이드 Akram Belkaïd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송아리
번역위원


(1) Thomas Bois, ‘1920-2020, Le combat kurde 1920~2020: 쿠르드 전쟁’ 중
‘Naissance et chute de la République de Mahabad 마하바드 공화국의 탄생과 몰락’, <마니에르 드 부아르> 프랑스어판, 169호, 2020년 2~3월.
(2) Airin Bahmani, Bruno Jantti, ‘Les ombres de Sanandaj 사난다즈의 그림자’, <마니에르 드 부아르> 프랑스어판, 상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