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낙태수술을 간청드립니다”

보비니 재판 50주년, 최초 공개 기록물

2023-01-31     필자 미상

1972년 11월 8일, 보비니 재판장. 지젤 알리미 변호사는 의학교수 폴 밀리에에게 미셸 슈발리에를 위해 증언해줄 것을 요청했다. 미셸 슈발리에는 그의 딸 마리클레르를 포함해 총 네 여성의 낙태를 도왔다는 이유로 기소됐다.

폴 밀리에 교수는 천주교 신자로, 낙태 합법화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저명한 의학교수는 “슈발리에 부인이 나를 찾아왔다면, 나도 분명히 도와줬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밀리에 교수의 진술은 재판의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1975년 자발적 낙태수술을 합법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재판 이후 폴 밀리에 교수 앞으로 수백 통의 편지가 쏟아졌다. 편지들의 내용에는 동료들의 비난과 공격도 있었지만, 철학적인 논평도 있었고 응원 메시지도 있었다. 

그리고, 절망했던 여성들이 밀리에 교수에게 간곡히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도 있었다. 본 기사에서는, 그동안 한 번도 공개된 적 없었던 당시 기록물들 중 서신 내용을 발췌해 재구성했다.

 

1972년 11월 29일, 한 여성

의사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 문제를 상담하고 싶어서 편지를 씁니다.

저는 25세이고, 임신 3주째입니다. 제게는 아들이 셋이나 있고, 저는 자녀 셋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남편은 이런 속사정을 모릅니다. 낙태수술을 해 주실 수 있는지 확인하고자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비용을 말씀해주세요. 저는 부자가 아니라서요. 비용에 따라 결정해야 해서요. 미리 감사드립니다.

가능한 한 빨리 회신 부탁드립니다. 제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밀리에 교수의 회신] 1972년 12월 5일

부인, 저는 낙태 전문의가 아닙니다.

그리고 힘든 상황에 있는 환자에게 비용을 청구한 적은 거의 없답니다.

X 교수(주소 및 전화번호)에게 문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부디 안녕하시기를.

- 폴 밀리에 교수

 

[한 여성이 쓴 편지] 1973년 2월 4일, 프랑스의 소도시

교수님,

신문을 읽다가 교수님이 쓰신 낙태 관련 기사를 읽고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아직 진찰 전이긴 하지만, 저는 임신 증상을 겪고 있습니다. 아마 두 달째일 텐데, 참으로 마음이 괴롭습니다. 저희 부부에게는 이미 두 명의 딸이 있습니다. 저는 최근 직장에 복귀했습니다. 남편은 몸이 아파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합니다. 작년에는 몇 달이나 일을 쉬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집을 새로 짓는 상황이라, 제가 일을 그만둔다면 공사를 전면 중단해야 합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 때문에 아무런 의욕이 없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교수님께 편지를 쓰니 기운이 납니다. 교수님의 도움을 받아 고민을 씻어낼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료 약속을 잡을 수 있을지요? 혹시 낙태수술을 해주실 의사 선생님을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실지요? 교수님의 조언을 따르겠습니다.

회신용 우표를 붙인 봉투를 동봉하오니, 회신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남편은 제 뜻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 A 드림

 

[2월 4일 편지에 대한 밀리에 교수의 회신] 1973년 2월 7일, 파리

부인,

X 박사님에게 연락해보세요.

부디 행운을 빕니다.

- 폴 밀리에 교수

 

“저는 분명히 낙태를 도왔을 겁니다”

 

보비니 재판에서 폴 밀리에 교수의 진술 일부를 공개한다. 이 내용은 지젤 알리미의 저서(1) 중 ‘보비니 재판’편(2)에서 발췌한 것이다.

 

밀리에 교수

슈발리에 부인이 저를 찾아왔다면, 저는 분명히 도와줬을 겁니다. 40년 동안 의사로 살아오면서 그런 극적인 사건을 많이 봤고, 법이 무엇이든 항상 맡은 바 의무를 다해왔다고 믿기 때문이죠. 저는 저를 신뢰하는 여성들을 도왔습니다.

 

재판장

낙태는 단순한 수술이 아닙니다. 결과에 개입하는 일입니다.

 

밀리에 교수

그 여성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낙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제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임신이 유지됐을 겁니다. 이런 일을 하면서 제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진실을 말하라고 하시니,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원래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여전히 천주교 관련 사회 활동을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여성들을 돕는 것이 제 의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 이후로, 치료적 낙태뿐 아니라 사회적 낙태까지 낙태수술을 여러 차례 독려해 왔습니다. 성폭행 피해 여성이 찾아오면, 거절하지 말고 낙태수술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강간당한 여성이 어떤 비극을 겪는지 알아야, 그런 여성이 찾아왔을 때 의사로서 취할 수 있는 태도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첫 사례를 제외하고는 개인적으로 낙태수술을 하지는 않았지만, 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 프랑스 밖에서 수술받도록 주선했습니다. 사회적 불평등이 너무 심각하다는 말은 굳이 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부유한 여성은 프랑스에서도, 외국에서도 낙태를 할 수 있습니다. 안전하게 낙태할 비용이 충분하니까요.

가난한 여성들은 어떨까요? 그런 여성이 낙태를 시도한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위험하고 정말 열악한 조건이었습니다. 저는 불법 낙태를 시도하다 죽은 여성을 수십 명 봤습니다. 애초에 제가 패혈증에 걸린 여성을 구한 것은 행운이자 영광이었습니다. 1948년 브루세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교환수혈을 시도했습니다. 그때 저는 아이를 더는 낳고 싶지 않아서, 도저히 그럴 처지가 아니어서 목숨을 잃을 뻔했던 여성들을 만났습니다. (...) 르노 노동자들이 무면허 의사에게 두 달치 월급을 주고 낙태를 시도하다 결국 병원에 실려와 제가 마취도 하지 않고 수술을 마무리해야만 했던 상황을 너무나 생생히 기억합니다. 당시 수술 집도의는 종교적 신념과는 거리가 먼 사회주의자였음에도, 그 여성이 낙태의 고통을 기억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1) Gisèle Halimi,『La cause des femmes』Gallimard, 1992년 2월 21일. 국내에는 『여성의 대의』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이재형 역, 안타레스 펴냄,  2021년 10월 04일).
(2) <보비니 법정의 심리(審理) 전체 기록(1972년 11월 8일)>, <La Nouvelle Revue Française> Gallimard, Paris, 1973년(2006년 재출간).

 

1972년 11월 22일, 어느 지방 소도시의 한 여성

선생님,

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만, 선생님은 제게 구원자이자 유일한 피난처이십니다. 제 인생은 선생님께 달려 있습니다. 저는 임신했지만 이미 다섯 아이가 있고, 남편은 심장병을 앓고 있어서 또 다른 아이를 전혀 원하지 않습니다. 갖은 수단을 써서 유산을 시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끊을 생각으로 생명보험에도 가입했습니다. 당분간만이라도 남편과 아이들을 궁핍한 처지를 면하게 하려고요. 하지만 여유가 없어서 320만 프랑(과거 프랑)이 넘는 생명보험에는 가입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에서 저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제 세 살짜리 아들입니다. 그 애는 항상 제 뒤에 있어요. 행여 눈앞에 제가 없으면 저를 부르면서 사방으로 저를 찾아다닙니다. 밤에 자다가도 저를 불러대서 제가 두세 번 조용히 하라고 해야 편히 잠을 잡니다. 

그 아이에게는 더 힘든 일이 될 거란 생각에 오랫동안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아이를 또 낳고 싶지 않아요. 저를 도와주실 수 있으신지요? 

법률상으로 낙태가 어렵다는 점은 잘 압니다. 그러니 대신 영국에 있는 낙태 시술 병원 주소와 수술비용을 알려주셔도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교수님, 부디 도와주세요. 영국 병원만 소개해 주셔도 좋습니다. 교수님께서 주소를 주셨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무에게도 하지 않겠습니다. 

12월 10일이 되면 임신 24주 차가 됩니다. 아무쪼록 빠른 답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리 감사드립니다.

꼭 도와주세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밀리에 교수의 회신] 1972년 11월 28일, 파리

부인,

제 편지가 제때 도착한다면, 12월 2일 토요일 아침에 가능한 한 빨리 저를 보러 오세요.

행운을 빕니다.

- 폴 밀리에 교수

 

* 진료 때 환자가 가져왔을 것으로 보이는 편지봉투에, 파란색 잉크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아이의 입양과 피임 수술을 고려해 3월 중순경 브루세로 갈 예정.”

 

1972년 11월 26일, 지방 소도시의 한 여성

의사 선생님,

친구를 통해 선생님의 주소를 알게 됐습니다. 제 친구가 선생님의 댁에 전화했더니 사모님께서 편지를 보내 줄 수 있겠냐고 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21세이고, 임신 5개월 반째며 부모님과 함께 농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낙태를 부탁드리고 싶지만, 나중에 건강에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입니다. 저는 현재 건강하며 보험기록도 없습니다. 산부인과에 가 본 적도 없습니다.

낙태수술을 해 주실 수 있다면, 상담을 부탁드려요. 입원해야 한다면 되도록 월요일에 퇴원하고 싶습니다. 

입원 일수와 비용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만약 복용할 수 있는 유산유도제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선생님의 회신을 기대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밀리에 교수의 회신] 1972년 11월 29일

아가씨,

임신 5개월 반에 낙태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미친 짓이에요. 

당신과 당신 뱃속의 아이, 둘 다 죽을지도 모릅니다. 이게 어떤 범죄인지 생각해 보세요.

원하신다면, 파리 디도가 96번지 브루세 병원에 있는 제 진료실로 오세요.

부디 안녕히 계세요.

- 폴 밀리에 교수

 

1972년 12월 1일, 어느 시골의 여성

교수님,

오랜 고민 끝에 교수님께 편지를 씁니다. 먼저 제 처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다섯 번째 임신을 했고, 남편은 최근 저를 떠났습니다. 제가 아는 의사는 저를 도와줄 수 없으며, 유일한 해결책은 영국으로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들겠죠. 그곳에 가려면 돈을 빌려야 해요.

게다가 이번 임신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지난 7개월 동안 계속 침대에 누워 주사를 맞아야 했거든요. 지금까지는 방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가족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으니 일을 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부양해야 하는데 제가 누워있으면 일을 할 수 없겠죠. 곧 있으면 성탄절이라서 아이들을 내버려 둘 수도 없습니다. 제게 아무런 탈출구가 없다면 절망에 빠져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저 때문에 힘들어질 겁니다. 

임신 사실을 안 이후 저는 몹시 절망했습니다.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제가 혼자 낙태를 한다면 저는 감옥에 가게 될 겁니다. 이런 저를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시거나, 동료 의사 선생님의 주소를 보내 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저 같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영국 병원의 주소를 알려주세요. 

교수님, 이렇게 너무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도움을 얻을 곳이 없다 보니 저 혼자서 너무 힘이 드네요. 빠른 시일 안에 교수님의 회신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 B 드림

P.S. 회신 후에는 제 이름과 주소를 버려주세요. 감사합니다.

 

 

[밀리에 교수의 회신] 1972년 12월 6일

부인,

Y 의사(주소 및 전화번호)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건승을 빕니다.

- 폴 밀리에 교수

 

[1973년 3월 8일, 어느 지방 소도시의 한 여성]

교수님,

낙태죄에 관해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기사를 읽고,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저는 미혼모이고, 네 살짜리와 두 살짜리 어린 딸이 둘 있습니다. 제 배 속에 있는 세 번째 아이는 낳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은 임신 2개월 반째입니다. 

교수님, 저를 도와주실 수 있나요? 전 공장에서 일하지만, 저와 제 두 아이의 생계를 꾸리기도 어려운 형편입니다. 이 편지에 답장 주시거나 진료 약속을 잡아 주실 수 있을까요? 저를 꼭 좀 도와주세요. 낙태수술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낙태에 찬성하신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만나 뵙고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제 주소를 동봉합니다.

교수님, 그럼 안녕히 계세요.

- A 드림

 

[밀리에 교수의 회신] 1973년 3월 3일, 파리

A씨,

가능한 한 빨리 만나야겠어요. 

우리 병원으로 오세요.

1973년 3월 17일 토요일 오전 8시 45분, 브루세 병원 

제 진료실에서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 폴 밀리에 교수

 

[1973년 3월 16일, 여성 A의 회신]

교수님,

이렇게 빨리 회답해 주시고 약속을 잡아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려고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임신 3개월째에 직장에서 일하다가 유산을 해 어젯밤부터 입원 중이랍니다. 마음 써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그럼 안녕히 계세요.

- A 드림

 

1973년 1월 9일, 어느 대도시 외곽지역의 한 여성

선생님,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몰라 걱정하던 중, 보비니 재판에서 낙태에 찬성하는 견해를 밝히셨다는 기사를 읽고 간절한 마음으로 선생님께 편지를 씁니다.

저는 이혼 절차를 밟고 있고, 6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마지막 월경이 11월 8일이었으니 지금 임신 4~5주째가 될 겁니다.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아이를 또 낳는다는 것도 제게는 재앙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여섯 아이를 키우는 것도 버겁기만 한데 일곱 번째 아이를 어떻게 낳을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6년 전 수술을 받은 후, 두 번이나 난산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의사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병원은 엄두도 못 냅니다. 돈도 없고 지불해야 할 청구서가 쌓여 있어서 돈을 빌릴 수도 없습니다.

혹시, 저를 도와주실 수 있을지 여쭙기 위해 편지를 씁니다. 이 편지를 불쾌하게 여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답장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밀리에 교수의 회신] 1973년 1월 12일, 파리

부인,

가능한 한 빨리 X 박사에게 연락하세요.

(파리의 주소, 전화번호)

행운을 빕니다.

- 폴 밀리에 교수

 

 

글·필자 미상
번역·이푸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