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제크여, 한국 공영방송을 어찌하랴
Corée
최근 <한국일보>에 실린 슬라보이 지제크와 이택광의 인터뷰 기사가 흥미롭다. 정치적 주체성의 전망 요구와 같은 도덕적 요청에 지제크는 ‘본래적인 정치’를 직시하는 걸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그 비판을 통해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다면 대답을 못한다고 환기한다. 나아가 철학자들이 세계를 해석해왔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말을 들어, 20세기는 이 말처럼 세계가 너무 많이 변화됐다고 말한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변화를 추구했으니 이제 다시 변화보다 해석이 필요한 시대가 왔다는 주장이다. 고작 국가를 재조직하는 것 같은 ‘쉬운 해결책’에 접근하는 대신 ‘사유’를 권한다. 그러니까 우리 삶의 토대를 고민하는 것은 어떤 사회를, 어떤 자유를, 어떤 정부를, 어떤 행복을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고작’ 미디어렙법 개정에 바친 1년
철학자들의 사유의 질감을 따라잡기에는 엄두가 안 난다. 국가를 재조직해서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실천에 분주한 사람들은 ‘고작’이라는 단어 앞에 흠짓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헌법재판소가 판결한 내용에 따라 입법부는 주어진 시한까지 광고판매대행회사(미디어렙)법을 제정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여러 이유를 들어 입법을 지연했다. 미디어렙법 제정이 늦춰지면서 예기치 않은 현상이 생겨났다. 가령 지상파 방송사업자들은 입법 공백을 틈타 자사렙 체계를 갖추었다. 지역·종교 방송, 신문 등은 수입에서 직접적 타격을 받았다. 여기서 미디어렙 제도 개선 실천 앞에 ‘고작’이라는 표현을 붙이거나 ‘쉬운 해결책’으로 호명하면, 지난 1년 여 동안 미디어렙법 제정을 위해 동원된 미디어 종사자들로서는 발끈하는 게 당연하다.
미디어렙법 사례를 놓고 ‘본래적인 정치’에 접근한다면 어떤 ‘사유’가 펼쳐질까. 우선 미디어렙이라는 소소한 제도조차 순리에 따라 갖추지 못하는 현실과 조우한다.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과 함께 이와 구별되는 국가 작용으로서 헌재의 판결에도 입법부의 부작위가 발생하는 근본 배경에의 접근이다. 여기서 불가피하게 우리 사회의 정치적 합리성으로서 신자유주의 문제에 직면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입헌주의, 법 앞의 평등, 정치적 자유, 시민사회의 자율성, 보편주의 등을 기본 원리로 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이 기본 원리를 비용 대비 수익, 생산성, 효율성과 같은 시장 지배적 개념을 들어 자유민주주의 기본 원리의 근간을 대체한다. 이런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은 정부의 투명성, 책임성, 절차적 민주주의 같은 입헌적 보호장치를 무시하고, 시민의 각종 기본 권리와 정보에의 접근마저 차단한다. 국가는 인민의 참여가 아닌 배제와 함께, 경영의 구현체로 탈바꿈된다. 신자유주의 합리성은 입헌국가를 비롯한 모든 제도에 기업 경영 모델화를 강제하고, 시민 주권과 국가 주권을 동시에 약화시키며, 국가 주권이 쇠락하는 그 순간에 국가의 행정권력을 확장하는 이른바 ‘치안 스테이트’를 구축한다.
치안 질서에 무너진 시민 언론 주권
치안 질서는 공동체 없는 통치가 이뤄지는 정치적인 것의 종언 상태이며, 정치적 과정이자 형식으로서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을 뜻한다.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이런 정세와 효과에 대해 공공·공통성 장치·체계의 위기, 인민의 자유로운 표현 및 회집, 언론 행위로 정리되는 시민 언론·커뮤니케이션 주권의 위기 등 이중의 위기라고 정의한다.
위기의 심화는 신자유주의 합리성을 관철하는 것을 의미하며, 신자유주의 합리성의 안정화는 공공·공통적인 것과 시민의 언론·커뮤니케이션 주권을 해체함에 따라 사회적 시민권을 제약한다. 이때 제도 개선을 위한 노력은 신자유주의 합리성의 범위 안에서 재현될 가능성이 크고, 그 때문에 ‘본래적인 정치’의 관념과 신자유주의 합리성이 강제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여야가 합의한 미디어렙 법안도 실은 신자유주의 합리성의 큰 틀 안에서 여야 입법 주체와 이해관계를 다투는 미디어 주체의 요구들이 조합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입헌주의의 신자유주의화와 대의제미디어의 신자유주의화는 궤를 같이한다. 오늘날 대의제미디어로서 공영방송은 방송의 공적 책무나 독립성, 자율성과 같은 자유민주주의 기본 원리 대신 신자유주의 합리성, 즉 비용 대비 수익, 생산성, 효율성 같은 시장 지배적 개념으로 채워진다. 이런 경향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추세이며, 신자유주의 법제도가 정착되고 본격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한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대의제미디어의 규제감독기구이자 공사의 최고의결기구인 이사회는 공영방송의 사회적 성격 변화와 관계없이 공영방송의 경영체제와 구조적 파트너십을 맺는다.
한국방송 이사회의 위험한 무능
한국방송 이사회는 한국방송이 독립성과 공공성을 보장하기 위해 경영에 관한 최고의결기관으로 설치돼 있다(방송법 제46조). 주요 기능은 방송의 공적 책임에 관한 사항, 방송의 기본운영 계획, 예산 계획 및 결산, 경영평가, 사장 및 감사의 임명 제청 등에 관해 심의·의결하는 것이다(방송법 제49조). 그러나 이사회의 구성 방식과 구성 권한에서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방송법 제46조 제3항은 11명으로 구성된 한국방송 이사회를 각 분야의 대표성을 고려해 방송통신위원회에서 추천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과 대통령 직속기구인 방송통신위원회가 이사회 구성을 좌지우지한다.
이렇게 구성된 이사회는 한국방송 경영에 관한 법적 최고의결기관이지만 집행 구조가 없는 비상임 체계로, 실질적인 기능과 역할을 담보하지 못한다. 이사회는 한국방송 경영, 편성, 여론 등에 대해 자체적인 조사·평가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한 달에 한두 번 개최하는 회의 구조인 이사회가 경영 전반에 대해 자체적인 조사·평가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사회는 결국 경영 감독과 방향 설정에서 정보와 상시 활동력 부족으로 경영진에 의존하게 되고 경영진의 판단에 따른 사후 심의와 승인의 역할을 하는 정도다. 재정 투명성 역시 감사원 감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담보하기 어렵다. 수신료 인상 추진 과정에서도 확인된다. 여당 추천 이사들은 보스턴컨설팅그룹의 제안에 따라 4600원·6500원 인상안을 주창했지만, 야당 추천 이사들은 1천 원 인상안을 제기했다. 이사회는 몇 달째 밀고 당기다가 결국 1천 원 인상안을 심의·의결했다. 사회적 합의를 거치지 않았고, 1천 원 인상분에 관한 공적 서비스 강화의 구체적 용처를 밝히지 않았다. 대의제미디어의 재원 문제를 결정하면서 미디어 주권자의 참여를 배제했고 관제방송으로 추락한 공영방송의 공적 복원에 대한 논의를 누락했다. 말하자면 이사회는 방송법 제정 취지에 근거한 대의제미디어로서 공영방송의 기능과 역할을 규제·감독하는 대신, 신자유주의적 경영체제에 때로는 비판적이지만 구조상 무매개적으로 종속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지배구조 개혁의 가치는 크다
그렇다면 여기서 ‘본래적인 정치에 대한 사유’와 ‘고작 국가를 재조직해서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것’ 사이에 어떤 긴장의 끈을 형성할 수 있을까. 고작 공영방송 지배구조의 민주화 따위로 신자유주의 합리성이 관통하는 공영방송의 추락을 구제하는 것조차 만만한 일은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6 대 5’ 또는 ‘7 대 4’, ‘8 대 3’의 여야 합의에 따라 여당이 주도하는 규제감독기구의 구성을 방치할 것이냐는 물음이 남는다. 여기서 ‘본래적인 정치에 대한 사유’에 관한 일정한 회의와 유보는 불가피하다. 미디어렙법 제정이 신자유주의 합리성의 관철에도 불구하고 방송광고판매대행이라는 제도의 민주적 기능을 담보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고작’의 폄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개입·통제의 조건을 만드는 실천의 의미를 깎아내릴 수 없다.
대의제미디어로서 공영방송이 방송법에 충실하게 작동된다는 것은 공영방송의 지배구조에 미디어 주권자의 참여를 보장하고 투명성, 책임성, 절차적 민주주의 같은 입헌적 보호장치를 가동하며, 규제감독기구가 이를 보지하는 역할을 감당함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합리성이 관철되는 대의제미디어의 현실을 감안할 때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의 노력 역시 ‘고작’이라는 조롱을 면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사회적인 개입·통제의 조건을 만드는 실천, 즉 공영방송 지배구조의 변화를 꾀하는 실천의 의의를 깎아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공공성·지역성·미디어주권을 위해
미디어 시스템과 정치 시스템이 맺고 있는 관계와 2012년 권력의 변화를 고려하는 가운데 현 시기 미디어 공공영역의 민주화를 위한 전략적 키워드로는 △보편성으로서 공공성 △지역성 △미디어주권을 꼽을 수 있다. 이 키워드의 실천이 갖는 의미는 대의제미디어에 제한되지 않는 미디어 주권의 확장과 거버넌스 참여를 통한 민주적 통제, 즉 민주적 국가화로 압축할 수 있다. 말하자면 권력의 운영 주체가 바뀔지언정 권력의 성격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볼 때 미디어의 모든 영역에서 주권을 확대하는 실천과 아울러 국가를 재조직해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실천 지표를 의미한다.
가령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지역성 원리를 반영하는 식의 제안이다. 지역성의 구현은 중앙집권적인 각종 제도 모델에 지역의 양적 개입을 늘리는 식의 접근이 아니다. 오히려 중앙과 지역이 모두 지역 개념으로 정의되는 것이며, 분권화 맥락과 함께 지역주민의 주권을 대의하는 방식으로서 거버넌스를 자리잡게 하는 것이다. NHK경영위원회 위원은 재계, 과학, 문화, 교육 등 분야별 전문가를 지역별로 안배해 선출한다. 이들은 일본의 8개 지역에서 각 1명씩, 그리고 일본 전국에서 4명을 선출해 총 12명이 일본 참의원과 중의원 양원의 동의를 얻어 총리에 의해 임명된다. ‘BBC 트러스트(Trust)’는 임기 5년의 의장·부의장·일반이사 등 총 12명으로 구성되고, 이때 일반이사 4명은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를 대표한다. 독일의 ‘ZDF 방송위원회’ 위원 수는 77명에 달한다. 그중 16명의 위원은 주정부 추천으로 선임되고, 연방정부에서 3명, 의회 원내정당들에서 12명 등 정당 추천과 종교·언론·시민단체·직능단체의 추천을 망라한다. 우리나라에서 공영방송 지배구조에 지역성이 반영되는 경우는 없었다.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방안으로 다음을 검토할 수 있다. 우선 방송통신위원회가 추천하는 방식을 ‘국회 추천 뒤 대통령이 임명’하는 방식으로 바꾼다. 방통위 추천이 아닌 국회 추천은 3 대 2 구조의 방통위가 추천하는 7 대 4 구성 대신 국회 추천을 통한 방식으로 개선하고자 함이다. 11명의 이사 선출시 과반인 6명에 대해서는 여당과 야당 추천 인사 3 대 3 동수로 하고, 5명에 대해서는 전국시도지사협의회가 추천하는 인사로 구성하는 방식을 고려할 수 있다. 국민을 대의하는 여야 정치권의 이해를 반영하면서도 지역의 유권자와 시청자의 이해를 반영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이사회의 역할 중 사장 선출 문제는 사장추천위원회를 통해 후보자를 거르고, 3분의 2 특별다수제로 선출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이사 11명 중 최소 3명 이상은 상임을 담당하고, 규제감독의 민주적 집행 능력을 갖추기 위해 사무처를 둔다. 이사회의 공식 회의는 온라인 생중계하고, 이사회 운영에 소요되는 모든 예산과 경비는 공개한다. 이 정도의 제도 개선이 현실이 된다면 ‘고작’ 하는 일치고는 상당히 변혁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다.
‘본래적인 정치에 대한 사유’와 ‘국가를 재조직해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실천은 유리돼야 하는지, 전자에 몰입하되 후자는 시종일관 부차화해야 하는지, 신자유주의 합리성을 거부하는 법제도 개선의 전략적 활로 또는 취사선택지는 없는지…. 오는 8~10월이면 한국방송·교육방송·문화방송 방송문화진흥원 이사들의 임기가 완료된다.
글 / 유영주
진보전략회의 회원, 남북경협포럼 전문위원이며, ‘미디어행동’ 등에서 사회운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