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되자 다시 묻힐 조선 말 근대 이야기와 역사

2012-02-13     김란기

지난 설을 하루 앞둔 날, 말하자면 음력으로 섣달 그믐날 신지도(전남 완도군)를 찾았다. 모처럼 한파가 몰아친 이날 남쪽이라지만 바닷바람이 예사가 아니다. 섬들 사이 푸른 물 위에는 흰 파랑이 너울거리고 가두리 양식장마저 흔들거린다. 그 사이를 모터 달린 배가 웅크린 채 달리며 양식장을 살핀다. 햇빛 내리쬐는 먼 바다는 빛을 반사해 눈부시지만 섬 기슭 바닷새들은 하늘에 정지하듯 바람을 타며 곡예하듯 춤을 즐긴다.

   
▲ 명동성당(당시 종현성당)이 준공될 무렵인 1898년의 모습. 오른쪽에 이미 8년 전에 준공된 주교관이 보이고 그 앞에 작은 한옥 건물이 지붕만 살짝 보인다. 이번에 발굴된 [건물지 1]의 건물로 추정한다. 그 앞의 가로로 긴 건물이 한때는 서당, 또 한때는 수녀원과 고아원으로 쓰인 윤정현의 집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건물은 1920년대에 성가 기숙사를 지으면서 철거되었다고 추정된다. 출처 : <백년 전의 한국>, 가톨릭출판사. 1986

명동성당터는 순교자의 집터였다

200여 년 전 윤행임은 이곳에 유배되었다(신유사옥). 그때는 강진현 신지도였다. 전라도 관찰사가 된 지 닷새 만에 유배길에 올랐다. 시파(時派)의 중추적 인물이던 그가 결국 벽파(僻派)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배후는 정순왕후였다. 사실 그가 탄핵을 받기 시작한 것은 1788년부터였으니, 스물여덟 살부터다. 이때는 성환으로 유배되었다. 다시 벽파의 공격으로 고양으로 유배되었지만 1794년에 풀려 이조참의에 재임명되었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한 1800년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대제학이 되었다.

윤행임이 신지도에 유배자로 온 건 그 이듬해였다. 직전 2월에 정약전도 신지도에 유배된다. 이들은 어떤 관계이었을까? 두 사람은 어찌하여 똑같이 신지도로 도배(島配)되었을까? 약전은 11월에 흑산도로 이배된다. 그러나 행임은 바로 전 9월에 그곳에서 사사(賜死)된다. 신지도 유배 넉 달 만이었다. 어찌된 일일까? 둘 다 서학을 했다는 죄목이었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특별히 감등(減等)의 법을 좇아서 신지도에 도배된 죄인 윤행임에게 사사하라” 했다고 한다. 행임은 신지도에 오자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다’(弗欺吾心)는 뜻에서 거처를 ‘불기헌’(弗欺軒)이라 하고 <불기헌기>(弗欺軒記)를 지었다. 또 ‘신지도에서 보고 듣는 대로 쓴 글’이라는 의미의 ‘신호수필’(薪湖隨筆)인 <석재별고>(碩齋別稿) 23권 11책을 저술했다. 여기에는 ‘신지도기’(薪智島記)도 포함됐다. 유배 뒤 불과 넉 달 만에 쓴 저술이다. 죽음을 앞두고 초연하게 쓴 것들이다.

서울 명동성당은 지금 재개발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이 조사에서 옛 집터와 ‘근대식 배수로’가 출토됐다. 배수로도 귀중했지만 집터 또한 범상한 것이 아니다. 이미 명동성당터는 윤정현의 집터이었고, 옛 조선교구가 이것을 사들여 성당을 지었다고 한국 가톨릭의 기록은 전한다. 또한 윤정현의 집은 고종황제가 하사한 것이라고 기록은 전한다. 발굴조사에서 나온 집터는 대체로 3개 건물지로 나타났다. 말하자면 3채의 건물터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1개의 건물지는 이전하여 전시를 해보겠다고 하는데, 나머지는 기록으로만 남기고 폐기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윤정현의 집터만 이전 보존하고 나머지는 폐기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전하여 전시 보존하겠다는 집터는 윤정현과 관계없는 것으로 발굴조사기관에서 판단했다. 그 나머지도 윤정현과 관계된 집터라는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천주교 쪽 기록에는 여기저기에 나타나 있다. 당시 사진에서도 범상치 않는 한옥 건물이 보인다.

   
▲ 명동성당 재개발공사는 2011년 10월 16일 추기경이 참석한 기공식과 함께 시작되었다. 정밀한 발굴조사가 시행되어야 할 땅에 여러 대의 중장비가 들어가 무자비하게 파헤치고 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순교자 윤행님의 집터와 근대식 배수관로가 출토되어 명동성당사를 다시 써야 할 상황이 되었다.

고종은 순교자 후손에게 왜 하사했을까

윤정현의 부친이 윤행임이다. 그러니 명동성당터는 서학을 했다는 이유로 사사된, 말하자면 순교자 윤행임의 집터이다. 순교자의 집터에 성당을 지은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발굴돼서 나타난 집터의 유구들은 윤행임과 관계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한국 최초의 주교 노기남의 글(<명동성당>, 중앙신서116, 중앙일보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 종현성당으로 쓰던 집은 원래 천주교가 성행하던 철종시대에 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지낸 윤정현의 집이었다. 윤정현이 죽고 그의 아들 윤태경이 이를 지니고 있다가 생활이 어려워지자 그 드넓은 종현의 집과 땅을 교회에 팔았다. 그때 윤태경이 살았던 수십 칸의 큰 기와집은 지금의 주교댁 건물 북쪽에 있었는데 한때는 서당으로 쓰였고 한때는 수녀원과 고아원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 집 앞엔 꽤 높은 산봉우리가 있었다. 오늘의 명동성당 자리는 바로 이 산봉우리가 있는 곳이다.”

윤정현의 문중인 남원 윤씨 후손은 윤행임부터 이 터에 살았음을 말하고 있다. (문중에서는 윤태경이 조선교구에 판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윤병수가 팔았다고 한다. 땅이 팔린 것은 1883년인데 윤태경은 1881년에 졸하였다.) 한편 남원 윤씨 문중은 이 건축물들이 헐려 없어질 때 문짝을 떼어내 지금도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윤태경은 이 집을 하사해준 고종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 집을 조선교구에 팔았을까? 얼마나 가난했는가?

성당은 왜 하필 그 터에 세워졌을까

윤태경은 윤정현의 친자는 아니었다. 아들이 없어 문중 안에서 양자로 들어왔다. 1848년 15살 된 태경이 문중의 대를 잇기 위해 정현의 자로 들어왔다. 그도 역시 과거에 급제하여 의주부윤, 정주목사, 양주목사를 지냈다. 그는 “민생만 살피고, 권신들에게 아부하지 않고, 서민을 괴롭히던 토호세력을 배척하며 깨끗한 공직 생활을 수행했기 때문에 가정형편이 어려웠다”고 했다(<대방세가언행록>(帶方世家言行錄·윤행임이 선대의 언행록을 모아 엮은 책으로 증손 병수가 간행. 6권 3책, 규장각 소장). 관직을 거쳤는데 그처럼 가난했단 말인가? 그렇다고 치고, 선친에게 저택을 하사한 국왕이 버젓이 살아 국가를 통치하고 있는데 그 집을 팔아치웠을까?

순교자 집터의 유구로 심증이 가는데 명동성당 쪽은 왜 그 유구들을 심층조사도 없이 폐기하려는 것일까? 윤행임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는가? 말하자면 순교자가 아니었는가?

<조선왕조실록> 순조조에 윤행임에 대해서 “홍낙임과 주무한 사실이 드러나 (중략) 홍낙임과 윤행임이 한가지로 투식으로 합작한 소굴의 근원”이라고 여러 대신들이 아뢰자,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먼저 이놈들을 잡아들여 캐묻는 바탕을 삼지 않을 수 없으니, (중략) 기필코 잡아들이도록 하라”고 하였다(순조 3권, 1년(1801 신유) 5월 20일).

홍낙임은 1801년 체포되어 제주도로 유배된 뒤 5월 사사되었다(신유사옥). 홍봉한의 3남인 그는 사도세자의 비인 혜경궁 홍씨의 남동생이다. 말하자면 정조의 외삼촌인 셈이다. 정조는 선왕 영조가 뒤주에 가두어 죽인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복권시키는 일을 거의 필생의 업으로 생각하고 시행했다. 정조의 시대가 끝나자마자 “홍낙임과 윤행임이 한가지로 투식으로 합작한 소굴의 근원”이라고 하여 둘 다 유배에 처하였고, 둘 다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척신 김조순이 칼자루를 쥐었다. 홍낙임(1801년 5월, 제주도 사사)과 윤행님(1801년 9월, 신지도 사사)이 천주학을 해서 유배에 처했고 사약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순교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윤행임이 서학을 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사사되었는데 그의 아들 윤정현이 이조판서까지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고종에게서 저택까지 하사받았다는 것은 말이 되는가?

이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 순조 3권 9월 24일 4번째 기사에 ‘양사의 전계 중에 있는 윤행임에 관한 글자를 고쳐 만들다’라는 항목이 있다. 이 항목에 “사헌부에서 아뢴 전계(前啓)에서 정약전 등의 일을 말하는 가운데 ‘이승훈과 의기(意氣)를 같이 한 자’라고 한 이하 14자를 지워버렸고, ‘도배(島配) 정배(定配)하여 그친 데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여 8자를 고쳐서 만들었으며…”라고 했다. 윤행임이 헌종 초에 신원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말하자면 복권된 것이다.

   
▲ 지난 2월 초 서울 명동성당 공사장 광경. 한낮 기온 영하 14도의 강추위 속에서도 공사는 멈추지 않고 있다. 이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해온 서울대교구는 돌이킬 수 없는 단계까지 공사를 빨리 진행시키기 위해 이처럼 무리를 하고 있다.

순교자 유구 폐기하려는 서울교구

그러므로 행임의 아들 정현이 늦은 나이인 51살에 출사하게 된 것이다. 늦은 만큼 그는 고속성장을 한다. 3년 뒤에는 홍문관 대제학이 되었고(1847), 또 2년 뒤에는 병조판서에 오른다(1849). 철종시대인 1856년(철종 7년)에는 규장각제학이 된다. 그가 죽기 1년 전인 1873년에 고종은 그에게 저택을 하사하였다. 대원군이 섭정을 마감하고 고종이 직접 왕권을 챙긴 해이다.

조선교구의 상징적인 성당이 고종에게서 하사받은 저택 자리에 기필코 세워진 이유는 또 어디 있을까? 그리고 오늘날 그 자리에서 유구가 나왔는데 폐기처분한 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100년간의 박해 뒤에 서울 종현의 언덕 위에 ‘종현성당’이 들어선다. 1892년 착공하여 1898년 완공한다. 이보다 앞서 주교관 건물이 들어섰다. 1890년의 일이다. 건물들이 들어서기 전 1883년부터 땅을 매입했다. 1886년 한-불 수호조약 이후 1888년 6월 주한 프랑스공사로 프랑시(Collin de Plancy·葛林德)가 부임했다. 그런데 그해 조선 정부(당시 외부(外部))는 토지 소유권을 억류한다. 정부는 인근 ‘영희전’(永禧殿)의 맥을 끊기 때문에 그곳에 집을 지으면 안 된다면서 환지를 제안하기도 했다. 블랑 주교(Blanc, Joannes Marie·白圭三·1844~90)에 의해 거절되었지만, 여기에는 한-불 수호조약에 의해 서양식 성당을 지을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1890년 초(구정)에 이르러서야 억류가 해제되었다. 프랑시의 노력이 컸지만, 당시 국제관계가 복잡해짐에 따라 조선 정부의 외교적 필요성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서양식 성당을 지을 수 없도록 되어 있는데 어떻게 고딕식 성당이 들어섰을까? 종현성당의 설계자는 코스트 신부(Eugène-Jean Georges Coste·1842~96)였다. 코스트는 ‘100년 동안의 박해로부터 쟁취한 종교의 자유’의 상징물을 만들고자 했고, ‘승리의 표현’이며, 비신자들에게 ‘신앙의 완전성’ 증거로 보여주고 싶었다. 코스트뿐만 아니라 1891년 2월 조선에 공식 입국한 뮈텔 신부(Gustave Charles Marie Mutel·閔德孝·1854~1933)의 ‘신앙의 자유획득 운동’도 한몫했다. 뮈텔과 코스트는 신앙의 상징은 오직 고딕성당 양식으로만 구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경복궁, 창덕궁과 종묘를 마주 바라보는 정면의 언덕 위에 높이 서서 조선의 왕궁을 내려다보려 했던 것이다. 나아가 100년간의 박해에 보상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은 요즘 세태로 봐도 영락없이 민원이 들어왔을 법한 일이었다.

오늘날 그 자리에서 순교자의 유구가 나왔는데 폐기처분한 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한국 천주교의 행로를 다시 생각한다. 한국가톨릭 서울대교구가 그동안 명동성당 재개발을 추진하면서 취해온 무리한 동기, 정책, 방법, 시행은 이 글에서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다. 이미 수많은 기록물에 올라갔기 때문이다. 현대의 정보체계는 히브리어 시대의 성직자의 만용을 용납하지 않는다.

일본 고베에 김옥균과 박영효가 처음 태극기를 게양했다는 여관이 있었다. 니시무라여관(西村旅館)이라고 전하고 있지만 지금은 없다. 다만 그 자리에 ‘니시무라사진연구소’란 이름만 남아 있다. 근처에는 붉은 고베포트타워가 랜드마크로 서 있고, 고베항 나카돗데이 여객터미널과 고베해양박물관이 여행자들의 눈에 쉽게 띈다. 산노미아역도 멀지 않고 모토마치역의 앞쪽에 있다. 고베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이 여관이 있던 곳은 옛 외국인 거류지의 입구였고, 이 부근은 1880년대의 개항지로서 ‘고베의 현관’이라고 할 만했다. 그래서 여관이 많았다. 김옥균은 제물포를 출발하여 시모노세키를 거쳐 고베에 도착해 이 여관에 들곤 했다. 여기서 잠시 머무르다 다시 해로를 이용해 요코하마를 거쳐 도쿄에 들어가기도 했다.

성당터에서 나온 배수관로

조선교구가 명동성당터를 사들이기 시작할 무렵 조선의 급진개화파 김옥균은 부지런히 일본을 드나든다. 1882년과 1883년이다. 고종이 임오군란 직후 그 타개책으로 박영효를 수신사(2차)로 일본에 보낼 때 김옥균은 고문 자격으로 따라갔다. 이때 박영효가 치도(治道)에 관해 논의하면서 김옥균으로부터 <치도략론>(治道略論)을 들고 왔다. 김옥균은 조선의 청년들을 선발해오도록 하고, 이들의 유학을 주선했다. 박영효는 귀국했으나 김옥균은 서광범과 함께 일본에 남았다. 박영효는 귀국 뒤 <치도략론>을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고종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이를 목판으로 간행해 반포토록 하였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 도로의 경계를 나누어 각호에 배정하여 책임지고 관리하게 하고 위반하는 사람에게 벌을 준다.
- 수통을 구워 만들어 하수도로 장군을 많이 만들어 변소에 쓰도록 한다.
- 변소는 집집마다 따로 만들되 집터의 넓고 좁은 것을 헤아려 만들다.

박영효는 1883년 1월 한성부 판윤에 임명된다. 그는 곧 치도국(治道局)을 설치하고 순경부를 창설해 치도사업을 준비한다. 그런데 한성부 시민들이 이에 반발했다. 경찰력을 동원해 시민들의 생활에 개입하고 벌칙까지 내리는 것 때문이었다. 이 일 때문에 박영효는 한성부판윤직에서 물러난다. 결국 한성부는 치도사업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이런 사실은 박영효가 올린 상소문에서 드러나고 있다. 1883년 3월 17일 박영효가 광주부 유수로 좌천된 뒤 상소에서 “길을 침범한 임시가옥들은 다 철거시키고, 길가의 집들은 설사 가깝게 지었다 하더라도 헐지 않는 것은 백성들이 살던 곳을 옮겨가기 싫어한다는 것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런데 심지어 이고 지고 흩어져서 도성 안이 텅 비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는 자들이 만들어낸 뜬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라며 자신을 비방하는 시민들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이어서 “큰 개혁을 할 때 비방과 원망을 초래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신이 어찌 이것을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라며 자신의 개혁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 명동성당 들머리 오른쪽, 주차장터에서 발굴된 ‘근대식 배수관로’. 나무의 뿌리와 몸통이 연결된 모양으로 부관(副管)은 주관(主管)에 끼워 이었다. 이것은 땅속의 물을 모아서 큰 관으로 흘려보내는 배수관의 시작 부분이다. 여기에 100년간의 발전 모습을 중첩한 후기 배수로의 모습도 함께 나타났다. 역사적 토목건축 기술의 집적체이다.

박영효가 세운 도시계획의 흔적

지난해 12월 16일 명동성당 재개발 현장의 발굴지에서는 기자들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조선 후기 배수관로가 생생하게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근대식 배수관로’로, 이 하수관로는 땅속의 물을 모아 인근 하천으로 흘려보내는 땅속 물길이었다. 이 배수관로는 뜬금없이 나온 것일까? 그렇지 않다. 김옥균이 일본을 드나들면서 1880년대 초 도쿄의 긴자거리와 요코하마의 도시기반시설을 보고 토론해 만든 ‘치도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도쿄 긴자 벽돌건축거리의 가스 가로등과 하수로 등 근대적 도시시설을 보고 왔고, 요코하마의 하수시설을 눈여겨보아둔 터였다.

그렇다고 조선에는 하수관로가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조선에서도 ‘암거’, 혹은 ‘맹암거’라고 하여 땅속에 물길을 구축하는 기술이 있었고, 최근 여기저기서 발굴되어 나타나고 있다. 대개는 자연석 막돌 등을 이용해 땅속 물길을 구축하였는데 삼국시대의 여러 유구에서 나타나고 있다. 서울의 도심에서는 목재와 석재를 이용한 조선시대 도시배수로도 발굴되고 있다. 이것들은 전통적인 토목건축 기술이었다.

요코하마에서는 1881년부터 벽돌로 하수관을 설치하는 개수사업이 진행되었다. 본래는 콜레라가 창궐하자 영국인 초빙기술자 브런턴(Richard H. Brunton)의 기술지도로 1869년 거류지의 하수도 정비계획이 착수되어 1871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던 것이 거류지 주민이 급증함에 따라 이 하수관도 배수용량이 부족하게 되어, 1881년(메이지 14년)부터 6년에 걸쳐 개수공사를 했다. 이때 채용된 것이 세로와 가로 비율이 3 대 2인 근대식 ‘계란모양관’(卵形管)이었다.

박영효는 새 도로를 만드는 것보다 도로를 관리하는 규칙을 정하는 것을 중시했다. 당시 반포된 조문은 “거리의 요충지에 치도국(治道局)을 설치하고 한성부 판윤과 대등한 대관(大官)을 두어야 하고 오물처리법, 도로정비를 감독하는 순검의 설치, 매시장(賣柴場·땔감나무 시장)을 길거리가 아닌 성 부근이나 동리의 빈터에 설치해야 한다”는 등 도시의 위생과 미관에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벽돌 사용 권장, 연료로서 마른 섶 대신 장작의 사용 권장과 더불어 방화 대책으로 임시상가인 ‘가가’(假家)를 제한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근대적 개념의 도시 도로에 관련된 최초의 시책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결국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1884년 12월 4일 저녁 우정국 준공 축하연을 기회로 일으킨 쿠데타였다. 3일 천하로 끝난 실패한 쿠데타였다. 주모자들은 간신히 일본으로 대피한다. 조선 급진개화파들의 망명 시절이 시작된다. 박영효에게는 1차 망명이요, 김옥균에게는 10여 년 뒤 홍종우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되는 망명이었다. 그사이 박영효는 조선개혁안으로 <건백서>(建白書)를 쓰기도 했다.

이들이 망명한 뒤 10년이 지났다. 김옥균은 홍종우에 의해 상하이에서 살해되었지만, 박영효는 1894년 6월 일본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귀국해 1895년 3월이 되자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이 되었다. 그는 10년 전 이루지 못한 정책을 다시 시행하고자 했다. 그가 입각해 첫 번째로 낸 내무아문 훈령 1호 ‘개혁훈시’는 1895년 4월 4일 각 도읍에 훈시한 88개조에 달하는 개혁 사항들이었다. 이번에는 도로 좌우에 가로수를 심고 집집마다 울 안과 빈 땅에 과실나무와 뽕나무를 심도록 하고, 각 마을이 나누어 부지런히 대로를 수축하고, 하천이 도로에 넘치지 않게 하라는 등 한층 발전된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10년 전보다는 국왕의 통치가 안정되었고, 근대화된 인식이 시민들에게 확산된 시기였다. 특히 갑오개혁(1894)으로 개혁 의지가 충만한 정부는 내무아문 안에 위생국을 설치하고 시행을 서둘렀다. 또한 ‘경무청관제’(警務廳官制)를 발포하여 도로 관련 사무를 시행하게 했다. 그 시행 세칙에는 ‘도로 위의 건설물 및 장애물, 도로 침범, 도로·교량·구거·오수에 관한 사항, 도로 청소 및 제설에 관한 사항, 변소 구조 및 시뇨 급취·운반에 관한 사항 등이 규정되어 있었다.

이번 명동성당에서 발굴된 ‘근대식 배수관로’는 이 시행 세칙에 근거해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박영효는 1895년 4월 16일 ‘가가금령’(假家禁令)을 발포하고 ‘도로수치(道路修治)와 가가기지(假家基地)를 관허(官許)하는 건’(이하 ‘가가기지 관허 건’)을 입안하였다. 전자는 일본인들의 상업적 침투와 일본인 거리의 확대를 막으려 했던 것이고, 후자는 남대문로와 종로, 정동 등을 정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명동성당은 1890년에 주교관을 짓고 나서 1892년부터 본격적으로 본당을 짓기 시작해 1898년에 준공했다. 그 사이인 1895년 인근에서는 도로정비와 하수관로 공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진다. 남산 밑 이현(泥峴·진고개)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자체적으로 하수로 정비 사업을 한다. 진고개는 본래 땅이 항상 습하다고 하여 이름 붙인 곳으로, 큰비만 오면 남산에서 흘러내린 골짜기 물이 범람해 지금의 충무로2가 서쪽은 전혀 사람이 통행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부근에는 일본공사관도 있었다. 이에 공사관이 나서서 일본제일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거류민들에게 돈을 거두어 하수도 공사를 했던 것이다. 일상(日商)들은 한상(韓商)과 청상(淸商)들이 지배하고 있던 남대문로로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일본인들이 공사한 배수관로는 남산에서 내려와 명동성당 옆을 지나 청계천으로 흐르는 개천을 덮은 것이었다.

근대 토목 기술 입증하는 유물

그런데 박영효가 1895년 7월 7일 일본으로 2차 망명길(시위대 교체 사건)에 오르는 바람에 ‘가가기지 관허 건’은 그가 직접 발포하지 못했다. 이것은 다시 8월 23일(음력)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으로 다음날 임명된 박정양에 의해 사업이 시행되고 다음해인 건양 원년(1896) 9월 29일 내부령 제9호로 ‘한성내 도로의 폭 규정 건’(이하 ‘도로 폭 규정 건’)으로 이름이 바뀌어 발포되었다. 내용은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이번에 발굴된 명동성당의 근대식 배수관로는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성당 축성 공사가 한창이던 1895년 오늘날 명동길 중간(예술극장 옆길)으로,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도 일본인들에 의해 공사 중이었다. 그렇다면 이 유구는 얼마나 문화재적 가치가 있을까? 따져보자.

이번에 발굴된 근대식 배수관로는 지하수의 흐름을 감안해 구운 벽돌을 써서 홍예식(아치 모양)으로 만들었다. 바닥은 박석을 깔았고, 홍예의 위는 벽돌을 평으로 한 번 더 깔았으며, 측면은 지지벽을 쌓기도 했다. 또 부관(副管)은 주관(主管)에 끼워 이었다. 이처럼 부관을 통해 사방에서 물을 모아 합수하고 그것을 주관을 통해 흘려보내는 수형(樹形) 배수로, 말하자면 나무의 뿌리와 몸통이 연결된 모양으로, 배수로의 시작 부분이 한꺼번에 출토된 점이 특이하다. 이것은 유래를 찾아볼 수 없다. 그 기술도 한국 고유의 전통식이다. 여기에 돌암거, 토관, 벽돌관, 시멘트관 등 100년 넘게 발전되어온 모습이 한꺼번에 집적된 것도 큰 의미가 있다.

이 근대식 배수관로는 조선 후기 개화파들이 추구했던 근대 조선의 토목건축 기술을 입증하는, 한국 근대 토목건축사의 지표로 평가된다.

4대강 두남두고 재개발 따냈나

그런데 명동성당 쪽은 마지못해 이 유구를 가운데 토막만 보존하겠다고 한다. 그것도 재개발 뒤 새 건물 지하실에 전시하겠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의 문화재위원회도 이견 없이 승인했다. 그러나 무릇 문화재는 현장 보존이 생명이며, 피치 못해 이전하는 경우 가치가 반감된다. 더구나 실내에 전시하는 것은 단순히 박제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 100년이 넘는 역사가 겹겹이 중첩된 근대식 토목건축 기술 유구를 한 부분만 전시 보존한다니 갑갑한 생각이 드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명동성당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어 지금까지 진행돼오는 동안 서울대교구 쪽은 너무나 많은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교계와 교회 안의 불소통은 물론이요, 이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묵인하는 조건으로 문화재청의 건축허가를 받고 추기경이 ‘4대강 공사를 반대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이에 한국천주교주교회의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강력하게 비난 성명을 발표했지만 밀어붙이고 있다. 서울대교구 직원을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에 파견해 근무케 하며 문화재청을 압박하기도 했다. 시공업체인 대우건설이 공사 중지된 발굴 현장을 훼손하자 서울대교구가 시킨 일이 아니라고 광고를 낸 일이라든지, 문화재 훼손 현장을 조사하는 정당한 조사위원을 발굴지에서 폭력으로 끌어내고 장비를 강탈한 일이라든지 많은 사건이 명동성당 재개발 사업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임기를 5년이나 넘겨 서울대교구장직을 겸하고 있는 추기경, 그리고 보필하는 신부들, 나아가 한국 천주교 전체의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


/ 김란기
공학박사, 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대표, 문화유산연대 공동대표, 도쿄대 객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