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신자유주의의 어떤 낭패
“우리 목표는 5년 안에 세계 최강의 스포츠 기업으로 우뚝 서는 것이다.” 2010년 5월 31일, 아르노 라가르데르가 광고 모델로도 손색없을 멋진 미소를 환하게 지어 보였다. 그는 이날 여러 스포츠 사업부를 하나의 조직으로 통폐합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이로써 라가르데르의 스포츠사업부는 ‘라가르데르 언리미티드’(Lagardère Unlimited)라는 이름을 달고, 라가르데르그룹의 핵심 기업 가운데 하나로 격상했다.
라가르데르, 스포츠 비즈니스 ‘올인’
아르노 라가르데르는 본사 기자회견장을 찾은 기자단에 ‘라가르데르 언리미티드’의 마스터플랜을 전격 공개했다. 앞으로 ‘라가르데르 언리미티드’는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유럽축구선수권대회 등) 대규모 스포츠 행사를 둘러싼 방송중계권과 마케팅 대행, 경기장 운영, 선수 이미지 관리, 우수 선수 훈련 지원 등에 역점을 두고 단기간에 최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매진한다는 계획이다. 라가르데르 회장은 “취미나 관심사와 관련된 분야에는 더 이상 관심 없다. 이제 후원 따위는 하지 않는다. (중략) 오로지 수익 창출에만 전력투구하겠다”(1)고 힘주어 말했다. 세계 스포츠 시장은 2009년 1조140억 달러의 매출액을 달성한 데 이어, 2012년에는 무려 1조320억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창출할 것으로 예상되는 유망산업이다.(2) 라가르데르도 언젠간 미국의 다국적 스포츠 매니지먼트 기업인 IMG의 1위 자리를 빼앗겠다는 야무진 꿈을 품고 있다. 하지만 이런 포부가 무색하게 지금까지 ‘라가르데르 언리미티드’가 보여준 성적표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라가르데르는 2012년 파리 올림픽 유치전을 계기로 비로소 스포츠사업에 눈을 떴다. 2004년 라가르데르는 스포츠 마케팅 기업 ‘아바스 스포츠’ 사장인 루시앵 부아이에와 ‘카날 플뤼스’ 전 회장인 피에르 레스퀴르의 조언을 받아 사회당 소속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 시장과 친분을 맺고, ‘후원업체 모임’ 대표직을 맡았다. 2005년 7월 6일 올림픽 최종 개최지로 런던이 선정되면서 파리 올림픽 유치의 꿈은 사실상 물 건너갔지만, 라가르데르 회장은 각종 매체에 전방위로 출연하며 프랑스 스포츠계의 구원투수(물론 공짜로 구원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를 자처하고 나섰다. 라가르데르그룹 간부로 활동했던 한 퇴사자는 “당시 그룹 홍보부를 맡고 있던 아르노 몰리니에는 2012년 파리 올림픽 유치 실패에 관계없이 계속 스포츠 부문을 라가르데르라는 브랜드 홍보를 위한 창구로 이용해야 한다고 회장을 설득했다”고 전했다.
국영 훈련기관 선수 빼내 메달 사냥
라가르데르 회장은 올림픽 유치 실패를 계기로 ‘라가르데르팀’(Team Lagardère)이라 불리는 선수훈련센터를 개관했다. 최적의 훈련 환경을 제공해 최우수 선수를 육성한다는 명목이었다. 스포츠 사회학자인 파트리크 미뇽 ‘국립스포츠 및 체육교육연구소’(INSEP) 연구원은 “라가르데르는 프랑스의 메달 사냥을 뒷받침할 만한 충분한 재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최정예 스포츠 선수 양성을 위한 최대 국영 훈련기관인 INSEP를 대신할 훌륭한 대안임을 자처한다. 신자유주의 대기업 회장다운 발언이다. ‘기업가정신’으로 단단히 무장한 채 시대에 뒤떨어진 체육연맹을 공격하는 모습이다”라고 평가했다.
체육부의 지원을 받으며 총 21개 종목에 걸쳐 630여 명의 최우수 선수를 훈련하고 있는 선수양성기관(3) INSEP는 라가르데르‘팀’의 탄생을 경축하기 위한 홍보 영상물 촬영을 위해 흔쾌히 장소를 협찬했다. 하지만 ‘팀’의 경영진은 아르노 라가르데르 찬양 일색의 이 영상물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INSEP를 이탈해 새로 라가르데르팀에 합류하기로 한 직원들에게 악의 없이 편하게 전 고용주의 부족한 점을 지적해줄 것을 부탁했다. 부아드뱅센에 위치한 INSEP의 선수양성센터에서 일하던 연구원 3명과 국가대표 코치 1명이 첨단 시설과 높은 보수에 혹해 장부앵 경기장에 마련된 라가르데르팀의 훈련시설로 자리를 옮겼다. 장부앵 경기장은 2004년 파리 시장이 라가르데르그룹에 장기 이용권을 내준 것으로도 유명했다.
라가르데르팀의 탄생으로 때아닌 특수를 누리기는 프랑스육상연맹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던 연맹은 2006∼2008년 연간 100만 유로를 지원받기로 라가르데르그룹과 스폰서 계약을 체결했다. “라가르데르의 후원 덕에 육상 프로리그가 출범했고, 육상대회도 열 수 있게 됐다. 대회에는 급여와 사회보장 혜택을 받는 프로선수 30여 명이 참석한다”고 말하는 베르나르 앙살렘 프랑스육상연맹 회장의 얼굴에 희색이 가득했다.
속성 투자, 실망스런 성적
라가르데르는 부진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프랑스 테니스계를 조롱하며,(4) 장밋빛 미래를 보여주겠노라는 달콤한 말로 과거 선수권 우승자들을 하나둘 꾀어냈다. 라가르데르는 알프마리팀 지역 소피아 앙티폴리스에 주니어급 선수 훈련센터를 개관하는 등 선수 양성을 놓고 프랑스테니스연맹과 경쟁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연맹 지도부는 폴 앙리 마티유나 가엘 몽피스 같은 선수들이 훈련원을 이탈하는 것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다. 1995년 오스트레일리아 오픈과 2000년 프랑스 오픈을 제패한 미국계 프랑스 선수 마리 피어스가 라가르데르팀에 합류한다는 소식에도 속을 끓였다. 하지만 라가르데르팀은 기대한 것과는 달리 의외로 부진한 성적을 보였다. 2008년 가엘 몽피스가 프랑스 오픈 준결승에 진출하기는 했지만, 그 밖의 라가르데르팀 소속 선수들은 그다지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더욱이 연맹 소속 선수들은 라가르데르팀 선수들을 압도하는 우수한 기량을 펼쳐 보였다.
라가르데르는 특히 언론으로부터 ‘프랑스 테니스계의 작은 모차르트’라고 칭송받는 리샤르 가스케를 애지중지했다. 시련이 닥쳤을 때도 그의 애정은 전혀 변함없었다. 2009년 5월 9일 스포츠 전문지 <레퀴프>가 온라인판을 통해 가스케의 소변에서 코카인이 검출됐다는 소식을 보도했다. 미국 마이애미 대회 출전을 포기한 뒤 곧바로 실시된 소변 검사에서 약물이 검출된 것이다. 보도가 나가자 아르노 라가르데르의 대변인인 람지 키룬(더욱이 그는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고문관으로도 활동 중이었다)의 진두지휘 아래, 라가르데르사의 변호인단과 그룹 내 홍보팀이 총출동했다. 덕분에 어린 꿈나무 선수는 스포츠중재재판소의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라가르데르는 전체 자본의 20%를 소유한 <카날플뤼스>의 방송 프로그램 <그랑 주르날>에 출연해 처음으로 승소 소감을 공개했다. 그는 후견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마치 절호의 기회가 왔다는 듯 “나는 결코 리샤르와 잠자리를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소수 엘리트만 남기고 팀 해체
이렇게 한바탕 촌극이 벌어진 뒤, 라가르데르팀은 종말을 향해 치달았다. 라가르데르팀에 처음으로 해고의 칼바람이 휘몰아쳤다. 직원 32명 가운데 12명이 짐을 꾸렸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10년 8월, 라가르데르팀은 공식 해체됐다.
스포츠연구소도 비교적 조용한 정리 과정을 통해 라가르데르팀과 운명을 같이했다. 라가르데르사에는 소수의 유명 선수만 남았다. 테니스 선수 리샤르 가스케와 폴 앙리 마티유, 유도 세계챔피언 뤼시 데코스는 ‘라가르데르 파리 레이싱’이란 새 조직에서 훈련을 계속했다. 이들의 훈련지는 ‘별 중의 별’로 불리는 크루아카틀랑 경기장이었다. 이곳도 장부앵 경기장과 마찬가지로 라가르데르가 2005년 파리 시장으로부터 장기 이용 허가를 받은 경기장이었다. 라가르데르그룹 경영진의 한 측근은 “회사에 대대적인 변화의 바람이 몰아친 건 2008년 10월 베이징 올림픽을 마친 선수들이 귀환하면서부터다. 아르노 라가르데르 회장은 선수들이 줄줄이 금메달을 목에 걸고 금의환향할 것이란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기대주들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크게 낙담한 라가르데르는 결국 팀을 해체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전해주었다.
한때 라가르데르는 국영 훈련기관을 지지하는 이들을 조롱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반대로 이들로부터 팀 해체라는 비겁한 결정을 맹렬히 비난받는 처지가 됐다. 라가르데르팀의 눈엣가시인 파트리스 도맹게즈 전 프랑스테니스연맹 기술위원장(2005~2009)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는 “스포츠에서 중요한 것은 경기 성적이다. 라가르데르그룹은 대패했다”며 환호했다. 그렇다면 돈이나 인맥은 승리의 보증수표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 모데 INSEP 대표는 “최우수 기량의 선수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방법론과 시간이 필요하다. 때에 따라서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다. 또한 실패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더러는 검증된 훈련 방식이 잘 먹히지 않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검증된 방식이 잘 통하지 않는 이유는 도맹게즈 기술위원장의 설명처럼 “한 선수를 길러내는 데는 10년이라는 세월, 다시 말해 1천 번의 경기와 1만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는 그동안 민영 훈련기관을 상대로 프랑스식 선수 양성 시스템 존속을 위해 싸워왔다. 민영기관과 달리 연맹은 공익을 사명으로 한다. 또 스포츠와 교육이라는 이중의 목표를 추구한다”고 강조했다.
라가르데르팀에 할당된 연간 예산은 700만 유로다. 사실 그 정도는 2009년 1억6400만 유로(이는 전년 대비 4분의 1 수준의 금액이다)에 달하는 순익을 달성한 대그룹을 파산으로 내몰 만큼 엄청난 액수는 아니다. 라가르데르는 ‘마트라 레이싱’ 축구팀의 구단주이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에서 교훈을 얻었다. 아버지는 1980년대 ‘파리생제르맹’팀을 권좌에서 끌어내기 위해 수백만 유로를 쏟아붓고 세계적인 스타 선수들을 영입했다가 쓰디쓴 실패를 경험했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아르노 라가르데르는 수익성이 불투명한 명예에 연연하기보다는 이익을 배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현재로서 라가르데르의 이런 계획은 실패로 판명나고 있다. 2010년 ‘라가르데르 언리미티드’는 2800만 유로의 수익을 냈다. 사실상 이익이 반토막 난 것이다. 스포츠 경제학자인 프레데리크 볼로트니는 “라가르데르팀은 후원 따위에는 전혀 관심 없다. 중요한 것은 최대한 적은 비용을 들여 스포츠 시장에서 네임밸류를 높이고, 스포츠사업의 초석을 다지는 일이었다”고 분석했다.
손실 메우려 돈 되는 건 뭐든 덤벼
‘라가르데르 언리미티드’는 이미지 관리 대가로 선수들에게 계약금과 보너스의 5~20%를 수수료로 챙기며 경쟁업체 IMG의 비옥한 텃밭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다. 또 다른 수익원을 발굴하기 위해 방송중계권과 마케팅 대행 업무를 전문으로 하는 자회사 ‘스포트파이브’(Sportfive)를 통해 스포츠 관람 사업에도 손대고 있다. 최근 유력 스포츠 연맹들이 TV 방송사와 직접 중계권 거래에 나서기로 결정하면서 라가르데르그룹의 입지는 다소 약화됐다. 하지만 라가르데르사는 일찌감치 손실을 충당할 만한 또 다른 묘안을 짜냈다. 2009년 12월 15일 ‘스포트파이브 스타디움 컨설팅’은 ‘경기장 사업, 프랑스에 불가피하지만 수익성 있는 투자’라는 그럴듯한 제목의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프랑스만을 위한 투자가 아니라, 라가르데르를 위한 투자이기도 하다. 사실상 라가르데르사도 2016년 프랑스에서 개최되는 유로 축구경기의 특수를 어느 정도 누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글 / 다비드 가르시아 David Garcia 언론인
번역 / 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레제코>, 파리, 2010년 6월 1일.
(2) <Back on track, the outlook for the global sports market to 2013>,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 2010. 이 연구 보고서에서 말하는 ‘스포츠 시장’이란 스폰서십, 관람 티켓 판매, 방송중계권 거래, 상품화 권리 등을 의미한다.
(3) INSEP는 각종 체육연맹의 요청에 따라 선수를 훈련한다. 한 예로 프랑스농구연맹을 위해 이 기관은 한 해 25명의 여성 선수와 15명의 남성 선수를 훈련하고 있다.
(4) 야니크 노아가 1983년 그랜드슬램 중 한 경기(프랑스오픈)를 우승으로 이끈 것이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