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주의에서 전쟁 잠재국으로 선회한 일본
프랑스 언론인의 시각에 비친 일본
2022년 11월 27일 토요일 오전,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도쿄 북부의 아사카 육상자위대 기지를 방문했다. 기시다 총리는 전차에 탑승해 기지를 시찰한 후 “앞으로 적 기지 공격 능력 보유 및 지속적인 군사력 강화를 포함한 모든 옵션을 고려할 것”이라는 파격 선언을 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덧붙였다. “일본 주변 안보 상황이 전례 없는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공상과학 소설에서나 벌어지던 일들이 현실이 됐다.”
이로부터 며칠 후, 기시다 총리는 국방 예산을 2배로 늘리고 향후 5년간 3,150억 달러를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국내총생산(GDP)의 2%에 달하는 규모다. 이로써 일본은 미국, 중국에 이어 국방비 지출 세계 3위 국가로 올라설 예정이다. 참고로 GDP의 2%는 201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28개 회원국(일본은 NATO 회원국이 아니다)이 약속한 국방비 증액 수준에 해당한다.
일본의 군사력 증강은 예견된 일이었다. 2022년 8월, 일본은 국방비 증액이 포함된 ‘국가안보전략’ 개정안을 발표하며 자위대 임무의 근본적인 변화를 예고했다. 이로써 자위대는 일본 영토 방어에 국한되지 않고 반격, 심지어 적국의 군사기지를 타격할 수 있게 됐다. 당시 아베 신조 총리 시절 방위상을 지낸 오노데라 이츠노리 자민당 안전보장조사회장은 도쿄의 한 호화 호텔에서 오츠카 타쿠 자민당 의원과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을 논의했다. 기시다 총리의 측근인 오노데라는 기시다 총리의 대변인을 자처했다. 경제지 <닛케이아시아>의 켄 모리야스 외교 특파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이 대담 내용을 들려줬다.
“두 사람은 중국이 대만과 (중국이 댜오위다오로 부르며 영유권을 주장하는) 센카쿠 열도를 동시에 침공한다는 시나리오에 근거해 의견을 교환했다. 그럴 경우 일본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대만 거주 일본인부터 대피시켜야 할 것인가? 그들이 도달한 결론은 센카쿠 열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 이었다!”
‘대만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일본
당시 일본에서는 긴장감이 팽배했다. 지난해 8월 2~3일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 며칠 뒤, 중국군은 대만 해협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했고 이때 발사한 탄도 미사일 중 5대는 일본 배타적 경제수역(EEZ)에 떨어졌다.(1) 모리야스 특파원은 “분명 중국은 앞으로 미일 동맹을 계속 시험할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미국의 공식 입장은, 아무리 경미한 공격일지라도 일본 본토가 공격 받는다면, 대만에서 110km 떨어진 오키나와 최서단 요나구니 섬일지라도 맨해튼 폭격에 상응하는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실제로 그럴 가능성은 무척 희박하다.”
중국은 이미 고비사막에서 오키나와의 카데나 미 공군기지 공격 모의 훈련을 실시한 바 있다. 일본은 위성사진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했다. 워싱턴의 보수파 싱크탱크 허드슨 연구소의 일본 전문가 무라노 마사시는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즉시 카데나 기지가 무력화될 것으로 예상하며 “중국은 대만 침공 초기에 탄도 및 순항 미사일로 오키나와와 큐슈의 전투기 활주로를 포격하고 사이버 및 전자파 교란 작전부터 펼칠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은 오키나와 주민의 안보를 위해서라도 미군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현재 오키나와에는 3만 명의 미군이 주둔 중이다. 2022년 10월 30일, 주일 미국대사는 오키나와 한센 미 해군 기지를 찾아 현지 채소 시장 개장식에 참석했다. 이 대규모 시장의 주요 고객은 오키나와 주둔 미군 가족들이다. 이런 제스처만으로 미군의 존재에 대부분 적대적인 오키나와 주민들의 환심을 살 수 있을지 의문이다.(2) 개장식에 몇 주 앞서, 일본 정부는 새로운 안보 전략을 공개했다. <2022 일본 방위백서>에서 중국을 ‘전례 없는 전략적 도전국가’로 묘사하며 아시아의 지정학적·군사적 균형을 파괴하고 센카쿠 열도와 대만을 위협하는 ‘경쟁국’으로 규정했다. 1895~1945년 대만을 점령했던 일본은 이제 대만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다.(3) 2022년 내내 미사일을 발사한 북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적국 리스트에 올랐다. 특히 러시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 합병된 쿠릴열도 영유권을 놓고 일본과 분쟁 관계에 있는 국가다.
일본 사회가 만장일치로 이런 안보 상황 분석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이 국방 예산을 늘린 것은 사실이다. 2022년 기준 중국 국방 예산은 약 2,290억 달러로, 전년 대비 약 7.5%p 증가했다(같은 해 미국 국방 예산은 7,680억 달러). 그러나 모리야스 특파원은 “시진핑이 안보를 강화한 이유는 전쟁 준비가 아니라, 중국 내 불평등 타개 조치들을 발표하기 위한 준비”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국의 부유층들, 람보르기니를 몰고 캘리포니아에 단독주택을 소유한 이들은 이런 조치들에 불만이 클 것이다. 시진핑은 대만이 중국에 통합되길 원하지만, 그의 담화에서 대만 침공에 대한 암시는 없다. 침공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시진핑 담화의 핵심은 사회주의로의 회귀다.”
모리야스 특파원은 “시진핑의 이런 구상은 전쟁과 양립할 수 없다”라는 분석을 덧붙였다.
“위대한 동맹 미국이 일본을 지켜줄 것”
자민당의 반대파가 가장 비난하는 점은, 군비 지출 규모와 적 기지 공격 능력 보유다. 특히 후자는 일본의 평화헌법에 위배된다. 일본 국민은 1945년 일본의 항복 선언 후 미국의 강요로 제정된 이 헌법에 여전히 애착을 가지고 있다. 평화헌법 9조는 “일본 국민은 국가의 주권인 전쟁과 국제분쟁 해결수단으로써의 무력 위협 또는 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 이를 위해 (...) 육군, 해군, 공군 및 기타 전쟁 잠재력을 절대 유지하지 않는다”라고 명시한다.
평화주의자들은 이 원칙을 수호하기 위해 일본 국회의사당 앞에서 주기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11월의 어느 오후, 6,000명의 시위대가 운집했다. 확성기를 든 경찰들이 시위대와 대치했다. 시위대 중 일부도 확성기를 사용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바닥에 그려진 경계선이나 통제 테이프를 넘지 않고 각자의 위치를 지켰다. ‘평화는 무력으로 이룩할 수 없다’, ‘군사력 증강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일본 열도의 요새화를 방관하지 말자’라는 문구가 쓰인 전단지로 주머니가 가득 찬 한 시위자가 눈에 띄었다. 자선단체에서 일하는 그는 시위대가 ‘대부분 노인’인 점을 아쉬워했다.
도쿄 고탄다 대학가의 한 대형병원의 의사는 “일본 청년들은 바깥세상과 동떨어져 있으며 외국어를 거의 못 한다. 진정한 외부의 위협을 인식하지 못한 채 집안에 틀어박혀 일상적인 고민만 할 뿐이다. 정부의 방위력 증강 결정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에는 위대한 동맹 미국이 일본을 지켜줄 것으로 믿는다”라고 설명했다. 인근에서 17세의 법학도 지망생 히로하루 카모를 만났다. 그는 정부의 결정에 공감하면서도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일본 정부는 대만을 지키기 위해 미국과 함께 싸우길 원하지만 일본 청년들은 이에 동참하지 하지 않을 것이다. 대만까지 가서 미군과 함께 중국 침략군 몰아낸다?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병역의무가 없는 나라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한 히로하루는 예비군으로 자위대에 합류할 의향은 있다고 밝혔다. “대만이 침공당하면, 오키나와와 큐슈가 위험하다. 그럴 경우 조국을 지켜야 한다!”
일본 국민과 정부가 생각하는 안보의 중심축은 여전히 미국이다. (2021년 중의원(하원) 선거에서 득표율 7.6%를 기록한) 일본 공산당의 대외정책 책임자인 모리하라 기미토시는 “홀로 설 길을 찾는 대신 대미 동맹에서 열등한 조력자에 머무는” 자민당의 민족주의 의원들을 조롱했다. 모리하라에 따르면 자민당 의원들이 미국을 가장 강하게 비판하는 부분은 “일본이 다른 부강한 국가들처럼 해외에 군대를 파견해 힘을 과시하지 못하게 막는” 평화헌법에 관한 것이다. 평화헌법의 열렬한 수호자로 정부의 방위전략과 미국의 ‘핵우산’에 완강히 반대하는 공산당 의원들의 대규모 회동이 있을 때면 경찰은 도쿄 시부야에 있는 공산당 본부에 경비 인력을 파견한다. 모리하라를 만나러 간 날도 민족주의자들이 탄 트럭들이 공산당 본부 주변을 행진하고 있었다. 욱일기와 우크라이나 국기가 걸린 트럭 운전자들은 확성기로 구호를 외쳤다.
“일본이 살 길은 국제적 협력 강화”
일본 언론은 대미 동맹 강화를 당연한 공식처럼 강조한다. 오노데라 자민당 안전보장조사회장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약소국으로 간주하고 침공했다. 어느 나라도 우크라이나를 지원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을 지켜줄 강력한 동맹이 있다면 일본이 공격받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4) 아베 전 총리의 대외정책 자문관이자 연설문 작성자인 다니구치 도모히코 교수가 해외에서 설파한 주장과 일치하는 설명이다.
2022년 11월, 다니구치 교수는 아시아 소사이어티(Asia Society) 스위스 센터가 주최한 회의와 유럽 평의회가 스트라스부르에서 주최한 세계 민주주의 포럼에 초청받았다. 유럽으로 떠나기 직전 다니구치 교수는 도쿄 게이오대학 수업에 우리를 초대했다. 학생들 앞에 선 그는 열띤 목소리로 수업을 진행했다.
“러시아, 북한, 중국... 지금껏 일본은 핵무기를 보유한 세 적국, 비민주적인 세 적국과 동시에 대적한 적이 없다. 이 전례 없는 상황은 일본의 인구 고령화와 감소, 경제성장 둔화와 맞물렸다. 일본이 중국처럼 신속히 성장해 중국과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유일한 합리적 선택은 협력의 확대다. 오랜 동맹국 미국은 물론 호주, 인도와도 협력해야 한다. 유럽과 협력도 확대해야 한다. 특히 프랑스는 독특한 입지에 있는 국가다. 인도양과 태평양의 해외영토 덕분에 프랑스는 배타적 경제수역을 하나 더 보유하고 있다!”
다니구치 교수의 주장은 2007년 아베 총리가 인도 의회 연설에서 제시한 인도·태평양 동맹 개념을 연상시킨다. 아베 총리는 이 연설에서 초(超)군사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중국과 이런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노력에 초점을 맞췄다.(5) 이때 아베 총리는 호주와 미국을 포함한 태평양 전역으로 확장된 ‘초거대’ 아시아를 제안했다.
미일관계, 1952년으로 회귀하나?
모리하라 일본 공산당 대외정책 책임자는 아시아가 인도·태평양으로 확장되면 “미국을 중심으로 뭉쳐 중국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국가들의 축”이 수립된다고 분석하며 “일본이 강력한 장거리 미사일을 확보하고 중국에 대한 ‘억제력’을 갖추면 미국의 인도·태평양 방어 전략도 강화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절대 일본이 이 미사일들을 독자적으로 사용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군사적, 경제적, 외교적 측면에서 미국의 고객일 뿐이다”라고 덧붙였다. 미·일 관계의 이런 비대칭성을 조금이라도 보완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이탈리아, 영국과 함께 2035년 배치를 목표로 차세대 전투기 공동 개발에 착수했다.(6)
일본과 미국의 이런 관계 변화는 미 군정 통치 종료 직후인 1952년, 양국의 평화조약체결 시점을 연상시킨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일본의 방위전략 수정은 중·일 관계의 위험한 단절이라고 경고했다. 사실 중·일 관계는 이미 경색됐다. 2012년 9월 11일 일본 정부가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중 민간 소유 3개 섬을 국유화한 이후, 중국 선박의 센카쿠 열도 침범이 잦아졌다.(7) 아베 총리의 주기적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양국관계 악화에 일조했다. 야스쿠니 신사는 제2차 세계대전 전범들의 넋을 기리는 곳이다.
그럼에도 양국의 긴장관계는 최근 완화되는 듯했다. 2022년 7월, 아베 총리 피격 후 시진핑 주석은 “새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중·일 관계 구축에 대해 (아베 총리와) 상당한 공감대를 이뤘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8) 그러나, 일본의 새로운 방위전략 발표 후 중국의 어조는 달라졌다. 중국 관영매체 <글로벌타임스>는 일본의 군국주의, 식민주의 과거를 상기시켰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국방 및 군사 현대화가 야기한 폐해를 고려할 때 일본의 정책 변화는 동북아 전역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많은 국가들이 군비 지출을 늘려야 할 것이고, 이는 동북아 지역의 새로운 군비 경쟁을 야기할 것이다.”(9)
피해를 떠올리는 한국, 가해를 부정하는 일본
일본의 ‘정책 변화’에 우려를 표하는 국가는 비단 중국만이 아니다. 1905~1945년 일본 식민 지배를 겪은 한국도 고통스러운 과거를 떠올리고 있다. 과거사 분쟁, 특히 일본군에 유린당한 ‘위안부’ 문제가 다시 대두되고 있다. 위안부 강제동원 만행 등 과거사를 부정하는 일본인들이 점점 늘고 있다. 도쿄도지사는 2017년부터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희생자 연례 추도식 참석을 거부하고 있다.
1923년, 간토 지방을 강타한 지진으로 도쿄와 요코하마의 상당 지역이 파괴됐으며 일본인 10만 명 이상이 숨졌다.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고 폭동을 계획 중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최소 2,600명의 조선인이 (일본 경찰 및 군대를 등에 업은) 일본인 자경단에게 학살당했다. 심지어 일본 정부는 “정보의 전략적 해외 전파”에 할당된 예산을 대폭 늘렸고 이 자금은 정작 “일본 과거사 진상”을 규명해야 할 해외 대학의 싱크탱크들에 대거 유입됐다.(10)
한국이 일본의 안보 정책 선회를 우려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일본 정부가 무력을 동원한 “적국 기지 공격” 가능성을 명시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적으로 규정한 국가에는 북한도 포함된다. 일본이 북한을 공격할 경우 한국도 직접적인 위험권에 들어간다. <한겨레> 칼럼니스트는 “일본이 (대한민국 헌법 3조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영토인) 한반도를 선제공격 대상으로 설정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라고 질문했다.(11) 한·미·일 3국의 견고한 연대를 추구하는 강한 보수주의 성향의 윤석열 대통령조차 “한반도 안보와 대한민국 국익에 직결되는 문제라면 당연히 한국과 긴밀한 협의를 거치거나 사전 동의를 구해야 할 것”이라고 일본과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12)
북한은 일본의 위협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 분위기다. 김정은은 마치 정해진 일정표에 따르듯 주기적으로 대륙간 탄도 미사일 발사 시험을 명령하고 있다.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은 1,000km 이상을 날아가 홋카이도의 일본 배타적 경제수역(EEZ)에 떨어진다.
모리하라 일본 공산당 대외정책 책임자는 북한의 목표는 일본이 아니라고 안심시키며 “북한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미국과의 대화를 희망하며 병적으로 관심을 갈구한다”라고 설명했다. 일본 자위대는 북한 미사일 격추를 시도하지 않지만 일본 국민은 북한의 위협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할 때마다 스마트폰 경보 문자가 발송되며, 지하철 및 고속철도 역 안내 화면에 열차 지연 메시지가 뜨기 때문이다. 일본 당국은 암호 화폐 기업들을 상대로 북한 해커 조직 라자루스(Lazarus)의 위협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북·미 대화와 마찬가지로 북·일 대화도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러시아도 이제 적국 진영에 합류했다. 러·일 관계가 항상 지금처럼 적대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베 전 총리는 마지막 임기(2012~2020) 동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5차례 골프 회동을 가진 반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는 무려 27차례 만남을 가졌다. 아베와 푸틴은 매번 경제 협력을 다짐했지만 쿠릴열도 분쟁에 대해서는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쿠릴 열도는 태평양과 오호츠크해를 가르는 경계선 역할을 하는 섬들이다. 러시아는 오호츠크해에서 핵잠수함을 운용 중이며 2016년부터는 미사일 방어 체계도 구축했다. 따라서 쿠릴 열도를 미국의 동맹국인 일본에 반환할 경우 러시아의 안보는 약화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기시다 현 총리는 러시아 제재 조치를 승인했지만 자국 에너지 안보라는 명목으로 러시아와 전략적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미국의 엑손모빌과 달리 일본 기업들은 사할린-2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러시아 해상 가스 탐사 및 생산 법인의 지분을 유지했다. 일본은 이 프로젝트로 생산된 액화천연가스(LNG) 수천만t 중 2/3(60%)에 가까운 분량을 구매했다. 이는 일본 수요량의 10%에 해당한다. 기시다 총리는 오호츠크해의 사할린-2 유전 및 가스전은 “일본 에너지 안보에 대단히 중요하다”고 해명했다.
과연, 일본의 선택은?
일본의 새로운 ‘방위전략’이, 일본 정부가 중요시하는 아시아 주변국과의 무역관계를 악화시킬 위험은 없어 보인다. 2009년, 아세안(ASEAN)(13)의 10개 회원국은 자유무역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일본 기업들은 아세안 회원국의 제조업 분야에 활발히 진출했다. 아식스는 2013년부터 전체 운동화 생산량 중 상당부분을 캄보디아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소니는 말레이시아에서 ‘홈 시네마’ TV 공장을 가동 중이다. 미쓰비시는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서 소비자 대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인수한 후 현지 생산 자동차 판매량이 증가하는 성과를 거뒀다.
일본과 아시아 국가들의 문화적 유대도 발전하고 있다. 일본 오사카부 이타미시는 베트남 하노이 성요셉 성당에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을 기증했다. 베트남에게 일본은 ‘교역’부문에서도 중요한 국가다. 일본은 (싱가포르에 이어) 베트남의 2번째 최대 투자국이며 베트남 해산물 최대 수입국이다. 이 때문에 일본은 때때로 국제무대에서 다른 국가들을 지지할 때 조심스러운 입장에 처하기도 한다. 2022년 10월, 일본은 미국과 영국이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한 스리랑카 규탄 결의안 투표를 거부했다. 일본은 중국에 이어 스리랑카의 두 번째 최대 채권국이다.
스리랑카 역시 일본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입장을 보인다. 2021년 3월 6일, 나고야 출입국 관리국에 구금된 스리랑카 국적의 한 젊은 여성이 사망했다. 이름은 위시마 산다말리, 교사였던 그녀는 가정폭력을 신고하기 위해 경찰서를 찾았다가, 비자 만료 사실이 드러나 나고야 출입국 관리국에 구금됐다. 그녀는 결국 건강이 악화됐음에도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사망했으나, 스리랑카 당국은 일본에 항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 국민들이 그녀의 죽음에 애통함을 표했다.
아세안 국가들과 달리 인도에는 일본 투자자들이 세운 공장이 없다. 도쿄 소피아대학의 인도인 연구원 메가 와드하는 “일본과 인도는 심각한 갈등의 역사가 없지만 양국관계는 형식적인 우호 관계 이상으로 발전한 적이 없다”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와드하 연구원의 저서에 등장하는 100여건의 인터뷰에서 알 수 있듯(14) 일본 열도에는 상당수의 인도 이주민이 존재한다. 영어를 구사하는 인도인 엔지니어 수천 명이 중소기업 대상 이민 제도를 통해 일본으로 들어와 IT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다. 이민을 허용하지 않는 일본 정책을 우회한 소위 ‘직업 훈련’ 프로그램 덕분이다. 하이테크 분야에서는 일본과 인도의 공동 우주 프로그램이 눈길을 끈다. 양국은 2030년 달 뒷면 탐사를 목표로 2019년 1월 세계 최초로 달 뒷면에 탐사선을 착륙시킨 중국과 경쟁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비록 미국의 전략적 비전을 공유할지라도 미국의 대(對)중국 경제 제재의 영향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소니가 대표적인 예다. 스마트폰에 장착되는 ‘CMOS’ 이미지 센서의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소니는 더 이상 중국의 거대 기술 기업 화웨이에 제품을 납품할 수 없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품은 중국 중산층이 물건을 구매할 때 기준점 역할을 하고 있다.
주일 프랑스상공회의소장을 맡고 있는 제롬 슈찬 고디바 초콜릿 일본·한국 지사장은 “비단 하이테크 제품뿐만이 아니다. 디자인, 패키징, 패션, 뷰티 등의 분야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인기를 끈 제품은 중국에서(대만, 한국, 태국에서도) 인기를 끈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라고 확신했다. 중저가 의류 브랜드 유니클로가 대표적인 예다. 중국에서 (전 세계 1,600개 매장 중) 900개 매장을 보유하고 있는 유니클로는 매년 백여 개의 신규 매장을 개설하고 있다. 유니클로의 가장 큰 해외 시장인 중국 덕분에 73세의 야나이 타다시 유니클로 회장은 280억 달러에 달하는 재산을 축적했고 일본 최대 갑부 반열에 올랐다. 타다시 회장은 지정학적 분쟁과 양국의 입장이 엇갈리는 이슈들을 피해가며 중국 정부의 비위를 맞춘다.
홍콩과 이 곳의 헤지펀드는 해외 투자자 그리고 중국 부유층에게 매력을 상실했다. 이후 일본은 세제 혜택을 제공하며 매력적인 금융 중심지로 부상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싱가포르에 뒤처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중국을 아시아의 엘도라도로 여겼던 서구 기업인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로서의 매력을 호소하는 중이다. 중국의 마윈 전 알리바바 회장도 일본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평화주의 정책의 갑작스러운 전환 이후, 일본은 중국과 최전선에서 대적하게 됐다. 또한 미국의 영향력에서 독립할 가능성도 잃어버렸다. 탈냉전 시대로의 진입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아시아는 역동성으로 꿈틀거리고 있다. 베트남에서 스리랑카에 이르기까지, 인구 고령화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성장 동력을 구축한 아시아 국가들은 중국과 직접적인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미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아시아의 강자인 중국, 그리고 안보를 약속하는 미국 사이에서 선택을 거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글·조르당 푸이유 Jordan Pouill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도쿄 특파원, 기자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Michael Klare, ‘Washington et Pékin jouent avec le feu 대만, 미·중 군사력 경쟁의 뜨거운 감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2년 9월호.
(2) ‘60% of locals say US base burden on Okinawa “unfair”, but figure lower nationwide: poll’, <마이니치>, Tokyo, 2022년 5월 12일.
(3) ‘Defense of Japan 2022’, 방위성, Tokyo, 2022년 8월.
(4) ‘LDP national security chairman seeks open debate on U.S. nuclear umbrella’, <재팬타임스>, Tokyo, 2022년 6월 1일.
(5) Martine Bulard, ‘L’Alliance atlantique bat la campagne en Asie 중국의 독주에 맞선 아시아 ‘나토’의 탄생가능성’,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1년 6월호.
(6) Alexander Zevin, ‘Malgré le Brexit, l’introuvable souveraineté britannique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 미국의 최적화된 속국’,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3년 2월호.
(7) Olivier Zajec, ‘Nouvelle bataille du Pacifique autour d’un archipel 태평양의 새로운 전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4년 1월호.
(8)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 게재된 시진핑 주석의 성명, 베이징, 2022년 7월 9일.
(9) ‘Japan's passage of defense documents brings country away from track of post-war peaceful development: Chinese embassy’, <글로벌타임스>, 베이징, 2022년 12월 16일.
(10) Tessa Morris-Suzuki, ‘Un-remembering the Massacre: How Japan’s “History Wars” are Challenging Research Integrity Domestically and Abroad’, <Georgetown Journal of International affairs>, 2021년 10월 25일.
(11) 정의길, ‘윤정부의 자유·연대론과 일본의 한반도 선제공격’, <한겨레>, 서울, 2022년 12월 20일.
(12) <연합뉴스>, 서울, 2022년 12월 19일.
(13) 1967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이 창설. 이후 브루나이(1984년), 베트남(1995년), 라오스 및 미얀마(1997년), 캄보디아(1999년) 합류.
(14) Megha Wadhwa, 『Indian Migrants in Tokyo』, Routledge, London,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