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자 마리아테기의 유산
인종, 계급 그리고 안데스 고원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일부는 서구 지식인들의 연구에서 받은 영향을 일종의 식민지배로 간주해왔다. 하지만 1894년 페루에서 출생한 사회주의자,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는 달랐다. 그는 라틴아메리카 좌파에 마르크스주의가 도입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결코 ‘모사’나 ‘모방’은 하지 않았지만, 독창성에 지나치게 집착하지도 않았다.
반인종차별주의와 계급투쟁의 관계에 대해, 진보 진영 내에서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우선, ‘경제적’ 관점을 지지하는 이들은 “계급은 모든 지배종속관계의 결정적 요소”라고 주장한다. 한편, ‘문화적’ 관점을 지지하는 이들은 “현재의 인종차별주의는 문화(즉 공동체의 정체성과 개인의 소속 집단을 규정하는 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이런 논쟁은 비생산적이며, 식민지 역사에 적용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무시한 처사다. 일부 사상가는 인종 간 지배종속 관계의 경제적 조건과, 계급 간 지배종속관계의 문화적 조건에 대해 연구했다. 그들 중 대표적인, 남미의 중요한 혁명적 인물이 바로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José Carlos Mariátegui, 1894~1930)(1)다.
프랑스에서는 다소 생소할 이 비정통 마르크스주의자 마리아테기의 사상은 현 시대에도 유효하다. 그가 지적한 문제들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계급투쟁에서 인종과 원주민 문제를 중심에 뒀고, 원주민에 대한 토지 반환을 정치적 전략으로 내세우는가 하면, 혁명에서 신앙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역설했다. 마리아테기는 1928년 출간한 명저 『페루의 현실 해석에 관한 일곱 편의 에세이』에서, 통찰력 있는 주장을 일찌감치 선보였다. 라틴아메리카 옛 식민지 국가들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면 원주민 농촌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탈식민화된 비유럽 국가의 실정에 맞춰 마르크스주의를 변용, 쇄신하려는 시도의 서막을 열었다. 이런 경향은 훗날 1950~1960년대에 이르러, 프란츠 파농(프랑스령 마르티니크 태생의 사회철학자), 아밀카르 카브랄(기비니사우의 민족해방운동가), 호치민(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초대 주석) 등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변주됐다.
“계급은 식민지 역사의 산물”
1928년 노동자농민사회당과 이어, 1930년 페루 공산당을 창당한 마리아테기는 식민지 역사를 고려하지 않은 신생독립국가에 대한 모든 사회학적 이론을 거부했다. 백인, 혼혈(크레올), 원주민(인디오), 흑인 간 위계서열이 계급의 위상을 결정짓는 사회는 식민지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페루의 혁명가는 식민지 독립 이후 나타난 인종차별주의는 (인도주의나 박애주의 전통에서 흔히 주장하는 것과 달리) 윤리적 문제가 아닌 정치적 문제, 즉 재산의 재분배와 관련된 문제라고 간주했다.
“우리는 원주민이 교육, 문화, 진보, 사랑, 혹은 종교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 함은 물론, 토지에 대한 권리도 가져야 한다고 분명히 요구한다. 철저히 유물론적인 성격을 띠는 이런 요구는 우리가 저 위대한 스페인 종교인(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의 후예나 추종자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비록 우리의 유물론에서도 그를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지만 말이다.”(2)
노예무역에서 팔려온 흑인은 광산에서, 원주민은 대규모 농장에서 혹사를 당한다. 반면, 백인과 흑인의 혼혈인 크레올은 모든 권력과 상업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다. 마리아테기는 토지와의 관계와 노동분업이 바로 인종 간 위계서열을 결정짓는 요소라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백인과 크레올은 ‘케추아’나 ‘아이마라’ 같은 원주민에게 압제자로 비칠 수밖에 없다. 마리아테기는 먼저 자유주의 세력과 가톨릭 세력의 주장과 달리, 제국주의의 경제적 측면을 증명하고자 했다.
동시에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서 지배적으로 간주되는 세계관에 반해, 원주민을 향한 인종차별주의가 결코 균일한 인종으로 구성된 독립 국가 안에서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주장했다. 마리아테기는 1929년 ‘라틴아메리카 인종 문제’라는 제목으로 열린 라틴아메리카 코민테른 1차 대회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영주 혹은 크레올 부르주아와 유색 농민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 요소가 없다. 계급 간 연대에 인종(편견) 간 연대가 더해지면서, 페루의 부르주아지는 양키나 영국 제국주의의 유순한 앞잡이가 된 것이다.”(3)
“원주민들에게 경작할 토지를 돌려줘라”
한편, 마리아테기는 인종서열이 계급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인종서열의 생산 여부는 재산과의 관계, 즉 미 제국주의의 발전에 기여할 경제적 토대(문화적 토대 포함)를 갖췄는지에 달렸다고 지적했다. 한 마디로 백인 제국주의 권력의 재생산을 보장할 만한, 토지 등 생존수단을 갖추고 관리할 능력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인종 간 서열이 결정된다고 본 것이다. 인종차별주의를 바라보는 이런 경제적 해석은 결국 반식민주의 혁명 전술로 귀결되는데, 그것이 바로 원주민에 대한 토지 반환이었다.
“본인들이 경작 가능한 토지 전부를 돌려달라는 것이 그들 원주민의 자연스러운 요구사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4) 여기서 마리아테기는 다소 절제된 모습을 보이는데, 오로지 원주민이 경작할 능력이 되는 토지만을 반환해달라고 주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테기가 주장한 토지개혁은 원주민의 필요와 능력에 맞게 점진적으로 소유권을 이전하는 정치적 이행과정을 상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리아테기는 ‘토지 반환’을 말하지만, 정작 원시 원주민 공동체를 원래 모습대로 판박이처럼 복원하자는 식의 공산주의 정책을 거론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공동체의 생존수단인 토지의 소유권을 원주민 공동체에 돌려주는 과정에서, 옛 원주민 공동체에 토대를 두지만 그와 전혀 다른 사회 형태를 발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이유’(Ayllus, 케추아 원주민의 언어로 집산주의 농촌 공동체를 뜻함)의 촘촘한 네트워크에 기초한 토지는 경제적 해방과 정치적 해방을 함께 선사한다고 봤다. 즉 토지 반환은 원주민에게 백인 자본주의 권력으로부터 경제적, 정치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마리아테기는 경제세계의 정치적 변혁을 위해 ‘혁명신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페루의 사상가는 공산주의가 초기 사회주의 사상이 견지하던 유토피즘을 벗어나야 한다고 보았던 ‘과학적인’ 사상과는 달리, 모든 혁명은 일종의 신앙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민중의 역사를 이해하는 총체적 방식이면서도, 동시에 페루 정치에 건국 신화, 즉 ‘잉카 공산주의’를 적용하려는 시도였다.
이 페루 지식인에게, 잉카 공산주의는 식민지 시대 이전에 위계 시스템에 따라 구축된 공산주의가 존재했음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사유 개념이 없이 토지 공유에 입각한 수많은 농촌 공동체들을 잉카의 최고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이 관리하며, 관개시설 등 일부 대규모 공사를 위해 세금과 조공을 징수하는 시스템이 존재했다. 대부분의 역사가와 논평가들은 이처럼 농민이 생산한 재산의 일부를 신권정치 계급이 세금과 노역 시스템을 통해 탈취하는 사회를 ‘공산주의’로 표현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사실상 잉카 제국 안에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이 존재한다면, 어찌 이를 공산주의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일단 ‘아이유’는 주기적으로 행정단위별 토지를 각 씨족에게 배분해 이를 공동으로 경작하도록 하는 토지제도를 운영했다. 마리아테기는 이런 사회 구조가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토지를 공동으로 경작하도록 하는 공동체적인 전통에 입각한다는 점에서 ‘원주민 공산주의’, 나아가 ‘공산주의 정신’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간주했다. 하지만 마리아테기는 잉카의 전제적인 정권이 당시 시대와 사회에 적합한 유일한 공산주의의 형태였다고 비호한다는 점에서 한층 더 도발적이라고 여겨진다. 분명 이는 러시아에서 나타나고 있는 스탈린주의를 정당화하는 행태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브리스톨의 벽돌에는 흑인의 피가 묻어있다”
하지만 마리아테기는 일종의 ‘역사적 상대주의’(5)를 주장했다. 가령 그에 따르면 공산주의의 정치적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산주의라는 단어는 오로지 사유 재산의 부재에 기초한 사회적 계층 간의 관계를 지칭하는 것일 뿐, 정치적인 통치 형태는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유일한 역사적 모델을 거부하는 시각은 특히 라틴아메리카의 코민테른이 표방하는 자민족중심주의적인 역사관(‘후진적’ 사회는 선진적 사회가 걸어간 길을 뒤따라야 한다는 시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자유라는 추상적 개념은, 빨간 프리기아 모자를 쓴 구체적인 자유(신교, 르네상스, 프랑스 혁명의 딸)의 이미지와는 다른 것이라고 그는 일갈한다. 마리아테기에게 인간적 자유란 결코 부르주아적인 인권과 그것을 상징하는 성상에 기초한, 현대 유럽에서 구현된 자유의 표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여러 구체적인 특수한 형태를 통해 표현될 수 있다. 수많은 통치 형태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된 자유의 개념을 지닌 수많은 사회가 출현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현대 공산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라는 시대의 특징과, 각 주체의 고유한 특수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권리를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혁명적 사고에 불을 지피고 혁명 운동의 동참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화(종교적인 것 포함)가 필요하다. 마리아테기에게 신화는 어떤 표상의 정서적 차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의식을 각성하는 힘을 지닌 것으로 간주됐다.
바로 이런 점이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가장 큰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안데스 출신의 사회주의자에게, 현대 종교는 옛 신화가 지닌 정서적 힘을 주재하는 일종의 제도에 해당한다. 종교 자체에 대한 비판은 ‘자유주의적이고도 부르주아적인 교란행위’(6)에 해당한다. “혁명가들의 힘은 지식에 있지 않다. 그들의 신앙, 열정, 의지에 있다. 그것은 영적이면서도 신비스러운 종교적인 힘이다.”(7) 그는 혁명이 신화에 기초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녔다는 점에서, 해방신학의 선구자라고도 볼 수 있다. 사실상 해방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자본주의적 현대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방의 동력으로 간주했다.
20세기 동안 반식민주의 혹은 반인종주의 투쟁은 계급과 인종 간 관계를 사유하는 새로운 종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무수히 탄생시켰다. 가령 트리니다드토바고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에릭 윌리엄스는 1944년 『자본주의와 노예제도』에서 한 영국인 논객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브리스톨을 세우는 데 쓰인 벽돌들 중 흑인의 피가 묻지 않은 것은 단 한 장도 없다.”
계급과 인종의 관계라는 주제는, 흔히 경제 및 문화에 관한 가벼운 논쟁으로 일축된다.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 C.L.R. 제임스, 에릭 윌리엄스, 세드릭 로빈슨 등을 비롯한 모든 ‘흑인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식민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하지만, 그들은 저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쇄신했다. 그리고 그 이론에 정치적 생명력을 부여했다.
“우리는 아메리카의 사회주의가 결코 모사와 모방에 그치기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웅적 창조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에 우리의 언어로, 인도아메리카 사회주의에 생명력을 선사해야 한다.”(8)
글·폴 길리베르 Paul Guilibert
작가. 『Terre et capital. Pour un communisme du vivant 토지와 자본. 생명의 공산주의를 위해』(Amsterdam출판사, Paris, 2021)의 저자.
번역·허보미
번역위원
(1) Michael Löwy(번역), ‘L’indigénisme marxiste de José Carlos Mariátegui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의 마르크스주의적 토착주의’ , <Actuel Marx>, Paris, 제2권, 56호, Paris, 2014년.
(2), (5), (6) José Carlos Mariátegui, 『Sept essais d’interprétation de la réalité péruvienne 페루의 현실 해석에 관한 일곱 편의 에세이』, François Maspero, Paris, 1968년.
(3), (4) José Carlos Mariátegui, ‘El Problema de las razas en la America latina’, 『Ideología y política』. Biblioteca Amauta. Ediciones populares de las obras completas de José Carlos Mariátegui, Amauta, Lima, 1969년.
(7) José Carlos Mariátegui, ‘El hombre y el mito’, 『El alma matinal y otras estaciones del hombre de hoy』. Obras completas, Amauta, 제3/20권, 1950년.
(8) José Carlos Mariátegui, ‘Aniversario y Balance’(1928), 『Ideología y política』(위의 책). / Michaël Löwy(번역), ‘L’indigénisme marxiste de José Carlos Mariátegui’(위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