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인가 배양인가

2012년 1월호 ‘교육은 점령할 수 없다’를 읽고

2012-02-13     이나래

“무생물처럼 살아라.”

매년 새해가 되면,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아이들에게 두 가지 작업을 한다. 하나는 고3 시기를 잘 보낼 수 있게 그들의 삶을 무생물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과 관련된 판타지를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생산해주는 일이다.

한국에서 열아홉의 나이를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산다’기보다는 ‘견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시기다. 그만큼 한국인의 인생에서 열아홉 살은 감당하기 어렵다.

인간 이전의 존재, 수험생

‘무생물’은 현 교육체계에서 내가 고3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단어다.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기계적으로 공부를 감내해야 할 시기를 어떻게 생물, 그중에서도 인간으로 버틸 수 있단 말인가. ‘대학입시’, 그 최우선시되는 목표 밑으로 우정, 연애, 독서, 호기심, 사랑 등 다른 삶의 에너지를 거세하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해야 하는 운명에서 감히 인간이라는 존재를 내세울 수 있을까? 차라리 주변 환경에 눈과 귀를 닫고 공부 하나에만 반응하는 무생물처럼 살아내는 것이 역설적으로 이 시기를 가장 잘 버티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생각해낸 말이다.

그러면서 나는 시각·청각 장애인처럼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의 텅 빈 마음속에 끊임없이 ‘명문대’라는 이름, 그리고 그 뒤에 펼쳐지는 삶을 판타지로 만들어 채워준다. ‘좋은 대학만 입학하면 억압된 생활은 끝나고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다’, ‘한 학기에 600만~700만 원을 호가하는 등록금을 내려면 이름값이라도 하는 대학을 들어가야 비용 대비 효율적이다’, ‘명문대만 졸업하면 취업이 절로 되고 질 좋은 삶을 유지할 수 있다’…. 고등학교 교육을 잘 체득하고 명문대만 입학하면 고민할 필요 없이, 삶의 올바른 답이 주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몇 년째 이 설득 기술은 아이들에게 먹혀들어간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이들의 눈빛이 일순간 빛난다. 학습하려는 열의와 동기가 생긴다. 성공률 100%에 가까운 슬픈 설득의 기술이다.

사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지 10여 년이 됐다. 열 번의 새해를 맞이했고 많은 학생들을 스쳐 보냈다. 그 시간 동안 크고 작은 교육계의 변화가 있었지만, 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하고 3년 동안 내신을 준비해야 하는 큰 줄기는 변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학원 의존도는 여전히 높고, 나는 아이들이 낸 학원비로 먹고살고 있다. 누군가 내게 ‘교육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교육은 수능에 의한, 수능을 위한, 수능의 기술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답할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월호 ‘교육은 점령할 수 없다’의 필자 존 마시는 교육이 하나의 신앙이 되는 세상이 됐다고 말한다. 교육이 전지전능해서 많은 이들이 교육을 열렬히 추종한다고 말이다. 교육의 추종자들로 치자면,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주장한다. 교육만 제대로 받으면 좀더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다, 삶의 질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다, 더 행복할 수 있다, 교육을 잘 수료한 자는 ‘명문대’라는 천국에서 마음껏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대다수 국민은 이에 절대적 믿음을 보인다. 10대 후반의 시기와 열정을 여기에 모두 쏟아붓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들어진 교육에 대한 신앙과 절대적 믿음은 정답일까? 존 마시는 대답한다. 이것은 신의 존재만큼이나 증명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말이다.

10대, 가장 빛나는 시기에, 가장 역동적으로 무언가를 해내야 할 시기에 소금에 푹 절인 배추처럼 힘없이 앉아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스스로 질문해본다. ‘과연 나는 지금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언어영역에서 실수를 줄이는 방법, 지문을 빠르게 읽고 이해하는 방법, 시간에 맞춰 문제를 푸는 방법 등 각종 언어영역 점수 획득 방법을 훈련하며 한 등급이라도 더 높여야 인생의 등급이 높아진다고 외칠 때마다 다른 정답은 없는지, 도대체 그것은 어디에 있는지 상상해본다.

그러면서 기존 교육체계에 대한 대안으로 많은 것들이 등장할 때마다 귀를 기울인다. 대안학교로 아이들의 생각 범위를 넓힌다든지, 조기교육을 통해 21세기에 걸맞은 인재를 길러낸다든지, 국제고·자사고를 통해 질 좋은 교육을 실현시키겠다고 주장하지만 기존 교육체계를 변화시킬 만한 대안은 되지 못하고 있다.

정답을 가르치는 이것은 정답인

2014학년도 수학능력시험이 개편된다. 영역별로 문항 수를 줄이고 난이도에 따른 차등 시험을 치른다고 한다. 국어는 화법과 작문, 독서 영역을 추가했고 영어는 듣기 비중을 50%로 늘렸다. 학생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문항 수를 줄였다고 교육과학기술부는 말했다. 아이들은 난도가 높은 문제를 선택할지, 좀더 쉬운 문제를 선택할지 A·B 유형 중 하나의 시험을 선택해야 한다. 언어영역을 국어로, 외국어영역을 영어로 교과목을 바꾸고 문제 수를 줄이면 학생들의 체감 부담률은 낮아질까.

교육부는 교과서에서 수학능력시험을 출제해 사교육을 줄이겠다고 밝혔다. 학생들은 스스로 18종이나 되는 교과서를 일일이 다 찾아서 공부해야 한다. 종종 현재의 고2 아이들이 내게 묻는다. “선생님, 이번에 바뀐 수능시험은 어떻게 치러야 해요? 어떤 난이도의 문제를 선택해야 점수가 잘 나오고 대학을 갈 수 있을까요?” 결국 고등학교 교육체계는 또다시 시험대 위에 올랐다. 이런 체제 개편이 또 하나의 대안이 되기를 바라지만 실험실의 흰쥐처럼 불안해하는 아이들을 보니 역시 이번 대안의 결과도 회의적이다.

수능 개편, 불안해하는 실험쥐들

내가 몸담고 있는 사교육 시장은 이런 변화에 그리 호들갑 떨지 않는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튼튼한 기반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아이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훈련하는 공부 방법을 개발하며 진화 중이다. 수능체계가 아무리 자주 바뀐다고 해도 사교육 시장은 발 빠르게 좇아가며 카멜레온처럼 환경에 적응해갈 것이다. 여기에 올해부터 시행되는 초·중·고 ‘놀토’ 제도는 사교육 시장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됐다. 공장에서 기성복을 찍어내듯, 수능에 적합한 기술자를 양산해낼 완벽한 틀이 갖춰진 셈이다.

정치권에서 부르짖는 경쟁과 수월성을 배제한 창의성과 인성을 중시하는, 듣기만 해도 좋은 그 교육은 도대체 언제쯤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정말 아이들의 정신을 살찌우고 아이들이 살맛 나는 세상으로 만들어주는, 그들이 주장하는 참교육의 세상이 도래할까. 한국의 교육체계가 이렇게만 흘러간다면 그들의 주장은 마치 샤넬·루이뷔통 같은 명품을 학생들이 하나씩 갖게 되는 세상이 올 거라고 말하는 사치스러운 주장으로만 남게 될 것 같다.

2012년 1월이 됐다. 어김없이 새해가 돌아왔다. 나는 새로운 고3 아이들을 맞았고, 지난 고3 아이들을 대학으로 떠나보냈다. 명문대에 붙은 아이들은 감사하다며 울먹였고, 그러지 못한 아이들은 재수를 결심하며 1년의 시기를 견딜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도 나는 새로운 고3 아이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 중이다.

무생물처럼 이 1년의 시기를 살아내라고.


/ 이나래 학원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