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이 부여한 현대인의 자격

2023-03-31     프랑수아 베고도 l 작가

자고로 우리 구세대는 전승의 의무가 있어. 휴대폰 없이도 살던 시절이 있었노라고 청년들에게 증언해야 하지. 물론 쉽지는 않은 일이지. 그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를 납득시키려면 상당한 설득력이 필요할 거야. 그 물건은 결코 우리 손의 연장이 아니라, 일종의 이식된 장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려면 말이야. 이 세상에 살았던 우리 종족의 99.9999%는 이 영험한 도구를 결코 즐겨 향유한 적이 없었어. 오랫동안 우리 팔 끝에 달린 것은 두 손이 전부였거든. 우리는 종종 그것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때도 많았지. 그럴 때면 멋쩍은 얼굴로 호주머니 속에 슬쩍 두 손을 쑤셔 넣곤 했어. 

인간은 휴대폰 없이도 여러 세기를 살아냈어. 새로운 돛대 범선을 만들고, 카드놀이를 발명하고, 문학작품을 창조했지. 그러던 어느 날, ‘전화기’라는 물건을 발명해낸 거야. 그리고 이어, 선이 없는 새로운 버전의 전화도 창조해냈지. 바로 그 ‘휴대폰’이라는 물건을 말이야.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어느새 기억이 가물가물하지. 변화는 정말 순식간에 일어났어. 1992년만 해도 휴대폰을 가진 사람이 없었거든. 그런데 10년이 지나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대폰을 쥐게 된 거야.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확신할 수 있지. 아무도 그것을 원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야. 나는 우리 조카 앞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1992년에는 휴대폰이 없다고 몸을 잔뜩 움츠리고 부들부들 몸을 떨며 울부짖는 사람은 없었어. 휴대폰이 없어도 잘만 살았거든. 아니 휴대폰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없었지. 수요 없는 공급이라고 해야 할까.

 

자유주의에는 자유가 없다?

조카는 여전히 의아해하는 눈치야. 원하지 않았던 물건에 그토록 군중이 환장할 수 있냐고. 아저씨 이야기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말이야. 하지만 나는 전승의 의무를 저버릴 수 없어. 우리 어리숙한 꼬마에게 이제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좋겠어. 맹목적 숭배의 대상인 휴대폰이 실은 기존의 물건에 더해진 게 아니라, 기존의 물건을 대체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갑자기 가정의 물품 수가 확연히 줄어들었지. 휴대폰이 다른 물건들의 역할을 하나둘씩 대체했거든. 어느덧 그 손바닥만 한 물건은 무한 충전을 거듭하며 우리의 일상 곳곳에 편재하기 시작했어. 그러다가, 모든 상품을 구품종으로 만드는 기업의 음모에 의해 기존 휴대폰이 순식간에 신상으로 대체됐지. 사실 우리가 공급에 무감각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 휴대폰이 없으면 그것이 독점하는 서비스들도 전부 받을 수 없을 테니까.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었던 거야.

우리 조카도 잘 아는 사실이지만, 자유주의란 그다지 자유롭지가 않아.

우리는 인터넷이 연결된 전화가 우리와 사회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는 사회에 살고 있어. 당연히 우리는 사회로부터 은밀히 휴대폰을 사도록 요구받지. 우리 사회는 은행계좌를 만들라고 우리에게 강요해. 그리고 인터넷이 없으면 그 은행계좌를 확인하지도 사용하지도 못하지. 또 인터넷 없이는 직업을 구하지도, 수행하지도 못해. 우리 사회에서는 모든 경제활동이 인터넷으로 이뤄지니까. 

또 우리의 돈줄을 꼭 쥐고 계신 고용주님께서는 항상 우리와의 ‘연결’을 원하시지. 하지만 휴대폰이 없다면 그런 일은 불가능할 거야. 휴대폰은 내 20세 조카가 경험해본 적이 없는 옛날, 우리가 ‘일과’라고 부르던 개념을 완전히 박살내버렸어. 무선이라고 해서, 전화선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야. 그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주변의 전파 형태로 변신한 것뿐이지.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선으로 종일 연결돼 있어. 24시간 개점 상태인 셈이야.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른 수많은 것을 대체한 이 물건 덕택에, 우리는 그것이 대체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얻었어(샀어). 휴대폰은 우리가 사는 물건이자, 다른 것을 사게 해주는 도구야. 이 점에서 공모자인 컴퓨터와 비슷하지. 아주 특별한 이중의 능력을 갖춘 물건인 셈이지. 그리고 아주 편리하기까지 해. 이제 우리는 휴대폰 덕분에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소비를 즐길 수 있게 됐거든.

그런 일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었지. 우리 구세대는 청년들에게 밤이 되면 몇 시간 동안 소비를 할 수 없었던 옛 시절을 증언해야 해. 당시는 밤이면 도시 전체가 폐점상태였다고, 지금처럼 새벽 4시에도 클릭 세 번이면 양말을 살 수는 없었다고 말이야.

 

알고리즘의 덫

스마트폰은 완전한 자본주의의 상징이야.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야.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핵심 조종자이기도 하시지. 휴대폰 안에서 이제는 노동시간과 여가시간, 생산자와 소비자, 밤과 낮이 ‘융합’되고 있잖아. 조카, 자네도 알겠지? 이건 정말이지 너무 심하다고. 이제는 자네도 이해할 수 있겠어? 어찌하여 우리가 이토록 취약한 존재가 된 것인지를. 이제 나는 현대인이라 할 수 있어. 온라인으로 기차표를 사고, <블랙 미러>의 다음 시즌을 기다리며 살지. 내가 구분할 수 있는 나무 품종은 5개에 불과해. 만날 수 있는 동물도 개, 고양이가 전부고.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과 나는 비대면으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지. 이른바 ‘알고리즘’이라는 것 말이야. 

나도 조카 자네처럼 수천 시간이나 수학 수업을 듣고도 도통 배운 게 없어. 내게 알고리즘의 실제 의미는 너무나도 모호하기만 하지. 내가 이해하는 알고리즘은 우리 구글 친구가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알고리즘의 정의와는 아주 거리가 멀거든. 내가 알고리즘에 대해 아는 것은 그저 모호한 지식에 불과해. 그런 의미에서 나는 현대인의 자격을 잘 갖췄다고 할 수 있을 거야. 알고리즘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알고리즘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까.

현 인류는 정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사용하는 저 수많은 용어와 사물에 의해 옛 인류와는 구분되지. ‘알고리즘’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순간은 참으로 곤욕스러워.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사용한 기계의 작동법을 자세히 설명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당황스럽지. 아마도 나는 알고리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거야. 그것은 일종의 머신에 의한 연산과정(대체 그 머신이란 또 무엇을 말하는가?)으로, 인터넷 검색 내용을 일정한 링크와 연결해주고, 내가 듣는 음악을 기반으로 또 다른 음악을 추천해주며, ‘알고리즘의 정의’란 낱말을 자판에 치는 순간 관련 내용을 눈앞에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이야. 한 마디로, 나는 알고리즘의 요인이나 원리도 잘 알지 못한 채, 그것의 결과만을 설명하는 셈이지.

물론 내가 알고리즘에 대해 무지하다고 해서, 알고리즘에 대해 아무런 견해가 없다는 뜻은 아니야. 그리고 알고리즘에 대한 내 견해는 부정적이지. 나는 현시대를 이토록 열렬히 비판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현시대의 흐름에 잘 맞춰 살아가고 있어. ‘알고리즘’이란 내가 하는 인터넷 서핑의 전 과정을 일컫기 위해, 내가 사용하고 빌려 쓰는 용어야. 나는 인터넷 세상을 항해하는 동안, 그 속에 미학적,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윤리적 흔적들을 고스란히 남기지. 한 번 발을 디딘 이상 그곳을 탈출할 재간이 없어. 알고리즘이 펑크록과 극좌파 지식인들의 공조로 이뤄진 이 인큐베이터 속에 나를 가둘 테니까.

물론 나는 알고리즘이 내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비판하곤 해. 나는 상당히 의식 있는 시민이니까, 알고리즘이 내 정체를 파악하고, 나를 마케팅 표적으로 삼으리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어. 하지만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완전히 솔직할 수는 없을 거야. 왜냐하면 이 말을 하는 와중에도 나는 은연중에 내 자신만은 그런 알고리즘의 프로세스에서 자유롭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으니까. 나를 표적으로 삼은 알고리즘은 끝내 나를 놓칠 것이라고 자부하지. 나는 순진한 얼간이가 절대 아니라고. 알고리즘이 친 덫이 제아무리 절대적이어도, 나만은 그 덫에서 자유로울 거라고.

알고리즘의 덫은 절대적이야. 그리고 나 역시 결국 그 덫에 빠지고 말았지. 나는 알고리즘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단다. 나는 진실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내가 살아가는 이 시공간 속에서, ‘진실로’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 돼버렸어. 알고리즘의 영향력에 대해 나는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야. 진실로 그것을 체감하지는 못하지.

나는 나에 대한 ‘정보들’이 수집된다는 걸 잘 알아. 나는 무수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또 빌려오지. 또한 나는 ‘데이터’와 그리고 ‘빅 데이터’를 끌어다 쓰기도 해. 나는 이 주제에 대해서도, 이미 내 정보를 주고 알고리즘을 통해 확보한 수십 편의 관련 기사를 시청하거나 읽었어. 물론 나는 내가 제공한 정보가 상업적으로 이용된다는 사실을 알아. 그런 사실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경각심도 느끼지 못해. 내 정보가 표적 광고로 바뀐다고 해도, 나는 그 광고들에 전혀 눈길을 주지 않을 테니까. 아니, 설령 눈길을 준다고 해도 전혀 어떤 자극도 받지 못할 테니까. 아니야, 실상 나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광고들에 자극을 받을 수 있어. 어떤 자극도 몸으로 느끼지 못한 채로 말이야.

 

조종과 욕망의 도구

실상 이 정보들은 나를 조종하는 데만 쓰이는 게 아니야. 때로는 나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서도 쓰이지. 나는 방금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컴퓨터 화면에서 1월 루아시(Loissy)-맨체스터 비행편의 할인 소식을 전해 들었어. 처음에는 물론 별 관심이 없었지. 하지만 문득 내가 응원하는 축구팀 경기가 있는 날 직접 맨체스터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어. 그래, 그들은 알고 있었던 거야. 알고리즘과 그 알고리즘의 ‘코딩’(나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이 단어를 쓰고 있어)을 맡은 이들에게 그것은 가치 있는 정보야.

저들은 내가 종종 인터넷에서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 결과를 찾아본다는 사실을 절대 모를 수가 없어. 그들은 이 정보를 기업에 팔았고, 그 기업은 내 눈앞에 상품 할인 광고를 보여준 거야. 그러자 나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맨체스터 여행을 꿈꾸게 됐지. 현대에는 견물생심이 도둑이 아니라, 구매자를 만들어내는 셈이지.

나는 잠시 구경만 할 생각으로, 경기장 인근의 호텔들을 검색해봐(그들에게는 내가 미끼를 문 셈이야). 그리고 내친김에 1월 23일 맨체스터-리버풀 항공편 시간도 알아보지(이제 그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할 거야). 나는 집필 중인 책을 쓰다 말고, 족히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검색에 허비했어. 우리를 습격하는 온갖 감언이설을 줄줄이 지적하는 책을 쓰다가 말이지. 내가 이런 내용의 검색을 한 기기는 사실 잠시 전, 내가 맨체스터의 천재 플레이메이커 케빈 데 브라위너의 종아리 부상과 관련한 정보를 찾아보자마자 내게 곧장 항공기 할인 광고를 보여준 것과 똑같은 기기야.

3개월 뒤, 나는 그 항공기를 타고, 그 경기장을 방문해. 그리고 그 호텔에서 환상적인 토요일을 보내게 되지. 내가 그들에게 나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자, 그들이 그 정보를 행복으로 바꿔준 거야. 그들이 나의 행복을 빌어준 셈이지. 그 사이 그들은 내게 장뤼크 르 테니아(프랑스 싱어송라이터-역주)의 인터뷰 기사와 분위기 있는 60년대 소울 음악, 배꼽 빠지게 웃긴 미국 토크쇼,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러시아 아나키스트, 그리고 나의 비판 정신을 길러줄 옛 문서와 인터뷰 등을 보여줬지. 대체 ‘그들’을 나는 어찌해야 할까? 그들을 살려주는 것은 죄악이요, 그들을 단죄하는 것은 배은망덕일지니. 

 

 

글·프랑수아 베고도 François Bégaudeau 
작가. 이 글은 그의 저서 『Boniments 감언이설』(Amsterdam·Paris·2023)에서 발췌한 것임.

번역·허보미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