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기수 압둘라, 그는 진범일까

2012-03-13     마리나 다 실바·알랭 그레슈

넬슨 만델라의 복역 기록이 머지않아 깨질 것 같다. 조르주 이브라임 압둘라는 블랙 팬더스의 무미아 아부자말, 아메리카 인디언 레오나드 펠티에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복역하고 있는 정치범이다. 압둘라는 27년째 프랑스 감옥인 오트피레네의 란므장 교도소에 갇혀 있다. 레바논 북부 코바야트 출신인 압둘라(1951년 4월 2일생)는 1984년 10월 24일 체포돼 1987년에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다.

그를 체포한 고위 관료의 충격 발언

지원단체들의 열성적인 석방 운동에도 언론은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침묵의 벽을 깬 것은 놀랍게도 당시 국토감시국(DST)(1) 국장으로 압둘라 체포에 기여한 명예 도지사 이브 보네다. 그는 1982~85년 대간첩 작전을 진두지휘했는데, 지난해 12월 28일 <프랑스24>에 출연해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부당한 복역이 너무 길어졌다. 도리에 어긋난다. 더 이상 그를 감옥에 가둬둘 근거가 없다. 비행기에 태워서 고향으로 보내줘야 한다. 나머지는 레바논 정부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는 1985년 자신이 얻어낸 합의에 대해서도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이 합의로 압둘라는 같은 해 3월 레바논에서 혁명무장단체(LARF·마르크스-레닌주의 분파)에 납치된 트리폴리 프랑스문화원장 질 시드니 페이롤과 맞교환될 예정이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프랑스 정부는 약속을 어겼고, 모두 나 혼자 꾸민 일인 것처럼 덮어버리려 했다.”

압둘라 사건은 레바논 전쟁, 특히 1982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의 베이루트 침공-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민간인 사망자 2만 명-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혁명 활동가인 압둘라는 시리아 민족사회당(SNSP)에 몸담았다가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을 거쳐 LARF의 일원으로 유럽 땅을 밟는다. 당시 LARF는 중동에서의 싸움을 서구 국가들로 확장하려고 했다. 압둘라는 1981~84년 벌어진 테러 7건의 주동자로 지목됐다. 1982년 1월 18일 파리, 주프랑스 미국대사관 무관 샤를 로베르 레이 피살, 같은 해 4월 3일 이스라엘 대사관 2등 서기관 야코프 바르시멘토프 피살 등도 혐의에 포함됐다. 압둘라는 경찰에 체포된 뒤 1986년 7월 10일 범죄단체 구성과 폭발물 소지죄로 형을 언도받았고, 그의 아파트 수색 과정에서 암살에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 권총을 포함한 무기들이 발견되면서 고의적 살인교사 죄목이 추가됐다. 주프랑스 미국대사관과 레이 중령의 가족이 원고로 나선 재판에서 미국과 이스라엘 정부는 압둘라에게 좀더 높은 형량을 구형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압둘라를 변호한 장폴 마쥐리에가 프랑스 대외안보총국(DGSE)에 피고인에 대한 정보를 넘겨줬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프랑스 사법사에 전무후무한 일이었다.(2)

테러 7건의 주동자로 몰렸으나

두 번째 재판은 프랑스에 전례 없는 테러 사건이 연이어 터진 직후 열렸다. 1985년 12월∼1986년 3월 수십 명의 인사들이 피살됐다. 근동아랍정치범연대위원회는 자신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며 압둘라와 1980년 7월 18일 이란 샤 정권의 마지막 총리 샤푸르 바크티아르 암살 기도 혐의로 체포된 아니스 나카시의 석방을 요구했다. 레바논에 살던 압둘라의 형제들이 범인으로 지목돼 수배령이 떨어졌다. 훗날 그들의 무죄가 입증되고 테러 사건의 주범은 이란 정보부와 연결된 한 이슬람 단체(1987년 봄 소탕)로 판명됐다. 이라크와 전쟁 중이던 이란 정부는 사담 후세인을 전폭적으로 지원(특히 군사적 지원)하던 프랑스 정부(자크 시라크 총리)에 본때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얼떨결에 압둘라는 검사의 구형보다 더 가혹한 형을 선고받았다. 1999년부터 압둘라는 조건부 석방을 요구할 권리를 갖게 됐다. 그러나 치열한 법정 싸움과 미국과 이스라엘의 압력이라는 장벽에 부딪혔다. 압둘라의 변호사 자크 베르제는 “미국 정부가 그의 석방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브 보네의 발언이 방송으로 나간 뒤 베르제는 다시 석방 요구서를 제출했다. 이미 2009년 5월까지 총 7번에 걸쳐 조건부 석방 요구서가 제출된 바 있다. 2003년 11월, 포 법원은 압둘라의 석방을 허가했지만 검찰의 항소로 취소됐다.

종신형 선고 뒤 진범들 속속 잡혀

현재 압둘라는 석방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아드난 만수르 레바논 외무장관도 그를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압둘라를 석방할 때가 됐다. 그는 모범수로 형을 살았다. 이건 인권 문제다. 그는 당연히 한 사람의 레바논 시민으로서 고국 품으로 돌아올 것이다.” 나지브 미카티 총리도 2월 파리를 공식 방문한 자리에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압둘라는 특수한 정치적 상황의 희생자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적과 협상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카시와 공범 4명은 1990년 프랑스가 이란과 외교관계를 재개하면서 사면을 받고 이란으로 추방됐다. 압둘라 역시 이미 자신의 정치적 참여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치르지 않았는가?
 


글•마리나 다 실바 Marina Da Silva & 알랭 그레슈 Alain Gresh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1) DST는 2008년 프랑스 정보부로 통합됐다.
(2) 1987년 <리베라시옹> 기자 로랑 갈리가 펴낸 <검은돈: 압둘라 사건의 흑막>(Robert Laffont·파리)에 그의 고백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