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약통에 불붙이는 런던 시티의 금융계

사상누각의 금융허브

2023-04-28     프레데리크 르메르 l 경제학자

지난해 가을, 영국 정부는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도입했던 은행의 보너스 상한 규제책을 철폐하기로 결정했다. 영국 정치계는 자국이 금융허브로서 얼마나 매력적인지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영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금융의 중요성은 특히 지금처럼 글로벌 시장이 극도로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악재로 작용할 위험이 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초고층 마천루들이 시티 오브 런던, 일명 ‘시티’의 스카이라인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다. 시민들은 시티의 빌딩들을 각각의 외관에 빗대 ‘수술용 메스’, ‘치즈 강판’ 등 재미있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런던은 총 250여 개에 이르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외국 은행이 모여 있는 도시다. 금융서비스 부문 종사자(컨설턴트, 변호사, 회계사 등 유관 계열 종사자를 포함) 수가 86만 명이 넘는 등, 금융 부문이 런던 활동인구의 18%를 차지한다.(1) 

 

2.6㎢에 불과한 대영제국의 금융 심장부

그중에서도 금융 일자리의 대부분이 일명 더 스퀘어 마일(The Square Mile)’, 단위로는 1스퀘어 마일(Square mile, 약 2.6㎢이며 제곱마일이라고도 한다.)에 불과한 시티에 몰려있다. 최근에는 좀 더 동부에 위치한 템스강변의 카나리 워프가 신흥 금융지구로 각광받고 있다. 시티는 글로벌 금융시장에 발맞춰 폭주하는, 평일에만 활기를 띠는 비즈니스 지구가 아니다. 시티는 현대금융의 기원이 된 대영제국의 역사적 심장부였다. 

17세기 스퀘어 마일의 은행가들은 런던에서 출발해 동인도나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떠나는 식민지 탐험에 재정을 지원했다. 위험만큼 이윤도 큰 장사였다. 당시 담배, 커피, 인디고, ‘하얀 금’이라 불리던 설탕은 식민지 체제의 연료였다. 당시 런던의 커피하우스나 길거리에서는 막강한 힘을 가진 영국 동인도회사와 같은 최초의 주식회사들이 발행한 증권 거래가 일찌감치 성행했다. 보험업도 함께 발전했다. 상인과 선장, 선주는 ‘로이즈 마켓(당시 클럽 운영자인 에드워드 로이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으로 알려진 한 투자자 클럽에서 향후 발생할 손해에 대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계약을 체결했다. 지금도 여전히 ‘로이즈’는 세계 최대 보험회사 중 하나로 손꼽힌다.

대영제국의 자금줄이었던 시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위상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1946년까지만 해도 런던 금융계는 전 세계를 무대로 널리 활약했다. 하지만 브레튼우즈 협정(국가 간 투기자본의 이동을 엄격히 규제-역주)이 체결되면서 국제적인 자금거래에 제약이 생겨났다. 1956년 수에즈운하 분쟁도 국제무대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쇠퇴시키는 계기가 됐다. 영국은 미국과 소련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이집트에서 철군하는 수모를 겪었다. 동시에 자국 영향력의 주춧돌이던 파운드화, 즉 영국의 금융계를 뒤흔드는 투기와 자본유출로 큰 타격을 입었다. 영국 금융계의 추락 위험에 월스트리트의 경쟁까지 심화됨에 따라, 시티의 금융계는 위기를 타개할 묘수가 필요했다. 변화하는 국제금융 시장에서 런던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자금 은닉 산업을 발전시키기로 한 것이다.

 

1986년 금융 빅뱅, 시티에 영화를 돌려주다

이처럼 영국에서는 여러 유럽 은행에 예금된 달러화, 즉 유로달러를 상대로 한 거래가 성행했다. 규제를 탈피한 런던의 외환시장은 1960년대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은행들을 매혹했다. 규제기관인 영란은행도 영국에 거주하지 않는 고객들을 상대로 한 이 새로운 은행업에 눈을 감아줬다. 한편 시티의 금융계는 케이먼 제도, 버뮤다 제도 등 해외영토에도 줄줄이 자회사 법인을 세우고, 과거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이 영토들로 은닉 자본을 끌어들였다. 대표적인 예가 중동의 오일달러, 마약조직의 검은 돈, 탈세자금, 독재자들의 은닉재산이었다. ‘역외(Offshore)' 자본은 국가의 통제만 벗어나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시티의 금융기관들에 의해 유로달러 시장을 거쳐 손쉽게 재활용(세탁)되기까지 했다.

1980년대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당시 마거릿 대처 총리의 비호 아래 금융규제가 대대적으로 풀린 것이다. 이른바 1986년의 ‘금융 빅뱅’은 런던 주식시장의 낡은 규제를 철폐하고, 실시간 전자거래시스템을 도입하는 한편, 대형은행의 주식시장 진출에 길을 터줬다. 미국, 일본, 유럽의 금융기관들은 영국 금융허브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며 자본의 발달에 유리한 환경을 마음껏 누렸다. 시티는 과거의 영화를 회복했다. 덕분에 오늘날 영국은 2020년 600억 파운드가 넘는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할 만큼 세계 최대 금융서비스 수출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2)

하지만 이런 런던 금융계의 비상, 아니 부활에는 영국의 정치·행정 엘리트층의 지원이 필수였다. 런던 금융계는 여러 세기에 걸쳐 스퀘어 마일을 관할해온 시당국인 시티오브런던 등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왔다. 특히 시티의 행정본부인 길드홀은 영란은행 건물 인근에 있다. 시티오브런던법인의 정책의장인 크리스 헤이워드는 “우리는 스퀘어 마일의 행정관리와 함께, 각국 정부를 상대로 시티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영국 금융 부문을 홍보하는 일도 맡고 있다”고 말했다. 길드홀의 주인들은 중세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시티오브런던법인이 얼마나 민주적인 덕목에 따라 운영되고 있는지 자랑을 늘어놓기를 잊지 않았다. 심지어 영국 왕실이 런던의 상인과 장인들에게 보장한 자유의 권리를 재천명한 문서인, 1297년 마그나 카르타 원본까지 방문객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해놓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시스템”

“시티오브런던법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시스템이다”

크리스 헤이워드는 이렇게 열변을 토했다. 4년에 한 번씩 시의회 선거가 원활히 개최되고 있으며, 특히 시티에서 활동 중인 기업의 대표들이 인원수에 비례해 유권자로도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시의회 선거가 시티의 유력 금융계 인사들의 손에 좌지우지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런던 금융계의 진정한 대변자인 시티오브런던법인은 역사적으로 영국 내에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쌓아왔다. 더욱이 시티오브런던법인은 막대한 자산을 누리고 있다. 시티오브런던법인의 자산을 관리하는 시 기금, ‘시티즈 캐시’의 보유 자산은 2021년 34억 파운드로 추산된다.(3) 게다가 시티오브런던법인은 하원에도 대표자를 두고 있다. 수석 로비스트에 해당하는 ‘리멤브런서(Remembrancer)’란 직함의 대표자가 1685년부터 옵서버 자격으로 하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리멤브런서’는 영국 금융계에 타격을 줄 만한 법안을 검토하는 법무팀을 이끌고 있다.

시티오브런던법인의 고위 인사들이 시티를 홍보하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누리는 연간 예산은 2021년 무려 1,370만 파운드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유럽연합 차원의 최대 유력 금융 로비 단체인 유럽금융시장협회(AFME)의 예산보다도 더 많은 액수다. 사실상 시티오브런던법인의 연간 예산은 ‘리멤브런서’가 지출하는 돈과, 시티오브런던의 시장이자 국내외적으로 런던 금융계를 대변하는 진정한 대사 격에 해당하는 ‘로드 메이어’(Lord Mayer, 시장님)가 사용하는 비용, 그리고 시행정부의 수장인 ‘정책의장’의 지출 예산 충당에 쓰인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높은 파고 속에서, 시티오브런던법인은 2010년 금융계의 ‘현대화’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가령 각기 영국의 재무장관과 런던 시장을 맡고 있던 노동당 소속 알리스테어 달링과 보수당 소속 보리스 존슨의 축복 속에 로비단체 ‘더시티유케이’가 탄생했다. 런던 금융계를 위해 활동 중인 이 로비단체의 영향력은 영국의 국경을 넘는다. 유럽 투명성 관련 비정부기구 ‘유럽기업감시’(CEO) 소속 연구원 케네스 하르는 “수십 년 전부터 시티와 그 로비스트 군단이 유럽연합 차원에서도 탈규제 공론화를 주도해왔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헤지펀드를 소유한 일부 대부호 외에는, 대부분의 런던 금융기관들이 브렉시트에 반대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브렉시트 이전에 마지막으로 영국 유럽연합집행위원을 맡았던 조너선 힐도 ‘더시티유케이’ 소속 로비스트였다.” 그가 맡은 일이 금융서비스와 재정안정, 유럽자본시장통합계획 등이었으니,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자리였을 것이다. 

 

영국 산업에 ‘유연성’을 선사한 브렉시트

“브렉시트? 그것은 지나간 이야기다. 지금은 상황이 변했고, 산업도 새로운 환경에 맞게 적응했다.”

‘더시티유케이’의 대변인 잭 닐홀이 이렇게 말했다. 컨설팅업체 EY에 따르면, 브렉시트의 여파로 파리, 프랑크푸르트, 더블린 등으로 이전된 일자리 손실은 7,000개 이하로 추산된다. 물론 과소평가된 통계수치일 수 있다. 하지만 과거 브렉시트가 예고한 재앙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브렉시트는 영국이 자국 산업에 적합한 ‘맞춤식’의, ‘유연’한 규제책을 채택함으로써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영국이 이처럼 규제완화에 나선 것은 ‘국제무대에서 런던의 유일한 경쟁자’인 뉴욕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며 경쟁하기 위해서였다.

보수당 정부는 결국 시티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준 것일까. 2022년 7월 20일, 영국 정부는 런던 금융계를 위한 ‘빅뱅 2.0’을 실행하기 위해 새로운 법안을 마련했다. 대표적인 주동 인물이 당시 재정부 장관이자, 현 영국의 총리인 리시 수낙이었다. 그는 2022년 5월에도 “이런 종류의 규제부담을 완화할 필요성”을 거론한 적이 있었다.(4) 새 법안에는 규제기관이 금융서비스의 ‘국제 경쟁력’을 활성화하는데 힘써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2022년 12월, 신임 재무부 장관 제레미 헌트도 이런 방향의 기조를 재확인했다. 그는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채택된 건전성 규제를 완화하는 일련의 개혁안을 발표했다. 

오히려 <파이낸셜 타임스>의 스타급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가 우려를 표할 정도였다. 그는 현 상황에서 ‘비상식적인 규제완화’는 위험하다고 경고했다.(5) 영국의 금융문제에 정통한 존 크리스텐센은 “시티의 책임자들은 시티를 ‘황금을 쏟아내는 연금술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견해를 버려야 할 때”라고 단언했다. 금융허브는 기생 관계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시티가 중국과 미국, 유럽의 자본을 흡수해, 영국에 투자하도록 만든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투자가 대체 어떤 형태를 띠는가? 대부분 부동산, 주식, 혹은 인수 합병이지 않은가. 한 마디로 생산적인 경제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투자들이다.”

런던 킹스컬리지에서 시티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마리에케 벡은 금융을 둘러싼 이권이 영국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을 문제점으로 꼽았다. 이런 상황이 ‘구조적 권력’의 덩치를 키운다고 본 것이다. 19세기 지주 귀족이 몰락한 이후, 금융은 새로운 지배계급의 출현을 가져왔다. 특히 영란은행과 재무부의 든든한 제도적 뒷받침 아래 산업자본주의의 주창자들이 널리 득세했다.(6) 복지국가 모델이 후퇴하고 사회보장급여가 축소됨에 따라, 영국의 국민들은 점점 더 연금에 의존해 노후를 준비하거나, 소비대출로 생활고를 해결해야 했다. 젊은 나이에 무거운 빚더미를 짊어질 위험까지 감수했다. 이처럼 오늘날 대부분의 영국 국민은 자의든, 타의든 금융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 

 

탄약통 위 불장난

오늘날 시티는 그 어느 때보다 정치세력을 상대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데 탁월해 보인다. 시티에 우호적인 정치세력 중 하나가 바로 키어 스타머가 이끄는 노동당 세력이다. 노동당의 대표적 좌익 인사 제임스 슈나이더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제레미 코빈 당수 시절에는 우리가 금융권력을 바로잡아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보였다. 하지만 현 지도부는 시티를 둘러싼 모든 비난을 모른 척한다.” 2022년 ‘더시티유케이’의 연례 콘퍼런스에 초대받은 노동당 소속 경제문제 담당 하원의원 레이철 리브스는 로비스트 수준의 감언이설을 늘어놓았다. “우리는 영국 금융서비스 산업의 국제적인 성공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영국은 세계 최대 금융서비스 수출국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시티가 선전하는 금융중심의 성장모델은 근간이 흔들릴 위기에 처했다. 이 모델을 통해 유입된 전 세계 자본은 비생산적인 활동에 투자되거나, 사치성 소비, 혹은 할부 소비를 부채질할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최근 위기는 영국 금융계의 성공신화를 언제든 무너뜨릴 수 있다. 에너지비용 폭등, 총체적 물가 상승, 각국의 중앙은행이 예고한 금리 인상 조치 등은 결국 자본이 ‘안전자산’ 특히 미국의 주식시장으로 유출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새로운 상황은 그동안 글로벌 금융계가 오랫동안 누려온 저금리의 유동성 원천을 말라붙게 만들 위험이 있다. 최근 실리콘밸리은행과 크레디스위스의 갑작스러운 추락은 금융분야가 얼마나 과열됐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이는 경쟁력이라는 명분하에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파국을 부를 수 있는지 증명한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금융 탈규제 기조를 취하는 것은(‘빅뱅 2.0’ 계획처럼), 탄약통 위에서 불장난을 즐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글·프레데리크 르메르 Frédéric Lemaire
경제학자

번역·허보미 
번역위원


(1) ‘Key facts about the UK as an international financial centre 2022’, TheCityUK, 2023년 1월, ‘Key facts about UK-based financial and related professional services 2023’, 2023년 3월, http://thecityuk.com.
(2) State of the sector : annual review of UK financial services 2022, 영국재정부와 시티오브런던법인의 공동 보고서, 2022년 7월, http://www.gov.uk.
(3) ‘City's Cash annual report and finacial statements, 시티오브런던법인, 2021년, http://www.cityoflondon.gov.uk/.
(4) Rowena Mason, Heather Stewart, ‘Rishi Sunak to weaken City regulation in post-Brexit nod to Tory donors’, <The Guardian>, London, 2022년 5월 10일.
(5) Martin Wolf, ‘The UK needs to learn its own lessons from the banking crisis’, <Financial Times>, London, 2023년 4월 2일.
(6) Franck Longstreth, ‘The City, Industry and the State’, in 『State and Economy in Contemporary Capitalism』, Colin Crouch(주 저자), Croom Helm, London, 197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