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포니는 식민지주의의 아바타?

문화 분야에만 국한된 마크롱의 해방 도구

2023-04-28     미카엘 장 l 전 OIF 사무총장

지난해 11월 19일과 20일, 독재체제로 회귀 중인 튀니지 제르바에서 제18회 프랑코포니 정상회담이 열렸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중 프랑스 국민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프랑스는 이 세계 공용어를 사용하는 모든 이들을 해방하려 했던 국제기구를 옥죄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이를 부인하는 특권을 누리던 한 명의 증인을 그리워하고 있다.

 

‘프랑코포니’의 어원에는 지리학자 오네짐 르클뤼가 있다. 애국심이 드러나는 이 단어는 1880년 그의 저서 『프랑스, 알제리와 식민지의 지리학(Géographie de la France, de l’Algérie et des colonies)』에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 책에서 프랑스어는 ‘식민지 제국의 영속성을 유지해주는 언어’라고 적혀있다. 비슷한 시기인 1883년, 같은 시대정신 속에서 식민국가 및 해외에 프랑스어를 알리기 위한 프랑스 동맹이 탄생했다. 여기에는 정복을 목적으로 프랑스어를 널리 전파하고자 했던 프랑스의 의도가 담겨 있지만 사용하는 프랑스어를 통제하려는 의도도 있다. 

 

자유, 평등, 박애의 이름으로 보복할 결심

실제로 1791년부터 프랑스어를 매개로 하고 그로부터 또 다른 무언가가 만들어져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을 잊지 말자. “프랑스 대혁명에 초대받지 못하고 플랜테이션 재배에 혹사당한 흑인 노예에게도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달라!” 부르짖으며 프랑스의 작은 식민지 생도맹그에서 50만 노예가 봉기했다. 이 세 단어에는 힘이 있었고, 마주해야 하는 냉혹한 현실이 있있으며, 인류의 일부를 가장 침울한 시기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 계몽주의 사상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었다.

츠베탕 토도로프(Tzvetan Todorov)가 그토록 강조한 것처럼 계몽주의는 세 가지 모범적이고 기본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다양한 결과를 낳는다. 첫 번째는 자율과 해방의 개념이요, 두 번째는 침해할 수 없는 기본권이 발생하는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개념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유 상실이라는 모든 형태에 반대해 투쟁할 수 있는 평등이 생겨나는 보편성이라는 개념이다.

그래서 계몽주의에서는 힘 있는 말들과 인본주의라는 개념에 불을 지필 수 있도록 널리 퍼진 개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이 피부로 인정을 받고 선조들을 깨어나게 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여자들, 이 남자들, 이 아이들은 이름, 언어, 문화, 거주지, 존엄성과 인간성 등 모든 걸 빼앗겼다. 이들은 붙잡혀 짐을 나르는 가축에 실려 노예로 팔렸다. 이들에게 투쟁 문구인 ‘자유, 평등, 박애’는 한 세상을 뒤흔들고 빼앗긴 것들을 되찾을 가능성을 의미했다.

 

명석한 개념

노예들은 그 문구를 (주인과 독재자가 사용하는 언어로 쓰였음에도 그와는 별개로) 마치 나누어야 할 전리품, 당연히 받아야만 하는 물건 또는 보물을 가로채듯 자기 것으로 삼았다. 투쟁은 고통스러웠고 유혈 사태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채찍질, 강간, 인종차별 등 몹쓸 대우나 수치심, 모욕감 같은 감정은 결코 없었다. 그럼에도 프랑스어는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억압하고, 쓰러뜨렸다. 그들은 자유, 평등, 박애의 이름으로 보복하리라 결심했다. 이 세 가지만 있으면 불가능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1804년 1월, 그렇게 스스로 해방한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 탄생했다. 사람들이 노예로 전락하고 고통스러운 감금 생활로 더럽혀진 땅에 원래 이름인 아이티를 되찾아줬다. 식민지화로 살육당한 형제 민족인 아라와크족, 타이노족 및 가리베족 언어로 아이티 보요 키스케야(Haïti Boyo Kiskeya) 즉, 아름다운 땅에 구불구불한 ‘산이 많은 우리 땅’이었다. 탈식민화와 노예 해방을 이룬 첫 국가인 아이티는 그 당시 불가능했던 꿈을 결국 이뤄냈으며, 이 소식은 억압받고 있던 남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모든 민족에게 빠르게 전달됐다.

알렉상드르 페티옹 아이티 초대 대통령은 ‘해방자(El Libertador)’라 불리던 시몬 볼리바르에게 “자유, 평등, 박애는 우리를 위한 것만이 아니며, 남아메리카 대륙의 억압받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다.”라고 했다. 1815년, 베네수엘라에서 추방된 볼리바르는 아이티로 망명했다. 페티옹 대통령은 노예 해방을 조건으로 볼리바르가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재정 및 물자 지원을 약속했다. 

 

‘해방’이라는 억제할 수 없는 꿈

그 결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공화국들이 탄생했다. 아이티 공화국은 비싼 대가를 치렀다. 1802년, 프랑스는 아이티와의 전쟁에서 패했다. 1825년. 샤를 10세 국왕의 특사 마카우 남작은 함대를 이끌고 포르토프랭스(아이티의 수도-역주)에 다시 쳐들어갔다. “우리에게 배상하지 않으면 몰살당할 것이다.” 분명한 협박이었다. 프랑스는 선조들과 후손들을 위해 배상을 요구했다. 빚을 갚으려면 아이티 정부는 반드시 프랑스 은행과 거래해야 했다. 미국과 결탁해 흑인 노예제를 지지하거나, 인종차별주의자거나 인종 분리주의자였던 유럽 강대국들은 더는 보복에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아이티에 엠바고가 선포됐고, 그 어떤 시장에도 접근할 수 없었던 아이티 경제는 무너지고 말았다. 신생국가 아이티는 낙인찍혔고, 침체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벌을 받았다.

이어서, 르클뤼도 프랑스 동맹에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프랑코포니의 개념은 원래 의미를 벗어나 ‘해방’이라는 억제할 수 없는 꿈을 좇아갔다. 아이티에서 시작된 남아메리카 대륙의 탈식민지화 투쟁은 아프리카 대륙까지 펴져 나갔다.

이것이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세네갈 초대 대통령, 하비브 부르기바 튀니지 초대 대통령, 하마니 디오리 니제르 초대 대통령과 노로돔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 등 1960년대 남반구 국가 원수들이 숙고하고 다듬은 프랑코포니다. 파트너십과 호혜 평등의 정신으로, 그리고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국가들끼리의 솔직한 대화를 위해 신생 독립국들을 협력의 장으로, 또 국제사회로 이끌겠다는 의지에 기초한 프랑코포니다. 이들은 프랑스어라는 공용어를 지렛대 삼아 공동 시장을 이미 기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움직임에 프랑스가 전적으로 가담하도록 설득하고 애쓴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이에 뜻을 함께한 국가와 정부가 40여 년 만에 4배로 증가한 것만 보더라도 참으로 명석하고 확실히 현대적인 개념이었다.

1970년 3월 20일, 니아메(니제르 남서부의 항구도시-역주)에서 프랑스어권 국제기구(OIF)의 전신인 문화기술협력기구 설립에 관한 협정이 체결됐고, 그 서문에 모든 게 들어있다. 회원국을 결속시켜주는 프랑스어라는 공용어의 사용을 ‘똑같은 수준’으로 장려하고 있지만, 이는 국제협력, 개발 및 진보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 협정에서 시작된 정부 간 기구의 정치적 중요성은 점점 커졌다. 프랑스는 이를 탐탁지 않아 했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이 기구를 통제하려고 했다.

1989년, 다카르 정상회담에서 압두 디우프 세네갈 대통령의 주도로 처음으로 프랑스어권 내외부에서의 기본권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했으며, 법적 협력과 사법 협력이라는 새로운 연대의 장이 만들어졌다. 2002년, 그는 2대 사무총장이 됐다.

 

UN 패밀리가 된 OIF

이후 모든 게 순조로웠다. 1997년,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회원국들은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전 UN 사무총장을 초대 사무총장으로 선출했다. 2002년, 그가 퇴임 연설에서 말한 것처럼 OIF는 ‘UN 패밀리의 일원이 되는 새로운 차원’을 보여줬다.

2000년, 바마코 선언을 채택하고, 프랑스어권에서의 민주주의, 권리 및 자유의 실천 프로그램을 시행하면서 모범을 보였다. 이런 조치는 2006년, 분쟁과 인류 안보 예방을 위한 세인트보니페이스 선언으로 강화됐다.

부트로스-갈리의 결의는 단호했고 그의 야망은 컸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모더니티라는 도전에 맞서 싸울 수 있고, 국제무대에서 신뢰할 수 있는 존재임을 입증할 수 있는 기구의 설립을 원했다. 상고르는 “식민지화의 잔재 속에서 찾아낸 프랑스어는 얼마나 멋진 도구인가. 우리의 프랑코포니는 탑도 성당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이 시대의 열정적인 본능에 사로잡혀 요청에 부응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부트로스-갈리는 상고르가 말한 선구적이면서 정치적 목적이 매우 강한 개화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명을 받들어 그는 절대 실용주의의 4가지 목표를 정했다. 첫째, 프랑스어권 국제기구를 명망 있고 인정받는 국제기구로 만들 것. 둘째, 정치·사회·환경적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경제적 교류의 규모를 늘릴 것. 셋째, 침해할 수 없는 기본권을 주장하는 민족을 이해하고 그들의 언어를 인정하면서 세계 민주주의를 뿌리내릴 것. 마지막으로, 언어 및 문화 다양성에서부터 분쟁 시 평화의 중재자 또는 평화문화 알리미에 이르기까지 여러 민족과 문명의 소통책으로서 기능할 것.

 

식민주의의 아바타인가?

따라서 OIF는 지식, 민주주의, 그리고 특히 환경적으로 중요한 정책들에 유리하게 결정된 다자행동을 공유하고 전달한 덕분에 자체 역량 및 제도 강화가 기대된다. 또한, 문화를 해방, 발전, 진보와 주장의 필수 요소로 내세우고 있다. 이 국제기구를 이끄는 가치들을 고려하면서 권리와 존엄성, 자유를 요구하는 사람들과 약육강식, 만성 실업, 빈곤 및 이농 상태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은 여성 및 청년의 자유를 요구하는 사람들과 동맹을 맺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필자는 2014년 제15회 다카르 정상회담에서 부트로스-갈리와 디우프의 뒤를 이어 3대 사무총장으로 선출됐다. 놀랍게도, 프랑스 미디어와 지식인층은 이런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OIF가 프랑스의 영향력을 우선적이면서 전적으로 행사하는 도구 즉, 식민지주의의 아바타였다고 생각하는 프랑스에서는 선입견, 고정관념의 명이 길다.

OIF를 불신하는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다. OIF가 테러로 가장 타격을 입고, 가장 불안정하며, 가장 취약한 회원국들을 인솔했고, 통합 및 집중 활동을 펼쳤으며, 프랑스어권 전문가, 네트워크, 기구 및 기관들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OIF는 매우 구체적이고 효율적으로 사헬지역 5개국(북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 경계에 있는 모리타니,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차드를 말함-역주) 편에 서서 감시, 분석, 정보부터 예방 분석, 리서치에 이르기까지 전략 수립을 위한 센터들의 설립, 강화 및 네트워크 설치에 기여했다. 그 덕분에 사헬지역 5개국은 위험과 테러 위협 및 첨예한 갈등을 예측하고 최적화할 수 있었다.

 

마크롱, 프랑코포니를 19세기로 되돌려

우연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젊은 대통령은 이 모든 움직임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지켜봤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하나의 다원주의를 위한 UN 총회에서의 첫 연설 후 4년이 지났지만, 그는 OIF는 다원주의와 전혀 무관하고, 이를 위해 할 일도 없다고 평가했다. 이 기구의 사명은 그게 아니며 지금의 자리에 맞지도 않으니, 다시 프랑스어 사용 권장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 지구적 아젠다를 다루는 중요한 시기에 진정한 단결력을 보여주고 제안하는 힘을 발휘하는 프랑스어와 함께 OIF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마크롱 대통령은 OIF가 지지 및 협력 체제를 구축하면서 2015년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목표(SDGs)의 채택에 상당히 관여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파리 기후 협정 채택도 마찬가지였다. 1992년 지구 정상회담에서 결성된 프랑스어권 교섭단체들은 저마다 기후회의에 참여해 북반구 국가들과 동일 액수의 보조금을 남반구 국가들에도 지원했다.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프랑코포니는 안타깝게도 오해를 받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OIF의 사명은 데카르트가 주장하는 실용주의 차원의 정치적 프로그램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모으려 노력하는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프랑스어권 국가들의 예술·문학적 성장만이 오늘날 유일하게 가치 있는 프로그램이다.”라고 했다. 

그는 반론 같은 건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정치 뒷거래 및 전략적으로 은밀하게 뒤에서 이뤄지는 타협을 이용해 르완다를 제외한 회원국들에게 원하는 것을 제공했다. 이에 원칙도 가치도 민주주의도 권리나 자유 그리고 물가상승에도 개의치 않던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은 행정 기관과 교육 기관을 포함한 르완다의 모든 기관에서 프랑스어를 없애버렸다.

마크롱 대통령은 OIF를 19세기로 되돌려 놓았고, 그 기반까지도 무너뜨릴 각오가 돼 있다. 

 

 

글·미카엘 장 Michaelle Jean
전 OIF 사무총장(2014~2018년), 전 캐나다 총독 겸 최고 사령관(2005~2010년) 

번역·송아리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