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소보의 두 민족, 서로 등을 돌리다

‘구 세르비아’를 향한 향수 vs ‘대 알바니아’를 향한 환상

2023-04-28     필립 데캉 외

2월 17일 프리슈티나는 축제 열기에 휩싸였다. 코소보 알바니아인 수천 명이 수도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보행자 도로, 마더 테레사 대로로 쏟아져 나왔다. 베레모를 쓴 할아버지부터 곱게 차려 입은 아동들까지 구 유고슬라비아 시절 세르비아의 자치주, 코소보의 ‘독립’ 15주년을 기념하고자 모였다. 연단에 오른 알빈 쿠르티 총리는 코소보 보안군의 역량을 자랑하느라 바빴다. 지난해 약 52%에 이어 올해도 약 20% 예산을 확대할 것이라고 자찬했다. 병사들과 경찰들의 퍼레이드가 끝나자, 민중 축제가 시작됐다. 다과와 발칸 민속춤, 즉석 연주회가 어우러진 축제는 늦은 밤까지도 이어졌다. 

하지만 세르비아인, 보스니아인, 고라나인, 롬인 등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는 이 지역에서 이날 축제를 즐기러 나온 건 오로지 알바니아계 공동체뿐이었다. 이날 곳곳에서는 프랑스의 지롱드주와 비슷한 규모에 170만여명의 인구를 가진 코소보의 특이성, 이날 축제의 특이한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풍경이 연출됐다.

먼저 차량과 건물, 거리 곳곳에 2008년 도입된 유럽연합기를 떠올리게 하는 코소보 공식 국기가 내걸리긴 했지만, 정작 사방을 가득 채운 것은 붉은색 바탕에 머리가 둘 달린 검은 독수리 형상이 새겨진 이웃국 알바니아의 국기였다. 

 

온전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코소보

독립절 공식 행사에 각국 정부와 외교 인사들이 초청됐지만, 실제로 행사장에 온 외빈은 불가리아 부통령과 알바니아 대통령, 단 두 명뿐이었다. 오늘날 국제연합(UN)도, 중국·러시아를 비롯한 강대국도, 5개 유럽연합 회원국(스페인, 슬로바키아, 키프로스, 그리스, 루마니아)도, 기타 다수의 ‘비동맹’ 국가들도 코소보를 온전한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현실이다.

공식 연단 너머 보이는 코소보 민주동맹(LDK)을 창당한 이브라힘 루고바(1944~2006년)의 대형 사진은, 물론 비폭력 저항의 지난한 역사를, 그리고 1989년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집권한 뒤 10여 년 간 혹독한 압제 속에서 이 지식인이 보여줬던 용기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Liria ka emër : UÇK(자유주의는 이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코소보자유해방군)’이라는 슬로건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1999년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간 내전(1)과 내전 종식 후 수년 동안, 세르비아계 코소보 자유해방군이 소수민족과 LDK의 온건 알바니아계 세력을 상대로 저지른 만행은 구체적 자료로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보다 불편한 것은, 대로에서 만난 하심 타치와 카드리 베셀리의 대형 초상화였다. 코소보 자유해방군(UÇK)의 두 지도자는 신생국가의 고위직을 역임했다. 하심 타치는 총리에 이어 대통령을, 카드리 베셀리는 정보국장에 이어 국회의장을 지냈다. 하지만 두 인물은 1998~2020년 자행한 반인륜범죄와 전쟁범죄 혐의로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네덜란드)의 구치시설로 이송됐고, 2020년 4월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코소보 전쟁범죄특별재판소(국제형사재판소 산하 특별기구)는 4월 11일부터 유가족 137명이 제출한 소장과 증거에 대한 심사에 들어갔다.

이번 축제와 세르비아와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결정적 협상이 개시된 것을 계기로, 코소보 정부는 서방의 언론이 다시 받아쓰게 될 코소보의 성공신화를 끊임없이 선전하느라 바쁘다. 가령 도니카 게르발라 슈바르츠 외무장관은 “코소보는 국제사회가 이뤄낸 성공 스토리”라고 확언하면서도, “상대편 세르비아는 러시아 권력의 대리자”라고 비판했다. 게르발라 여사가 이끄는 자유주의 정당 ‘모험당’(Guxo)과 주권주의 좌파 정당 ‘자결당’(VV)은 서로 손을 맞잡고 2021년 2월 총선에서 승리했다. 이 승리는 세르비아와의 협상에 자신감을 선사했다. 

“우리는 준비가 됐다. 협상의 순간만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이번 선거에서  국민 50% 이상의 지지율도 확보했다. 지금처럼 안정된 정국은 앞으로도 다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현 정부는 대화할 준비만 된 것이 아니다. 실제 성과까지 이뤄낼 능력이 있다. 그런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듯, 코소보 공화국은 이제 어엿한 주권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우리가 논의하는 것은 코소보의 지위가 아니라, 관계 정상화다.”

수도를 빠져나가는 동안 오빌리치 화력발전소 2기가 뿜어내는 미세먼지가 폐 속 깊이 스며들었다. 현재 코소보의 전력공급을 책임지는 두 발전소는 프리슈티나를 유럽에서 가장 대기오염이 심각한 대도시로 전락시켰다. 한편 미트로비차의 옛 산업단지까지 덕지덕지 내걸린 온갖 광고와 대형 간판은 도시의 미관을 해치고 있었다. 이틀 전, 이 도시의 북부에 거주하는 시민들은 또 다른 축제를 기념했다. 오스만제국의 침공에 맞선 1804년 봉기를 기념하는 축제였다. 코소보 북부 4개 도시의 주민은 대부분 세르비아인으로, 국경을 접한 세르비아를 거의 모국으로 생각하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쿠르티는 작은 젤렌스키 같다”

이들 지역에 가면 길거리는 물론 관공서에서도 세르비아어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학교와 의료기관은 모두 세르비아 정부에 예속돼 있다. 또한 상거래에도 디나르(코소보의 알바니아인의 경우 유로화를 사용한다) 화폐가 사용된다. 이 오래된 노동자 도시에 가면 쇠락한 트레프차 광산단지 주변의 길들은 코소보를 양분하는 이바르 강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르비아 삼색기로 장식돼 있다. 알바니아인이 다수를 이루는 이바르강 남안은 미트로비차라고 불리는데, 이 지역으로 진입하는 주요 교각은 자동차 출입이 금지돼 있다. 다리를 지키는 건 오늘날 27개국 출신의 3,700명 병사로 구성된 코소보 다국적군(KFOR) 소속의 카라비니에리(이탈리아 국가 헌병대)다.  

코소보 다국적군(KFOR)은 1999년 6월 10일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가 채택한 결의안 제1244호에 의거해 코소보에 파견됐다. 당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알바니아인의 독립을 무력 제압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공습(결의안 채택 없이 독단으로)을 단행한지 2개월이 지난 뒤였다. 유고슬라비아군 철수 뒤, 국제연합(UN)은 ‘국제 민간 및 안전 요원의 주둔’을 허용했다. 그중에는 NATO 사령부 산하 서방의 군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2003년까지 우크라이나인이나 러시아인도 있었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당시 ‘코소보의 실질적인 자율성과 진정한 자치’를 호소하면서도, 동시에 “전 회원국이 유고슬라비아연방공화국의 주권과 영토 완전성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이에 코소보 해방군은 UN 결의안의 내용대로 무장해제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영미특수군의 지원을 받아 코소보를 장악하고, 2008년 독립 선포 이후 재건작업에 나선 코소보를 지배했다. 

“물론 현 상황은 1999년과는 전혀 다르다. 세르비아계 주민과 알바니아계 주민이 실제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세르비아계 주민은 제도적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서로를 향한 불신도 극에 달한 상태다.” 세르비아리스트당(Srpska lista)의 부대표 이고르 시미치가 말했다. 그의 당은 현재 코소보 의회 내 세르비아계 의석 10석을 보유한 가운데, 세르비아에 대한 모든 대립과 비판을 차단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하지만 1년 전부터 심각한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시미치가 지적했다. “쿠르티와 그 장관들의 반세르비아 발언이 초래한 결과다. 쿠르티는 작은 젤렌스키처럼 행동하며 세르비아 정부를 자극하고 있다.”

 

“세르비아인은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다”

세르비아 선거 참여를 막는 온갖 요소들, 코소보 내 세르비아 자동차번호판 금지, 복잡한 신원 문서 발급 절차, 난폭한 강제수용 조치, 지역경찰과 경쟁관계에 있는 특수경찰대 파견 등등. 그동안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세르비아 공동체에 적대적인 조치들이 실시될 때마다 매번 도시 주변 도로를 차단하는 것으로 응수해왔다. 갑작스레 양국의 긴장이 고조되자 뜻하지 않게 유럽 외교관들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매 위기사태에 대해 비난 성명을 내고, 양국의 고위급 회담을 주선하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3월 18일 오흐리드에서 채택된 기본협정은 2013년 양국이 브뤼셀에서 상호 합의한 이후 아무런 후속조처도 없었던 사항들을 실질적으로 이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록 유럽이 열심히 움직인다지만, 실상 코소보 총리를 굴복하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미국의 압박이다. 가령 지난해 7월 31일 미국 대사와 접견한 이후 자동차번호판 교체시한을 연장하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11월 초, 북부 4개 도시에서는 판사와 경찰, 공기관 직원 수백 명이 이 지역에 대한 낙인찍기를 규탄하며 일제히 사퇴했다. 그동안 코소보의 제도권 안에서 통합의 노력을 다해온 북미트로비차의 법원장, 니콜라 카바시치 판사는 더 이상 정부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 “비오사 오스마니 대통령과 총리는 세르비아인을 일상적으로 범죄자나 테러리스트로 취급해오고 있다. 코소보의 주권 확립을 위한 쿠르티와 그 동지들의 투쟁은 다민족 국가의 원칙에 위배된다. 정부는 오로지 서구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만 다민족 국가를 내세울 뿐이다. 실제로는 우리의 정치적, 사법적 권리를 모두 박탈하고 있다.”

네보이사 블라이치 변호사도 한층 더 격앙된 목소리로 거들었다. “24년째 세르비아인은 오로지 서류상으로만 동등한 시민에 불과했다.” 2018년 미트로비차에서 암살된 세르비아계 정치인 올리베르 아바노비치의 유가족 곁을 지키던 전 자문관은 “지금 상황은 옛날보다 더 심하다. 코소보에서 정의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잘못 알고 있는 자이거나, 혹은 가망이 없는 자일 것이다.” 그가 환멸에 찬 눈빛으로 강조했다.

코소보 다국적군(KFOR)은 현재 봉쇄된 도로를 해제해달라는 코소보 정부의 요청이나, 자국의 군사 천여 명을 파견하게 해달라는 세르비아 정부의 요청에 아직 아무런 후속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코소보 다국적군을 이끌고 있는 이탈리아군의 안젤로 미켈레 리스투치아 참모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이 모두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한 판단 때문이었다. 무력 사용은 현장의 상황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최선의 방도(관례적으로 그리고 이 지역에서 항상 그래온 것과 같은)는 대화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최대한 양측 모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그만 신호에도 민감하게 대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오판을 가장 경계한다. 그래서 악화일로로 치달을 만한 불필요한 이야기나 언행을 최대한 삼가해달라고 양측에 요구하는 것이다.”

 

정부의 자화자찬, 국민들의 불신

 

알빈 쿠르티 총리는 국제사회의 신임을 잃고도, 자국의 경제적 성과를 자찬하느라 바쁘다. 최근 그는 ‘일자리와 정의를 위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선거전을 치렀다. 사회적 진보 측면의 성과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에, 총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는 2021년 10.7%, 2022년 4%라는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수출은 23%, 소득세는 22% 증가했다.”

하지만 2022년 국내총생산(GDP)이 5.3% 감소하고, 무역수지도 막대한 적자를 기록했다. 적자를 일부 메워준 것은 GDP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해외동포의 송금과 서방의 지원이었다.(2) 실업률이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2021년 말 20% 이상으로 유럽에서 최고 수준이다. 고용률은 단연 유럽 내 최저 수준이다. 최근 대대적인 이주추세 속에서 일자리가 있는 사람이 15~64세 국민 중 1/3 미만이다.

물론 총리는 최저임금 보장이나 누진세 도입 같은 공약들은 아직 이행하지 못했다고 시인했다. 그럼에도 그는 공직자의 임금 격차를 1~4.74배로 제한하는 법률을 마련한 것에 상당히 만족해했다. “우리가 집권하기 전까지 격차는 무려 1~20배에 달했다. 이제 대통령 월급은 군인 월급의 3.2배다. 내 임금도 2.9배 차이에 불과하다. 예외는 의사, 법조인, 대학교수 뿐이다.” 한편 총리는 또 다른 사회정책으로, 석사과정에 이르는 무상 공교육, 교육 수준의 발전, 국민연금과 장애인 연금 인상, 자녀 1명당 2세까지는 매월 20유로, 이후 16세까지는 10유로에 이르는 가족수당과 출산수당 제공 등을 꼽았다.

자결당(VV)의 창당을 이끌고, 현 총리에게 수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줬던 옛 혁명문화는 어디로 간 것일까? 쿠르티 총리의 옛 동료들은 자결당(VV)이 주권주의 정당에서 민족주의 정당, 개인을 숭배하는 포퓰리즘이 가미된 정당으로 변모하면서 그와 멀어졌다고 털어놓았다. 2020년 6월, 불과 4개월 만에 쿠르티 초대정권이 몰락한 뒤 자결당(VV)은 정체성을 잃었다. 이 정당은 2021년 2월 선거에서 이슬람주의자에서 우익인사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스펙트럼을 대폭 확장했다. 가령 아르타네 리즈바놀리 경제부장관은 공공연히 신자유주의를 자처하는 인물에 해당했다. 전 내무부장관을 지낸 페치(혹은 페야)시 시장 겸 KDK(야당) 부대표, 무하셰리 가스멘드는 다음과 같이 쿠르티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연대하던 당시의 그는, 주권 관련 사안 두세 가지 외에는 정치적 계획이 없었다. 그는 돈을 펑펑 쓰고도 아무 성과도 이뤄내지 못했다.” 

 

“우리는 문화도, 음식도 서로 비슷해요”

가스멘드는 딸기와 라즈베리 재배를 위해 세르비아 샤바츠 지역과 협력을 추진하는 온건정책으로 비난에 시달렸지만, 결국 2021년 높은 지지율(61% 득표)로 시장직에 재선됐다. 그는 “사람들은 더 나은 삶과 더 발전된 경제를 원하며, 전후 시대를 벗어나기를 희망한다”면서 얼마 전 있었던 일을 들려줬다. “이탈리아 라이트너사와 함께 도시를 내려다보는 곳에 스키장을 건설하려고 계획했다. 하지만 정치인 올리비에 이바노비치가 미트로비차에서 암살되자, 두 민족이 다시 대립하는 상황을 우려한 투자자들이 돈을 회수해갔다.”

도시를 빠져나오자 루고브스카 계곡을 낀 도로 위로 18세기 이후 세르비아 정교회의 소재지 역할을 해온 페치 총대주교청이 보였다. 포르피리예 대주교는 주로 베오그라드 총대주교청에 머물고 있었지만, 2021년 2월 이곳의 총대주교로도 취임했다. 도로는 어떤 다른 지역과도 연결돼 있지 않았는데, 몬테네그로와의 국경이 국경선 획정을 둘러싼 분쟁으로 폐쇄됐기 때문이었다. 수도원 주변으로는 레보셰 마을의 허름한 벽돌집들이 대부분 폐가 상태로 남아 있었다. 전후 코소보를 떠난 난민 20만 명(대부분 세르비아인이나 롬인)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온 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보리슬라프 크르스티치는 알바니아에서 온 아내와 장모, 그리고 세 아이와 함께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코소보에서 국제결혼은 흔하지 않다. 농부인 그는 “우리 마을의 소녀들은 세르비아로 떠났다. 우리는 서로 비슷하다. 문화도, 음식도 비슷하다”라고 말했다. 그의 아내 에드몬다는 미소를 지으며 “이곳 생활이 좋지만, 이농 현상은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학교가 10km나 떨어져 있다 보니, 아이들은 동네 친구가 거의 없었다. “아이들이 계속 이곳에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곳에는 미래가 없다.” 크르스티치도 안타까워했다.

 

데차니 수도원, 파란만장한 역사와 운명

프로클레티예(저주받은 언덕) 국립공원 기슭에 자리한 비소키 데차니 수도원은 수많은 세르비아인이 ‘구 세르비아(Old Serbia)’라고 부르는 이 지역의 파란만장한 역사에 대해 홀로 많은 것을 이야기해줄 수 있을 듯하다. 코소보 중세시대 기념물 가운데 ‘위험에 처한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데차니 수도원은 오늘날까지 계속 운영되는 24개 수도원 중 한 곳이다. 이곳의 수사 한 명이 취재진에게 이 건물의 역설적인 운명을 이야기해줬다. 이 건물은 매번 세르비아인에게 패배를 안겨준 군대 덕에 여러 시대에 걸쳐 약탈 위험을 피했다는 것이다. 

투르크 치하에서는 오랫동안 오스만 군인들이 수도원을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 주둔했고, 19세기 말에는 알바니아 민병대가 이곳을 보호하기 위해 징집됐다. 1941~1944년에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국가헌병대(카라비니에리)가 알바니아인들이 수도원을 파괴하지 못하게 막아줬다. 또한, 내전 동안 난민들이 묵던 수도원은 1999년 코소보 다국적군(KFOR)의 보호를 받았다. 덕분에 알바니아인들이 정교회 유적 30여 곳을 파괴한 2004년 포그롬(박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취재진은 특별 허가를 받아 수도원 내부로 들어가 봤다. 도중에 외국 병사들이 통제하는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복잡한 통로를 지나야 했다. “이곳에는 항시 외국 병사가 주둔할 수밖에 없다. 수류탄 공격을 비롯해 수차례 테러 시도가 있었다. 수도원 벽면에는 이슬람국가(IS)의 구호가 적힌 낙서들이 가득하다. 지하디스트들이 수도원 문 앞에서 무기를 든 채 체포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도원을 위협하는 가장 실질적인 위협은 데차니 시당국과 수도원 인근 24헥타르를 둘러싼 정부당국의 요구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곳 국유지의 소유는 수도원이라고 2016년 코소보 헌법재판소도 판결했다. 하지만 시와 정부는 여전히 판결 내용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한 취재진의 질문에 쿠르티 총리는 조금 전까지 부패와 법치국가 부문에서 코소보의 순위가 크게 개선됐다고 한참 자랑을 늘어놓았음에도, 버젓이 코소보 최고 사법기관의 판결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줄어드는 세르비아인, 본토박이 알바니아인

코소보의 두 번째 도시, 프리즈렌의 심장부에는 중요한 3개의 건물이 이웃해 있었다. 19세기 카톨릭 성당, 오스만의 시난 파샤 모스크(17세기), 그리고 1306년 세르비아 왕 밀루틴 네마니치이 건립한 레예비사 성녀교회였다. 2004년 약탈과 화재를 딛고 다시 재건된 성녀교회는 오늘날 신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과거 이곳에 살던 세르비아인 1만여 명 중 10여 명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코소보의 경우 1939년 인구조사에서 세르비아계 주민이 전체 인구의 1/3을 차지했다면, 1981년에는 14.9%, 지금은 아마도 5% 이하일 것으로 추정된다(2011년 인구조사는 세르비아계 주민이 보이콧했고, 2021년 인구조사는 연기됐다).

현재 역사적인 다양성과 절연한 코소보에서는 다른 수많은 민족들 대신 오로지 알바니아계 공동체만 우월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모두가 사회통합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권리를 행사하려고 하면, 더이상 사회통합이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법정, 시청, 경찰서 등에서 우리의 언어를 더는 사용할 수 없다.” 샤르 산맥의 산악지대에 사는, 이슬람 종교를 믿는 슬라브계 민족이자 고라니인 기자, 파티르 베르자티가 설명했다. “소수민족은 점차 사라지거나 혹은 동화되고 있다.” 고르네 류비네 마을에서 아스트라 라디오의 진행자로 활동 중인 보스니아인 라이프 아데미도 말했다.

1878년 프리즈렌 동맹의 창설지인 자그마한 건물 앞에서 15여 명의 청년들이 ‘본토박이 알바니아인’(Shqipëri etnike)이라는 문구가 찍힌 깃발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박물관 내부로 들어가자, 19세기 말 프리즈렌 동맹의 당원들이 꿈꾸던 ‘대(大) 알바니아’를 환기하는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코소보 총리도 그와 비슷하게 알바니아어 사용권의 영토를 모두 통합하려는 프로젝트를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취재진이 총리에게 “일전에 알바니아와의 통일에 찬성표를 던질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라고 운을 떼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다. 그렇게 얘기했었다. 만일 그런 투표가 열리기만 한다면 말이다. 우리는 서로 별개의 국가지만, 동일한 민족국가다. 코소보와 알바니아의 국경은 그저 유고슬라비아와 세르비아의 국경이었다. 그런 만큼 우리는 현 국경선에 큰 애착이 없다.”

더욱이 쿠르티 총리는 (코소보와 알바니아의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다-역주) 최근 이웃국 알바니아의 총선 투표에도 참여했다. 현재 알바니아에서 그의 당은 사회당 출신 총리 에디 라마의 반감을 자극하고 있다. “알바니아인들은 서로 단결해야 한다. 알빈 (쿠르티)도 같은 것을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 서로 접근 방식이 다르다.”(3) 알바니아 정부수장은 통일 문제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그는 사실상 세르비아, 북마케도니아와 재화 및 서비스의 자유로운 통행을 추진하고 있다.

 

알바니아협회와 세르비아 협회, 협력의 시험대에 올라 

최근 몇 달간 고조된 긴장은 슈트르프체를 비롯한 산악마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월 6일, 정교회 성탄절을 맞이해 성탄절 전야에 태울 ‘바드냐크’라는 마른 떡갈나무 가지와 세르비아 국기를 들고 지나가던 청년들이 차량에서 발사된 총을 맞는 사고가 발생했다. “모두 충격에 빠졌다. 정말 너무나 힘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이곳에서 살기 위해 싸우고 있다.” 두 명의 부상자 중 한 명인 21세의 밀로시 스토야노비치가 말했다. 테러 용의자는 얼마 후 체포돼 가택연금 처분을 받았는데, 그는 코소보 보안군의 일원이었다. “이번 총격사건은 과거의 악몽을 되살렸다.” 1999년 9월 아버지를 잃은 야스미나 지브코비치가 증언했다. 그녀는 23년이 지난 지금도 가족을 찾는 이들의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행방불명자의 수는 1,614명이다. 

두 민족이 서로 협력하는 사례는 드물지만, 6년 전부터 알바니아와 세르비아 협회는 서로 힘을 합쳐 양국의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미트로비차에 작은 협회 사무실이 있다. “우리는 뭉치면 더 강해진다는 걸 깨달았다.” 바이람 세르킨나이 협회장이 말했다.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일을 겪고도 세르비아인과 함께할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은 이들과 함께 일하는 것뿐이라고 대답했다. 전쟁으로 득을 보는 사람은 없다.”

코소보 해방군에 입대하기 전인 1980년 8월을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을 더이상 볼 수 없었던 한 80대 노인이 강조했다. 이미 조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증조부는 1912년 발칸전쟁에서 실종됐다고도 했다.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있다. 양국의 정부는 두 민족의 화합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먼저 서로 대화를 시작한다면, 언젠가 정부도 대화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노인은 이렇게 이야기를 끝맺었다.

 

 

글·필립 데캉 Philippe Descamps 
기자
아나 오타세비치 Ana Otašević
영화감독

번역·허보미
번역위원


(1) 온라인 게재 시리즈 기사, ‘Vingt ans après, les plaies ouverte du Kosovo20년 후, 아물지 않는 코소보의 상처’ 참조, 2019년 3월.
(2) 별도의 언급이 없는 경우, 모든 통계수치는 유럽통계청(Eurostat) 국제통비교, 코소보통계청(ASK) 자료를 참조한 것임, ask.rks-gov.net.  
(3) <TV Klan>, Tirana, 2023년 2월 17일.

 

강압에 의한 ‘정상화’

 

지난 2월 27일, 알렉산다르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과 알빈 쿠르티 코소보 총리는 양국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기본협정과 관련해 EU측 제안을 수용하기로 했다. 3월 18일, 12시간의 마라톤협상 끝에 양국은 여전히 지켜지지 않는 상호 약속을 이행하는 내용을 담은 부속문서를 수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서명은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유럽연합 외교·안보 고위대표 호세프 보렐이 협정 전체 내용이 완전히 채택돼 즉시 실행될 것이라며, 협정 내용을 발표했다.

서방의 외교관들은 우크라이나전쟁이 유럽통합을 가속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동시에, 러시아의 영향력을 줄이고 발칸반도 국가를 포섭하기 위한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다. 이미 세르비아는 러시아에 대한 지지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크라이나전쟁에 대해 중립적 태도를 취하며 대러시아 제재를 거부해오던 세르비아도 이제 러시아의 ‘침략’을 규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4개 지역에 대한 ‘불법 병합 시도’를 철회하라고 촉구하는 UN총회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지난해 여름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이번 협정안은 1972년 12월 동서독 사이에 체결된 ‘기본조약’에서 영감을 얻었다. 1969년 서독의 총리로 선출된 빌리 브란트는 동방정책(Ostpolitik)을 이웃 나라 간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협의에 의한 공존’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는 독일민주공화국(DDR, 동독)을 국제법상으로는 결코 해외국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훗날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제2의 독일 국가로 ‘실질적으로’ 인정했었다. 몇 달 후, 동서독은 국제연합(UN)에 나란히 가입했다.

이번 기본협정은 마크롱 대통령의 외교보좌관인 에마뉘엘 본과 숄츠 총리의 외교보좌관인 옌스 플뢰트너, 그리고 세르비아·코소보 회담 특별 대표 미로슬라우 라이차크가 함께 마련한 합작품이었다. 처음에 ‘프독’ 계획에서 출발해, 이후 미국의 지지 하에 ‘EU안’으로 이름이 바뀐 이번 기본협정안은 2013년과 2015년 체결된 ‘브뤼셀’ 협정을 포함해, 지난 20여 년 전부터 논의돼오던 사항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동서독의 사례도 이미 2007년 EU 중재대표를 맡았던 독일 외교관 볼프강 이싱거가 제시한 방안에 거론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 완전히 새롭게 추가된 내용이 있다면 전후 두 가지 사실(코소보라는 국가가 세워졌지만 세르비아 공동체는 세르비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에 기초한 두 주요 주체 간에 직접적이고도 우선적인 관계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세르비아는 “정상적인 관계, 평등한 권리에 입각한 좋은 이웃 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코소보가 어떤 국제기구에 가입하는 것도 결코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 다음으로, 코소보는 “코소보 내 세르비아 공동체에 적절한 수준의 자치권을 허용해주는 한편, 세르비아의 금융 지원 가능성 등 일부 특수 분야에 대한 서비스 제공력”을 허용해줘야 한다.

프랑스는 협정 이행을 위한 중요한 열쇠로 ‘기술적인’ 부속문서에 규정된 구체적인 일정에 따라 이런 정치적 합의를 실행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코소보는 세르비아계 공동체와 그 도시들에 적절한 지위를 보장해주기 위해 즉각적으로 협상을 개시해야만 한다. “코소보와 세르비아는 어떤 조항의 이행도 거부하지 않기로 합의한” 가운데, 30일(4월 중순) 이내에 실무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모든 약속 위반은 “각국의 유럽연합 가입 절차와 재정 지원에 곧바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처럼 구속력이 강화된 협상은 사실상 양국의 관계 정상화가 강압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최근 몇 달간, 부치치와 쿠르티는 의도적으로 기본협정의 내용을 찔끔찔끔 외부에 흘리며 여론 작업을 다져왔다. 그러면서 그들은 각자 자신들이 최고의 국익 수호자라고 선전해왔다. 1월 말 EU 집행위원회의 대표들과 회담 이후, 세르비아 대통령은 대표단이 했을 법한 이야기를 언론에 털어놓았다. “세르비아는 반드시 이번 협의안을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EU 가입 절차를 중단하고, 투자를 철회하고, 경제, 정치적으로 세르비아에 심대한 피해를 초래할 총체적 조치를 취할 것이다.” 

물론 2월 초 의회에서 세르비아 대통령은 다시 한번 코소보의 일방적인 독립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것은 코소보를 ‘세르비아의 완전한 영토의 일부’로 간주하는 세르비아의 헌법에도, 세르비아의 영토 완전성을 인정한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제1244호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르비아 대통령이 앞으로 코소보를 ‘실질적으로’ 인정하는 상황으로 나아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협상단이 부치치에 비해 훨씬 어려운 상대로 여기는 쿠르티 총리는 “10년 전 브뤼셀에서 체결한 33개 협정은 중요도 면에서 서열 차이가 없으며, 단순히 시간적 순서를 따를 뿐”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2월 13일 코소보 의회에서 그는 미국과 유럽이 서로 이해관계가 같은 상황에서 서구 대표단의 압박이 거세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저들은 그들이 제시한 주요 협상안은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그것으로 끝’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또한 협상안을 거절하는 순간, 코소보를 상대로 징벌적인 외교 조처를 취하는 것은 물론, 우리에 대한 저들 정부의 신뢰가 큰 타격을 받게 되리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쿠르티 총리는 과거 자신의 당과 함께 세르비아계 지방자치 연합 창설에 맹렬히 반대해왔다. 하지만 이제 EU 가입을 수용하려고 한다. 보조금 차단과 투자 중단을 피하기 위해서다. 

코소보의 젊은 작가 요반 자피로비치는 국민이 느끼는 씁쓸함을 다음과 같은 멋진 문장으로 요약했다. “우리가 기다린 것은 세르비아와 코소보의 대화였는데, 정작 대화를 하는 것은 독일과 영국, 미국이네.” 이런 식으로 강요된 협정은, 과연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이 신뢰를 회복하고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완전한 화해까지는 어렵더라도 말이다. 

 

 

글·필립 데캉 Philippe Descamps 
기자
아나 오타세비치 Ana Otašević
영화감독

번역·허보미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