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주의자들, 네팔의 미래를 짊어지다

2012-03-13     필리프 데스캉

지난해 8월 재집권에 성공한 네팔의 마오주의자들은 지난 5년간 미뤄온 마오주의 반군 병사들의 네팔 정부군 편입 문제를 매듭지으며 평화의 길을 열었다. 제도적으로 불확실한 상태인 신생 연방공화국에서 5월 말 전까지 헌법을 도입하려면 다른 정치세력들과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부패와 철밥통으로 점철돼온 후진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루팍은 작은 인도산 오토바이를 타고 승용차와 트럭들 사이를 지난다. 교통혼잡 때문에 그에게는 계절풍이 말갛게 씻어낸 하늘, 눈 쌓인 랑탕의 산꼭대기 위로 떠오른 달을 감상할 여유가 없다. 네팔 수도 카트만두의 비좁은 외곽순환도로에서는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 움푹 파인 도로, 보행자, 자전거, 아니면 소떼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루팍은 친구 아제이를 만나 차를 마시고 몇 개비의 담배를 피운다. 휴대전화로 두어 번 정도 통화하고서, 마오주의자인 두 젊은이는 자신의 꿈을 이야기한다. 스무 살인 그들은 21세기 삶을 살기 원하고 공산주의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제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나라 상황에서 내전은 필요했고 우리는 승리했지요. 그렇지만 아직 자립과 신뢰는 얻지 못했어요. 우리는 공산주의가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왜곡됐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소련식도 중국식도 아니에요. 우리는 페이스북과 인터넷이 함께하는 현 세기를 살기 원해요. 사회를 바꾸려면 의회 제도를 통해야만 해요. 우리는 점진적 변화를 원합니다. 사회주의에 도달하기 전에 점진적 자본주의를 통해 봉건주의를 청산하고 모두의 권리, 특히 우리 타망과 같은 원주민의 권리를 지켜야 해요."

소련식도 중국식도 아닌, 네팔식을 위해

30년 만에 네팔의 인구는 2배가 되어 현재 2700만 명에 육박한다. 카트만두의 인구는 지난 10년간 60%나 증가했다. 2008년부터 최초의 마오주의 정권이 세금을 부과하는데도 자동차 이용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자동차 사고를 줄이기 위한 최고의 수단은 어쩌면 도로를 보수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경적을 아무리 크게 울려도 행상인들과 자전거 리어카, 수많은 '툭툭'(동남아시아에서 주로 인력을 이용하는 교통수단으로 '릭샤'라고도 한다) 사이에서 시속 30km를 넘게 운행하는 건 곡예다. 사회 평화를 회복하면서 아시아의 여타 대도시들에서는 사라지는 '피상적인 도시화'가 여기서는 한창 이뤄지고 있다. 대중 버스를 이용해 시내로 가는 데는 15상팀(약 200원) 정도가 든다. 유럽에서는 9개 좌석 정도가 들어설 버스 안에 15개 좌석이 있고, 승객 수는 흔히 2배 정도다. 그래도 여기서는 자신이 부자인 듯 느끼는 관광객은 버스보다는 20배나 비싼 작은 일본 택시를 선호한다. 사업이나 관광업에서 성공한 네팔인들은 서구에서 팔리는 가격보다 세금을 포함해 3.5배 비싼, 번쩍거리는 지프를 타고 다닌다.

가장 비참한 민중들의 반란, 그리고 승리

길거리는 네팔의 모든 계급이 뒤섞이는 흔치 않은 장소 중 하나다. 가장 빠른 자들은 가장 느린 자들에 대한 어떤 배려도 없다. 네팔의 이런 문화에 익숙한 앙리 시갸레는 한마디로 함축한다. "네팔 사람들은 평소 행동하듯이 운전한다." 앙리는 그르노블 출신의 엔지니어로, 1979년 안나푸르나에 '스키를 타고 8천m 고지에 최초로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 뒤 그는 네팔의 산과 사람들에 푹 빠져 20년 전부터 이곳에 정착했고, 점차 마오주의 네팔 공산당의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네팔의 마오주의자들과 1789년 상퀼로트(프랑스혁명 때 혁명적인 민중 세력)를 비교한다. "아시아에서 가장 비참한 민중이 군주제 및 카스트 귀족 정치, 봉건 관료주의(1)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76살의 그는 수많은 산악인들과 등산가, 아니면 단순 관광객들이 마음속에 네팔을 담아간다고 말하면서 일부 자선 행위 말고는 네팔의 정치·사회 현실에는 무관심한 반면, 티베트를 위한 운동에는 즉각 결집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

마오주의네팔 산당(UCPN-M) 중앙위원회 위원이자 전임 총리인 히트 바하두르는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그것도 완전한 승리는 아니다"라고 겸손해한다. 2006년 11월 평화협정으로 마오주의자들은 전체 네팔의 4분의 3을 통치하게 되었다. 국왕을 배제하고, 힌두교의 국교 지정을 폐기하고, 제헌국회 선거를 실시하는 등 외면상으로는 힘을 획득한 듯 보였다. 그러나 큰 도시들을 접수하고 미국·영국·인도·중국 같은 강대국의 지원을 받는 군대에 대적할 힘을 갖춘다는 건 반군세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2008년 4월 28일 마오주의자들은 예상을 뒤엎고 전체 601석 중 238석(30%의 득표율과 준비례대표제로 전체 의원 수 중 38%)을 확보하며 여유 있게 의회에 진출했다.(2) 마오주의네팔공산당은 국민회의당(119석)과 마르크스레닌주의자연대(PCN-MLU·109석), 테라이 마데시 전선(83석)을 앞섰다. 그러나 공화국이 수립된 이상 평화로 이행하려면 어려운 합의 과정이 필요했다. 헌법을 채택하려면 의회의 3분의 2 이상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의회 내 힘겨루기는 다시 시작됐고, 의회 파행과 협박, 거리시위, 화해의 포옹 뒤 절교 등으로 점철됐다. 만일 서구 사회의 관찰자가 대표적 네팔 정당들의 역사와 기조를 그대로 믿는다면 그는 이 정당들을 바로 좌파로 분류하고 싶을 것이다. 오랜 기간 여당이던 국민회의당은 늘 자신들을 사회주의 정당이라고 공식적으로 소개한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라는 명분 때문에 1950년대 국민회의당 운동가들은 당국의 추적을 피해 숨어다녔다. 그러나 권력을 행사하게 되자 보수 정당의 색을 드러냈다. 국민회의당은 부유층을 위해 일했고, 민영화를 옹호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공산주의가 득세하게 되었다. 공산주의를 표방한 정당만 20개가 넘었다. 1990년 최초의 민주 혁명 이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첫 주자는 네팔 마르크스레닌주의자연대였다. 그러나 실제 이들은 상당한 '중도파'였다. 국민회의당과는 경쟁관계였지만 핵심 사안에서는 가까웠다. 카트만두 주재 미국 대사의 전보를 최근 공개한 '위키리크스'는 미국 쪽의 충실한 정보 제공자인 카드가 프라사드 샤르마 올리 같은 일부 지도자들이 국민회의당과 가까운 관계임을 밝히고 있다.(3)

'마오주의자'라 자칭하는 공산주의자들은 플래카드나 의원 명함에 마르크스, 엥겔스, 또 레닌과 함께 빠질 수 없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초상을 그려넣는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선택은 유럽 사민주의자의 선택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문제는 국유화나 계획경제도, 규제도 아니다. 오히려 '3P', 즉 '공공-민간 파트너십'이다.

좌파 정치의 깊은 뿌리와 폭넓은 다양성

이 정당들 내부는 여러 계파로 나뉘고 심지어 분파되기도 하는데, 주로 특정 인물 중심으로 계파를 형성한다. 마오주의자 중에 과거 당의 사상가이자 현직 실용파 총리인 바부람 바타라이 계파가 있는데, '프라찬다'라 불리는 역사적 지도자인 푸슈파 카말 다할 계파와 연대하고 있다. 이들은 당 부총재인, '키린'이라고도 불리는 모한 바이디야 지지 세력의 반란에 맞서고 있다. 키린파는 바타라이 계파와 프라찬다 계파의 최근 연대를 '기회주의', 심지어 '비열'이라고 즉각 비난했다. 그러나 이들은 의회 안에서 토론이나 표결을 할 때면 늘 연대한다.

내전 동안 누와코트 지역구의 정치인이던 히트 바하두르는 인도에서 2004~2005년에 걸쳐 13개월간 구금된 바 있다. 14살 때부터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신민주주의'의 길이 요원하다는 걸 알고 있다. "세속주의 공화국을 수립했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였다. 그러나 오늘날 시민들에게 가난은 그대로이고 어려움도 여전하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우선 반군 통합을 통해 평화 절차를 마무리하고, 민주주의 헌법을 도입해야 한다. 지금의 난관은 드러내놓고 맞선 적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적들은 은밀하게 작업한다."

낮은 강도의 내전에서 10년간 1만3500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3분의 2는 정부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4) 2006년 1만9500명의 '인민해방군' 군인들은 유엔의 통제 아래 네팔 곳곳에 산재한 숙영지로 편성됐다. 그때부터 이들의 정식 군대 편입 문제는 마오주의 공산당의 정치 진로에 걸림돌이 되었다. 2009년 8월 프라찬다 총리는 이 문제로 파문을 일으키며 사임했다. 마오주의자들의 수장 프라찬다는 육군 참모총장 루크만구드 카타왈을 해임하려 했다. 카타왈은 유엔이 옹호한 마오주의 반군의 국군 통합에 적대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네팔 공화국의 대통령은 카타왈 해임을 취소했다. 이는 대통령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었지만 다른 야당들의 지지로 가능했다. 이에 대한 반대로 마오주의자들은 즉각 거리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거센 사회적 반발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내전 승리 뒤 산적한 과제

사상가 드루바 라즈 아드히카리는 "평화 협상을 성공시키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임신한 여성이 우선 출산부터 해야 그동안 생각해왔던 다른 일도 할 수 있지 않는가"라고 말한다. 그는 과거 휘하에 군인 300명을 거느린 마오주의 반군 대장이었다. 그는 교외에 있는, 네팔의 몇 안 되는 펩시콜라 공장 뒤 작은 집 1층에 살고 있다. 그의 아내 수니타 레그미는 과거 마오주의 반군이었다. 전투에서 그녀는 왼쪽 다리와 첫 번째 남편 바산타 대장을 잃었다. "전쟁에 참여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우리의 희생으로 이 나라에 많은 것을 줄 수 있었다." 어쨌든 아드히카리는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변화를 위해 싸웠던 이들을 잊는다면 변화는 계속될 수 없을 것이다."

지난해 11월 1일 4개 정당 간에 채결된 협정(5)에 따르면, 반군 병사 6500명을 특별 부대로 통합해 마오주의 반군의 35%를 흡수하고, 이들을 이용해 사회기반시설과 삼림 조성 프로젝트, 인명구조 사업을 운영하도록 돼 있다. 한 달 뒤인 12월 집계된 전국 숙영지 상주 반군은 1만6508명으로, 이 중 9천 명 이상은 정식 군대와의 통합을 원한다. 이 중 극소수만이 훈련을 받아들였고 7365명은 5천~8천 유로의 배상금과 함께(네팔의 월 최저임금은 62유로, 약 8만원) 자발적 은퇴를 선택했다. 희생자에 대한 배상과 함께 진실규명 및 화해위원회, 또 실종자조사위원회도 꾸릴 계획이다. 그러나 과거 시도된 여러 협상에서 별 성과가 없었던 민감한 사안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군사조직과 유사한 마오주의 청년들의 조직(청년 공산주의자 동맹) 해체와 내전 때 강제 몰수된 토지의 반환이다. 토지 소유자들의 대변자인 국민회의당은 6천 개 가문이 관련 피해자라고 추산했다. 지난 1월 정부는 게릴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게릴라가 배서한 토지 거래 전체를 인정하겠다는 제안과 함께 반환 범위를 책정했다.

임박한 헌법 제정, 평등과 통합 시대 열까

대법원은 제헌 국회의 연한을 '마지막'으로 6개월 연장하는 데 동의하면서 헌법 제정 마감 시한을 못박았다. 헌법 제정 기일은 오는 5월 말로 정해졌고, 덕분에 주요 정당들은 세부적 사안 대부분을 해결했다. 그러나 지역 분할과 지자체 선거 방식은 여전히 논쟁거리다. 국민회의당의 아르준 나르싱하와 신임 교육부 장관이자 마오주의네팔공산당의 대변인 디나 나스 샤르마는 TV 토론에 나와 이와 관련된 여러 이견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지난 몇 년 동안 두 정당은 서로 직설적으로 싸워온 반면, TV 토론에서 두 사람은 서로 질세라 상냥한 태도를 보였다. 방송 장애로 토론이 중단되자(건기 동안 하루에 16시간 정전되기도 한다) 농담과 서로에 대한 호감이 담긴 대화가 이어졌다. 국민회의당의 나르싱하는 "우리는 대통령제도 민족 기반의 지방분권제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마오주의 공산당의 디나 나스는 화답했다. "국회의 우유부단과 불안정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원하는 것은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는 것이다. 자신의 일을 직접 챙기려는 네팔 국민의 소망을 인정해야 할 때다. 가난과 부패를 없애고 여성과 카스트의 하층민에게 더 많은 권리를 주기 위한 수단을 확보해야 한다."

대통령이나 총리를 직접 선출하는 혼합 체제로 타협이 이뤄질 수도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은 강력한 의회의 특권에 의해 견제를 받는다. 지방분권 문제는 마오주의자들이 주장해왔고 모두가 원칙으로 수용했지만,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네팔 셰르파연합 의장인 크리파 수르는 "우리는 소수민족에 대한 존중과 함께 셰르파만의 국가를 원한다"고 단언한다. 고산지대 출신인 이 민족은 서구 산악인들의 등반을 지원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네팔 전체 인구의 0.5%에 못 미친다. 현재 92개 언어를 사용하고 있고 인구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사람들이 모국어로 네팔어를 사용하는 이 나라에서, 각 민족들이 자립국가를 요구할 경우 네팔은 분해될 것이다. 반대로 일부 권한을 지자체에 위임하면 공공재를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도 있다. 또한 지방분권화는 사회의 상층 카스트들의 지배 구도를 깨뜨릴 것이다. 따라서 남은 문제는 지역 간에 일관성 있는 균형을 찾는 일이다. 현재 네팔 전체 부의 대부분은 네팔인의 반이 거주하는 수도와 테라이 곡창지대에 편중돼 있다. 국가재정비 위원회의 대다수는 지난 1월 말 11개 지방 분할과 함께 각 지역에 1개 민족의 자치를 인정하는 지방분권제를 제안했다. 그러나 위원 중 3명은 엄밀한 지리적 관점에서 6개 지역으로 분할할 것을 제안했다.

생존 기반 마련하려면 부패 척결부터

방글라데시와 아프가니스탄보다 낮은 1인당 국민소득과 함께, 네팔은 아시아에서 가장 불우한 나라다.(6) '인간의 얼굴을 한 개발' 관점에서, 유엔은 네팔을 아프리카 최빈국과 같은 범주로 분류한다. 193개국 중 157번째 순위다. 10년 전에 숨김없이 드러났던 비참한 생활상의 충격은 지금 덜하지만, 극히 일부의 부도 제대로 재분배되지 않는다. 2010년 네팔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가난의 최저 기준인 연간 180유로(한화로 약 23만원) 미만의 돈으로 살고 있다.(7) 음용수와 화장실, 양질의 교육이나 의료진 등의 부족은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다.

매년 25만 명의 젊은이가 네팔을 떠난다. 최소 300만 명의 네팔인이 인도나 중동 지역에서 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최근 이스라엘에서 벌어진 네타냐후 가정부 사건에서 묘사된 것과 같이,(8) 네팔 인력은 종종 학대의 대상이 된다. 최근 몇 년간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해외 거주 네팔인들이 본국에 보낸 돈이 네팔 국가 생산의 약 20%를 차지한다는데,(9) 실제로는 더 높을 것이다. 그야말로 국가 최고 수입원으로 연간 50만 명 이상 관광객을 수용하는 관광보다 훨씬 비중이 높다. 해발 8천m 이상 되는 높은 산은 네팔의 최고 천연자원이다. 그러나 엄청난 잠재성이 있는 수력발전은 거의 개발되지 않은 상태다.

수익성 있는 분야에 대한 투자가 부족하다 보니 예금 인출, 기금 횡령, 투자자 또는 기부자에 대한 심각한 치안 부족 같은 네팔 특유의 문제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지난 몇 년간의 혼란으로 폭력에 둔감해진데다 처벌이 거의 전무하다 보니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유엔은 "내전 기간에, 또 이후 인권침해와 관련해 민간 법정에 회부된 사람이 거의 전무하다"고 보고한다.(10)

마오주의자들, '다름'을 보여줘야

그러나 가장 심각한 요인은 공권력이 전통적으로 무능하다는 데 있다. 국제위기그룹(ICG)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내전 동안 네팔 정부는 놀랍게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채 개혁 없이 살아남았다. 일부 정부의 존재 이유가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기보다는 연고 관계를 지속하고 부패를 양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약간의 권력으로도 부를 축적하고, 가족과 가신들을 거느릴 수 있다. 국제투명성기구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아시아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는 아프가니스탄 다음으로 네팔이다.(12)

법치가 취약한 탓에, 카스트 제도를 탈피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있는데도 브라만과 크샤트리아 같은 신분층의 지배가 지속되고 있다. 미셸 케르고아트 교수는 "엘리트 계층의 지배적이고 다소 불가침한 성격을 차치하더라도, 이들의 문화와 관습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그런데도 네팔 사회와 네팔 발전의 잠재성에 이들이 미치는 영향은 상당하다"고 말한다.(13)

기존 정당이 복지부동했기 때문에, 골수 지지자인 가난한 시골 주민들 말고도 많은 이들이 마오주의자들을 지지했다. 마오주의자들의 청렴한 이미지로 사람들의 신뢰는 확고해졌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사회 발전(최저임금, 생필품 보급 등)이 더디더라도 헌법이 일단 도입되면 의회 대다수를 차지한 마오주의 공산당을 통해 국민의 뜻을 발현할 수 있으리라고 희망한다. 안나푸르나 호텔과 에코 트렉 여행사의 사장인 아드히카리는 당당히 말한다. "자유를 통해 수많은 꽃봉오리가 피기 시작하고 있다. 나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 있다."

젊은 사업가이자 트레킹 여행사 연합 회장인 그가 '혁명론자'의 논지를 펼치며 네팔 사회의 어려움을 타개하려는 것을 보면 네팔이 그동안 겪어온 질곡을 엿볼 수 있다.

마오주의자들의 실체는 지금까지 알려진 진부함과는 다르다. 미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테러리스트 조직(14)으로 치부된 네팔의 마오주의자들은 일부에서 그들을 즐겨 빗대는 '크메르루주'와는 거리가 멀다. 타협에 개방적인 그들은 이제 네팔 기존 권력의 만성을 답습하지 않을 것임을 증명해야 한다.


글•필리프 데스캉 Philippe Descamps 언론인.

번역•박지현 sophile@gmail.com

(1) Henri Sigayret, <네팔, 10년간의 내전, 이유는?>(Nepal, 10 ans de guerre civile, pourquoi), Vajra, Gainesville(미국), 2011.
(2) Marie Lecomte-Tilouine, ‘De la guérilla ? la démocratie au Nepa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5월호 참조.
(3) 위키리크스가 밝힌 전보 중 특히 2003년 2월 3일, 2008년 5월 19일, 2009년 11월 20일자 참조.
(4) 네팔의 비정부기구 INSEC에 따르면, 1996∼2006년 8377명이 정부군에 의해 살해됐고, 2970명이 마오주의 반군에 의해 살해됐다.
(5) 2011년 11월 1일 마오주의네팔공산당, 네팔 마르크스레닌주의자연대, 국민회의당과 마데시전선의 총재 간에 체결된 7개 쟁점 협정.
(6) 유엔개발계획(UNDP), <2011 인간개발보고서>, 뉴욕.
(7) <Poverty in Nepal>, Nepal Living Standard Survey 2010~2011.
(8) ‘Former caregiver in Netanyahu’s home: I was forced to work 24 hours a day’, <Haaretz>, 텔아비브, 2011년 9월 1일.
(9) 2011년 6월 재정부가 실시한 2010·2011 경제총조사.
(10) 2011년 6월 유엔이 발표한 ‘2011~2012 네팔 평화 수립 전략’(Peace-Building Strategy for Nepal 2011~2012).
(11) <Asia Report>, n°194, Bruxelles, 2010년 9월 29일.
(12) 국제투명성기구의 2011년 보고서.
(13) Michelle Kergoat, ‘네팔의 정치사’(Histoire politique du Nepal), Karthala, Paris, 2007.
(14) 2012년 2월 1일 기준 리스트에는 여전히 마오주의네팔공산당과 민간 반군을 포함하고 있었다. www.treasury.gov/opac.


인도, 부담스러운 이웃

인도와 중국에 둘러싸인 네팔은 자국보다 40배 큰 두 강대국에 맞설 힘이 없다. 남쪽 평원을 통한 인도의 입김은 북쪽 히말라야의 국경을 절대 넘을 수 없지만, 티베트를 통한 중국의 영향력보다 더 명백하고 뿌리 깊다.

네팔 전통문화에 인도가 미치는 영향은 힌두교 비중(인구의 80%), 인도보다 더 심한 카스트 제도, 왕가에서 엄격히 쓰고 있는 힌디어 공용어를 보면 가늠할 수 있다. 인도의 영향력은 최근에는 같은 학교 출신 상류층의 형성과 인도의 국민회의당, 네팔의 국민회의당 간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인도의 이런 영향력 행사는 1950년 7월 30일 양국 간에 체결된 ‘평화 호혜 조약’을 통해 공식화됐다.

인도 정부는 네팔의 독립을 인정하면서도 네팔 정부에 양국의 우호관계를 저해할 수 있는 모든 개입과 분쟁을 인도 정부에 알리도록 의무화했다. 여전히 발효 중인 이 조약으로 양국 국민은 상호 무비자에 실제 국경이 없는 상태이며, 거주 및 재산과 관련해서도 완전히 자유롭다. 인도는 작은 이웃인 네팔의 외교 및 국방 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지배력을 유지했고, 네팔의 수자원을 비롯한 천연자원을 탐내고 있다. 1989년 네팔은 인도인들에 대한 노동허가제를 도입하고 중국산 무기를 구입하기 원했으나, 그때마다 인도는 네팔을 가혹한 봉쇄로 통제했다.

‘통합 중국’의 원칙 아래 티베트 난민에게 신경 쓰고 있는 중국 정부는 네팔 정권에 협조적이었고, 산악도로 건설에 많은 투자도 했다. 중국 정부는 네팔 반군이 마오쩌둥을 인용하는데도 이들 정권 수립을 우려했고, 주저 없이 네팔 국왕 갸넨드라를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미국의 개입과 똑같은 식으로 중국이 중국군을 파병하자, 인도 정부는 네팔 왕실을 포기하고 2005년부터 ‘평화 이행’ 카드를 십분 활용하기로 결정했다.(1) 인도 정부는 인도 내 낙살라이트 게릴라와 이념적으로 근접한 마오주의 반군에 대한 편견이 있었는데도 이런 결정을 감행했다.(2) 인도의 입장은 제헌 왕정과 복수정당제라는 양 축에 근간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네팔의 혁명이 드세지고 왕이 실각하자 인도 정부는 첫 번째 축인 제헌 왕정을 포기하고, 정치 게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온전히 유지하려고 한다.

인도는 큰 덩치가 무색하게 네팔 혁명 정권을 돋보이게 하는 들러리 노릇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빅브러더’(인도)의 이런 의도는 네팔 민족주의를 발발시킨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마오주의자들은 민족주의 내전 동안, 그리고 야당 시절 대대적으로 반인도적 수사법을 구사했다. 그러나 바타라이는 총리로 임명된 지 두 달도 채 안 돼 지난해 10월 23일 인도 뉴델리를 방문해 양국 투자 협정을 체결했다. 역사학자들은 네팔 정치사에서 중요한 시점에 인도의 결정적 역할이 있었음을 제시했다(1951년, 1990년, 2005년. 네팔 연대기 참조). 최근 네팔에서 체결된 평화 이행에 관한 협정도 이런 비공식적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은 듯하다.

(1) Bishnu Raj Upreti, ‘External engagement in Nepal’s armed conflict’, <The Maoist Insurgency in Nepal>, Routledge, NewYork, 2010.
(2) 니콜라 자울·나이케 데스케스네스, ‘인도의 숲엔 마오주의자가 산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10월호.


끝나지 않은 혁명의 60년

1951년 2월: 라나 왕조 통치가 막을 내린다.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총리와 네팔 국민회의당의 지원 아래 트리브후반 왕이 헌법 제정을 약속하며 왕권을 재건한다.
1959년 2월: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최초 헌법을 제정한다. 국민회의당이 제헌 국회에서 승리를 거둔다.
1961년 12월: 의회가 해산되고 판차야트(원로회로 정당정치를 부정하던 보수주의자들)의 비호 아래 절대왕정으로 복귀한다.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구금과 축출이 이어진다.
1990년 4월 8일: 첫 번째 민중시위 자난 안돌론(Janan Andolon)이 발생한다. 비렌드라 왕은 두 달간의 시위와 탄압 뒤 정당제를 용인한다.
1996년 2월 13일: 마오주의네팔공산당이 정부에 대한 ‘인민 게릴라’를 시작한다.
2001년 6월 1일: 비렌드라 왕이 암살되고, 디펜드라 왕자가 사건의 배후로 처벌된다. 비렌드라의 형제 갸넨드라가 왕에 오른다.
2001년 12월 24일: 국가 비상사태가 발령되고, 군부대의 대대적 진압이 시작된다.
2005년 2월 1일: 갸넨드라 왕이 정부를 불신임하고 국회를 중단시킨 뒤 행정 전권을 장악한다.
2005년 11월 21일: 인도 뉴델리에서 절대왕정에 반대하는 7개 주요 정당과 마오주의자들 간에 12개 요점을 담은 협정을 체결하다.
2006년: 두 번째 민중시위인 2차 자난 안돌론이 4월 6일 일어난다. 총파업과 반정부 시위가 이어진다. 4월 24일 왕이 물러나고, 국회가 재건된다. 마오주의네팔공산당은 일방적인 종전을 선언한다.
2006년 11월 21일: 평화협정 체결. 연립정부와 반군이 유엔의 감독 아래 들어간다.
2007년 1월 23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평화이행정치지원 임무단(유엔네팔임무단)을 결성한다(옛 반군 군인과 군대를 감시하고 선거 절차를 지원).
2008년 4월 28일: 제헌 국회에서 선거 실시. 마오주의네팔공산당이 국민회의당 및 네팔 마르크스레닌주의자연대를 제치고 제1당이 된다. 국회는 2년간 평화 이행을 끝내고, 헌법을 제정하도록 한다. 결과를 도출하지 못하고 세 차례에 걸쳐 시한을 연장한다.
2008년 5월 28일: 왕정을 폐지하고 네팔연방공화국을 수립한다.
2008년 8월 15일: 마오주의네팔공산당의 당수 프라찬다가 국민회의당을 제외한 6개 정당 연합의 총리가 된다.
2009년 5월 4일: 총리가 마오주의 반군의 국군 편입을 반대하는 육군참모총장을 해임시킨다. 공화국 대통령이 이를 취소한다. 마오주의네팔공산당은 정부에서 이탈한다.
2010년 1월 7일: 마오주의네팔공산당-정부-유엔 간에 소수 반군의 편입 문제와 국회 파행에 대한 협정을 체결한다.
2011년 1월 15일: 유엔네팔임무단의 임무가 종료된다. 마오주의 반군 부대들은 통합 및 재교육 특별위원회 사령부 휘하에 귀속된다.
2011년 8월 28일: 마오주의네팔공산당의 부총재 바타라이가 테라이 지역 정당들의 지원으로 총리가 된다.
2011년 9월 1일: 마오주의 반군들은 특별 사령부에 자신들의 무기고 열쇠를 반납한다.
2011년 11월 1일: 네팔 4개 주요 정당들이 마오주의 반군의 통합 및 평화 이행과 연방민주주의 헌법 투표 등 7개 주요 사항이 담긴 협정을 체결한다.
2011년 11월 25일: 대법원은 제헌 국회의 시한을 6개월 재연장하도록 승인한다. 국회의원들은 2012년 5월 말까지 헌법을 제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