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식 노동자평의회가 무력해진 이유

2023-04-28     장뉘마 뒤캉주 l 대학교수

무려 제1차 세계대전 전, 노동자평의회가 유럽 여기저기에서 조직됐다. 노동자들이 권력기관에 맞서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목적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노동자평의회가 정부와 사용자에게 압력을 가한 덕분에 많은 타협이 이뤄질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 대화’가 법제화되면서 노동자평의회는 무력해지고 말았다.

 

관료주의, 표현의 자유 억압과 탄압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자주 “소비에트”라는 단어를 꺼낸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USSR)의 역사를 상기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러시아어로 ‘노동자평의회’를 의미하는 소비에트는, 본래 또 다른 성격의 민주주의 기반을 형성한 기관이었다. 노동자평의회는 1917년 러시아에서 공식 탄생한 정치체제로, 다른 국가 특히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크게 발전했다. 

노동자평의회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1930년대 초 혁명에 반대하는 이들이 행했던 폭력과 독일의 그 유명한 “사회적 모델”의 출현을 이해할 수 있다. 가장 저명한 역사책에서부터 입문서,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노동자평의회 운동(독일어로 Rätebewegung)’에 대한 내용은 거의 사라졌다. 1917년부터 ‘중유럽(Mitteleuropa)’ 전역에 대규모 혁명의 바람이 불었다. 베를린, 빈, 부다페스트, 뮌헨, 라이프치히, 그라츠, 프라하, 바르샤바 그리고 더 작은 도시들에도 혁명의 물결이 퍼져나갔다. 러시아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중부 유럽에서 독일과 그 동맹국의 군대가 와해한 후 노동자 및 군인들이 모여 평의회를 결성하고 강력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저항과 폭동이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1918년 1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엄청난 규모의 총파업이 일어났다. 몇 달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제국은 해체됐고, 공화국이 하나둘씩 설립됐다. 1918년 11월, 전쟁의 공포에 위축됐던 이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 혁명에 영향을 받아 행동을 시작했다. 이런 급진적 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출현한 평의회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부다페스트에서는 벨라 쿤의 지휘 아래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돼 몇 주간 이어졌으나 루마니아 등 혁명을 막으려는 세력에 의해 강력하게 저지당했다.(1) 

이 평의회는 확실히 아래에서부터 탄생한 것이었다. 군인들과 노동자들(주로 대규모 공장의)이 자신들의 요구를 함께 외쳤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군인들의 요구는 대개 전방에서 본국으로 송환해달라는 것, 집에 급여를 전달해 달라는 것 등이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대변할 대표자들을 선출했다. 그들의 동기는 다양했지만 특히 금전적인 것이 많았다. 해체 단계에 있던 그들의 국가가, 기본적인 기능조차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평의회들은 식량 및 물자 공급, 주거 할당처럼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국가 대신 처리하기도 했다. 사실상 새로운 권력 기관이었다. 정치적 측면에서 이 평의회를 단순한 반란자들의 모임, ‘빨갱이’들의 본거지로 본다면 오산이다. 군인 평의회에서 우리는 모든 종류의 정치적 성향을 살펴볼 수 있다. 일례로 아돌프 히틀러도 이런 평의회의 부대표자였다(그는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자신의 그런 이력을 숨겼다).

그러면 ‘노동자평의회 운동’을 『바이마르 역사의 옥스퍼드 핸드북』에 나와 있는 표현처럼 ‘시민운동’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까?(2) 최근에 나온 많은 연구결과들은, 이 평의회들의 영향력이 매우 정치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노련한 운동가 또는 경험 없는 과격파 청년들이 이끄는 평의회는 의회 제도를 대체하는(적어도 강력하게 수정하는) 새로운 원동력이었다. 1918~1919년, 여러 도시에서 이런 이중 권력구조가 나타났다. 뤼벡부터 브레멘, 그리고 로스토크부터 프랑크푸르트까지 노동자와 군인 평의회가 주축이 돼 시위와 폭동이 일어났다. 이 평의회에는 면직당한 군인들도 포함돼 있었다. 평의회는 시청, 기차역, 군대 지휘 본부, 신문 편집부 등 전략적이고 상징적인 장소를 점거했다. 

이런 가운데, 유명한 사건이 일어났다. 1919년 1월 1일,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독일 공산당(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 KPD)을 창당한 것이다. 독일에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우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카를과 로자’는 베를린에서 1918년 12월에 열린 평의회 대회의에서 선출되지 못했다. 사회민주당이 대세인 가운데, 독일 공산당은 반대의 물결에 직면했다. 당원들 중 일부는 의회선거 참여 거부를 외치며 투쟁을 원했다.(3) 이런 급진사회주의자들은 정당과 노동조합이라는 파트너 관계를 넘어, 노동자 평의회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 토대를 형성하고자 했다.

1919년 1월 15일, 스파르타쿠스 연맹의 급진 좌파의 봉기가 진압되면서 이들의 희망도 끝났다. 적어도 1922년 초까지는 노동자평의회는 끈질기게 버텨서 혁명의 불꽃을 유지했다. 폭발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피어난 이런 희망은 산업노동자 계층의 많은 소수파에 영향을 끼쳤다. 전통적인 정치 정당뿐 아니라 전통적인 노동조합도 거부하는 여러 조직이 탄생했다. 이들은 기업 내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두고 매우 강력한 노동자 중심의 ‘고급 민주주의’ 원칙을 장려하고자 했다. 일례로 기득권층의 선거권은 아예 박탈하는 것 등이다. 레닌은 이런 ‘평의회주의자’들을 ‘극좌파’라고 낙인찍었다. 이것이 20세기에 대대적으로 사용된 ‘극좌파’ 용어의 탄생이다.

1919년부터 1920년까지 급진 노동계를 대표한 평의회주의자들은 독일 공산노동자당(KAPD, 독일 공산당(KPD)에 노동자를 의미하는 Arbeiter의 A를 추가한 것)을 창당했다. 전쟁의 경험으로 트라우마가 생긴 젊은 프롤레타리아는 보통 자신보다 나이가 든 노동조합의 ‘거물’들과 사회민주당원을 규탄하고 구세계를 뒤엎기를 바랐다. 이들은 본래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같은 형태를 꿈꿨으나 이후 방향을 바꿨다. 거의 종말론 수준의 극단적 사회적·정치적 시야를 가진 이들은 노동계에 이미 깊게 뿌리내린 사회민주주의 현실을 부정했다. 그 결과, 이들은 빠르게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급진적 좌파 사상”은 이와는 달리 진정한 사회적·정치적 추진력을 얻었다.

 

사민주의적 ‘사회적 대화’, 평의회를 위원회로 전환

오스트리아의 상황은 달랐다. 오스트리아 평의회주의자들은 다른 성향을 보였고, 공산당은 영향력이 없었다. 대신 노동자평의회 특권을 확장하려는 사회민주당이 있었다. 오스트리아 역사학자 한스 오트만이 언급했듯 “노동자평의회 운동 속에서 오스트리아는 다른 국가와 구별되는 특성이 있었다. 노동자평의회가 더 오랫동안 존재하다 보니 기반이 탄탄했고 그 덕에 경제적·사회적 문제에 활발하게 개입할 수 있었다.”(4) 1924년까지 사실상 노동자평의회는 건재했다. 사회민주당 좌파 지도자인 막스 아들러는 평의회 민주주의와 의회 민주주의 사이에 유기적 결합을 제안했다. 그리고 “부르주아식” 민주주의로 인한 과두정치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 후자가 전자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5) 

요컨대 전술한 평의회의 권력의 제한 여부가 쟁점이자 최우선 과제였다. 논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몇 달 만에 '기록적인' 사회적 성과가 이뤄졌다. 1919년 4월부터 8월까지 바이에른에서는 임시 평의회 공화국이 세워지고 헝가리에서는 소비에트 정부가 혼란에 빠졌을 때, 오스트리아는 많은 법을 제정했다. 노동자평의회를 기업 위원회로서 인정할 것, 최초의 유급 휴가 도입, 합스부르크 제국의 재산을 압수해 전쟁 피해자와 빈민에게 재분배하는 “성(城)에 관한 법” 등이다. 결과적으로 서방 유럽에서 가장 앞서는 법체계를 만들었다. 평의회 흐름이 없었다면 이런 법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 일부 엘리트 계층은 이런 법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극우파 국가주의로 전향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그 유명한 “사회적 동반자 관계”와 함께 노사가 합의하는 문화가 대세가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920년대에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전까지 좌파 운동가들은 1918~1919년 정신을 다시 한번 일으키려고 노력했지만, 노동자평의회는 껍데기만 남고 말았다. 극단적인 흐름을 차단하면서 사회민주주의가 신속히 자리를 잡았고, 이전 평의회는 기업 내에서 오늘날 “사회적 대화”로 부르는 일을 수행하는 위원회로 변모했다.(6) 

사회민주적 성향의 노동조합과 사용자 대표는 그들에게 “빨갱이로 인한 위기”가 닥쳤다는 데 동의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휴전되고 며칠 후, 노동자와 군인 평의회가 꽃을 피우던 시절, 독일에서는 “스티네스 레기엔 협약”이 체결됐다. 루르 지방의 기업인인 휴고 스티네스가 사용자를 대표하고 사회민주당(SPD) 당원인 카를 레기엔이 노동자 조직을 대표해 체결된 협약이었다. 노동조합을 협상 상대로 인정하는 이 협약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탄생한 ‘소비에트’식 희망이 실현된 법적·정치적 모델의 뼈대라고 할 수 있다. 

100년이 흘러 2018년, 바이마르 공화국 100주년이 되는 때, 베를린에서 ‘사회적 파트너’와 정부는 대대적으로 이 협약을 기념했다. ‘평의회주의자’에 대한 이야기는 공식 기념사에서 잠깐 거론될 뿐,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글·장뉘마 뒤캉주 Jean-Numa Ducange  
프랑스 대학 연구소 및 루앙 대학 현대사 교수. 최근 저서로『피로 물든 공화국, 베를린과 빈 나치즘의 기원이 되다』(아르망 콜랭 출판, 파리, 2022년)가 있다.

번역·이정민
번역위원


(1) 『La naissance des premiers partis communistes 초기 공산당의 탄생』, Molcer, <Aulnay-sous-Bois, n°3>, 2021.
(2) Nadine Rossol and Benjamin Ziemann,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2022.
(3) Marcel Bois,『“Vous voulez faire de votre radicalisme une position confortable et expéditive”, Les conflits autour de l’héritage de Rosa Luxemburg dans les débuts du KPD “편안하고 신속한 급진주의를 원하시는군요”, 독일 공산당 초반 로사 룩셈부르크의 유산을 둘러싼 분쟁』, Actuel Marx, Paris, vol. 71, no. 1, 2022.
(4) ‘소비에트의 시간’, 온라인 매거진 <Période> 인터뷰, 2017년 10월 9일, http://revueperiode.net
(5) Jean-Numa Ducange, ‘Vienne la Rouge(한국어판 제목: 좌파가 오스트리아를 집권했을 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한국어판, 2022년 5월호. 
(6) Sophie Béroud et Martin Thibault, ‘Du dialogue social à l’épreuve de force 사회적 대화에서 권력 분석까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3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