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투쟁과 민족 문제, 무엇이 우선인가?

민족자결권을 둘러싼 오랜 논쟁

2023-04-28     알랭 비르 외

프리드리히 엥겔스, 로자 룩셈부르크 등 혁명사상가들은 계급투쟁의 당위성이 민족운동과 대립하는 문제를 지적했다. 이 문제에 대해, 레닌이나 트로츠키는 국익이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이익에 종속된다고 생각했다.

 

일부 좌파 운동가들은 러시아의 침공에 맞선 우크라이나의 항전을 지지하며 ‘민족자결권’을 절대 원칙으로 내세웠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전통을 내세우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연대 입장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물론, 그 뒤를 이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민족자결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그러나 이들은 민족자결권이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도 최우선이라고, 즉 신성불가침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일명 ‘민중의 봄’ 시기, 혁명과 반(反)혁명이 교차하던 19세기 유럽의 상황을 짚어보던 엥겔스는 체코, 세르비아, 모라바, 루테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지의 슬라브족이 주장하던 민족 자치권 요구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아, 일련의 논고를 펴냈다. 민족 자치권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이탈리아 등에서 민주주의 혁명을 막기 위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도구로 활용됐기 때문이다.

“범슬라브주의자들은 (...) 끝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하나는 민족성을 일부라도 지키기 위해 혁명 과업을 뒤로 하고 전제 군주제의 힘을 빌리는 것, 다른 하나는 혁명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민족성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 당시 동유럽 지역에서 혁명의 향방은 체코인과 남슬라브인이 어떤 입장을 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상황이었다. (...) 결정적인 순간, 이들은 민족성 수호에 대한 희망 때문에 혁명을 배신했다. 페테르스부르크(제정 러시아)와 올로모우츠(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혁명의 운명을 맡겨버린 것이다.”(1) 비슷한 논리에서 마르크스 역시 “크로아티아인과 헝가리인, 체코인 등 슬라브족의 허름한 불한당들이 빈에서 게르만의 자유를 옥죄었다. 그리고 이제 러시아 도처에서 차르가 판을 친다.”(2)

우크라이나의 역사가 로만 로스돌스키는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이런 주장을 호되게 비판했다. 엥겔스가 본질적으로 민족차별적 논리를 세우려 했다는 것이다. 엥겔스가 독일인을 비롯해 폴란드인, 헝가리인, 이탈리아인 등은 그 성격상 민족자결권을 가질 수 있다고 본 반면, 우크라이나인을 포함한 슬라브족은 “역사가 없는 민족”(3)이라 칭하며 자결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로스돌스키의 이런 지적을 뒷받침할 논거가 전혀 없다. 엥겔스는 그저 1846~1849년 유럽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분석했을 뿐이다. 당시 엥겔스는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유럽 정세를 파악했다. 그 첫 번째는 동유럽과 남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는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계급 간 대립이 발생한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민주주의를 향한 봉기와 반란, 혁명이 일어날 잠재적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분석에는 역사적 연쇄 효과가 컸지만, 그렇다고 이를 넘어선 일반화는 결코 없었다.

 

민족자결권의 도구화

사회주의 이론가 로자 룩셈부르크도 이 문제에 극단적 관점을 드러냈다. 제국주의 내부의 대립으로 1차 대전까지 발발한 상황에서, “조국의 수호라는 명분은 순수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적 상황을 세계적 맥락에서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 고삐 풀린 제국주의 시대에는 민족 전쟁이 존재할 수 없다. (...) 약소 민족국가의 지배층이 강대국 지배층과 공모하고 그들의 손에 놀아나는 상황에서, 약소국은 열강의 제국주의 놀이 속 병졸로 전락하게 된다.”(4)  

그러나, 의외로 로자 룩셈부르크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 1차 대전 초기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비판론을 제기하면서 로자는 “사회주의는 각 민족에게 그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결권을 인정한다”라고 명시했다. 다만 로자는 “지금의 자본주의 국가를 자결권의 표현형으로 제안하는 것은 실로 사회주의의 기만”이라고 선을 그었을 뿐이다.(5) 1차 대전이 끝난 1918년, 로자는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기술한다. 

“민족문제 앞에서 계급투쟁 논리는 확실히 뒤로 밀려난다. (...) 민족주의는 인기가 많기 때문이다. 국가를 구성할 권리를 앞세우며 크고 작은 국가들이 도처에서 생겨나고, 부패한 시신들이 새로운 탄력을 받아 오래된 무덤에서 튀어나온다. 그리고 ‘역사가 없는’ 민족들은 (...) 자신들도 새로운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의무감을 절실히 느낀다.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는 물론 캅카스 지역에서만 10개의 신생국가가 생겨났다. 시온주의자들은 이미 팔레스타인 민족을 격리하기 위한 게토를 구축하고 있다. 실로 민족주의의 밤에 열리는 마녀들의 집회가 아닐 수 없다.”(6)

레닌 역시 수차례에 걸쳐 민족자결권을 주장했지만, 그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맥락을 세심히 고려했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에 대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미 주장한 바와 같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원칙에서 출발한 레닌은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는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프롤레타리아의 혁명 과업에 종속되는 것이었다. 레닌에게는 사민주의의 관점, 즉 계급 이익에서의 관점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가 민족자결권을 인정했다고 해서 각국의 적절한 독립 시기를 사민주의가 직접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외려 사민주의는 자본주의의 발달 상황과 (...)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주의 계급투쟁이 가져오는 이익을 고려해 각각의 경우에 대해 직접적으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7) 

집권한 레닌은 최초의 노동자 국가가 아직 미약하나마 제정 러시아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든 전제 군주제 하에서 억압받는 모든 민족을 – 각자의 바람과 권리를 존중하면서 –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그 외 다른 전략을 쓸 경우, 잘못하면 피억압 민족의 눈에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이 오만한 옛 차르 정권의 연장으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10월 혁명 그 자체를 배신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었다. 레닌이 민족 문제에 있어 ‘대(大)러시아’를 앞세운 스탈린과 제르진스키의 입장을 단호히 비판한 이유다.(8)  

볼셰비키 혁명과 국제 노동자 운동에서의 입지가 상당했던 트로츠키 역시 민족자결권 문제를 여러 차례 짚었다. 트로츠키도 기본적으로는 레닌과 같은 입장을 표하며, 늘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혁명 과업을 지향하면서 민족 자치권 문제를 고민했다. “피억압국에 있어 민족자결권은 민주주의의 기본 해법이다. 이들 국가에서는 신분과 계급의 구속 문제가 국가의 종속 문제와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무엇보다도 평등과 자치권, 혹은 완전한 독립에 대한 요구의 형태를 띤다.”(9) 하지만 트로츠키는 민족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제국주의의 대대적인 유린은 이 문제를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 전쟁 중 소자본가 계급과 사회민족주의 세력은 모두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내세웠고, (...) 교전국 정부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민족주의 구호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서로 맞선 전쟁에서 민족자결권을 내세우던 이들은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를 척결하기 위한 논거로서 이를 활용했다. 

독일 제국주의는 처음엔 제정 러시아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레토니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캅카스 지역의 독립을 이용했지만, 이후에는 우리에게 맞서고자 이를 폭넓게 악용했다. (...) 소비에트 공화국은 (...) 독립 국가를 구성할 각국의 자유와 민족자결권을 대놓고 옹호해왔다. 사회주의로의 과도기에 이런 원칙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잘 알고 있는 우리 당은 이를 다른 모든 역사적 과업과 필요에 우선하는 절대적 교리로 삼지는 않았다.”(10)

 

‘유럽 소비에트 합중국’, 트로츠키의 구상

치욕의 스탈린 정권에 단호히 맞선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추방된 후에도 소비에트 산하 공화국들의 독립에 찬성하고, 이들 국가가 모스크바 중앙으로부터 분리될 권리까지 지지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나 경제적 정치적 측면에서 우크라이나가 점하고 있는 결정적 위치를 고려하면서 트로츠키는 “외쳐야 할 구호는 오직 하나, ‘자유로운 통일 독립국가, 노동자와 농민의 나라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를 위해’ 뿐”(11)이라고 했다. 이 문장에서 트로츠키는 ‘노동자와 농민의 나라 소비에트’라는 표현을 명시했다. 이를 인용하는 이들도 종종 도외시하는 이 문구는, 자결권 문제에 대한 트로츠키의 접근방식을 잘 보여준다.

그는 냉혹한 스탈린 정권의 억압에 시달리던 민족의 독립 요구는 원칙적으로도 정당하다고 봤다. 그것은 또한 정권의 불안을 야기하고 몰락을 재촉할 힘이기도 했다. 전쟁을 앞두고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정권이 무너지면 ‘유럽 소비에트 합중국’ 설립을 위한 새로운 혁명의 시대가 열릴 수도 있었다. 그가 1923년부터 구상한 ‘노동자와 농민의 유럽 통일 공화국’이 연합해 ‘유럽 소비에트 합중국’을 만드는 것이다.(12) 트로츠키에게 있어 민족자결권의 수호는 이렇듯 그가 내세운 ‘영구 혁명론’의 틀 안에 있었다.(13)

혁명과 반(反)혁명이 이어지고 국제 분쟁과 내전이 지속되던 상황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 룩셈부르크, 레닌, 트로츠키 모두 민족 문제와 자결권 문제를 노동 계급의 이익에 종속시켰다. 그들이 내세운 입장은 전반적으로 비슷했지만, 세부적으로는 결이 조금씩 달랐고 룩셈부르크와 레닌처럼 의견 차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절대적인 민족자결권 이론을 구축하려 한 이는 없었다. 

 

 

글·알랭 비르 Alain Bihr
프랑슈콩테 대학 사회학과 명예교수
야니스 타나세코스 Yannis Thanassekos
브뤼셀 자유대학 사회학 연구소 소속 연구원

번역·배영란 
번역위원


(1) Friedrich Engels, ‘Le panslavisme démocratique 민주적 범슬라브주의’, <Neue Rheinische Zeitung 신 라인신문>, n° 194, Cologne, 1849년 2월 15일. 올로모우츠는 1849년 10월 빈 봉기 이후 오스트리아 황제와 궁정 신료들이 피신한 장소로, 천대받던 지역에서 제국의 임시 수도로 격상됐다.
(2) Karl Marx, <Neue Rheinische Zeitung 신 라인신문>, n° 84, 1849년 1월 1일.  
(3) Roman Rosdolsky,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역사가 없는’ 민족. 1848년 혁명에서 민족의 문제 Friedrich Engels et les peuples « sans histoire ». La question nationale dans la révolution de 1848』의 2장에서, Syllepse, Lausanne-Paris, 2018. 로스돌스키는 엥겔스가 폴란드에 대해 슬라브족임에도 민주적 측면에서 혁명 국가로 인식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4),(5) Rosa Luxemburg, 『La Crise de la social-démocratie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1915), La Taupe, Bruxelles, 1970년. 
(6) Rosa Luxembourg, 『Fragment über Krieg, nationale Frage und Revolution』 (1918년 5월), <Gesammelte Werke> 중 4권, Dietz Verlag, Berlin, 1990,  위의 로자 룩셈부르크 저서에서 로만 로스돌스키가 인용.
(7) Lénine, 『Thèses sur la question nationale 민족 문제에 관한 논고』(1913년 6월), <Œuvres 작품집> 중 19권, Éditions sociales, Paris, 1967년. 
(8) Lénine, 『La question des nationalités ou de l’autonomie 민족성 혹은 자치권의 문제 』(1922년 12월), <Œuvres 작품집> 중 36권, Éditions sociales, 1976년.
(9),(10) Léon Trotsky, ‘Le droit des peuples à disposer d’eux-mêmes 민족자결권’, 『Entre l’impérialisme et la révolution』에서, La Taupe, 1970년. 
(11) Léon Trotsky, ‘La question ukrainienne 우크라이나 문제’(1939년 4월 2일), 『Entre l’impérialisme et la révolution』에서, La Taupe, 1970년. 
(12) Léon Trotsky, ‘Les conditions sont-elles mûres pour le mot d’ordre des États-Unis d'Europe ? 이제는 유럽 합중국이란 주장을 할 여건이 성숙했나?’, <Pravda>, Moscow, 1923년 6월 30일. 
(13) Léon Trotsky, 『La Révolution permanente 영구 혁명론』 (1928-1931), Gallimard, Paris, 196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