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라늄 광산에 방치된 독일 예술
서독인들은 예술이 정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돈이 될 수는 있어도 말이다. 이런 기준에 따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노동자들을 위한 작품들은 동독의 산업 황무지 지하실에 방치됐다. 한때 ‘카를마르크스슈타트(카를 마르크스 시)’라고 불렸던 독일 켐니츠에서 발견된 이 그림들처럼 말이다.
공로 훈장으로 가득한 커다란 유리장, 장막처럼 묵중해 보이는 붉은색의 노동절 깃발이 달린 진열장. 그리고 지도와 기술 도면이 보관된 문서철이 있고, 서류 여백에 적힌 러시아어를 주의 깊게 살피는 사람이 보인다. 니코 로세는 마치 고대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으로 걸어 들어가듯 운영을 중단한 비스무트 소련·독일 광업주식회사(SDAG Wismut, 이하 비스무트)의 창고로 들어간다. 비스무트는 소련의 핵무기 제조용 우라늄을 비밀리에 채굴했고 전성기에는 직원이 10만 명에 이르던 대기업이었다. 이 탐험 끝에 니코 로세가 맨 구석에 있는 방의 문손잡이를 돌리자, 가장 은밀하고 중요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속의 눈에서 떨어진 이곳 켐니츠 교외에 비스무트 본사가 쓰던 건물이 있고, 위풍당당한 외벽의 기둥 안쪽에는 지상 최대 규모의 독일민주공화국(동독) 미술품이 소장돼 있다.
광산업체가 예술에 관심을 쏟은 이유
방사능 오염에 따른 막대한 환경 피해를 복구하고 정화 사업을 펴는 재단에서 부국장으로 일하는 45세의 니코 로세는 “비스무트는 이곳에서 우라늄 채굴이 시작된 1946년부터 1990년까지 예술작품 약 4,300점을 수집했다”라고 설명한다. 로세는 자기 몸집보다 더 큰 그림 한 점을 꺼내 천장에서 쏟아지는 희미한 빛을 비춰 보인다. 에바 슐체크나베의 1973년 작 그림 속 4명의 광부가 장장 30여 년 만에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세상에 나온 광부들은 온 힘을 다해 작업을 시작할 듯하다. 로세가 설명했다. “작품 주제는 대부분 광산과 관련이 있습니다. 화가들은 갱도에서 작업하는 광부들을 관찰할 수 있었거든요.”
동독의 대형 광산업체가 왜 예술활동에 관심을 쏟았을까? 보안 유지를 위해 비스무트는 동구권 전체의 우라늄 채굴을 도맡았고, 광범위한 인프라와 사업망을 구축했다. “직원들은 사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했었어요. 별도의 휴가 전담 기구도 있었답니다.” 로세가 강한 작센 지방 억양으로 설명했다. 국가에서 학교, 영화관, 상점, 스포츠 클럽, 레저 센터를 지어줬다. 광부들은 방사능을 비롯한 각종 위험에 노출돼 있었고, 그 보상으로 일반 시민보다 더 나은 생활 조건을 누렸다. 비스무트는 직원들 생활 전반을 책임졌다. 미술 교육도 그중 하나였다. 그래서 미술관을 세우고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그렇게 제작된 작품은 미술관뿐 아니라 구내식당과 작업장에도 전시됐다.
“예술작품 창작 지원과 수집은 사실상 국가 속의 또 다른 국가였던 비스무트의 전체 기능 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로세는 진열된 작품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가 액자를 움직이자, 동독 시절에 가장 유명했던 화가들 작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베르너 페촐트, 프랑크 루디크카이트, 알렉산드라 뮐러욘체바, 한스 지겐브루크.” 칼 쿤 작품 세 점이 있다. 라이프치히 학파의 베르너 튀프케와 빌리 지테 작품도 보이고, 카를하인츠 베스텐부르거가 그린 광부들의 초상화와 풍경화도 있다. 이들 중 다수는 동독에서 권위 있는 상을 받았고, 최고 수준의 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했지만, 동독 붕괴 후에는 세상에서 잊혀져갔다.
지난 30년 동안 동독 지역의 몇몇 소도시에서 극소수의 작품을 짧은 시간 동안 선보인 적이 있긴 하지만, 이처럼 드물고 아는 사람들만 보는 전시회가 아니면 비스무트의 소장품들은 대중의 눈에 띄지 않는 창고 깊숙한 곳에 파묻혀 있었다. 냉전, 소비에트 연방, 실패한 이데올로기와 한데 묶여 동독의 미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구심의 대상으로 남아 있으며, 전체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선전 도구라고 비난받는다. 로세가 설명을 이어갔다.
“독일이 통일된 후에 동독의 미술 작품들이 정치적 색채를 띤다는 이유로 폄하되곤 했어요. 이곳 소장품 중에는 커미션을 받아 제작된 작품도 있습니다. 이런 재원은 예술가들의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죠. 하지만 이런 관행은 동독만의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예술의 역사를 관통할 만큼 일반적이었습니다. 관건은 예술가들이 얼마나 압력을 받았는가, 지배 이데올로기에 동조했는가입니다. 여기 있는 그림들을 보면 권력의 영향이 비교적 약했던 듯해요. 정권을 미화하는 그림도 있지만 비판적 시선을 담은 그림도 있습니다. 이런 두 가지 면모야말로 이 소장품들의 가치를 높여준다고 봅니다.”
이 주장의 근거로 로세는 두 가지 그림을 비교했다. “베르너 페촐트의 <평화적 핵에너지 사용>은 원자 폭탄 생산을 목적으로 세워진 비스무트의 성격에 잘 맞는다고 할 수 있죠. 반면, 쿠르트 페슬의 <로네부르크 풍경>은 적나라한 사실주의로 광업으로 인해 파괴된 자연을 표현했어요.” 재단이 상설 전시를 열거나 박물관을 세우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로세는 한숨을 내쉬었다. “독일 정부에서 나오는 돈은 자연환경을 복구하는 목적으로만 쓸 수 있습니다. 예술작품 전시에 쓸 돈은 없죠.”
예술인가? 선전인가?
비스무트 재단은 작품들을 망각 속으로 사라지게 방치할까, 아니면 세상에 나와 빛을 보게 할까? 어떤 쪽이 됐든 여기에 소장된 미술품의 운명은 켐니츠 인근 광산에 다량으로 매장된 우라늄에 달려 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미국이 핵무기의 파괴력을 입증하자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원자 폭탄 개발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하지만 소련의 광범위한 영향권 안에서 우라늄이 충분히 매장된 곳은 동독지역이었던 작센과 동부 튀링겐뿐이었다.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 스탈린이 모든 노력을 쏟아 부은 곳이 바로 여기 비스무트다. 이 사업의 성패는 어떤 방향으로든 환경과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우라늄 채굴 사업은 전폭적인 투자와 철저한 통제 속에서 진행됐다. ‘소련·독일 광업주식회사’를 뜻하는 SDAG는 양국이 평등한 관계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우라늄 채굴 사업의 통제권은 확실히 모스크바에 있었다. 우라늄 개발 사업이 비밀리에 추진된 점은 로세가 지적하듯 ‘비스무트’라는 이름에서부터 드러난다.
“비스무트(Wismut 혹은 Bismuth)는 우라늄과 무관한 금속이고, 주로 합금 덮개나 뚜껑을 만드는 데 사용됩니다. 그 이름처럼 모든 영역에서 철저한 통제가 이뤄졌어요. 소련군이 철책을 설치하고 철통같은 방위 태세를 유지했습니다. 광부들은 엄격한 통제를 받았고, 상시 신원확인 절차를 따라야 했죠. 사진 촬영은 철저히 금지됐고요. 그 밖에도 광산의 실제 기능, 적용기술, 우라늄의 채굴량을 감추려는 여러 조치가 있었습니다.” 로세가 몸을 숙여 보관함을 들더니 덮개를 제치고 수채화와 석판화 작품들을 꺼냈다. 이 두 가지 양식은 비스무트 수장고의 다양성을 더한다. “글뤼크 아우프(Glückauf, 무사귀환)!” 로세가 외쳤다. 과거에 광부들이 갱도로 내려가기 전에 서로 행운을 빌며 건네던 인사말이다.
초상화 속 광부가 말을 건넨다
우리는 켐니츠 중심부로 가는 지역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 도시에서 가장 큰 기념물(7미터 높이의 카를 마르크스 청동상으로 켐니츠가 ‘카를마르크스슈타트’라고 불리던 시절이 있었음을 상기시켜줌) 발치에서 예술 평론가 부르카르트 뮐러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뮐러는 ‘평화적인 원자력 사용’이라는 문구가 적힌 비스무트 소장품도 일부 포함된 도록을 팔 밑에 끼고 있었다. 비스무트의 소장품은 그에게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쥐도이체 차이퉁>과 <디 차이트> 신문에 기고문을 실었다.
62세의 평론가 뮐러는 “인상적인 소장품이지만 아무도 이 작품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 작품들을 제대로 분류하거나 평가한 사람이 없었어요. 엄청난 걸작들이 끔찍하게 열악한 조건에서 평범한 그림들과 뒤섞여 있습니다. 소장 미술품의 작가들은 대부분 잊혔지만, 그중 빼어난 실력을 갖춘 작가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지배적인 편견과는 달리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 천편일률적인 주제는 아닙니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란 동독을 포함해 바르샤바 조약국에서 대두된 회화 기법으로 붉은색을 많이 사용하고 ‘승리한 운동선수, 빛나는 노동자, 영웅적 군인’등의 인물을 통해 사회주의 정권의 위엄을 강조하는 단순하고 받아들이기 쉬운 시각적 언어를 말한다. 뮐러는 도록을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비스무트 작품들이 실린 쪽을 펼치더니 광부들의 검게 그을린 얼굴과 상처 난 손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광부들의 초상화를 보고 감명받았어요. 광부가 등장하는 작품이 많은데, 인물 한 명 한 명의 존엄이 드러납니다. 정치인이나 사업가 초상화는 하나도 없답니다. 다들 노동자들이죠.” 마지막 말에서 동독 시절에 적극적으로 묘사된 인물상과 오늘날 독일 사회상의 대비를 드러냈다.
“이 작품 좀 보세요.” 뮐러의 시선은 루츠 R. 케처의 작품 <버스>에서 고정됐다. 버스에 탄 여러 사람 중에서 나이 든 광부가 유독 눈에 띈다. 오랜 세월의 고된 노동으로 지친 광부는 체념한 듯이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인다. 작가는 밤길을 달리는 버스 차창에 불빛이 비친 광경을 독창적인 표현법으로 흥미롭게 묘사해 냈다. 저 멀리에 위협적인 우라늄 가공 공장이 있지만, 불길하게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연기와 어두운 배경 때문에 겨우 윤곽만 눈에 들어온다. 뮐러는 이 그림이 저명한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에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면서 말했다. “커다란 유리 차창에 고독이 비쳐요. 탁월하고 섬세한 표현력이죠. 무명 화가의 작품입니다. 비스무트 소장품 보관 창고에는 이런 작품들이 가득해요.”
뮐러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작가 저마다의 개성이 돋보이는 스타일이다. 대기업 커미션을 받은 예술가 대다수가 예술적 자유를 누렸다는 점, 그리고 커미션을 준 기업이 중시했을 법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규범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세상의 시선에서 이 놀라운 작품들을 멀어지게 하는 ‘덮개’만큼 큰 무관심을 안타까워하며 뮐러는 한 기억을 떠올린다.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독재 정권의 공식 예술이라고 여기는 작품을 모두 외면했어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비스무트 창고에 쌓여 있는 작품들은 더없이 불순한 예술품일 뿐이겠죠.”
“동독의 예술은 깊은 혐오의 대상이 됐고, 망명하지 않고 동독에 남은 화가들은 단순히 체제에 봉사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작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죠. 그 결과, 동독 역사상 가장 중요한 미술 작품들이 오늘날까지 대중이 접근할 수 없는 상태로 방치돼 있답니다. ”
뮐러는 2025년에 켐니츠가 유럽의 문화 수도로 선정되면 비스무트의 작품들도 세간의 관심을 끌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 작품들은 분명히 관심을 집중시킬 겁니다. 이 도시에는 아주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거든요.” 뮐러는 이렇게 단언하면서 도록을 접었다. 도록 표지에 있는 베르너 페촐트 작품의 광부는 비스무트의 작품들을 망각의 갱도에서 끌어내 달라는 듯, 독자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다.
글·젠스 말링 Jens Malling
언론인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