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마피아’와의 한판, 재생에너지동맹이 떴다

Corée 특집 탈핵 시대의 도래

2012-03-13     이상훈

원자력발전을 맹목적으로 추진해서 이익을 좇는 이권집단이 있다. 언론에선 이들을 '원자력마피아' 혹은 '핵마피아'라고 지칭한다. 원전 이권 구조에 참여하는 이들은 건설회사와 원전시설 제조업체, 철강·시멘트 등 관련 업계, 이들과 결탁한 일부 정치가, 원전을 밀어붙이는 엘리트 관료, 원자력 관련 연구를 하는 대학과 국책연구소 등이 있다. 이들의 역할은 산업 진흥, 안전 규제, 학문 연구 등으로 나뉘지만 결국 원자력산업 부흥을 목적으로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끈끈하게 결속하는 원자력 '패밀리'를 형성한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도쿄전력과 일본 정부가 보여준 정보 왜곡과 은폐, 언론 통제과 여론 조작 등은 원자력마피아의 원자력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산-학-정-관의 원전 패밀리

원자력은 에너지원의 하나이고 원자력산업은 발전산업의 일부이지만 원전은 전력 수급 안정과 에너지원 다원화, 산업 진흥의 차원 말고도 정치적·군사적 맥락에서 추진되는 경향이 있다. 원자력발전은 태생 자체가 핵무기 개발의 산물이면서 탄생과 초기 성장도 에너지 개발과 산업적 이해보다는 군사적·정치적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 지금도 핵무기 공식 보유국인 미국·프랑스·영국·러시아·중국이 전세계 원전 용량의 55%를 차지한다.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1953년 말 주창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은 원자폭탄 기술을 독점적으로 통제하면서, 동시에 일부 기술을 공개·개방하고 민생용 원전산업을 육성해 산업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옛 소련과의 핵무기 경쟁 속에서 원자력 협정을 통해 자신의 영향 아래 있는 일본·한국 같은 국가들을 통제하고 원자력 시장을 석권하려는 것이었다.

패전 뒤 일본 정치가들은 핵무장을 통한 강대국 건설에 관심이 컸다. 기시 노부스케,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 전후 부흥을 주도하며 총리를 지낸 국가주의적 정치가들이 핵무장을 통한 대국화의 길을 열려고 핵기술 보유를 지휘했다. <일본 핵발전의 진실>을 쓴 일본의 양심적 지성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일본 원전이 전력회사가 선택한 산물이 아니라 "유력 정치가와 엘리트 관료들이 강력한 주도권을 쥐고 추진"했다고 지적한다. 국가주의적 정치가들이 대국화를 노리고 일본을 잠재적 핵국가로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 원전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핵무기의 가공할 파괴력과 방사능 피폭을 경험한 일본 민중은 원수폭금지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했고, 매년 8월 원수폭금지 세계대회를 개최하는 등 핵무장화에 활발히 저항했다. 하지만 원자력마피아의 컨트롤타워 구실을 하는 일본의 강력한 관료 집단은 시민들의 반발과 저항을 일정 수준에서 제어하며 핵무기 잠재적 보유국으로서 원자력 강국 일본을 완성했다. 도널드 레이건 정권과 1982년 출범한 나카소네 내각은 미-일 원자력협정을 개정했고 그 뒤 일본은 핵연료 사이클 형성을 위한 핵연료재처리시설, 고속증식로, 우라늄 농축시설 건설에 박차를 가해 플루토늄 대량 보유의 길을 걷고 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을 인식한 한국의 정치가들도 원자폭탄을 갈망했다. 한국전쟁 뒤 이승만 대통령,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김성삼 의원 등은 공개적으로 원자폭탄 보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고대승 박사는 "한국이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맺고 원자력기구를 설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원자력이 지닌 군사적 측면에 있었다"고 분석했다. 물론 미국이 한국의 이런 의도를 외면하는 바람에 한국이 초기에 구입한 원자로는 군사적 이용은 물론 발전용 이용도 어려운 연구용 원자로에 그쳤다. 이어진 박정희 정권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욕망은 김진명의 베스트셀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픽션을 통해 소개된 바 있고, '평화적 핵주권론'이란 미명 아래 여전히 대중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한국 원자력계의 오랜 숙원인 핵연료 재처리는 원자력산업의 고도화 차원에서 요구되지만, 남북 간 군사적 대치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탄생한 평화적 핵주권론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

이렇듯 북한핵을 포함해 핵무기에 둔감한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정서는 국내에서 원전산업이 쑥쑥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한국의 원자력마피아는 산업계·학계·정부·언론·규제기관·지역주민 등이 복잡하게 상호이익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그 연결망의 중심에는 원전산업계가 자리잡고 있다. '에너지정의행동'은 한국의 원자력마피아를 분석했는데, 한국 원자력산업계의 규모는 2009년 기준으로 약 16조 원에 이른다. 발전 관련 사업체 매출이 약 12조 원으로 75%를 차지한다. 인력은 2만3천여 명이다. 그중 59%가 원전 건설 및 운영과 관련된 일자리다. 원전 건설이 지속되다 보니 투자 금액도 8조3천억 원에 이른다. 원전 건설은 현대건설이 지배하는 가운데 대우건설·삼성물산·대림산업 등 대형 건설사들이 참여하며, 두산중공업이 원자로 제조를 담당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현대건설 재직 당시 원전 건설을 주도했다. 산업 규모에 비해 원자력계의 영향력이 큰 것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개입 때문이다. 정부는 원자력 홍보를 목적으로 설립된 원자력문화재단에 연간 100억 원을 지원해왔고, 연구개발기금으로 연구소와 대학에 연간 2천억 원 이상을 지원하고 있다. 원전 수출엔 대통령과 국방부까지 나서서 총력을 기울인다. 원자력을 이해하는 여성 모임, 한국여성원자력전문인협회, 원자력정책포럼, 한국원자력협력재단 등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이런 원자력마피아를 옹호하는 다양한 민간단체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

한·일, 원폭을 향한 은밀한 스트레칭

반전반핵운동, 반원전운동에서 태동하고 성장한 재생에너지동맹은 독일이 원전을 탈피해서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1970년대 반핵운동의 규모와 기세가 대단했다. 베를린자유대의 미란다 교수에 따르면, 동서로 분단된 독일은 스스로 핵무장을 하면서 핵무기 개발이 국가 정체성의 일부를 형성한 프랑스와 달리, 미-소 냉전에서 핵전쟁의 공포를 느끼면서 반전반핵운동이 활발했고, 이것이 1970년대 독일의 반핵운동으로 이어졌다. 핵무기에 대한 민감성의 차이가 탈핵국가 독일과 원전국가 프랑스의 반핵운동 차이, 결국엔 원전 정책 차이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독일의 반핵운동 세력은 반원전 시위를 조직하는 한편, 점차 정부 에너지 정책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런 반핵운동의 결과로 1977년 독일에서 생태연구소가 설립됐다. 생태연구소는 독일의 탈원전 에너지 정책의 수립에 깊이 간여했고,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 에너지 전환 연구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민간 연구소로 성장했다. 독일 시민들은 에너지 절감 정책과 재생에너지 기술 개발을 주장하면서 스스로 에너지 절약을 실천하고, 값비싼 재생에너지 시설을 이용하려는 노력을 펼쳤다.

한국의 환경연합 에너지대안 모임은 1998년과 2000년 독일의 에너지 전환 현장을 돌아보면서 많은 이들을 만났다. 독일의 중견 태양열기업 바그너솔라의 바그너는 하노버대학 정치학과를 다니면서 반핵의 대안을 고민하다가 친구들과 태양에너지 회사를 설립해서 운영해왔다. 그처럼 진로를 바꿔 재생에너지 이용과 보급에 나선 교사, 시의원, 농부 등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시민들의 노력 덕분에 1990년 '1천 태양광지붕 프로그램'이 도입되고 1991년부터 '전력매입법'이 시행됐다. 이 법은 재생에너지 전기에 대해 지역 전기회사가 소비자가격의 80~90%에 매입할 것을 규정했다. 이 법이 제정된 뒤 독일의 풍력발전 용량이 빠르게 증가했다. 하지만 발전 단가가 비싼 태양광은 보급이 늘지 않았다.

1992년 말 아헨의회는 태양에너지지원협회라는 시민단체의 제안으로 기준 가격에 태양광과 풍력전기를 구매하는 규정을 통과시켰다. '아헨 모델'이 시작되면서 태양광발전의 수익성이 크게 개선돼 태양광 보급이 빠르게 늘기 시작했다. 아래로부터 반핵운동이 에너지 대안운동으로 성장·발전해갈 때 이를 토대로 원자력 폐쇄와 탈핵을 정책으로 내건 녹색당이 1980~90년대 빠르게 성장했다. 1998년 사민당과 녹색당이 적녹연정으로 집권에 성공하면서 원자력발전을 포기한다는 합의가 실현된 뒤, 2000년 연방정부는 기준가격구매제를 핵심으로 하는 재생에너지법을 제정해 재생에너지 보급은 날개를 달게 된다. 2000년대 독일은 재생에너지 비중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1990년 3.5%에서 2011년 19.9%로 커졌다. 2011년 11월 100만 번째 태양광발전소가 세워졌다. 재생에너지 보급에는 각성한 시민들과 소규모 조합의 역할이 컸다. 2010년까지 독일에 세워진 재생에너지 발전 시설 중 40%가 일반 시민의 소유이고, 11%는 농부가 소유한 것이라고 한다. 2010년 재생에너지 분야에서 266억 유로의 내수시장이 형성됐고, 이를 통해 일자리 36만7천 개가 만들어졌다.

MB의 현대건설, 원전 건설 주도

그동안 국내에서도 반핵운동 과정에서 대안이 모색되면서 2000년 환경연합 에너지대안센터가 설립되고, 에너지 절약 운동 확산을 위한 연대기구로 에너지절약시민연대가 창립됐다. 그 뒤 신재생에너지법이 제정되고 발전차액지원제도가 도입되면서 재생에너지 보급 속도도 빨라졌다. 하지만 핵에 둔감하고 원전에 우호적인 여론 때문에 원전은 계속 확대되는 반면, 재생에너지는 보조적 에너지원에 머물렀다. 발전차액지원제도는 시민이나 조합이 참여하는 시민발전소 건설에 활용하기보다는 대기업이 대규모 발전소를 통해 높은 수익을 올리는 기회가 되었다. 에너지 절약 운동에도 불구하고 값싼 전기요금 때문에 산업용·난방용 전력 소비가 급증하면서 한국은 2002∼2010년 전력 소비가 56% 급증했다.

하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완고하고 일관된 원전 확대 정책을 관철해가는 원자력마피아에 대항하기 위해 국내에도 에너지 대안 세력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1970년대 반핵운동이 왕성했던 독일도 1986년 체르노빌 사고를 거치면서 원전에 비판적인 여론이 과반수를 이뤘듯이, 한국에서도 후쿠시마 이후 원전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크게 확산됐다.

후쿠시마 이후 대반격 시작

이런 분위기의 변화에 힘입어 '핵 없는 사회를 위한 공동행동'에 생활협동조합·종교계·지역단체 등이 대거 참여하고, 지난해 11월 교수 200여 명이 참여하는 탈핵교수모임 출범을 시작으로 지난 1월 29일 의사 109명이 참여한 반핵의사회, 2월 7일 젊은 변호사들이 주축이 된 탈핵법률가모임 등이 발족하는 등 탈핵 운동의 저변이 크게 확대됐다. 또한 3월 6일 에너지대안포럼의 에너지 대안 시나리오 발표, 4월 그린피스 한국지부의 <에너지혁명> 발간 등 에너지 대안 정책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비록 수출주도형이라는 편향을 보이지만 국내 신재생에너지산업은 2010년 고용인원 1만3380명, 매출액 8조1282억 원, 수출액 45억8천 달러, 민간투자 3조5580억 원으로 성장했다. 유년기의 재생에너지산업이 정부의 눈치보기에서 좀더 자유로워진다면 시민사회·녹색정치와 결합해서 원자력마피아에 대항하는 재생에너지동맹은 훨씬 강고해질 것이다.

독일이 했다면 한국의 재생에너지동맹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원자력마피아가 해체되고 핵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고 안전한 한국의 미래는 꿈이 아닐 것이다.


글•이상훈
환경연합 에너지기후위원.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