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민주화운동, 달라지는 소비자

Corée 특집 탈핵 시대의 도래

2012-03-13     이유진

지난 1월, 일본 후쿠시마 식품점 진열대에 놓인 배추와 토마토를 한참 바라보았다. 소담스럽게 담긴 채소 바구니에 '지산지소' 푯말이 붙어 있었다. '지역에서 난 농산물을 지역에서 소비하자'는 이 운동은 우리의 로컬푸드 운동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활발했지만, 후쿠시마 사고 이후 앞날을 가늠하기 힘들어졌다. 지금 후쿠시마의 농민과 어민들은 방사능에 오염된 땅과 바다를 바라보며 절망하고 있다. 지진이나 홍수, 폭설 같은 재난은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지만 방사능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사고로 고향을 떠난 원전 난민만 16만 명이다.

수도권, 핵발전 윤리에 눈뜨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뒤 1년, 지방자치단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1월 9일,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에서 에너지 소비를 줄여 원전 1기를 줄인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2월 13일에는 '탈핵-에너지 전환을 위한 자치단체장모임'이 출범했다. 전국 228개 지자체의 21%인 45개 지자체장이 참여했다. 참여 지자체들이 전력 소비를 10% 줄이면 핵발전소 2기를 대체할 수 있다고 한다. 45개 지자체 중에서 서울 15개 구, 인천 7개 구, 경기도 10개 시 등 32곳이 수도권이다. 후쿠시마 학습효과로 수도권에서 핵발전소의 위험성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수도권에 전기를 공급하는 핵발전소 지역 주민들이 겪는 고통을 이제야 보기 시작한 것이다. 탈핵에너지교수모임, 반핵의사모임, 탈핵법률가모임(해바라기), 핵 없는 사회를 위한 공동행동, 탈핵종교인 모임, 녹색당 등 '탈핵'을 기치로 내건 다양한 조직이 결성되고 적극 활동하는 것도 한몫했다.

지난 2월 21일 열린 '서울시 원전 1기 줄이기 시민 워크숍'에는 '삼척 핵발전소유치백지화투쟁위원회' 이광우 정책실장이 초대됐다. 그는 아직 짓지도 않은 핵발전소가 이미 지역 공동체와 민주주의를 완전히 파괴하고 있다고 전했다. 원전을 유치하려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의 갈등이 첨예한데다, 유치를 위해 동원되는 거짓말과 편법이 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한 달 전 송전탑 반대 운동을 하다 분신한 경남 밀양의 이치우씨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다. 워크숍에서는 자연스럽게 서울의 전력 소비 증가가 지역에 핵발전소 증설이라는 고통을 안겨주기에 서울에서 '원전 1기만큼'의 전력을 꼭 줄여야 한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일본 영화 <도쿄핵발전소>는 도지사가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핵발전소 유치를 선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도지사는 "도시에서 전기를 많이 쓰기 때문에!", "지방에 대형 발전소를 지으면 자연을 파괴하고, 철탑으로 경관을 훼손하기 때문에!", "정부 보조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유치하자고 주장한다. 영화에서 역설적으로 꼬집었듯이, 우리나라에서도 핵발전소나 방사성폐기물처분장 후보지로 몸살을 앓은 지역에서는 '그렇게 안전하면 청와대나 국회가 있는 서울에 짓자'는 구호가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뒤늦었지만 그 애타는 목소리에 수도권 시민들과 지자체장들이 귀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지자체장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김성환 서울 노원구청장은 월계동 방사능 아스팔트 사고로 깨달은 것이 많다고 했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연간 피폭 허용선량 이하로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어린이와 임산부, 장기적 노출에 대한 주민들의 불안감을 잠재울 수 없었다. 지자체에서 걷어낸 방사능 아스팔트를 처리할 방법이 없는데도, 중앙정부는 비협조적이었다. 그는 중·저준위방사성폐기물조차 제대로 처리 못하는데, 수만 년을 보관해야 하는 고준위폐기물은 어떻게 할 것인지 답답했다고 한다. 차성수 서울 금천구청장은 "지금까지 스위치만 켜면 불이 들어온다고 생각했던 에너지 소비자들이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생산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며 "이번 선언에는 핵발전소가 있는 지역이 참여하지 않았는데, 궁극적으로 에너지 소비 지역이 생산 지역과 연대해야 한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지자체의 적극적인 대응은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감지된다. 지난 1월 15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탈원전세계대회에 후쿠시마를 포함한 전·현직 시장 8명이 참가해 '탈핵을 위한 지자체장 네트워크'를 결성했다. 2월 27일에는 교토·오사카·고베 시장이 간사이전력에 탈원전을 위한 구체적인 일정을 제시할 것과 전력 수급 정보를 공개하도록 촉구하는 공동의견서를 발표했다. 간사이전력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에서는 지금 총 54기의 핵발전소 중 52기가 멈춘 상태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정기 검사를 마치고 재가동하는 핵발전소가 없기 때문이다. 남은 2기도 4월 하순이면 모두 정기 검사에 들어간다. 지자체들은 새로운 안전 기준을 정부가 제시하지 않는 한 재가동을 인정하지 않겠다며 버티고 있다. 이런 지자체를 뒷받침하는 것은 핵발전소 사고의 위험을 실감하고 있는 주민들이다.

중앙정부에 반기 드는 지자체들

한국의 '탈핵-에너지 전환을 위한 자치단체장모임'은 선언문에서 수명을 다한 핵발전소 폐기와 추가 핵발전소 건립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2024년까지 핵발전소 14기를 추가 건설한다는 정부 방침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중앙정부가 에너지 정책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국가다. 한국은 지식경제부가, 일본은 경제산업성이 에너지 수급 계획을 세우고 집행한다. 후쿠시마 사고 전까지 두 나라가 경쟁적으로 핵발전소 수출산업화 정책을 펼친 것도 중앙정부의 전폭적인 주도하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자체가 중앙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나선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우리나라는 1995년 지방자치제를 실시하면서 지역에너지 사업을 시작했지만, 에너지 정책 분권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자체의 역할은 에너지 절약, 홍보, 안전관리, 재생 가능 에너지 시설 보급 정도이고, 예산·인력·권한이 턱없이 부족하다. 지자체 스스로도 에너지 문제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지난해 9월 15일 대정전이 지자체장들의 생각을 바꿨다. 먼저 후쿠시마 이후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원전 건설을 폐지하거나 재검토하는데 한국 정부만 나서서 '원전 르네상스'를 외치는 것이 불안한 것이다. 원전 추가 건설 계획은 중앙정부가 세우지만 발전소가 들어서는 지자체에서는 그에 따른 입지 갈등, 송전탑과 온배수, 지가 하락과 주민 건강 등 모든 문제를 감내해야 했다. 더불어 수요 관리를 등한시한 결과 9월 15일, 656만 가구에 전력 공급이 끊기는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공급 중심의 낮은 전기요금 체계가 소비 증가를 불러왔고, 원전을 추가로 지으면서 전력 소비를 끌어올리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 원전 중심의 전력 공급 방식은 전력망의 안정성을 떨어뜨린다. 원전 중심의 정부 정책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지차체장모임은 중앙집중형 핵발전소 중심 에너지 정책을 지방분산형 신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전환하고, 지자체 스스로 에너지 행정을 강화할 것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를 위해 지역에너지계획과 조례를 만들고 에너지 전담팀을 구성할 계획이다. 에너지 정책의 무게중심을 원자력에서 재생 가능 에너지로, 공급에서 수요 관리로, 중앙정부에서 지자체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자리와 소득 창출도 기대하고 있다. '탈핵-에너지 전환을 위한 도시 선언문'에는 "농어촌 대부분의 가옥 지붕에 태양광발전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건물의 단열 효과를 높이는 과정에서 마을 단위로 에너지 협동조합을 만들고, 풍력과 지열을 활용하는 과정에서 무너지는 농어촌과 중소도시는 새로운 활력을 찾게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탈핵을 통한 분산형 전원 시스템이 지속 가능한 에너지 정책 전환의 방향일 뿐만 아니라 지역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생협·여성단체, 생활 속 실천 선언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4주년 특별 회견에서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우리나라는 현실적으로 원전밖에 없다"고 발언했다. 우리 사회에서 탈핵이 쟁점화되는 것을 의식한 발언으로 보인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핵발전소의 위험과 과장된 경제성을 밝히는 정보가 많아졌다. 이제 정부가 '원전=청정에너지'라고 주장해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시민은 많지 않다. 핵발전소에 관한 정보의 확산은 시민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탈핵을 하려면 시민들의 의식 변화, 탈핵 정책 비전 제시, 정치 의제화 과정이 뒷받침돼야 한다. 의식 변화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먼저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의 탈핵 선언이다. 한살림은 지난 1월, '정부의 핵발전소 확대 정책에 대한 한살림의 입장'이라는 발표를 통해 "밥상에 오르는 먹을거리에 대해 방사능 오염 정도를 측정하는 수준을 넘어서 핵 없는 생명 세상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30만 조합원, 2천여 가구 생산자들과 함께 비상한 각오로 에너지 소비를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올해 3·8 여성대회에서 선택한 화두는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었다. 에너지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변신하는 더욱 적극적인 사람들도 있다. '서울시민 햇빛발전협동조합'은 서울시 건물 옥상 50곳에 5MW 규모의 발전소를 설치할 계획이다. 서울시와 교육청이 공공기관과 학교 지붕을 내주면, 협동조합은 발전회사와 특수목적회사를 차려 햇빛발전소의 운영과 홍보를 맡는 방식이다. 조합에는 마을공동체 운동 활동가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환경단체가 적극 참여하고 있다.

시민들이 모이면 다음으로 '탈핵'이 가능하다는 것을 정책적으로 보여줄 비전이 필요하다. 독일에서는 1977년 창립된 '생태연구소'가 탈핵의 비전과 논리를 제공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탈핵에너지교수모임에서 적극 활동하고 있다. 민간 연구소인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와 그린피스에서 각각 탈핵을 목표로 삼은 한국의 에너지 전환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다. 서울시의 '원전 1기 줄이기' 정책과 지자체장 모임에서 지자체의 에너지 행정 강화를 위한 정책을 발표하면 좀더 다양한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지역·시민 중심의 운동 점화

탈핵의 정치 의제화도 시작됐다. 통합진보당이 4·11 총선 공약으로 탈핵을 표방했다. 진보신당도 '2030 탈핵을 위한 제안'을 발표했다. 전력 소비를 30% 줄이고, 재생 가능 에너지를 30% 늘려, 2030년에 핵발전소를 폐쇄한다는 계획이다. 3월 4일에는 '탈핵'을 제1의 목표로 설정한 녹색당이 창당했다. 짧은 기간에 5개 광역시도당에서 당원 1천 명을 모으는 쉽지 않은 일을 해냈다. 민주통합당은 원전 정책 전면 재검토 정도를 표방하고 있고, 새누리당은 소식이 없다.

후쿠시마 사고는 원자력이 어떤 에너지인지, 원전에 의존한 전력 생산·소비 시스템을 유지했을 때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이를 교훈으로 2012년 한국 사회에서 중앙정부와 거대 발전사, 공기업이 지배하던 원자력 중심의 에너지 정책을, 지역과 시민 중심의 정책으로 전환하려는 운동에 불이 붙었다. 수동적 에너지 소비자에서 에너지 선택권을 주장하는 일, 그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탈핵을 위한 정치·사회 운동을 확산시키는 일, 나아가 에너지 소비자에서 에너지 생산자가 되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지금껏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에너지 민주화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2012년 급변하는 정치 지형 속에서 '탈핵'을 통한 에너지 민주화 운동이 성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글•이유진
저서로 <기후변화의 유혹, 원자력>(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