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영어, 그러나 허술해진 학문

Corée

2012-03-13     최경봉

 영어는 거부할 수 없는 언어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위상이 흔들리는 징조는 곳곳에서 감지되지만, 영어의 위세가 꺾일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힘이 강해지든 약해지든 이미 영어는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분야의 지식이 국제적으로 유통되는 거의 유일한 통용어이기 때문이다.

거부할 수 없는 권력 언어

언어의 평등한 공존을 중시하는 유럽연합(EU)이 공용어 수를 늘리고 있지만, 공용어가 늘수록 아이러니하게도 통용어로서 영어의 사용 빈도는 높아진다. 프랑스와 독일이 이끌어가는 EU이지만, 프랑스어와 독일어는 영어를 뛰어넘는 통용어가 될 수 없다. 이유는 단 하나, 이미 국제통용어로 자리를 굳힌 영어가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어할 줄 아세요?"라는 질문이 18세기 유럽 사교계에서 그 사람의 수준을 가늠하는 데 애용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추억으로 언급될 뿐이다.

더구나 영어로 생산되는 지식의 양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영어 텍스트를 번역한 번역서는 세계 번역서의 60~70%를 차지하는 데 비해, 다른 언어 텍스트를 영어로 번역한 번역서는 세계 번역서의 2~3%라고 한다. 영어로 생산되는 지식이 세계적 지식의 흐름을 선도한다고 할 만하다. 이 정도면 영어를 배워 직접 지식 세계에 접근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국에서 영어 열풍을 '광풍'으로 표현하며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건 감정적 불편함일 뿐 그들 또한 광풍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결론은 분명하다. '영어를 열심히 배워 지식을 확장하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세계시장에 선보일 만한 지식을 생산해야 한다. 물론 영어로.' 세상에서 낙오되지 않는 길이다.

그러나 영어만으론 세상 못 움직여

대개 어른들의 충고는 고리타분하기 일쑤이지만, 나이 먹을수록 더욱 공감하게 되는 충고가 하나 있다.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아." 언어의 세계 또한 그렇다. 제아무리 기세등등한 영어라도 언어 세계에서 유아독존할 수 없다.

지식 세계에 직접 접근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지만, 영어가 아닌 언어로 지식 세계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활발하다. 영어로 생산되는 지식을 선별해 다른 언어로 바꾸는 번역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세계를 하나로 묶는 인터넷 공간에서 여러 언어가 네티즌을 이어주고 지식을 유통하는 데 사용된다. 인터넷 공간에 아랍어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재스민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영어로 생산하는 지식의 양은 거대하지만 영어가 세상을 움직인다고 단언할 수 없다. 영어로 생산된 지식이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다른 언어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다른 언어공동체에서 공감을 얻어야만 한다. 다른 한편으로 다양한 언어공동체에서는 다른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새로운 지식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그런 지식이 축적되어 언어공동체를 변화시킨다.

인터넷이 출현할 때만 해도 인터넷이 보편화되면 최소한 네티즌의 언어는 영어가 될 거라 예상했다. 한국 사회에서 영어공용화론을 주장한 이들은 인터넷으로 결속된 지식 세계를 거론하며 열린 민족주의를 주창하고, 영어가 공용어가 되는 사회의 필연성을 강조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인터넷 세계가 확장될수록 인터넷 세계의 언어는 다양해지고 있다. 미국에 본사를 둔 거대 포털 사이트들이 성능 좋은 자동번역기를 탑재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영어로 세상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국제통용어는 대부분 권력어와 동의어로 쓰였다. 영어는 어떤가? 한국인 대부분이 영어 학습에 막대한 돈과 시간을 쏟아붓는 걸 보면 영어가 권력어임이 틀림없다. 사회의 상층부일수록 영어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것은 영어가 권력어이기 때문이다. 상류층일수록, 일류대학의 구성원일수록 영어가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커진다. 결국 최고가 되려면 영어의 세계에 몸을 담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영어의 위세는 식민지를 점령한 제국어의 위세와 닮았다.

일본 통감부는 대한제국의 초등학교용 교과서 편찬에 관여하면서, 모든 교과서의 언어를 일본어로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어로 교과서를 편찬하는 데 반대 여론이 들끓자, 통감부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일어 독본과 이과(理科) 교과서만 일본어로 발간하고, 나머지 교과서는 국한문 혼용으로 발행하기로 했다. 이는 과학과 실용의 영역에서 조선어를 배제하는 논리가 되었다. "한국 유년에게 일문 교과서를 익히게 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뇌수를 뚫고 저 소위 일본 혼이라 하는 것을 주사하고자 함이라."(<대한매일신보>, 1906년 6월 6일자)라고 외치며 나선 저항도 결국 실용이라는 논리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어 상용화를 전제로 한 교육을 본격화했다. 조선어를 제외한 모든 과목의 교과서가 일본어로 발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행정과 법률 관련 문서는 일본어로 된 문서를 표준으로 삼게 되었다. 당연히 진학과 취업에 관련된 모든 시험은 일본어로 치러야 했다. 권력의 그늘 아래 안주하려면 일본어를 새로운 모어(母語)로 삼아야 했다. 조선인의 일본어 해득률이 10% 남짓이던 시절, 식민지 상류층 엘리트들의 생활어는 일본어였다.

각자 언어로 교육·학문하는 추세

물론 오늘날의 영어는 일제강점기의 일본어와 다르다. 일본어 상용화는 일제의 기획 아래 진행되었지만, 영어의 확대 과정에는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 점령군과 함께 들어온 일본어가 통용어가 되는 과정에는 일제의 폭력이 개입했지만, 영어의 확대 과정은 폭력적이지 않다.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영어가 교육과 학문의 세계에서 권력어로 기능하는 현실은 불안한 면이 있다.

우리나라가 미국의 식민지가 아닌 이상, 영어를 교육언어로 삼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어를 교육언어로 삼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일본이 직접 기획한 식민지 교육 정책에 따라 교사를 파견하거나 조선인 교사를 양성해 진행하는 식민지 교육은 차라리 체계적이었다. 그러나 영어권의 구심력이 약한 상태에서 영어를 교육언어로 삼는다면 교육이 정상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일정한 수준을 갖춘 교수자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강의는 지식이 원활히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습득한 지식을 적용하고 이를 기반으로 지식을 재생산하는 일이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식민 지배를 경험한 다언어 사회의 언어 상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식민 지배를 경험한 다민족·다언어 사회 중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한 나라에서도 개별 민족어는 여전히 쓰이고 있다. 단,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 사회가 발전할수록 개별 민족어의 사용 영역이 확장된다는 것이다. 영어는 민족 간 통용어로 여전히 기능하지만, 민족어는 기초적인 생활어에서 행정 언어로, 행정 언어에서 학술 언어로 그 영역을 확장해간다. 영어가 국제통용어로 확고히 자리잡은 상황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뭘까?

싱가포르,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영어가 공용어이거나 그에 준하는 위상을 가진 국가에서 새로운 아시아 영어가 만들어지는 것은 영어가 순전히 통용어로 기능하다는 증거이다. 본토의 구심력이 약해진 통용어는 결국 피진(Pidgin)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고, 피진이 된 통용어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피진으로 운용할 수 없는 영역에서 소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본토 영어로의 일신(一新)? 그러나 영어의 토대가 약화된 상태라면 민족어가 기초 생활의 언어에서 사유의 언어, 문화의 언어, 경우에 따라서는 학문의 언어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어의 구심력이 강력한 중국 사회에서조차 소수민족들의 학문 활동이 주로 소수민족어로 이루어지는 현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심도 있는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언어로 교육과 학문 활동이 이루어져야 최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개항 이후 일본어를 통해 근대를 기획한 우리 현실에서 일본어를 배우는 것은 지식의 세계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러나 우리말의 사용 영역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던 식민지 현실에서 우리말로 이룬 지식의 체계는 불완전했다. 상층 엘리트는 제국의 언어인 일본어로 지식을 받아들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지식 체계를 완성하려 했다. 따라서 일본어 해득률이 낮은 수준에 머물던 시절, 상층 엘리트가 산출한 지식은 식민지 조선의 지적 자산으로 축적될 수 없었다. 식민지 엘리트들은 본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 열중했을 뿐 그 지식을 조선인과 공유하거나 조선인 공동체를 위한 지식을 생산하는 데는 무관심했다. 이는 제국이 그들에게 부여한 임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식민지에서 벗어나더라도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않는 한 제국의 언어는 상류층 엘리트들의 지적 소통언어로 기능한다. 권위주의 시대에 싱가포르·필리핀·말레이시아 등에서 상류층 엘리트들은 영어로 말했고, 이로 인해 상류층의 언어와 일반 국민의 언어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이런 사회에서 민족어의 사용 영역이 확대되는 현상이 민주주의의 발전과 비례한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다면, 한 언어공동체에서 생산한 지식은 그 언어공동체에서 검증받고 통용될 필요가 있다. 학문 세계의 언어가 해당 언어공동체의 언어로 소통되지 않는다면 지식의 민주적 공유는 기대하기 어렵고, 그러한 학문이 공동체의 문제의식을 담아내기 어렵다. 전 국민의 언어가 영어로 교체되지 않는 한 말이다.

영어 위상은 곧 민주주의의 문제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지식 생산의 요람인 대학과 지식인 사회의 상황은 어떤가? 대학에서 영어 강의를 확대하는 정책은 한국 대학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어 강의는 지식에 접근하는 통로를 다양화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영어 강의 비율이 높아질수록 학문의 국제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이를 대학 평가의 근거로 삼는 것은 문제이다. 영어를 한국 대학의 통용어로 삼으려는 것은 영어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식민지 엘리트들의 사고틀을 벗어나지 못한 데 따른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이 영어 강의를 확대할 때는 실용의 논리를 앞세우지만, 영어 강의가 우리말 강의보다 효율적일 수는 없다. 더구나 전공 강의를 외국어 교육 차원에서 접근하는 수준이라면 이를 통해 학문의 발전을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런데 이처럼 현실성 없는 정책이 관철되는 데에는 권력의 비합리적 논리가 엄존하는 법. 영어 강의 확대에 비례해 영미 유학파가 대학에 진입하는 비율이 늘었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일이다. 지식의 다양성과 주체성이 동시에 위협받는다는 것은 곧 지성의 위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식의 습득과, 지식의 생산과, 생산된 지식의 국제적 유통과, 생산된 지식을 공동체의 자산으로 만드는 일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 지성의 역할이다. 지성의 역할을 진지하게 고민하면 영어의 역할이 좀더 분명해지지 않을까?


글•최경봉
원광대 교수·국어국문학. 저서로 <우리말의 수수께끼>(김영사), <한국어가 사라진다면>(한겨레신문사), <우리말의 탄생>(책과 함께),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책과 함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