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진압은 과격시위를 부른다
프랑스 시위 환경의 과격화
약 100년 전만 해도 프랑스 공화국은 시위대를 통제하되, 그들과의 충돌은 최대한 피했다. 그러나 2000년대부터 시위대를 처벌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져, ‘주동자’ 색출 및 체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시위대는 점점 과격해지고 있다. 이런 의문이 든다. 과연 정부는, 시민들의 시위할 권리를 존중하고 있는 것인가?
1891년 부르봉 궁의 연단에서 한 의원이 며칠 전 프랑스 북부의 소도시에서 일어난 시위대의 폭력 진압 사건을 규탄했다. 이날 시민들은 아침 일찍부터 한 공장 앞에 모였다. “오전 9시경 중위의 명령을 받고 출동한 헌병대가 일방적으로 공격에 나섰습니다. 남자 한 명이 부상을 입었고 아동 한 명은 귀의 절반이 잘려 나갔습니다. 이에 시민들의 분노는 폭발했고, 헌병대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잠시 소강상태가 이어지더니,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오후 3시경,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면서 시위대의 인원이 크게 늘었습니다. 그리고 경찰의 폭력 진압이 본격화됐습니다. 경찰은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때렸습니다. 여성, 아동, 노인들이 바닥으로 쓰러졌습니다. 분위기는 과열됐습니다. 수많은 시민이 경찰에게 돌을 던지며 맞섰습니다.” 상황은 한순간에 비극으로 치달았다. “거리는 온통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그러자 누가 지시를 내렸는지도 모른 채 사전 경고도 없이, 시민들을 향한 일제 사격이 시작됐습니다. (…) 곧 광장은 부상자와 사망자로 뒤덮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태에 대한 해명을 요구받은 내무부 장관은 엄중한 어조로 답변했다. “우리는 공공질서 유지에 필요한 명령을 내렸을 뿐입니다. 그 명령은 명확하고, 확실하고, 신중하게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날 지역 경찰은 시위대 중 밀수업자와 부랑자 등도 있음을 알아챘을 겁니다. 그들은 500~600명으로 추산되며 그중 1/4 이상은 외국인입니다. 경찰들은 흥분한 시위대의 모욕과 도발과 공격을 종일 참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계에 도달했다고 느꼈을 때, 이 위험한 상황을 해결할 다른 방도가 보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무기의 힘을 빌렸을 겁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했다. “시위대의 도발을 막아내다 지친 경찰들이 어떤 폭력을 저질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건, 임무를 수행하다가 부상을 입거나 죽음의 위협을 느꼈던 경찰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중략) 저는 그 용맹한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 문장을 들은 의원은 폭발했다. 그는 장관을 향해 “살인자”라는 말을 두 번 내뱉었고 결국 의회 밖으로 쫓겨났다.
“적당하고, 확실하고, 신중하게” 시위대를 진압했다는 당시 프랑스 정부의 주장은, 시위대와 경찰의 과격화에 대한 책임, “공공질서 교란자”, 특히 외국인을 향한 시선, 공권력에 대한 조건 없는 지원 등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든다. 이는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시위대와 생트솔린 대규모 저수지 건설에 반대하는 세력의 강경 진압을 둘러싼 각종 논란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그때의 의원은 사회당 소속이었지만 민중사회환경 신연합(NUPES)의 소속은 아니고, 그때의 내무부 장관은 제랄드 다르마냉이 아니다. 1891년 5월 4일에 의회에서 충돌했던 것은 에르네스트 로쉬와 장 앙투안 에르네스트 콩스탕이었다. 무엇보다 그날은, 1일 8시간 근무와 5월 1일 노동절 휴무를 주장하는 공장 노동자들에게 발포해 9명의 사망자(어린이 2명 포함)와 35명의 부상자를 낸 푸르미(Fourmies) 학살 사건이 발생한 지 고작 3일째 되는 날이었다.(1)
“그 천한 것들에게 본때를 보여줘라”
1891년과 오늘날의 상황 간의 유사성이 놀라운 이유는, 19세기 말을 기점으로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군은 ‘민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역 경찰이나 헌병대가 어려움에 처하면, 푸르미에 보병 145연대가 투입됐던 것처럼 곧바로 군이 개입했다. 1830년의 영광의 3일, 1848년 6월 바스티유 광장에 모인 노동자들의 무력 진압, 1871년의 피의 일주일은 수천 명의 사망자와 수만 명의 부상자를 냈다.
그러나 당시에 이런 폭력 진압은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엘리트층은 민중이 ‘기질적으로’ 자신들과 다르다고 여겼다. 민중은 본래 개인의 의지가 없는 존재들이어서 폭동을 일으키는 일부 주동자들을 맹목적으로 따라간다는 것이었다.(2) 루이 16세의 재무장관이었던 튀르고는 1775년 4월 18일 부르고뉴 지방 의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민중에 대한 이런 선입견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곡물 가격 인상에 반대하는 농부들이 마을을 약탈하고 풍차를 파괴하는 사건을 말하며, 튀르고는 “그 천한 것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폭동의 주동자를 체포하고, 그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다면 더 큰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 믿음의 효력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사라졌다. 앙시앙 레짐에서는 귀족들이 정계를 독점하고 있었다. 일정액 이상의 세금을 납부한 시민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했던 시절에는 부자들만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48년 남성들이 보통 선거권을 얻으면서 서민들도 정계에 진출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각종 클럽, 선거위원회, 교육동맹, 공제조합, 정당이 등장하면서 통상적인 권력기관은 점차 무너졌다. 이런 조직들은 시민들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사회적 문제와 노동조건에 관한 연설, 프로그램, 이데올로기를 기획해 확산시켰다.(3)
제3공화국이 수립되고 1877년부터 공화정 체제가 안정된 이후에도 이와 같은 정치적 모임은 계속 유지됐다. 새로운 정부에서는 한쪽에서는 표현의 자유(1881년 언론법), 집회의 자유, 노조 결성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내세우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이런 자유를 행사하는 이들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또한, 군대를 완전히 신뢰할 수도 없었다. 1907년에 포도 재배자들이 시위를 벌였을 때(나르본에서 사망자 7명 발생), 보병 17연대는 반란을 일으켜 오히려 시위대와 연대하면서 조르주 클레망소 정부를 위기에 빠뜨렸다.
이에 따라 20세기 초에 군과는 별도로 시위대 통제를 전담하는 집단을 구성하자는 법안이 발의됐다. 몇 차례의 부결 끝에 법안은 1921년 7월 22일에 비로소 통과돼, 곧바로 111개의 ‘기동 헌병대’가 조직됐다. 기동 헌병대는 1926년에 ‘공화국 기동 헌병대’로 명칭을 바꾸었고, 1939년에는 소속 인원이 21,000명에 달했으며, 파리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의 치안유지를 거의 독점적으로 담당했다. 공화국 기동 헌병대는 치안유지와 관련된 법칙을 정하고 훈련 프로그램을 마련했으며 고유의 노하우를 개발했다.(4)
그중에는 시위대를 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어떤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1930년대에 유행한 문구)’이나 ‘잠시 정신이 나간 시민들(1970년대에 유행한 문구)’로 대우해야 한다는 항목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시위대와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경험상 이것은 언제나 충돌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인파를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거나 어떤 장소에 붙잡아두거나 해산시킬 수 있는 기법이 사용됐고, 현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출구를 언제나 마련해 놓는 것도 중요했다.
유일하게 허용된 도구는 집단 규율, 인간 장벽, 소총의 개머리판, 곤봉이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참호전에서 사용한 뒤로는 사용하지 않았던) 최루탄 가스, 공격용 수류탄, 소방 호스와 같이 시위대와 거리를 둘 수 있는 기술도 도입됐다. 1944년에 경찰은 CRS(공화국보안중대)라는 일종의 전투경찰 조직을 만들었다. 1947년에는 CRS의 대원 수가 13,000명 가까이 됐고, 기동 헌병대의 조직 형태, 활동 원칙, 사용 도구 등을 그대로 모방했다.
세트장까지 마련해 시위대 진압훈련
기동 헌병대와 CRS는 당시의 격렬했던 사회적 갈등(1947~1948년 광부 파업)에 투입됐고 양쪽 모두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시위대의 사망자 수는 현격히 줄었다. 특히 지방에서는 사망자 수가 크게 줄었는데, 파리만은 예외였다. 파리시는 시 경찰에서 차출해온 이들로 별도의 부대를 꾸려 운영하고 있었다.(5) 그러나 이들은 특별한 훈련 방식이나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고, 공산주의자들(1962년 2월 8일 파리 지하철 샤론역에서 10명 사망)과 알제리인들(1953년 7월 14일 시위에서 7명 사망, 1961년 10월 17일 시위에서 수십 명 사망)을 ‘혼내주기’ 위해 난폭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6)
1968년 5~6월에 발발한 위기는 그 강도나 규모 면에서 치안유지 조직들에 큰 부담을 주었다. 사망자가 5명이라는 공식적인 발표와 달리(파리, 플랑, 칼바도스에서 대학생 3명, 소쇼에서 노동자 2명), 사망자 수와 현장에서 사용된 도구들은 훨씬 더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1968년부터 1974년까지 2만 명의 경찰 인력이 충원됐고, CRS와 기동 헌병대는 새로운 신체 보호 장비(헬멧, 보안경, 정강이 보호대, 방패, 방독면)와 공격 및 방어를 위한 장비, 예를 들어 소방차, 차륜형 장갑차, 다양한 유탄 등을 구비했다.
1969년 4월에는 생아스티에와 도르도뉴에 경찰 교육을 담당하는 기동헌병대훈련센터(CPGM)가 문을 열었다. 1977년에는 진짜 도시와 똑같이 건물, 거리, 광장이 있는 ‘시가빌’이라는 세트장을 센터 안에 마련해, 치안유지가 필요한 모든 상황, 나아가 바리케이드와 화염병이 등장하는 가장 심각한 상황을 시뮬레이션하면서 대원들을 훈련시켰다. 이런 훈련은 대원들이 임무 수행 중에 느끼는 공포와 스트레스를 스스로 관리할 수 있도록 집단 규율과 자기 통제력을 길러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전문가들이 현대사상 가장 격렬한 시위 중 하나로 꼽는, 1994년 2월 4일 렌에서 벌어진 어부들의 시위가 있고 나서(조명탄과 갈고리의 사용, 경찰과 기동 헌병대에 전투로 인한 사상자 발생, 브르타뉴 의회 건물 방화), 또 한 번 장비의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차량에 철창이 설치됐고, 방화복, 토시, 팔꿈치 보호대, 어깨 덮개, 케블라 모자, 목 보호대 등으로 구성된 ‘로보캅’ 같은 복장이 등장했다.(7)
치안유지 조직들이 폭력을 최대한 자제한 이후로 비록 부상자는 증가했지만 1968년 이후로 사망자는 거의 나오지 않아서, 1986년 12월에 드바케 법에 반대하는 대학생 시위 현장에서 기동타격대에 의해 사망한 말리크 우세킨과 2014년 10월에 시방에서 유탄 폭발로 사망한 레미 프레스의 이름이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다.(8) 이제 경찰 책임자들은 치안유지에 관한 ‘프랑스식 모델’에 자부심까지 느끼게 됐다. 그들은 반세계주의 운동에 잘 대처하지 못하는 해외 경찰들을 의아하게 바라봤고(1999년 시애틀, 2001년 예테보리와 제노바), 다른 유럽 국가들의 의견과 거리를 뒀다.
그러나 1990년대 말부터 상황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정부의 주요 책임자들은 사회적 갈등이 예전보다 감소했다고 여겼고, 따라서 CRS와 EGM(기동 헌병대)의 인력을 ‘사회 불안’ 해소 부문에 재배치하기로 결정했다. 리오넬 조스팽(1997~2002) 정부에서 시작된 이런 변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가속화됐다. 2002년 8월 29일에 제정된 국내 안보를 위한 방향 및 계획법에 첨부된 활동 계획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돼 있다. “기동대는 폭동과 집단적인 행동이 빈번히 일어나던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프랑스에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뿌리내리면서, 기동대의 운영 원칙에 대대적인 변화가 필요하게 됐다. 이번 정책에 따라 기동대의 최우선 임무는 더 이상 치안유지가 아니며, 이제부터 기동대에 소속된 3만 명은 일상에서의 안전 보장 업무를 담당한다.”
이후 치안유지를 담당하는 경찰과 기동대원의 수는 감소했다. 2015년에 집계된 인원은 2만 5,786명이었는데, 2002년 대비 15%p 감소한 것이며 임무도 다양해졌다. 이 조직들이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CDI(진압 부대)의 세력이 커졌다. 본래 지역마다 다양한 형태로 운영되던 CDI는 공공 안전 경찰로 구성돼 있었고, ‘도시 내 폭력 사건’과 교통 체증을 해결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그러다가 (CRS의 노란색 헬멧과 구분되는) 로얄블루색 줄이 두 개 그어진 헬멧을 쓰고 활동하는 CDI는 2000년대 말부터 치안유지를 담당하는 핵심 인력으로 떠올랐다. CDI는 인원이 많을 뿐만 아니라, 다소 조직이 정체돼 있다고 평가받는 CRS나 EGM에 비해 명령을 내리거나 활동을 이행하는 데 있어서 더 독립적이다. 또한 치안유지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법적 처벌에 관해서도 더 유연하다.
마킹 액체와 고무 수류탄, 고무탄 총까지
본래 시위 현장 통제에서 구속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일례로, 시위대를 해산시킨 후 시위대를 구속하는 경우). CPGM의 대표를 지낸 베르트랑 카발리에 장군은 전통적인 원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시적인 폭력 행위에는 일일이 대응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최종적인 효과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시위 참가자들이 다소 폭력적으로 행동했다 하더라도, 시위의 열기가 잦아들고 상황이 정리된 후에는 시위대의 요구사항을 논의하고 해결하려 노력하는 것일까요?”(9)
그러나 2000년대 초부터 프랑스 정부는 시위대의 처벌에 관한 기존의 입장을 바꾸었다. ‘무처벌’의 원칙을 버리고, 시위 주동자를 색출하고 체포했다. CRS와 헌병대 중에서 시위 현장을 촬영하는 이들도 생겼고, 최근에는 피부와 섬유에 흔적을 남기는 ‘코드화된 마킹 제품’까지 등장했다(물건, 사람, 장소에 특정 표시를 남기는 데 사용되는 무색무취의 무해한 액체로, 최근 생트솔린 시위에서 헌병대가 시위 참가자들 추적에 사용해 논란이 일었다-역주). 검찰은 미결구금을 남발하고, 긴급상황에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업무를 조직했다.
시위대 중 불법행위(공공기물 파손)를 저지른 이들을 가려내는 기술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이는 2021년에 도입된 치안유지국가계획의 성과다. 이 계획에는 시위를 통제하는 두 개의 ‘다르고 또 상호보완적인’ 목표가 있다. 하나는 ‘적대적인 집단의 즉각적인 해산’이고, 다른 하나는 ‘요주의 인물을 찾아내는 작전을 사용해 빠르고 쉽게 주동자를 검문하는 것’이다. EGM과 CRS에도 담당 조직이 있기는 하지만 현장에서는 대부분 CDI, BAC(범죄단속반), 그리고 2019년에 창설된 논쟁적 단체인 BRAV-M(폭력행위진압부대)이 이런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이런 작전들의 상호 보완성을 설명해주는 여러 수사학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부분적으로 모순될 수밖에 없다. ‘적대적인 집단’에 타격을 주는 작전은 시위를 중단시키는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폭력 사태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 또한 최루탄을 비롯한 진압 도구들은 상대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가장 약한 이들이 먼저 피해를 입기 마련이고 따라서 시위대의 몰이해와 분노를 초래하게 된다.
게다가 소수의 인원이 시위대 안으로 침투하는 작전은 물리적으로 위험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작전 수행원들의 무력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SNS에 게시된 수많은 영상에는 시위 현장에 기동대나 CRS가 투입된 이후부터 갈등이 격화되는 모습이나, 도시 경찰이 개입함과 동시에 혼란이 가중되는 모습이 등장한다. 이들은 조금만 곤경에 처하면 곧바로 고무 알갱이 수류탄과 방어용 고무탄(LBD 40, 구경 40㎜) 총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에 등장한 낮은 치사율의 무기 ‘고무탄 총’은 본래 특수부대에서 미친 사람이나 인질범을 제압하는 목적으로 사용하던 도구였다. 그러다가 BAC와 CDI에서도 고무탄 총을 점차 사용하기 시작했고, 2005년에 파리 외곽 지역에서 일어난 소요사태 이후 고무탄 총 사용이 완전히 일반화됐다. 특히 경찰이 시위대를 통제할 때는 거의 고무탄 총이 동원된다. 노란 조끼 시위가 일어났을 때 2018년 11월 17일부터 2019년 2월 5일까지 고무탄 총은 총 1만 3,460회 발포된 것으로 집계된다. 그중 85%는 도시 경찰이, 나머지 15%는 CRS가 한 것이었다.
같은 기간 동안 헌병대의 고무탄 총 발포 횟수는 약 1천 회였다.(10) 고무탄 총의 폐해에 관한 논란이 일면서 사용량이 조금 줄기는 했지만 현장에서는 고무탄 총이 여전히 많이 사용되고 있다. IGPN(국가경찰 감사관실)의 연간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에 고무탄 총 발포 횟수는 6,684회였고, 이는 2012년의 1,514회와 비교하면 9년 만에 4배나 증가한 수치였다.
경찰과 언론, 시위대를 범죄자들로 간주
도시 경찰에게 시위 현장 통제의 임무가 맡겨지면서 시위대를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었다. 도시 경찰은 스스로를 ‘추적자’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시위대를 ‘잠시 흥분한 시민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범죄자로 취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최근 모욕, 각종 가혹행위, 강제 체포 등이 빈번해진 이유다. 이 모든 요소가, 2010년 중반부터 감지되다가 노란 조끼 운동 때 정점을 찍은 ‘치안유지 작업 과격화’의 원인이다.(11) 그러나 이런 현상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위의 불법화를 일종의 정치적인 행동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치안유지는 경찰과 시위대가 대치하는 상황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경찰과 시위대에 덧붙여 정부까지를 포함하는 3자 간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시위 질서’는 20세기 전반에 걸쳐 서서히 확립됐다. 여기에는 진압 조직과 시민들이 폭동과 봉기의 형태에서 벗어나 시위와 같이 좀 더 코드화된 레퍼토리로 옮겨가는 과정도 포함된다. 이들은 시위 대형을 조직하고, 깃발을 제작하고, 요구사항을 정리하고, 구호를 정하고, 치안 담당 기관을 설립했다.(12) 그리고 이는 불만스러운 부분의 민주적인 표현으로 여겨져, 정치적인 협상으로 쉽게 이어졌다.
파리 경찰청의 공공질서 담당 부대표였던 장마르크 베를리오즈는 1997년에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모든 시민은 언젠가 한 번쯤은 시위대가 될 것이다. 시위가 공정한 선거를 치르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공유한다.”(13) 이런 발언은 윗세대와 달리 집단행동의 경험이 없는 현대 엘리트 정치인의 대표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선거 제도는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에, 당선은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지고 마치 백지수표처럼 통용된다.
그러나 노조를 대표하는 단체들과 시위대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행위는(의료진 시위의 경우) 의회를 장악하기 위해 각종 법적 장치를 동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제49.3조, 토론 시간 제한, 징계), 반론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려는 상명하달식 정치의 모습이 오늘날에도 여전함을 보여준다. ‘군중’, ‘무리’, ‘떼’와 같은 표현에도, 과거 튀르고처럼 시위대를 무지하고 난폭한 천민으로 보는 시선이 담겨있다. 시위대를 위협하고자 힘을 과시하거나 시위대의 기세를 약화시키고자 명분을 내세우는 것도 튀르고의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가스, LBD, ‘덫’의 남용, 금지구역, 미결구금, 벌금, 개인 신상정보 수집, 대규모 소환 등은 시위대를 한층 더 불안하고, 불친절하게 만든다.
그러나 치안유지의 과격화와 정치의 과격화는 같은 과정의 두 얼굴이다. 협상을 거부하고 시위대의 요구를 외면하면 시민들의 분노는 커진다. 나아가 폭력성도 높아진다. 이런 흐름은 언론이 불에 탄 쓰레기통이나 파괴된 공공기물을 집중보도하면서 가속화된다. 언론은 왜? 시위가 벌어졌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얼마나 극적으로 벌어졌는지(대개 과장까지 섞어서)에 집중한다. (14)
결국 시위의 중요성과 사회에 실제로 미치는 영향력은 반비례하게 된다. 경찰의 대응은 강경화되고, 수많은 시민이 참여한 시위의 의미는 퇴색된 채, 내무부 장관이 간단하게 ‘블랙-블록’(신분을 감추기 위해 검은 옷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역주),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는 개인 활동가들’ 또는 ‘극좌파’로 지칭한 이들이 꾸민 음모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집단행동으로 대표 민주주의는 생명력 얻어
이런 시위 질서의 붕괴는 즉각적인 정치적 이득을 가져온다. 오히려 중기적인 차원에서의 효과는 미미하다. 우선 시위 참가자들이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게 만든다. 이들은 자신의 안전에 신경을 쓰고(방독면 착용, 임시병원 설치 등), 영상 촬영을 통해 경찰의 폭력행위를 강조하고, 구호를 외치기보다 대치상황, 이동, 예측 불가의 상황을 만들어낼 전략에 집중한다. 이런 변화는 폭동, 태업, 방화, 폐쇄, 점령 등 행동방식을 과격화한다.
그러나 정부는 언제나 상대편에게 최소한의 동의만을 원할 뿐이다. 여러 차례 장관을 역임하고 후에는 대통령직(1920~1924)에까지 오른 알렉상드르 밀랑 의원은 푸르미 비극이 일어난 뒤에 콩스탕 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만약에 공화국이 수립됐고 그것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면, 즉 이제까지의 모든 위기에도 불구하고 공화국이 건재하다면, 그것은 공화국에 사회적 개혁을 끊임없이 요구해 온 공장, 농장, 광산의 노동자들 수백만 명 덕분입니다.” 이 말은 2023년 2월 15일 제라르 마르디네 관리직총동맹(CFE-CGC) 사무총장의 말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 “당신이 말하는 정책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책입니까? 프랑스 노동자를 위한 건가요? 아니면 영미권 국가의 연금을 위한 건가요?”
이 두 발언 모두, 프랑스에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샐러리맨들의 노동조건을 존중하면서 노동과 자본 간의 타협점을 찾은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15) 그러나 이제는 노골적으로 특권층에 기울어진 현 상황은 그 타협점을 무너뜨린다. 이런 상황에 책임을 져야 할 사회적 정치적 엘리트들은 그 자신도 피해자가 될 가능성을 망각한 채 타협이라는 건축물을 훼손하고 있다.
대표 민주주의는 이사회 주주들 혹은 국제금융기관 집행위원회 회원들이 정중하게 대화하는 방식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 대표자와 피대표자 간의 힘의 관계를 주기적으로 재정의하는 집단적인 행동을 통해 대표 민주주의는 생명력을 얻는다. 정치는 처벌 지침, 최루탄 제조 안내서, LBD 사용 원칙을 통해서가 아니라, 절대다수의 이익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이런 행동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글·로랑 보넬리 Laurent Bonelli
파리 낭테르 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번역·김소연
번역위원
(1) 1891년 5월 5일자 프랑스 공화국 관보에서 발췌. https://gallica.bnf.fr
(2) Déborah Cohen, La nature du peuple. Les formes de l’imaginaire social (18~21e siècles) 민중의 기질. 사회적 상상력의 형태, Champ Wallon, Seyssel, 2010.
(3) Christophe Charle, 『Histoire sociale de la France au 19e siècle 19세기 프랑스 사회사』, Seuil, 파리, 1991.
(4) Patrick Bruneteaux, 『Maintenir l’ordre, les transformations de la violence d’État en régime démocratique 치안유지, 민주주의 체제에서의 정부의 폭력성 변화』, Presses de la Fondation nationale des sciences politiques, 파리, 1996.
(5) 파리 시 경찰은 1966년에 국가 경찰에 편입됐다.
(6) Emmanuel Blanchard, 『La police parisienne et les Algériens (1944-1962) 파리 시 경찰과 알제리인들(1944~1962)』, 파리, Nouveau Monde Éditions, 2011.
(7) David Dufresne, 『Maintien de l’ordre. Enquête 치안유지, 조사』, Hachette, 파리, 2007.
(8) 1977년 7월 크레이말빌의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유탄에 맞아 숨진 비탈 미샬롱과, 2018년 12월 마르세유에 위치한 자신의 아파트에서 최루탄에 맞아 목숨을 잃은 지네브 르두안도 있다.
(9) Maintien de l’ordre : du terrain au politique 치안유지 : 현장에서 정책까지, 2020년 10월 16일 콘퍼런스, https://www.youtube.com
(10) Jacqueline Eustache-Brinio, <치안유지를 위한 방어용 고무탄 총의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에 관한 보고서>, 파리, 상원, 2019년 2월 20일.
(11) Olivier Fillieule & Fabien Jobard, 『Politiques du désordre. La police des manifestations en France 사회 불안 방지 정책. 프랑스의 시위 담당 경찰』, 파리, Seuil, 2020.
(12) Charles Tilly, 『La France conteste, de 1600 à nos jours 1600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는 프랑스』, 파리, Fayard, 1986.
(13) <Les Cahiers de la sécurité intérieure 국내 안보 소식지>, 파리, n°27, 1997.
(14) Patrick Champagne, 『Faire l’opinion 의견 표현』, 파리, Éditions de Minuit, 1990.
(15) Robert Castel, 『Les métamorphoses de la question sociale. Une chronique du salariat 사회 문제의 변모. 샐러리맨 연대기』, 파리, Gallimard,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