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동지'이스라엘과 이란의 기묘한 커넥션
아랍 견제 '주변부동맹' 파트너, 정치·군사적 교감·교류 소련붕괴, 걸프전후 적대관계…'필요 따라 또 바뀔 수도'
특집 - 시오니즘의 폭력Ⅰ
"우리는 이란과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으며 두 국민 간에는 여러 방면에서 깊은 우호관계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1979년 이란혁명 직후 이스라엘 외교부 고위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이란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미국에게도 자연스러운 대화 파트너였다. 30년이 지난 지금, 이스라엘을 위시해서 서방의 정책 결정권자들은 이란을 위협적인 세력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이들의 태도 변화가 이란혁명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근거하고 있다면 어떠할까?
'고립 벗기 위한 다각도 동맹'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 다비드 벤 구리온은 이스라엘이 "지리적 사고(事故)"로 인해 중동에 위치할 뿐, 본질적으로는 유럽의 일부라고 믿었다. "우리는 아랍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의 정치 제도와 문화 및 사회는 이 지역과의 관계의 산물이 아니다. 이들과 우리 사이에는 정치적인 친숙함도, 국제적 연대도 없다."1)
벤 구리온은 한편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미국에게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1953-1961)은 미국이 이스라엘의 도움 없이 이 지역에서 자국의 이익을 더욱 잘 보호할 수 있다고 믿고 이스라엘의 노력을 무시하였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벤 구리온은 '주변부 동맹'이라는 개념을 고안하였다. 이는 아랍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이란, 터키, 에티오피아 등과 같은 주변국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이스라엘의 군사적 억제력을 강화하고 고립을 해소함으로써 중동지역에서 이스라엘이 미국의 눈에 하나의 매력적인 '자산'으로 비쳐지길 기대하였다.
벤 구리온은 '주변부 동맹' 독트린과 함께 '소수집단 동맹'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고안하기도 하였다. 터키인, 페르시아인 뿐 아니라 유대인, 쿠르드인, 드루즈인, 레바논 마론파 기독교도 등의 소수민족과의 연대를 꾀하면서, 그는 중동의 절대 다수는 아랍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아랍 민족주의 한 복판에 이들 소수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고취하고 이들과 동맹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였다.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이란과의 '자연스러운' 동맹이 구체화되었다. 트리타 파르시 교수는 자신의 책 <배신의 동맹>에서 이스라엘과 이란 국왕과의 협력에 대한 구체적인 일화, 특히 이라크의 힘을 빼기 위해 1970년과 1975년 사이에 이스라엘이 이라크의 쿠르드족에 대해 군사적 지원을 하였다는 점을 소상히 적고 있다.2)
이스라엘과 이란은 아랍 국가들에 대하여 '문화적 우월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동질감은 한계가 있었다. 무슬림 국가의 주권자인 이란 국왕은 양국 간의 관계가 절대적인 비밀사항임을 강조하였고, 이는 이스라엘 당국의 불만을 초래하였다.
이란·레바논 기독교 세력과 동맹
이스라엘과 이란의 이러한 상호 교감이 이란혁명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되었다는 점은 놀라운 사실이다. 당시 베긴 수상은 테헤란의 이슬람 정권과의 관계복원을 위해 접촉을 시도하였다. 대외정책에 관한 호메이니 정권의 실용주의 노선 또한 이스라엘 당국의 입장을 정당화하였다.
1980년 이라크와의 전쟁이 말해주듯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인 이란은 이스라엘과의 우호관계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다.
특히 군사무기 분야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첨단 기술을 획득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모사드의 전 책임자 요시 알페르는 주변부적 논리가 거의 '본능적'일 정도로 이스라엘인의 사고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고 단언했다.3) 이러한 확신에 찬 이스라엘은 1980년대 중반, 이란에게 무기를 제공하도록 미국을 설득하였으며, 이는 이후 '이란 게이트'의 전조가 되었다.4)
1977년 총선에서 메나헴 베긴이 이끄는 우파가 승리함으로써 노동당보다 더욱 극단주의적인 시각, 즉 '수정주의적' 시온주의파 리더인 블라디미르 자보틴스키의 시각이 이스라엘 정권을 지배하였다. 자보틴스키는 1923년 '철의 벽'5)에 대한 그의 유명한 글에서 아랍인과의 협력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베긴도 미국의 지지를 업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헤게모니 전략 이외에는 아무런 대안이 없다는 주장을 폈다.
"오직 아랍인들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때, 우리를 없애려는 이들의 희망이 사라진 바로 그 순간에야 비로소 이들은 극단주의적 지도자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이후 온건론자들이 부상하면) 상호 양보에 입각한 합의를 받아들일 것이다."
우파는 또한 '소수자 동맹' 전략의 구체적 실현을 꾀하였다. 1982년, 아리엘 샤론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위치한 레바논을 침공하여 시리아에게 군사적인 참패를 안기면서 베이루트에 기독교 마론파 권력을 세웠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전략이고 잘못된 계산에 의한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이 전략은 마론파의 쇠퇴를 재촉하고, 남부와 베카 계곡의 시아파를 자극하여 헤즈볼라 세력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반 이스라엘 소수파들의 각성을 일으키는 전략이었던 셈이었다.
이란혁명과 이란·이라크 전쟁의 변화
대 레바논 전략의 실패와 함께 이란을 비롯한 주변부와의 관계는 악화 일로에 빠져들었다. 이 전환점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중동정세에 대한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되었다. 후진국으로부터 탈종교적 현대로의 역사적 진화라는 스토리에 집착한 서방의 관점에서 보면,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일종의 궤도 이탈 혹은 반동이었으며 이는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정상화될 수 있는 것이었다.
즉, 서방에서는 이슬람 혁명의 이념적 기초가 '공허'하며 '실용주의자들'이 곧 경제적 발전의 궤도를 바라 잡아 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는 또한 서방인들이 착안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기도 하였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따라서 열성적으로 '온건파'의 존재와 이란 당국의 실용주의 조짐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이란 지도자들이 대외정책에서 간간이 보여주었던 실용주의의 징후는 차후 이스라엘과의 동맹으로 발전할 수 있는 디딤돌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사실, 서양이 집착하는 물질적 '현대성'은 이란 지도자들이 가장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무슬림이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사회적 미래를 결정하는 또 다른 현대성의 개념을 주창하고 있었다. 서구인들이 자신의 세계관과 문화를 이 지역에 전파하려는 시도에 테헤란의 권력층뿐 아니라 많은 이란인들이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이유는, 이 세계관이 이미 식민주의로 전염된 낡은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 서양적 태도는 이란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원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란혁명은 침략적인 지역적 야망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재래적인 군사적 측면에서 이스라엘이나 미국을 위협하지도 않았다.
1988년, 8년간의 혼란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전쟁 말미에 이란은 이라크와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1990년~1992년 중 일어난 두 가지 사건, 즉 소련연방의 해체와 1차 걸프전(1990~1991)에서의 사담 후세인의 패배는 중동지역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이는 이란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과 이스라엘에 대한 이라크의 위협이 동시에 사라졌음을 뜻하였다. 이후 이란과 이스라엘은 중동의 라이벌이 되었으며, 미국은 세계에서 유일한 초강대국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스라엘 당국은 1차 걸프전 당시 이라크의 미사일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이스라엘을 걸프전의 취약 요소로 인식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미국은 이스라엘이 이라크에 대해서 보복 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다른 한편, 중동지역에서 이란이 헤게모니 국가로 부상할 수 있다는 전망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를 자국의 군사적 우위에 대한 하나의 위협으로 간주하였다. 이스라엘은 이 시나리오가 실현되면 테헤란과 워싱턴의 위험한 접근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으로 우려하였다.
주변부 전략 폐기와 이란 적대
1992년, 이작 라빈이 이끄는 노동당 정부가 아랍 국가들과의 평화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주변부 전략을 폐기함으로써 엄청난 혼동이 일어났다.
당시 라빈의 조언자인 요시 알페르는 <뉴욕타임스>에서 "이란은 제1의 적국이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이후,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하려 한다고 끊임없이 비난하였다. 시몬 페레즈는 이란이 1999년에 핵무기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국제사회에 경고하였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 내 많은 인사들 뿐 아니라 이스라엘 당국 내부에서도 이란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을 계속 견지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전 간부인 슬로모 브롬은 "5년 혹은 7년 후에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는 과거의 말을 기억하라"며 "이후 시간은 흘러도 항상 '5년이나 7년 후에'라는 말만 되풀이 되고 있다"고 비웃었다.6)
2008년에도 이란이 "5년 혹은 7년 후에 핵무기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미국 정보부는 발표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1차 걸프전으로 인해 쇠락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야세르 아라파트와 협상하기로 결정했다. 라빈과 페레즈는 미국 유대인 로비 에너지의 방향을 돌리기 위해 이란을 악마로 만들었다. 미국 유대인 로비는 "적과 성찬을 들고" 자보틴스키를 배반한 이스라엘 리더를 공격하는 대신, 이란으로 대표되는 치명적 위협에 집중하게 되었다.
미국도 이에 맞춘 전략을 수립하였다. 이란을 위시하여 서방 문명의 가치, 제도, 자유를 공격하는 야만인들의 지역인 '주변부'에 위치한 적들에 대항하기 위해 일부 친 서방 아랍 국가들의 동참을 부추겼다. 2000년 11월, 부시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이 전략에 더욱 박차가 가해졌다.
미국, 이란의 일괄협상 제의 거절
미국의 유명한 보수 논평가인 윌리엄 크리스톨은 지난 2003년 "미국의 권력은 이란 혁명의 종식을 울리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란의 패배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둘 수 있다"며 "즉, 아랍인과 무슬림의 사기뿐 만 아니라 이슬람주의 저항운동의 동력까지 소멸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랍인들은 온순해질 것이고 중동지역 전체가 도미노처럼 미국에 복종할 것이라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동안 이란과 미국의 협력(2002년)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총체적 합의'를 도출하려는 이란의 모든 시도가 부시 행정부 지도자들에 의해 거부되었다는 점은 따라서 놀라운 것이 되지 못한다. 2003년 이란은 미국에게 자국의 핵개발 프로그램, 하마스와 헤즈볼라에 대한 이란의 지원, 이스라엘의 공식적 인정, 미국의 내정간섭 등 모든 문제에 대한 양국 간 협상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2003년에 이란이 보여준 유화적 태도를 미국은 "이란에 대한 압력이 통했기 때문에, 즉 미군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점령으로 미국의 위세에 눌린 이란이 이슬람 저항세력과의 관계청산을 제안하고 이스라엘의 승인도 고려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했다. 이는 중동문제를 '온건파' 대 '극단주의'로 보는 단순한 흑백론적 시각에 갇힌 미국의 잘못된 해석일 따름이다. 이러한 시각은 오히려 미국과 아랍세계를 두 진영으로 양극화할 뿐이다. 자유주의적 관점에 입각한 서방의 미래관에 대한 무슬림 세계의 저항을 단순히 물리적인 방식으로 억압하려 하는 미국과 유럽의 동맹국은 오히려 중동지역 일반 대중의 서방에 대한 극단적인 적대감만 증폭시킬 것이다. 상상의 혐오감은 언제든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
번역 | 김태수 asticot@ilemonde.com
각주
1)아비 슬램, '강대국과 1958년 중동 위기',
<Journal of Imperial and Commonwealth>, 런던, 1999년 5월호.
2)트리타 파르시, <배신의 동맹, 이스라엘, 이란, 미국간의 비밀 거래>, Yale University Press, New Haven, 2007.
3)같은 책 91쪽.
4) 1980년대 중반에 일어난 이 스캔들로 인해 레이건 행정부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이란 게이트로 인해 미국 정부가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고, 그 대금으로 니카라과 반군을 지원하였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이 두 행위는 의회에 의해 금지되어 있었다.
5)드니 샤르비 엮음, <시오니즘, 기본적 텍스트>, 알방 미셸, 파리, 1998.
6)트리타 파르시, 같은 책, 1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