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방송의 위험한 거래

2012-04-13     마르크 앙드웰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프랑스 공영방송 <프랑스 텔레비전> 사장을 직접 임명하면서 정부와 방송 간의 껄끄러운 관계가 수면 위로 부상했다. 공영방송그룹은 정권에 충성을 바치는 고위 공직자들 앞에서 오금을 못 편다. 하지만 디지털 혁명과 함께 30년 전과는 전혀 다른 현안과 직면하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미디어에 대한 각별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지난 1월 29일, 그는 6개 공영방송(<TF1> <France2> <iTélé> <BFM-TV> <LCI> <LCP>)과 2개 민영방송(<France24> <TV5-Mond>)을 통해 자신이 기자 4명과 동시에 가진 기자회견을 방영했다. 그럼에도 프랑스 시사주간지 <렉스프레스>(L'Express)에 따르면,(1) 사르코지 대통령은 한 사석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프랑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프랑스>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는 사람쯤으로 여긴다며 역정을 냈다. 심지어 사르코지는 2008년 자신이 직접 의결한 법안, 즉 대통령이 공영방송 사장을 직접 임명하도록 한 법률을 폐기할 계획이 전혀 없음을 시사했다. 이 법이 제정된 뒤, 프랑스 방송 규제 기관인 방송최고심의회(CSA)가 추천하고 여당과 야당이 지명한 의원들이 문화부위원회를 장악했다.

합의 정신은 사르코지 대통령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임기 중에 자신의 스타일로 국정을 펴는 데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2008년 1월 (자신의 측근으로 구성된) 소규모 그룹과 알랭 맹크의 조언에 따라, <프랑스 텔레비전>에 대한 광고 전면 폐지를 결정했다.(2) 하지만 2010년 11월 이 결정에 반대한 의회는 프랑스 방송법을 일부 수정해 공영방송이 저녁 8시 이전에는 광고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정권의 입김이 통하지 않는 독립적인 곳으로) 유명한 CSA 자문위원들의 고유 업무인 공영방송 사장 직접 임면권도 가져갔다.

사르코지, 공영방송 인사권을 장악하다

<프랑스 텔레비전>의 전 부사장 파트리스 뒤아멜은 "사르코지는 파트리크 드 카롤리스(<프랑스 텔레비전> 전 사장)를 공영방송 장관처럼, 그리고 나를 (방송) 프로그램 및 뉴스 편성을 담당하는 정무차관처럼 여겼다"며 분개했다.(3) 하지만 이 방송 전문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정치와 경제의 힘 관계에 따라, 행정부는 무수한 편법을 동원해가면서 공영방송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공영방송사 사장이라는 자리는) 정부 지도자들의 장단에 춤을 췄다. 1986년, 우파 정권은 심지어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공영방송 사장들을 교체했다. 좌파 정권도 매한가지였다. 1990년 5월, 좌파 정권은 3개월 전에 CSA가 임명한 <앙텐2> 및 <프랑스3>의 사장인 필리프 기욤을 경질했다. 문화통신부 장관 카트린 타스카가 기욤에 특히 적대적이었다. 타스카는 기욤이 사장에 선출됐을 때 "'뜻밖이다'란 표현으로 반감을 드러냈다".(4) 타스카는 사르코지 대통령보다 훨씬 먼저, 정부가 언젠가는 '합법적으로' 공영방송 사장 임면권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일간 <리베라시옹>에 밝힌 바 있다.(5)

하지만 사장 임명 방식만 문제인 게 아니라, (공영방송사의) 재정 및 경제의 자율성도 도마 위에 올랐다. 왜냐하면 독일은 독립기관이 TV 수신료를 징수하는 데 비해, 프랑스에서는 '베르시'(Bercy)라 불리는 재경부가 수신료를 징수하고 있다. 그래서 공영방송의 역대 사장들은 매년 국가를 대표하는 관료들과 힘겨운 예산 협상을 벌여야 했다. 이 관료들은 정치적 논란과 과다 지출의 근원이 되는 공영방송을 좋아하지 않는다. 요컨대 이들은 정치적 골칫거리와 과다 지출의 원인은 안중에도 없다. 게다가 이들은 공공서비스엔 거의 무관심했다. 공영방송의 전 고위 간부는 이런 증언을 했다. "그들은 <TF1>을 필두로 한 민영 채널의 수익과 '문화 로비'(광고 수주)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민간 채널의 요구에 귀기울이며, 자본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무도 <프랑스 텔레비전>이 제대로 된 산업 프로젝트를 개발하는 걸 원치 않았다." 공영방송사의 통제가 엄격한 정치적 통제 시스템에서 단순한 재정 통제 시스템으로 바뀌며, 정부와 공영방송의 역대 사장들은 공영방송이 민영방송 영역을 지나치게 침범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왜냐하면 1990년대 정부가 공영방송의 미래를 담보할 만한 전략적 결정(되도록 민영방송 영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렸을 때까지만 해도 공영방송이 시청률의 절반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당시엔 공영방송의 경영 방향이 민영방송의 경영 전략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992년, 공영방송이 (사회적 임무, 즉 정부의 전략적 결정을 따르기 위해) 자신들이 입은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국가에서 특별 지원금을 받자, 민영방송 <TF1>은 브뤼셀 유럽위원회에서 유럽연합(EU) 경쟁법(독점적 지위 남용 규제의 근거를 규정한 법)을 근거로 공영방송을 공격했던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공영방송 강화와 방송 민영화

당시 에르베 부르주 <프랑스 텔레비전> 사장은 프랑스 공영방송이 영국방송협회(BBC)를 모델로 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프랑스 국영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사(<ORTF>)의 해체로 인해 아직 충격 속에 있던 공영방송에 '그룹 마인드'를 회복시켜주는 게 목적이라 했다. 그는 또 <TF1>에 더 잘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 공영방송 <프랑스2>(<앙텐2>에서 개명)와 <프랑스3>(<FR3>에서 개명)을 하나로 통합해 '프랑스 텔레비전'이란 로고(처음엔 'France Télévisions'에 's'가 없었다)를 단 지주회사를 창설했다. 하지만 <TF1>이 1987년 건설업체 부이그사에 매각되며 민영화될 때까지 공영방송 <TF1>의 사장을 지낸 부르주는 (<프랑스 텔레비전> 사장 재임 때) 부이그 채널(<TF1> 채널은 1974년 7월8일에 설립돼 1988년 부이그그룹으로 매각되기 전까지 프랑스의 대표적 공영방송으로 역할을 해왔다)의 광고 파이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프랑스 텔레비전> 스포츠부 부장 장 레베이용은 "에르베 부르주는 공영방송의 광고 점유율을 높일 때도 용의주도했다. 이따금 시청 점유율이 43%를 초과하면, 그는 우리에게 40%를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하며 더 이상 점유율을 높일 필요가 없다고 했다"고 증언했다.

베르시의 고위 관리들은 공영방송, 특히 <프랑스2>의 광고 점유율 확대에 호의적이었다. 왜냐하면 베르시가 1992년부터 공영방송사에 특별 지원금을 지급하면서 재정 상황이 날로 악화됐기 때문이다. <프랑스 텔레비전> 사장으로 취임한 부르주의 후임, 언론인 장 피에르 엘카바쉬는 1994~96년 공격적인 영업 마케팅으로 <TF1>에 빼앗겼던 광고의 대부분을 되찾아왔다. 당시는 '뉴스-공연'(Info-Spectacle)과 '진행자-제작자'(Animateurs-Producteurs) 개념이 막 도입되던 시기였다. 1996년 5월, 엘카바쉬는 진행자 겸 제작자들과 맺은 터무니없는 거액 계약이 문제가 돼 경질됐다.

어쨌든 엘카바쉬는 <TF1>을 공격해 공영방송을 성장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프랑스 텔레비전> 광고국의 전 책임자는 이런 말을 했다. "광고국은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쳐야 했다. 엘카바쉬가 우리에게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한 광고 프로그램을 제공하면, 광고 제작은 전적으로 우리 몫이었다. 성과가 나타났다. 1994~97년, 우리 방송의 광고시장 점유율이 24%에서 29.9%로 상승했다. (중략)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TF1>의 광고시장 점유율을 50% 미만으로 끌어내리는 것이었다. 1997년 말, 그 목적을 간단히 달성했다." 이것은 광고의 품질은 뒷전인 치열한 광고 마케팅 현장에서 거둔 대단한 승리였다.

사회당 재집권에 요동친 프랑스 방송들

1997년 사회당이 재집권하자 프랑스 방송사가 들끓었다. 이때 위성방송 패키지 상품이 잇따라 출시됐는데 <카날플뤼>(Canal+)는 카날 인공위성을, <TF1>과 <M6>은 도요타 생산 시스템(TPS) 상품을 각각 내놓았고, 통신 그룹 비방디(Vivendi)가 설립됐다. 그러자 프랑스 문화통신부 장관 카트린 트로트만은 공영방송사의 재정을 안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다른 데 있었다. 그는 <프랑스2>가 민영화돼 프랑스 미디어그룹 라가르데르에 인수될까 걱정한 것이다.

트로트만 장관은 "프랑스에서는 공영방송이 여전히 국가의 행동을 직접 떠받쳐주는 지렛대처럼 간주되고 있지만, 사람들은 공영방송을 경제적·문화적 이윤 창출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며 지적했다. 그는 공영방송이 스스로 예산 편성 및 집행을 통해 재정적 독립을 해야만 자율경영이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정부가 <프랑스 텔레비전>의 주주 역할을 하기 바라고, <프랑스 텔레비전>의 경영 전략을 법적으로 인정해주길 바란다. <프랑스 텔레비전>의 사장이 정치인이 아니길 바라며, 그가 진정한 의미의 공영방송 정책을 펼치기를 원한다." 요컨대 사회당 출신 트로트만 장관은 고위 관리, 특히 베르시 소속 공무원들이 <프랑스 텔레비전>을 마치 자신들의 하부 행정기관처럼 취급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1999년 베르시는 3년 주기의 (공영방송) 예산편성 법안을 기각하고, 향후 TV 시청료 누진제(부자가 더 많이 부담하는 정책) 도입 법안에도 반대했다. 이 중 최악의 사태는 <프랑스 텔레비전>의 산업 프로젝트가 베르시에서 지원받지 못한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 텔레비전>은 24시간 뉴스 채널 창설과 '디지털 지상파 텔레비전'(DTT)의 출범을 대비해 여러 지역 채널들과 함께 DTT 방송에 대한 기틀을 마련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2002년 대선을 몇 달 앞두고, 시청률 40%를 자랑하는 민영방송 <TF1>의 저녁 8시 뉴스의 정치적 영향력을 잘 인식하고 있던 리오넬 조스팽 총리는 <TF1>의 심기를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좌파 일부가 오래전부터 공영방송의 광고 폐지를 권장하고 있지만, 정부는 시간당 광고량을 8분으로 줄이는 데 그쳤다. 요컨대 사르코지 대통령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재정적으로 궁핍한 공영방송은 이전보다 훨씬 더 베르시의 결정에 의존하고 있다.

실제 지난 15년 동안 <프랑스 텔레비전>의 지배구조에 대한 정부 고위층의 간섭은 심화됐다. 엘카바쉬 사건 이후, <프랑스 텔레비전>의 후임 사장들로 임명된 크자비에 구유 보샹(1996~99)과 마르크 테시에(1999~2005)는 공통된 특성이 있다. 둘 다 관료 출신에다 프랑스국립행정학교(ENA) 졸업생이다. 도지사 출신인 보샹은 1974년 <ORTF>가 해체될 때엔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고문으로, 프랑수아 레오타르가 문화통신부 장관으로 재임할 때는 장관고문으로 <TF1>의 민영화에 참여했다. 금융감독원의 전직 감독관 출신인 테시에는, 1980년 채널 <카날플뤼>의 자금부장으로 취임했다. <프랑스 텔레비전>의 두 사장은 민영방송의 산업 이익을 결코 위협한 적이 없다. 행정부처·공기업·민간기업·공영방송의 고위직 간 지속적인 인사이동은 정부와 <프랑스 텔레비전>의 얽히고설킨 막후 관계를 잘 보여준다.

그래서 정부는 2010년 8월 레미 플림랭을 <프랑스 텔레비전> 사장으로 임명하고, 이브 롤랑을 그룹 사무총장으로 같이 임명했다. ENA 출신인 롤랑은 알랭 쥐페가 총리로 재임할 때(1995~97)(6) 그의 방송고문이었다.

이보다 앞선 2005~2007년 파트리크 드 카롤리스가 <프랑스 텔레비전> 사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엔, 전직 금융감독원 국장이 <프랑스 텔레비전>의 자금 총괄국장으로 임명됐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신봉자인 카롤리스는 <프랑스3>이 적자라는 이유로 민영기업에 매각할 속셈이었다.

뜨거운 감자, 공영방송의 광고 폐지

공영방송 영역을 민영화하고 축소하려는 의도를 지닌 베르시의 관료들 앞에서, 역대 <프랑스 텔레비전> 사장들은 대부분 운신의 폭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그룹 사장이 여권 인사가 아니면 상황은 더욱 복잡했다.

프랑스의 DTT 출범은 지속적으로 국영방송 간 시청률의 균형을 잡아줬다. 더욱이 6년 전부터는 인터넷의 발달로 텔레비전의 소비 형태가 완전히 달라졌다. 요즘 젊은 세대는 TV를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인터넷상에서 내려받아 컴퓨터로 시청한다. 30살 미만의 젊은 층은 TV 뉴스를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나 '데일리모션'에서 본다. TV 채널들은 나이 든 시청자를 무시할 수 없다. 프랑스 TV 시청자의 평균 연령은 55살로 영국 공영방송 <BBC> 시청자의 연령보다 10살이 많다. 15년 전까지만 해도 구경하기 힘들던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즉각적인 돌발영상이 넘쳐나고 있다. 예전에 방송 프로그램은 방송사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젠 누구나 콘텐츠를 제작해, 이른바 '탈선형화' 추세에 따라 유료든 무료든 '제 입맛대로' 프로그램을 서비스할 수 있다.

그래서 공영 프랑스 텔레비전은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요즘은 프로그램 저작권 관리가 핵심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카날플뤼>의 사장 베르트랑 므외는 최근 이런 주장을 했다. "넷플릭스(Netflix), 애플, 구글의 인터넷TV 출범으로 (방송시장에) 탈선형화가 도입되면 기존 방송사들의 경쟁 환경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7) 실제로 인터넷 TV는 TV 시청자에게 인터넷 연결을 통해 동영상 콘텐츠에 직접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이같은 기술 혁신이 모든 매체에 기존 매체가 겪던 전파 제약 없이 전세계로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일부 방송 전문인은 (TV 시청자의) 소비 패턴의 대변화를 예견하고 있다.

인터넷TV 등장이 무료 방송 모델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에 따라 유튜브는 20여 개 프리미엄 채널을 출범시켰다. 이제 방송 전쟁은 단지 국가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공영 프랑스 텔레비전의 관건은 재원의 다각화다. 하지만 그룹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아, 프로그램 대부분을 몇몇 외주제작사에 맡겨 제작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베르시 관료들은 기존 광고 수입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수익 활동의 개발(국제 저작권 관리, 디지털 미디어 프로그램 판매, 시청자가 참여하는 방송서비스 도입 등)은 공영방송의 사명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러나 영국 <BBC>는 이같은 수익사업으로 상당한 재원을 마련했다. 예컨대 2005년 <BBC>는 매출의 18%를 수익사업으로 벌어들였다. 시청료로 운영되는 브뤼셀 공영방송들은 민간 미디어 업체와 텔레비전을 비롯한 종이신문의 법적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이 민간업체들은 EU 경쟁법을 빌미로 공영방송의 디지털방송 확대를 저지하려 한다. <BBC>를 비롯한 벨기에의 프랑스어 공동체 방송(<RTBF>)과 독일 공영방송(<ARD-ZDF>) 등은 현재와 미래의 TV 시청자가 선호하는 인터넷 방송 활동을 축소해야만 했다.

프랑스에서 공영방송은 사라지는가?

2008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르코지 대통령의 선언(<프랑스 텔레비전>의 광고 방송 전면 폐지) 이후, 정부는 <프랑스 텔레비전>에 대한 간섭을 줄이고 방송사의 문화 프로그램 제작에 자금 지원을 꾸준히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주로 '대통령 친구들'에게 위탁 제작된 난해한 프로그램들을 시청자는 외면했다. 2009년 프랑스 감사원 보고서에 따르면, "국가가 주도하는 문화정책, 공영 프랑스 텔레비전의 사회적 책임을 간과한, 심지어 무시한 정책에 부응하는 방송 프로그램에 (정부의) 투자를 의무화한 것"으로 드러났다. 간단히 말해, 정부가 문화정책을 펼친 것이 아니라 공영방송사에 하청을 준 셈이다. 그렇다고 공영방송사가 문화정책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정부가 충분한 자금을 대주는 것도 아니다. 방송 제작자와 정치권은 사르코지 대통령이 <프랑스 텔레비전>이란 공공서비스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공무원의 손에 맡겨 거대한 '문화 기관'으로 탈바꿈시켜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정부의 목적은 30년 전부터 용의주도하게 준비해온 것, 즉 적자를 핑계로 공영방송을 없애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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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르크 앙드웰드 Marc Endeweld <프랑스 텔레비전: 영향받는 공영 텔레비전의 비화>(Flammarion·파리·2010)의 저자.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강의 중.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1) <렉스프레스>, 파리, 2011년, 12월 12일.
(2) 프랑스 공영방송은 <프랑스2> <프랑스3> <프랑스4> <프랑스5>, 그리고 옛 <해외영토방송>(RFO)으로 구성돼 있다.
(3) <렉스프레스>, 파리, 2010년, 11월 3일.
(4) Philippe Guilhaume, <제거 대상인 사장>, 알뱅 미셸, 파리, 1991.
(5) <리베라시옹>, 파리, 1990년 5월 18일.
(6) M. Rolland, 전직 감사원 고문은 <세금 감축>과 <해외의 교훈> 등 세간의 주목을 끈 여러 저서를 출간했다. 에코노미카(Economica), 파리, 1985.
(7) <카날플뤼>는 상업방송사인 <다이렉트8>(Direct8)과 <다이렉트 스타>(Direct Star)의 지분 60%를 대표적인 프랑스 물류업체 볼로레그룹에서 2억7900억 유로에 매입했다. 프랑스 일간 <레제코>, 파리, 2011년 9월 9~10일.


대선 공약에 나타난 프랑스 각 정파들의 방송 정책

지난해 10월, 사회당 대선주자 프랑수아 올랑드는 이런 선언을 했다. "난 사법부와 미디어의 독립을 보장하는 대통령이 될 것이다." 실제 사회당(PS) 공약엔 공영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책임자 임명을 대통령이나 정부기관이 아닌 독립기관의 소관으로 하는 안이 담겨 있다. 지난 1월 27일 올랑드 대선 캠프의 문화·방송·미디어 책임자인 오렐리 필리페티는 비아리츠(프랑스의 서남부 대서양 연안) 국제 방송 페스티벌에서 "우리는 <프랑스 텔레비전> 이사회를 개혁해 여야 의원들이 포함된 독립기관을 창설할 생각이다. 아직 명확하게 결정된 것은 없지만 <프랑스 텔레비전> 사장을 임명하는 이사회와 별도로 독립적인 기관을 창설할 참이다. 영국 모델을 본뜬 시스템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필리페티 여사는 "시청료를 경제위기 기간에 올린다는 것은 복잡한 문제이므로 공영방송 재원 조달 방식엔 급격한 변화가 없을 것"임을 밝혔다.(1) 마찬가지로, PS도 법안대로 저녁 8시 이전의 <프랑스 텔레비전> 광고를 철폐할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룹 경영을 더욱 약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올랑드는 프랑스 통신사(<AFP>)의 독립을 유지하고 취재원 보호법을 강화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게다가 그가 방송사들이 의무를 더 잘 이행하도록 하기 위해 방송최고심의회(CSA)의 제재 권한을 강화하겠다고 나선 것을 보면, 그는 일부 기업이 미디어를 손에 넣고 쥐락펴락하는 것에 맞서 싸울 생각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좌파전선의 공약은 일부 기업의 미디어 독점에 대한 뜻을 분명히 밝혔다. "우리는 언론·미디어·방송 독점 방지법을 마련해 이 분야들을 재정 논리와 시청률 강제 조약에서 해방시킬 생각이다. (중략) 우리는 국가 및 공공 책임 준수를 감시하고 언론노조의 창설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국회의원·전문가·사용자 대표로 구성된 국가 미디어위원회를 창설할 것이다. 우리는 공공 미디어폴(LED 조명과 음향시설을 조합한 기둥 모양의 멀티미디어 시설물)을 조성하고 언론협회와 언론노조의 존재를 보장할 것이다." 2008년 좌파전선의 대선주자 장뤼크 멜랑숑은 "공공서비스는 재정 확충이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영상의 파워(질 좋은 영상)가 우리 아이들의 상상력을 키우는 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 좋은 영상을 제작하는 데는 돈을 아낄 필요가 없다"고 했다.(2)

프랑스 반자본주의 신당(NPA·Nouveau Parti Anticapitaliste)은 공공 미디어폴을 조성해 그 안의 "모든 프로그램을 공공채널 프로그램에 포함시키고, CSA도 민주적 미디어 규제 기관으로 대체하자"고 제안한다. 또한 NPA는 공영채널의 광고 전면 철폐도 원한다. 프랑스 '유럽 생태 녹색당'(Europe écologie-Les Verts) 공약은 공영방송의 임원 임명 방법의 개혁을 주장하며 방송 부문에 진출한 기업의 지분을 한도 이상 소유한 모든 회사엔 공공시장 진출권을 배제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프랑스민주연합(UDF)의 대선주자인 중도우파 성향의 프랑수아 바이루는 "공영방송은 그 어떤 것보다 더 권력으로부터 보호돼야 한다. 새로운 법안을 만들어 행정부에서 독립적인 인사를 임원으로 임명하고, 방송사의 복수 체제를 법으로 보장해 임원들이 방송사를 이끌어야 한다. 또한 CSA의 구성원과 이들이 가진 권한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대통령이 소속된 대중운동연합당(UMP·Union pour un Mouvement Populaire)의 대선 홍보 담당관인 프랑크 리스테르는 니콜라 사르코지가 주도하는 공공서비스 개혁에 대해 지속적인 홍보 발언을 하고 있다. "<프랑스 텔레비전> 개혁의 취지 중 하나는 광고 압박 없이 창작물을 방영하는 것이며, 공적 자금으로 광고 수익(광고 금지법으로 인한 손실)을 보전해줘 <프랑스 텔레비전> 재정의 일정 부분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1) <레제코>, 2012년 1월 29일. / (2) <프랑스3>, 2008년 2월 9일.


프랑스 국영 방송사 <ORTF>의 해체

지난 30년 동안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프랑스 정치권은 공영방송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프랑스 방송정책은 1974년 <ORTF> 해체와 <TF1>의 민영화를 주도한 방송 자유화 시절로 회귀하고 있다. 1974년 대통령에 취임한 지스카르 데스탱은 지체 없이 <ORTF>의 해체를 결정했다. 당시 여러 공영방송(<TF1> <Antenne2> <FR3>)이 독점체제 상황에 있었다. 1974년 8월 7일의 공영방송법은 2조에 '<ORTF>의 해체'를 명시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정부의 방송 독점은 문제 삼지 않았다.

새로운 정부(데스탱 정부)는 이런 결정(<ORTF> 해체)을 통해 노골적으로 드골주의의 상징과 단절을 꾀했다. 아울러 정부는 방송노조의 약화와 통제도 꾀했다. 기자 250명이 해고됐다. 수백 명의 기자가 한직으로 쫓겨났다. 데스탱 대통령이 재임한 7년 동안 뉴스 방송에 다양한 압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데스탱 대통령은 1975년 1월 6일 "(프랑스)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프랑스의 목소리만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 방송사들의 기자는 다른 나라의 방송 기자와 다를 게 없다"고 천명했다. (1)

1981년 좌파 정권(미테랑 정부)이 들어섰을 때, 정보통신부 장관 조르주 필리우는 혁신적인 방송법을 약속했다. 1982년 7월 29일 공영방송법은 방송 프로그램의 독점을 폐지한 반면, '방송 커뮤니케이션의 자유화'를 허용했다. 자유 라디오 채널(radios libres)들이 탄생했다. 사회주의 좌파 정권은 서둘러 텔레비전에 대한 방송 자유권을 대기업에 부여했다.

세계적인 커뮤니케이션 회사 아바스 그룹의 회장이자 프랑수아 미테랑 내각의 정책보좌관을 지낸 앙드레 루슬레가 맨 먼저 <카날플뤼>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1985년 1월 4일 미테랑 대통령은 다수의 민영방송을 창설하겠다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폭탄선언을 했다. 그러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채널 <TV5>와 <M6>에 투자했다. 공영방송들은 국가의 지원이 거의 모두 끊기는 바람에 지속적인 경영난에 허덕이게 된다.

미테랑 정부 때 문화통신부 장관을 지낸 카트린 타스카는 이런 증언을 했다. "과거의 역사적 경험이 미테랑의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방송사에 대한 대통령과 그 측근의 입장을 이해하려면, 그가 간직하고 있는 공영 텔레비전에 대한 좋지 않은 추억을 이해해야 한다. 공영 텔레비전은 지난 30년간 우파 정권의 시녀였다. 공영 텔레비전은 그에게 혹독하게 굴었다. 그는 민영 텔레비전보다 공영 텔레비전 때문에 고통을 더 받았다. 내가 그에게 '공공서비스의 임무'에 대해 운을 뗄라치면, 그는 '헛소리 집어치워!'란 표정을 지으며 '난 저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중략) 공영방송에 한 번 데인 좌파는 자신들이 더 이상 여당이 아닐 때, 똑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기 위해 철저히 대비했다. 그래서 좌파 정권은 민영방송이 창설되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생각했다."(2) 좌파 정권은 1986년 총선에서 패배가 기정사실화되자, 사후를 대비하기 위해 방송법 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다.

미테랑 대통령 시절, 좌우 동거 형태로 우파 내각이 들어서자 서구 텔레비전 역사상 유례없는 독특한 일이 벌어졌다. 공영채널이 민영화된 것이다. 그것도 메이저 채널 <TF1>이 그러했다. 미테랑 정권의 새로운 우파 총리인 자크 시라크가 이끄는 공화국연합당(RPR)은 공영채널을 하나(<TF1>)만 남기고 나머지 두 채널은 민영화 한 뒤 "정부는 (방송사에서) 손을 떼겠다"고 약속했다. 방송 제작자 니콜라 트로브는 "RPR의 이같은 결정 이후, <TF1>이 모든 방송 부문의 경제를 쥐락펴락했다. 그 결과, 공영방송은 <TF1>의 눈치만 봤다. 지난 25년 동안 우·좌파 정권은 항상 <TF1>에 호의적이었다. <TF1>의 민영화 당시, 정권이 <TF1>의 광고 할당 시간을 늘려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전까지만 해도 <TF1>은 경쟁사인 <TV5>와 <M6>에 비해 할당받은 광고 시간이 적었다"고 했다. 결국 프랑스 정부는 1986년 여름, 프랑스 방송법(방송커뮤니케이션 자유법)을 처리했다. 표결 처리 없이 법안 채택을 허락한 법률 49조 제3항을 근거로, 임시국회 때 프랑스 방송법을 의결 처리한 것이다.

(1) Jean-noël Jeanneney, <세기의 메아리: 프랑스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사전>, Hachette Littératures, 파리, 1999.
(2) Christophe Nick & Pierre Péan, <TF1, 권력>, Fayard, 파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