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가/철학자 이정우

Corée Spécial 공부란 무엇인가

2012-04-13     이정우

공부 바람이 불고 있다. 나와 내 이웃,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본질적 의미를 공부하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제도권 공부가 토플이나 학점 등 '나홀로 스펙 쌓기'로 변질된 것과는 달리, 제도권 밖에서는 '존재하는 것'과 '사는 것'과 '사유하는 것'에 대한 공부가 한창이다. 학교 담장 너머의 '참된 세상 공부'를 견인하는 강호의 고수 4인의 '공부론'을 들어본다. - 편집자 

'공부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공부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답이 나올 듯하다. 여기에서는 '돌보기'(또는 '가꾸기', '만들기') 측면에서 생각해본다.

공부란 대개 사회적으로 부과된 의무이기도 하고, 먹고살기 위해서 좋든 싫든 해야 할 필요이기도 하다. 알고 싶은 의지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개인적 또는 사회적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사람마다 맥락이 다르겠지만, 내게는 공부가 일차적으로는 나 자신을 돌보고 가꾸고 만들어나가기 위한 것이다. 하루하루 생활을 영위해가려면 밥을 먹어야 하고, 사회생활을 하려면 옷 입는 데도 신경 써야 하고, 건강을 유지하려면 운동도 해야 한다. 내 신체를 돌보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런데 신체만 영위해서는 건강한 삶을 살기 힘들다. 정신도 계속 돌보아야 한다. 사회생활을 하려면 (귀찮은 일이지만) 여러 기초적인 정보를 알아야 하고, 무지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지식을 쌓아야 하고, 공허한 영혼으로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정신적 자양분을 섭취해야 한다. 그래서 내게 공부란 일차적으로는 내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해야 하는 필연 같은 것으로 다가온다. 필연으로서의 공부는 대개 사회적 입지를 위한 것이지만, 내게는 그것보다 좀더 원초적인 어떤 것으로 느껴진다.

사회란 공부의 의미를 사적인 것보다는 공적인 것에 둔다. 기초 교육을 함으로써 각인을 '국민'으로 길러내고, 특정한 기능을 양성시킴으로써 직업적 능력을 갖게 만들고, 윤리 교육을 통해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등 여러 공적인 맥락이 교육을 지배한다. 그러나 공부란 그 이전의 어떤 원초적인 것이 아닐까. 그것은 우리가 다른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인 듯하다. 이는 우리가 이성적 존재이고, 그래서 인간적 수준의 사회와 문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고귀한 생각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경지는 오히려 나중 문제이다. 내게는 차라리 공부란 살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신체를 돌보지 않을 수 없듯이, 살기 위해서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다가온다. 

신체 돌보기를 게을리할 경우 각종 병에 걸리듯이, 영혼 돌보기로서 공부하지 않으면 각종 정신적 병에 걸릴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가 "네 영혼을 돌보라"고 역설한 것도 아마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게는 공부한다는 것이 이렇게 밥 먹는 것과 같은 어떤 절박한 것으로 다가온다.

어린 시절부터 이런 느낌에 휩싸여서, 허기가 지면 밥을 먹듯이 마음이 허해지면 공부를 해온 것 같다. 중학교 때는 많은 문학작품을 읽은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국문학자이자 한학자이신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국문학전집'이라든지 '세계문학전집' 등의 이름이 붙은 총서를 많이 읽었는데, 이는 내게 공부라는 차원을 열어주었다(얄궂게도 당시에는 내게 이런 독서가 '학교 공부'와 정확히 대칭적인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대학의 이공계에 진학한 후 공부했던 자연과학 분야 또한 내 의식의 지평을 활짝 열어준 중요한 계기였다. 그 후에는 역사와 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인문사회과학이 내 공부의 주요 영역이 되었다. 이런 모든 공부가 내 마음을 채워준 양식이었다. 책이(책만은 아니겠지만) '마음의 양식(糧食)'이라고 한 것은 누가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저 상투적 표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내가 숱한 밥과 다른 음식들을 먹지 않았다면 지금 이런 신체를 이루어갈 수 없었듯이, 이런 공부들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런 정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신체와 정신이 물론 흡족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먹은 것들이 곧 내 몸이듯이 내가 공부한 것이 곧 내 정신 자체가 아닐까 싶다.

'사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는, 공부하지 않으면 병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느낌은, 달리 보면 공부하지 않을 경우 내가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는 느낌인 것 같다. 이는 곧 내 삶을, 우리 모두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자연적 환경 전체를 이해하는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삶이란 어떤 거대한 힘에 휩싸여 흘러가버리는 극히 수동적인 무엇이 될 수밖에 없다는 느낌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환경은 다양하다. 현대인은 대개 국민국가의 틀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국민국가라는 틀이 형성된 것은 생각보다 멀지 않은 시기였다. 어떤 과정을 통해 이런 틀이 형성되었고, 그 틀의 의미 맥락이 무엇이고, 우리에게 그 틀은 어떤 긍정적·부정적 성격을 띠는지 등에 대해 공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저 그 틀을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고서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곧 정치적 바보가 된다는 것, 사회적으로 어리석은 자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환경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적 환경, 과학기술적 환경, 대중매체·대중문화적 환경 등에 대해 늘 공부하고 날카로운 비판적 의식을 벼르지 않는다면, 그런 거대한 환경의 소용돌이에 떠밀려 우매한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공부하는 것은 똑똑한 인간이 되기 이전에 우선 우매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과거의 소박한 사회에선 달랐을 수도 있지만, 오늘날의 복잡한 현대사회는 공부하지 않을 경우 우매한 대중의 일원이 되고 만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한다면, 공부에는 숱한 분야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19세기와 20세기에 관련된 역사서들과 △현대사회를 비판적으로 해부하는 사상서들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19세기와 20세기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만든 세기이다. 이 두 세기에 국민국가, 자본주의, 과학기술, 대중문화 같은 오늘날 우리 삶의 기본 환경을 이루는 틀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19~20세기 관련 역사서들을 읽는 것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이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해하는 것, 말하자면 현대인의 탄생설화를 이해하는 것이다(내가 학위 논문을 쓰던 시절 특히 미셸 푸코에게 매료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자본주의를 경제학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고, 수량적 파악보다 중요한 것은 그 밑에 깔려 있는 발생학적 역사이다. 이는 과학기술과 대중문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내가 말하는 '대중문화'는 어떤 특정 장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가 창작·유통·논의되는 과정의 성격을 가리킨다. 실험영화는 대중문화가 아니지만, <일주일 만에 읽는 칸트>는 대중문화이다). 각각의 내용 자체보다 그것이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져왔고, 오늘날 어떤 맥락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고대중세의 역사에도 관심이 많지만, 일반적 맥락에서 볼 때 근대 역사, 특히 19~20세기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차대한 공부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 오늘날 현대인에게 공부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비판적 사상서이다.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매한 대중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상서, 특히 비판적 사상서를 읽어야 한다. 오늘날처럼 학문이 실용화되는 시점에는 더욱 중요하다. 사상서를 읽는 것이 대학생들의 필수 덕목이 되던 때도 있었으나, 오늘날의 대학생들은 스티브 잡스 같은 기술자는 알아도 오늘날을 대표하는 사상가들은 그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엉뚱하게도 마이클 샌델 같은 2류 철학자나 리처드 도킨스 같은 속류 유물론자가 유행하고 있다). 단순한 기법이나 사실, 지식이 아니라 사상·사유를 말하는 책 또는 작품은 매우 드물다. 과거에는 이런 사상서들이 적어도 교양층에서는 일종의 상식이고 필수이고 심지어 유행이기까지 했으나, 오늘날에는 이런 흐름이 세태에 휩쓸려 실종돼버렸다. (2000년 내가 철학아카데미를 세워 푸코, 들뢰즈 등을 강의할 때만 해도 사상에 대한 열기가 뜨거웠으나, 이제는 지난 이야기가 돼버렸다. 어쩌면 '후기구조주의'에 대한 경도가 '사상'이라는 것에 대한 경도의 마지막 형태가 아니었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부디 근거 없는 예감이기를.) 최근 불고 있는 인문학 바람이 그저 또 하나의 유행이 아니라 비판적 사상에 대한 관심이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비판적 의식이 깃들지 않은 인문학이란 그저 또 하나의 '웰빙'일 뿐이다. 비판적 사상서를 공부하는 것은 나를 돌보고 사회를 돌보는 힘을 길러준다.

나이가 이제 제법 든 지금의 내게 공부란 삶과 화해하는 일, 삶과 더불어 노니는 일에 연결되고 있다. '산다'는 것, 더 넓게는 '존재한다'는 것은 때로는 몹시 두렵고 힘겨운 것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왜 살아야 하는가?", "도대체 왜 세계가 존재하는가?", "죽음을 포함해 세상의 이 모든 고통과 비극의 이유는, 또 의미는 도대체 뭔가?" 이런 물음을 반추하면서 인간은 삶에 대해, 존재와 세계에 대해 앙심(怏心)을 품게 된다. 철학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삶- 생로병사를 모두 포괄하는 의미에서의 삶- 과, 더 나아가 존재(존재한다는 것)와 자신의 간극을 메우려는 인간의 노력이다. '산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과 화해하기, 더 나아가 그것들을 사랑하기, 함께 노닐기. 사실, 철학의 본질적 문제는 단 하나이다. 어떻게 인생을 사랑할 것인가? 나아가 어떻게 세계·존재와 함께 노닐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감성적·즉물적 해결로 만족하거나, '좋은 게 좋다'는 식의 간단한 결론으로 치닫거나, 외부적 장치들(예컨대 교회 등)에 내맡기거나 하지 않고, 사유로써 집요하게 길을 찾아갈 때 철학은 성립한다. 선철들은 이렇게 도달하려는 경지를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 표현했다. 이는 '산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이 함축하는 아픈 간극이 소멸된 경지이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공부하고 책을 써왔지만, 선인들의 이런 희구를 건성이 아니라 가슴으로 공감하게 된 것은 최근에 이르러서이다.

생각해보면, 형이상학적 수준에서 사유를 전개한 대부분의 선철들은 이 문제를 다루어오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이런 형이상학적 사유는 처음에 이야기했던 원초적 의미에서의 공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하지 않을 수 없는 공부의 좀더 고급스런 형태가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지금까지 내가 해온 공부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겨우 반성적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내가 앞으로 할 공부는 이런 사유를 스스로 일정 수준에서 다듬어내기 위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삶을 사랑하는 마음도 계속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를 향한 윤리적 외침이나 정치적 훈계는 그저 '지식인'이기에 하는 상투적인 말일 뿐이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목소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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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정우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강대 교수와 철학아카데미 원장을 지냈다. 현재 인문학 강좌 파이데이아(대안연구공동체) 교장과 경희사이버대 교수로 있다. 저서로 <소운 이정우 저작집>(그린비·전 6권), <천하나의 고원>, <세계철학사1: 지중해 세계의 철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