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2.0, AI의 새로운 비밀 전쟁
알고리즘과 머신러닝 전쟁에서, 과연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미국? 아니면 중국? 이 질문의 이면에는 실제적 현실이 숨어있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에게는 중국과의 경쟁이 심화돼도, 수백억 달러의 공공 보조금을 탈취할 절호의 기회다. 막대한 로비와 진영 간 대립이 재현된다. 인공지능 지정학도 결국 돈 문제다.
‘냉전은 끝났다.’
1988년, 철의 장막 저편에서 건너온 흥미로운 비디오게임 광고는 이렇게 선언했다. 그리고 표지 하단에 “거의…”라는 문구를 덧붙였다. “동서 긴장이 완화되기 시작한 때 소련은 미국에 결정타를 날렸다”라며, ‘소련의 도전’을 경고했다. 빨간 배경과 기하학적 도형에 둘러싸인 크렘린 궁 그림 위에 “Тетрис”라는 큼직한 노란 제목이 펼쳐진다. 마지막 철자는 소련의 상징인 낫과 망치 형태를 띠고 있다. 라틴 알파벳으로는 ‘Tetris(테트리스)’다.
현재 국립미국사박물관에 전시된 테트리스 브로슈어는 영국 미디어 재벌 로버트 맥스웰이 소유했던 미국 게임사 스펙트럼 홀로바이트의 아이디어였다. 스펙트럼 홀로바이트는 냉전 테마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닫고 러시아 전통음악부터 소련 우주비행사 이미지까지 온갖 코드를 활용한 결과, 로널드 레이건 시대의 미국에서 테트리스로 대박을 터뜨렸다.(1)
당시 스펙트럼 홀로바이트 사장이었던 길먼 루이는 미국에서 이른바 ‘냉전 2.0’이라 부르는 시대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냉전 2.0은 세계경제를 제패하려는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을 일컫는다. 미중 냉전은 기술 및 군사 경쟁으로 확산되면서 이제 테트리스가 아니라 인공지능(AI) 전쟁으로 변모했다.
길먼 루이와 에릭 슈미트의 만남
길먼 루이는 미국의 전형적인 출세가도를 걸어왔다. 그는 1980년대 초반에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미 공군이 만남을 요청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다. 이윽고 길먼 루이가 소유한 기업들 중 하나가 로버트 맥스웰의 레이더에 포착됐고, 맥스웰에게 팔렸다. 1990년대 말, 길먼 루이는 미 중앙정보국(CIA)의 벤처 캐피털 펀드인 인큐텔의 수장이 된다. 인큐텔은 구글어스(Google Earth) 기술에 투자한 비영리 기관이다. 이후 트럼프 정권이 중국과의 기술 전쟁에서 미국이 뒤쳐졌다고 소란을 피우자, 길먼 루이는 미국 인공지능국가안보위원회(NSCAI)의 중심부에 다시 서게 된다. NSCAI는 에릭 슈미트 구글 전 회장이 이끄는 권위 있는 자문기관이다.
길먼 루이와 에릭 슈미트의 관계는 단 몇 년 만에 매우 친밀해졌고, 전자는 후자가 후원하는 AFF(America’s Frontier Fund) 사장직에 오른다. AFF는 인큐텔을 본뜬 비영리 기관으로, 미국이 ‘21세기 세계 기술 경쟁에서 승리하도록’ 보조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또한 ‘제조업 재활성화, 일자리 창출, 지역경제 부흥, 미국 중심부의 잠재력 개방’ 등 만병통치약 같은 면모를 띤다.
AFF의 창설 계기는 ‘딥테크’ 또는 ‘선도 기술’이라 불리는 인공지능 및 퀀텀 컴퓨팅 분야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에서 비롯됐다. AFF 웹사이트에는 “선도기술은 차고에서 탄생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천재 기업가를 존중하는 실리콘밸리의 믿음과 정반대되는 선언이다. 아인 랜드의 소설(개인주의, 자본주의 주창)과 공공 보조금 사이에서 후자를 택한 것이다.(2)
흥미롭게도 길먼 루이는 냉전 1.0을 이용해 테트리스를 홍보했고, 이제 냉전 2.0을 이용해서 인공지능을 홍보하고 있다. 혹은 반대로 신냉전을 홍보하기 위해 인공지능을 이용하는 걸까? 현재 미국에서는 둘 중 어느 쪽인지 구분하기 불가능해졌다. 확실한 건, 이 모든 홍보가 돈으로 변환될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발맞추려면, 테트리스 슬로건도 “신냉전이 도래했다. 거의”라고 바뀌어야 한다. IT기업, 방산업체, 강경한 싱크탱크 등 수많은 미국인을 솔깃하게 만드는 메시지다. 이 모든 미사여구가 이념적 변화의 현실을 완전히 가리진 못한다. 중국과의 인공지능 경쟁에서 뒤쳐진다는 불안이 미국 정책 엘리트들을 자유시장이란 마법 같은 단꿈에서 깨어나게 만들었다. 그들은 워싱턴 합의를 포기하고, 심지어 ‘베이징 합의’에 합류한 것처럼 보인다.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에 최근 게재된 에릭 슈미트의 글을 보면, 강력한 인공지능 국가에 대한 새로운 열망뿐 아니라 과거 정책 오류를 검토하겠다는 의지도 엿보인다.(3) 이 글은 미국이 ‘세계화’에 현혹된 나머지 너무 오랫동안 ‘전략적 사고’를 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벤처 캐피털 기업들의 단기 성과주의를 비판한다. 미국이 기술 부문 장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정부 보조금 및 융자금과 구매 약속’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정부 보조금은 벤처 캐피털 기업과는 달리 장기적 안목을 갖춘 AFF 같은 기관을 통해 분배될 것이다.
신 워싱턴 합의는 ‘군사적 신자유주의’
에릭 슈미트의 글은 때때로 강력한 산업정책을 요구하는 듯하면서도 결코 선을 넘지 않는다. 새로운 워싱턴 합의는 미국이 신냉전에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용해서 민간 부문에 대한 공적 지원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새로운 워싱턴 합의를 ‘포스트-신자유주의’라고 오해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상 과거의 ‘군사적 케인스주의’의 모든 특징을 갖고 있다. 즉, 군비지출 확대가 소련에 대한 승리와 미국의 경제번영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미 국방성과 실리콘밸리의 관계는 확연히 공고해졌다. 미 국방부는 디지털·인공지능부문 최고책임자 자리를 신설했으며, 미국 차량 공유업체 리프트의 머신러닝 책임자였던 크레이그 마텔을 그 자리에 앉혔다.
미국 IT 기업들은 직원들이 이런 관계에 대해 윤리적 우려를 제기함에도 불구하고, 국방부 조달예산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알파벳은 국방부와 함께 진행하던 메이븐 프로젝트(담당 엔지니어들의 반발을 샀던 AI 군사 감시 시스템)를 보류했지만, 곧이어 구글 퍼블릭 서비스(Google Public Service)를 창설했다. 구글 퍼플릭 서비스는 무고해 보이는 이름과는 달리 군에게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실리콘밸리의 클라우드와 머신러닝 능력은 미 국방부의 비전인 육·해·공 센서가 보낸 정보를 통합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한다. 인공지능으로 정보를 분석해서 효과적인 공동 대응을 구현하는 것이다. 2022년 말, 미 국방부는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오라클, 아마존 등 4대 IT 공룡에게 90억 달러 규모의 혁신적인 인프라 개발 프로젝트를 맡겼다.(4)
그러나, 현재는 과거 냉전시대가 아니다. 따라서 이 공적 자금이 케인스 식대로 일반 시민에게 ‘흘러갈지’ 장담할 수 없다. 인공지능 분야에서는 스타 엔지니어(수백만이 아닌 수백 명)와 AI모델을 훈련시키는 수많은 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노동비용이 축적된다. 심지어 후자 대부분은 미국에 있지도 않다. OpenAI도 ChatGPT에 음란한 글이나 이미지가 뜨지 않게 방지하기 위해 케냐 노동자들에게 의존한다.
클라우드 컴퓨팅의 경우도 경제적 파급 효과가 어떨지 아직 미지수다. 데이터 센터의 구축비용 자체도 어마무시한데다, 이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올라갈 수 있다. 인공지능과 클라우드 컴퓨팅 개발에 대한 환경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다시 말해, 군사용 인공지능에 이 모든 돈을 투자해서 승수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망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냉전 2.0은 ‘군사적 케인스주의의 귀환’이 아니라 ‘군사적 신자유주의 출현’일지도 모른다. 군사적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인공지능과 클라우드에 대한 정부 지출이 증가할수록 불평등이 심화되고 IT 공룡의 주주들만 배불릴 것이다.
그러니 이들 중 일부가 냉전을 재개하고 싶어 한다 해도 전혀 놀랍지 않다. 에릭 슈미트 전 구글 CEO는 이 새로운 합의를 형상화하는데 누구보다 큰 역할을 수행했다.(5) 200억 달러 자산가인 슈미트는 2008년 버락 오바마 선거 캠페인 이후 미국 정책권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2016~2020년에 미국 국방혁신위원회(DIB) 의장을 맡았으며, 세계 각지의 미국 군사기지 100여 개를 방문했다. 이후 미국 인공지능 국가안보위원회(NSCAI) 위원장을 맡았다. 최근에는 미국 신흥생명공학안전위원회(NSCEB)에도 등장했다.
슈미트는 새로운 ‘볼테르’인가?
슈미트의 행적은 추적하기 힘들 정도로 다각적이다. 예를 들어 슈미트의 벤처 캐피털 펀드 중 하나인 이노베이션 엔데버즈(Innovation Endeavors)는 리벨리언 AI(Rebellion AI)처럼 인공지능에 특화된 스타트업들에게 자금을 아낌없이 투자한다.(6) 다시 말해, 슈미트와 그의 파트너들은 인공지능 기업들에 2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는 동시에 슈미트는 해당 기업들에 더 많은 공적 자금을 투입하도록 권고하는 정부 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권고 이면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엘리자베스 워렌 상원의원은 국방부에 슈미트와 미국 행정부의 관계에 대한 해명자료를 요구했으며, 국방부가 슈미트에게 지나친 영향력을 부여한 결과 ‘공공 이익을 수호하는데 실패했음’을 시사했다. 최근 슈미트는 생명공학 위원회에 합류한 일도 반발을 샀으며, 이어서 또 다른 벤처 캐피털 펀드를 통해 관련 분야에 투자한 일 때문에 눈총을 받았다.(7)
슈미트 퓨처스 자선재단도 알고 보니 영리기업인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에는 미국 정부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급료를 지원했다는 뉴스가 보도됐으며, 이중에는 인공지능 정책과 IT 규제 담당 직원들도 포함돼 있었다.(8) 슈미트와 슈미트 퓨처스는 크레이그 마텔이 국방부의 인공지능 담당자가 되도록 돕기도 했다.
어떻게 민간기업이 공무원에게 급료를 지불할 수 있었을까? 다름 아닌 법적 구멍 때문이다. 일부 비영리 단체의 경우 실제 이런 일이 가능하며, 심지어 비영리 단체로서 민간기업에게 돈을 받기도 한다. 이 경우, 슈미트 퓨처스에서 돈을 받은 비영리 단체는 미국과학자연맹(Federation of American Scientists, FAS)이다. 미국과학자연맹은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유래한 싱크탱크이며, 테트리스를 성공시킨 길먼 루이가 현재 대표직을 맡고 있다.
슈미트의 가장 효과적인 냉전 홍보 전략 중 하나는 부자들을 회피하지 않는 인물로 유명한 헨리 키신저를 합류시킨 것이다. 헨리 키신저는 슈미트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최근 인터뷰에서 99세의 나이가 무색하게 LSD 환각제를 처음 경험한 19세 청년마냥 인공지능을 설파했다. “난 IT 기업들이 인간 의식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종교에서 이성으로 넘어간 계몽주의 시대와 동일하다.”(9) 이 논리에 따르면, 슈미트는 새로운 볼테르인 것이다.
“인공지능 전쟁은 핵무기에 버금가”
2021년, 슈미트와 키신저는 제3자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시대에 관해 책을 발표, “인공지능 전쟁은 핵무기에 버금가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10) ‘테러리스트들이 인공지능을 이용해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질까? 그리고 국가나 다른 주체가 공격한 것처럼 속일 수도 있을까?’ 그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지만, 답은 제시하지 않는다. ‘사이버 9·11테러’가 불가피하다는 말을 반복하는데, 이는 방산업체들이 국가예산을 탈취하기 위해 이용하는 슬로건이다. 그들은 공포감을 잔뜩 조장한 다음, ‘세계는 인공지능을 적용한 군비통제가 필요하다’는 합리적 결론을 낸다. 내용은 이게 전부다. 이 책은 분석에 대한 열린 철학적 질문만 남길 뿐,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다.
슈미트는 키신저의 명성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키신저가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1950년대 말에 창설한 이니셔티브를 모방한 인공지능 싱크탱크 SCSP(Special Competitive Studies Project)를 창설했다. 당시 키신저는 어떤 종류의 군비통제도 옹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련과의 제한적 핵 충돌은 사실상 불가피하면, 어쩌면 미국에 오히려 유리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다.
슈미트와 키신저의 저서가 ‘군비통제’를 언급하고 있지만, SCSP가 주창하는 정책은 정반대를 향하고 있다. 바로 ‘오프세트-X’라는 흥미로운 명칭의 상쇄전략이다. 냉전시대 미 국방부의 상쇄전략은 전술 핵무기, 공중센서 등 최신기술에 의존해서 소련의 탱크, 항공기, 병력의 수적 우위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1940년대 중반부터 세 가지 상쇄전략이 존재했는데, 각기 다른 기술과 가정을 기반으로 한다.
오프세트-X 전략은 미중 전쟁이 발발할 경우, 중국 인민해방군이 미국 네트워크를 공격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따라서 미국은 이에 대비해야 한다. SCSP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인민해방군과의 잠재적 전쟁의 결과는 센서, 네트워크, 소프트웨어, 인간-기계 인터페이스, 로지스틱스 그리고 이 모든 요소를 연계하고 강화하는 시스템의 우위와 회복력에 달려있다.’(11) 솔직히 군비통제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는가?
비전문가에게는 무시무시하게 들리겠지만, 지난 10년간 미 국무부의 결정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우스갯소리다. 2014-2018년에 로버트 워크 전 국방부 차관이 추진한 3차 상쇄전략에 이미 대부분 포함됐던 사항이다. 로버트 워크는 현재 SCSP 자문위원회에 재등장했다. SCSP 보고서가 겨냥한 대상은 군인이 아니라 일반 대중이다. 국방부의 인공지능 예산을 늘리기 위해, 대중을 설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이 인공지능 전쟁에서 승세를 잡았으며, 이 승리는 미국 군사력의 패배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을 펼쳐야 한다. 현재로서 두 번째 가정은 공상과학에 불과하다.
ChatGPT에 맞선 어니봇의 실패
그러나 중국이 진짜 승세를 잡은 것일까? 중국이 미국의 ChatGPT에 버금가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을 보면, 중국이 인공지능 전쟁에서 이기려면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12) 바이두가 ChatGPT 경쟁작으로 출시한 어니봇이 처참히 실패함에 따라 주가가 크게 하락했다. 실리콘밸리가 대형언어모델(LLM, ChatGPT에 사용되는 딥러닝 기술) 분야의 선두주자인 이유는 미국의 문화적 헤게모니 때문이다. ChatGPT 기업인 OpenAI가 경쟁에서 훨씬 앞서가는 이유도 방대한 온라인 영어 자료를 기반으로 모델을 훈련시킬 수 있었던 덕분이다. 반면 만다린 자료는 이보다 훨씬 적다.
미국의 문화제국주의를 경계했던 사람들은 이제 ChatGPT 때문에 심각한 걱정거리가 생겼다. ChatGPT가 세상의 모든 문제에 답을 해주는 기본 제공자로 부상했기 때문이다(다만 ChatGPT가 제공하는 답변은 상투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내용으로 제한된다).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미국과의 문화전쟁의 포로가 될지도 모른다.
한편, ChatGPT 등 언어모델의 좁은 범위를 벗어나면, 중국 기술 동력은 여전히 강력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호주의 유명 싱크탱크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이 핵심기술 분야 44개 중 37개에서 선도적 위치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목록에는 국방, 우주, 로봇공학, 에너지, 환경, 생명공학, 인공지능, 신소재, 양자기술 등이 포함된다.(13)
이런 논문들 대부분의 문제점은 대학기관의 상대적 성과, 출판물 수, 개별 연구자의 학위 등의 연구 지표에만 과도하게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다. 특정 분야에서 우위를 가늠하는 지표로 사용될 수는 있지만, 결론을 실상에 적용할 수 없다면 모든 논문은 무용지물이다. 바로 여기서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시도가 성과를 맺고 있다. 미국은 화훼이가 5G 시장을 주도하는 것을 막고, 중국이 최첨단 칩 제조의 자급자족을 달성하는 것을 저지하는 정책을 펼쳤다.
냉전 2.0을 원치 않는 미국 IT기업들
한편, IT산업과 방산업체의 의견이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다. 미국 IT기업들은 힘겨루기 때문에 중국 민간시장을 잃고 싶어 하지 않는다. 따라서 본격적인 냉전 2.0도 원치 않는다. 자사 판매에 타격을 입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반면 방산업체들은 애초에 민간 계약자가 없고, 미 국방부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중국군과 거래할 수도 없기에, 이런 제약이 없다. 따라서 방산업체들은 냉전 2.0을 원한다. 지금 당장 말이다. 이 중 일부는 열전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바이든 정부의 중국 IT기술 견제정책(느리지만 중국을 옥죄는 성과를 보임)은 양측의 불편한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에게 핵심기술을 팔지 말라고 네덜란드, 한국, 일본 등 동맹국을 구슬려서 중국의 목에 올가미를 조이고 있다. 또한 해외직접생산물규정(FDPR) 등 냉전시대의 법적장치도 활용하고 있다. 이는 미국 기술로 제품을 생산하지 않은 경우, 외국 기업의 중국 수출을 제한하는 규정이다.
이 정책의 의도는 인공지능 개발 비용을 ‘적당히’ 높여서, 중국의 기술 자급자족 열망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다. 또한, 바이든의 정책은 중국이 목표에 달성하는 속도를 늦춤으로써 미국이 자체적인 인공지능 관련 문제(대만의 칩 산업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를 해결할 시간을 벌어줬다. 최소한 미국은 중국의 의존성을 연장하고 이를 이용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명시적 목적을 숨기지 않는다(안드레 군더 프랭크, 루이 마우로 마리니 등 종속이론가들이 이를 지적했었다).
중국이 자국 목표를 지지해줄 국제 동맹을 결성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미국은 혼자서 중국을 상대하지 않는다. 인공지능국제협의체(GPAI) 등 국제 이니셔티브를 활용하고 주도한다. 길먼 루이가 운영하는 슈미트 펀드인 AFF는 최근 4자 안보협의체의 후원을 받아 인도, 일본, 호주와 함께 공동펀드를 출시했다.
IT기업에 힘을 실어주는 ‘민주주의와 세계평화’
이런 노력들은 대부분 민주주의와 세계평화를 촉진한다는 기치 아래 이루어진다. 그러려면 국방 예산이 늘어나고, IT기업과 그 주주들은 더욱 부유해질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유럽은 군사문제에 있어서 미국을 따른다는 이유로, 이런 노력들에는 거의 동참하지 않는다. 변화가 생기더라도, 대부분 규모가 작다. 예를 들어 최근 NATO는 네덜란드가 10억 유로 규모의 혁신펀드를 유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유럽의 국방예산이 증가했지만, 인공지능 자금을 받는 대상은 아마도 팔란티어 같은 미국 기업일 것이다.
이 시점에서 미국 기업들이 속도를 내지 못하게 저지하는 것은 유럽의 개인정보보호법이지, 현행 공공정책이 아니다. 이탈리아가 ChatGPT를 금지한 사건만 있는 게 아니다. 독일에서는 경찰이 팔란티어의 데이터 분석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서 범죄가 발생하기도 전에 방지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개인정보보호법이 언제까지 미국을 막아 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최근 유럽위원회 관계자들의 연설을 보면, EU는 미국이 주장하는 냉전 2.0을 상당히 설득력 있는 시나리오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EU-중국 관계를 악화시키는 동시에 EU를 미국 IT기업들의 수중에 밀어 넣을 것이다. EU가 택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전략은, 과거 몇몇 사안에 대해 그랬듯, 양측을 경쟁시키는 것이다.
2014년, 정치학자 리다 바이스는 미국의 기술 선도력의 진짜 동력은 실리콘밸리가 아니라 국가안보라고 주장했다.(14) 그녀는 냉전의 적이 부재했던 탓에 미국은 획기적 혁신을 창조할 능력이 약화됐다고 꼬집었다. 더 나아가 “중국은 왜 소련이나 일본처럼 혁신을 주도하는 경쟁자로 변모하지 않느냐”는 질문까지 던졌었다. 그러나 이는 시간문제였다.
린다 바이스는 미국이 기술경쟁을 선도하고 싶다면, ‘금융주의(Financialism)’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월스트리트의 이득을 제쳐두고 미국 제조업의 재건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외로 이것은 월스트리트의 몰락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광고함으로써 돈을 벌겠다는 실리콘밸리의 부상이다. 미국을 단잠에서 깨우고, 중국을 과거 소련처럼 적으로 만드는 전략이다.
만약 이 모든 것의 시작에 테트리스가 있다면? 신냉전은 시작됐다. 거의…
글·에브게니 모로조프 Evgueny Morozov
비영리 지식탐사 플랫폼 ‘더 실라버스(The Syllabus)’ 설립자이자 편집자이다. 2023년 여름, 살바도르 아옌데의 기술적 업적에 관한 팟캐스트 ‘더 산티아고 보이즈(The Santiago Boys)’를 출시할 예정이다.
번역·이보미
번역위원
(1) 2023년 3월 31일, 애플TV+에서 <테트리스>라는 영화를 공개했는데, 소련에서 시작된 테트리스 게임이 전 세계 컴퓨터로 확산되는 놀라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주제에 관해 가장 권위 있는 서적은 댄 애커맨의 『The Tetris Effect 테트리스 효과』(PublicAffairs, 2016년)다.
(2) François Flahaut, ‘Ni dieu, ni maître, ni impôts 신도, 주인도, 세금도 없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8년 8월호.
(3) Eric Schmidt, Yll Bajraktari, ‘America could lose the tech contest with China’, <Foreign Affairs>, 뉴욕, 2022년 9월 8일. 바이라크타이는 슈미트의 인공지능 싱크탱크인 SCSP의 대표다.
(4) Defensescoop.com, 2022년 12월 7일.
(5) Cf. Kate Kaye, ‘Inside Eric Schmidt’s push to profit from an AI cold war with China’, <Protocol>, 2022년 10월 31일, https://www.protocol.com
(6) Jonathan Guyer, ‘Inside the chaos at Washington’s most connected military tech startup’, <Vox>, 2022년 12월 14일, https://www.vox.com
(7) CNBC.com, 2022년 12월 13.
(8) Alex Thompson, ‘Ex-Google boss helps fund dozens of jobs in Biden’s administration’, <Politico>, 2022년 12월 22일, https://www.politico.com
(9) <Time>, 뉴욕, 2021년 11월 5일.
(10) Henry A Kissinger, Eric Schmidt, Daniel Huttenlocher, ‘The Age of AI : And Our Human Future’, <Little, Brown and Company>, 뉴욕, 2021년.
(11) ‘The Future of Conflict and the New Requirements of Defense. Interim Panel Report’, <Special Competitive Studies Project>, 2022년 10월, https://www.scsp.ai
(12) Gabrielle Chou, ‘La Chine entravée dans la bataille de l’intelligence artificielle 인공지능 전쟁에 속박된 중국’,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3년 4월호.
(13) Jamie Gaida, Jennifer Wong Leung, Stephan Robin, Danielle Cave, ‘ASPI’s Critical Technology Tracker : The global race for future power’, <Australian Strategic Policy Institute>, 2023년 3월 2일, https://www.aspi.org.au
(14) Linda Weiss, ‘America Inc.? Innovation and Enterprise in the National Security State’, <Cornell University Press>, 이타카, 20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