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프랑스 의대생들의 탈출구
타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의사 지망생들
오늘날 프랑스에 의사가 부족한 것은, 지난 50년 동안 의대 정원을 엄격히 제한해왔기 때문이다. 인원제한은 어느 정도 완화했다지만, 극히 부분적인 조치에 지나지 않아 향후 10년 의료 수요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프랑스에서 학위를 이수하지 못한 의사지망생들에게 다른 국가, 특히 루마니아로의 유학은 최후의 탈출구이자 험난한 가시밭길이다.
“1학년 이수 후 2학년 진급 관문은 치열합니다. 이 첫 관문에서 두 번 낙방하면 재기할 방법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의학을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적십자에서 활동하던 중에 루마니아 클루지나포카에 있는 의과대학에서 프랑스어로 강의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바로 원서를 냈고, 합격했어요. 주어진 소명이 있다면, 세상 끝까지 가더라도 지켜야지요.”
현재 의대 3학년생인 레오폴딘 뮐레르는 프랑스 두(Doubs) 지방 출신이다. 루마니아 북서부 트란실바니아에 있는 클루지나포카는 인구 35만의 도시다. IT, 신기술, 연구와 개발에 힘입어 경기가 활기를 띠는 이곳은 ‘루마니아의 실리콘밸리’로 불린다. 이곳의 6개 공립대학과 다수의 사립대학에는 루마니아는 물론 유럽, 아프리카, 이스라엘 등지에서 온 학생 약 8만 명이 재학 중이다.
의사의 꿈을 이룰 마지막 기회
클루지나포카(‘클루지’로 알려짐)의 도심은 프랑스 대학 도시와 유사하다. 성 미하일 성당을 둘러싼 활기찬 우니리 중앙 광장 주변에는 르 툴루즈, 랄키미스트, 체 게바라 등의 이름을 붙인 주점과 음식점이 즐비하다. 주말이면 한 주 수업을 마친 청년들이 모여들고, 곳곳에서 프랑스어가 들려온다. 이울리우 하치에가누 의약대학(Iuliu Haţieganu, UMF)의 프랑스어권 학과에서 일반 의학, 치의학, 약학을 공부하는 학생은 약 1,800명에 달한다. 유럽과 북아프리카 프랑스어권의 학생 중 대다수가 프랑스 국적 학생이다. 이들에게 클루지에서의 의학 과정은 의사가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3~6학년생들 중 상당수는 2020년까지 프랑스에서 시행된 의예과 1학년 공통시험(이하 Paces)에 낙방한 이들이다. 이 시험은 두 번 불합격하면 다시는 응시할 수 없다. 이 경쟁시험을 통해 2학년 진급 여부가 결정되는데, 진급이 가능한 학생 수는 제한돼 1971년 의학과 교원 자율조합과 자율고등교육노조연합(FSAR)의 요청에 따라 역대 모든 프랑스 정부는 2학년 진급 인원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의사의 수와 사회보장 지출을 제한해 왔다.(1) 의대 정원은 1972년 8,588명에서 1993년 3,500명까지 감소했다가, 2020년에는 9,361명으로 확대돼 점진적으로 증가해왔다. 일반 의학과 합격률은 15% 안팎이다.
클루지에서 3년째 의학 공부를 하는 보르도 출신 기욤 수는 프랑스 의예과 재학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Paces 시험은 아주 어려웠어요. 앞이 막막해서 사람들과 만남도 끊고 지냈어요. 부모님이 강습료를 대주셔서 사설 강좌를 듣기도 했지만, Paces 시험에서 두 번 연거푸 고배를 마셨죠. 그 후 코로나 팬데믹 동안 보르도 병원 응급실에서 물건 나르는 일을 했어요. 참 좋은 경험이 됐답니다. 그러다가 일반의가 된 부모님 지인의 딸을 만났어요. 그녀가 클루지에서의 의학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상당히 만족스럽다고 하더군요. 교수진도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았고요. 그래서 저도 이곳에 지원했고, 합격했죠.”
우니리 광장 주변의 술집에서 만난 학생들은 자기 경험을 기꺼이 들려줬지만, 프랑스에 돌아갔을 때 차별받을까 봐 이름 밝히길 꺼렸다. 루아레에서 온 의과 4학년생인 폴 B.도 Paces 시험에서 두 번 다 낙방했다. “클루지 의과대학은 형을 통해 알게 됐어요. 우리 형도 여기서 학교에 다녔거든요. 부모님께서는 제가 바칼로레아를 치른 직후에 여기서 공부하기를 바라셨지만, 저는 그래도 프랑스 의대에 도전하고 싶었어요. 부모님 말씀대로 여기서 곧장 공부를 시작했으면 낙방의 아픔은 겪지 않았겠죠. 하지만 그 아픔 덕택에 마음을 굳게 먹고, 고교를 갓 졸업하고 온 학생들보다 나은 실력을 갖출 수 있었어요.”
낯설은 루마니아에서 얻은 희망
하지만 학생들이 모두 처음부터 클루지를 좋아한 것은 아니다. 프랑스 마른에서 온 의대 3학년 셀레스트 피니는 이렇게 말한다. “첫해는 정말 힘들었어요. 고향에서 2,000km나 떨어진 낯선 나라에 떨어졌는데, 공항에서 나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공산주의 시절 분위기가 풍기는 스산한 동네와 까마귀 떼뿐이었거든요. 코로나19 격리기간을 혈혈단신으로 지냈어요. 무척 힘들었지만, 꾹 참고 버텨냈답니다. 지금은 여기 온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클루지 UMF 대학교 총장 안카 다나 부조이아누의 설명대로 의과대 신입생 선발은 서류 전형으로 이뤄진다. “바칼로레아와 고등학교 성적도 중요하지만, 의료 분야 지원자의 능력과 동기를 보여주는 과외활동 이력도 고려합니다. NGO 자원봉사, 병원 인턴십, 보건 분야 업무 경험도 있으면 좋습니다.” 그 밖에도 문화, 스포츠, 단체 활동이나 여행 경험도 고려 사항이 된다.
프랑스 퓌드돔 출신으로 프랑스어권 의대생 모임 클루지 의과학생회(CMC) 회장 아리아나 프로보스트는 지원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신청서를 작성한다고 설명했다. 뮐레르는 자기소개서에서 실력보다는 성격과 열정을 강조했다. “Paces 시험을 준비할 때는 다른 학생들과 끝없이 경쟁해야 했고, 수강생이 너무 많아서 지도 교수를 만날 기회조차 없었어요. 막막하고 힘들었지요. 그러나 이곳 루마니아에서는 첫 해부터 학생들이 서로 의지해요. 그리고 교수님들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어요.”
2020년에는 프랑스의 의학과 1기 과정이 개편됐다. 속성으로 치러지고 경쟁이 과도하게 치열하다는 지적을 받아온 Paces 과정이 두 가지 학사 과정으로 구분됐다. 기존의 Paces 과정을 본떠 의학 주전공에 선택 과목(법학, 경제학, 생물학, 철학, 언어 등)을 부전공으로 하는 의학 특화 과정 Pass(Parcours accès santé spécifique)와 의학이 아닌 다른 주전공에 의학을 부전공으로 하는 의학 부전공 학사 과정 Las(Licence accès santé)로 나뉜 것이다. 기존의 진학 시험은 학기 중 필기시험과 학기 말 구술시험으로 대체됐다.
한 차례 낙방한 학생은 Las 과정일 경우 주전공을, Pass 과정일 경우 부전공을 이수해 다시 한번 2학년 진학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정부의 목표는 다양한 배경지식을 갖춘 학생들을 육성하고, 의과 시험에 탈락하더라도 다른 학업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것이다. 기존의 2학년 진학 ‘정원 제한 제도(Numerus clausus)’는 ‘최소 정원 제도(Numerus apertus)’로 대체됐다.
새 제도가 학생들을 해외로 밀어내
그러나 새로 도입된 제도가 워낙 복잡한데다가 교수진의 준비도 미흡해 혼선과 차질을 빚었다. 2022년 10월, 학부모와 학생들로 구성된 전국 Pass/Las 단체는 국무원에 의학과 개편 계획의 재검토를 요청하며 다음과 같은 성명을 내놓았다. “의과대학 체계의 전반적인 혼란으로 수천 명의 청년이 진학을 포기하고 있으며, 꿈을 이루려는 학생 수백 명이 이웃 유럽 국가 학부로 이탈하고 있다.”(2)
의과대 학장 회의는 의예과 커리큘럼이 과중하고 다양성을 찾아보기 어려우며, 시험에서도 불평등이 심하다는 점을 인정했다.(3) 그러나 디디에 사뮈엘 학회장은 2학년 정원을 늘리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의과대 학부는 더 많은 학생을 수용할 여력이 안 됩니다. ‘최소 정원 제도’의 인원을 늘리려면 추가 자원이 필요하니까요. 현재 2학년에 입학한 학생은 총 1만 500명입니다. 개혁 내용은 실행이 어렵고 복잡합니다. 일부 학생들이 왜 혼란스러워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해외로 나가는 학생들이 늘어난 이유도 분명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클루지 의대 2학년에 재학 중인 앵드르에루아르 출신 오르탕스 미셸은 자기 경험을 회고했다. “개편이 이뤄진 해 저는 Pass 과정 중에 있었어요.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때죠. 의학 특화과정은 과거 Paces 과정과 같았어요. 우리는 직전 연도에 2학년 진학시험에서 탈락한 학생들과 경쟁해야 했어요. 지원자가 이미 넘쳐나는데, 의학 부전공 학사 과정까지 더해진 거예요. 자격 요건은 매번 달랐어요. 저는 연초에 부전공에서 낙제 점수를 받아서 2학기 시험에 응시하지 못했어요. 2학년 과정에서 적성에 안 맞는 부전공을 계속할 자신이 없었어요.”
노르망디에서 온 사망타 주아외는 2학년 때 Pass 과정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자리가 없어 Las 과정에 등록했다. “시험에 떨어졌어요. 2년이 지나야 다시 시험을 볼 수 있는 일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2학년에 진학하지 않았어요."
그 밖의 유럽 국가에서 의학을 공부하려는 프랑스 학생들은 1) 스페인, 영국, 독일 등지에서 해당 국가 언어로 수업하는 학부에 등록하거나, 2) 헝가리, 크로아티아, 루마니아에서 영어로 강의하는 학부에 등록하거나, 3) 벨기에나 루마니아의 세 프랑스어 사용 학부(가장 규모가 큰 클루지나 티미쇼아라, 이아시)에서 모국어로 공부할 수 있다. 벨기에 왈롱 지역은 오랫동안 프랑스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최근 입학조건이 더욱 엄격해졌다. 2021년에는 의과와 치과 시험 응시자 6,200명 가운데 외국인이 3,300명이었는데, 이중 프랑스 출신 응시자의 합격률은 30%를 밑돌았다.(4) 이처럼 프랑스 응시자가 늘어난 데는 Pass/Las 과정 개편이 한몫했다.
클루지의 UMF 역시 높은 지원율을 기록했다. 수요가 커지면서 일반 의학 1학년에 입학하는 프랑스어권 학생의 수도 많아졌다. 2007년에 프랑스어 과정 개설 당시에는 수십 명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200명에 달한다. 부조이아누 총장은 이 과정이 만들어진 이후 지원자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2020년에는 의과에 6명, 치과에 17명이 입학했다(학생 50명). 바칼로레아를 마치자마자 바로 루마니아로 유학을 희망하는 프랑스 지원자도 점점 더 많아지는 추세다.
UMF 연간 등록금은 2020년 6,000유로에서 최근 7,500유로로 인상됐다. 이 학비는 대부분 학부모가 부담한다. 학자금 대출을 받기도 한다. 브르타뉴에서 온 4학년생 알린 베리에는 경제적 고충을 토로했다. “10년 만기로 3만 6,000유로 학자금 대출을 받았는데 내년부터 상환을 시작해야 해요.” 사회적 기준에 따라 대학 생활지원센터에서 지급하는 유럽의회 장학금을 받는 경우도 있는데, 그 액수는 가정의 소득에 따라 100~400유로로 다양하다. 클루지의 원룸 월세는 200~300유로인데 유학생이 많아서 매년 인상된다. 루마니아에서 생활비가 가장 높은 곳은 프랑스 평균치에 가깝다. “장학금과 부모님의 도움으로 학비와 월세, 공과금을 해결하고 있어요.” 하지만 4학년 마틸드 C.는 생활하기 빠듯한 수준이라고 말한다. “학비에 보태려고 여름에는 일을 해요. 운이 좋게도 클루지 대학교에서 그 해 최우수 학생 10명에게 주는 1,500유로 상당의 장학금도 받았어요.”
프랑스어 과정의 인기 비결
부조이아누 총장은 클루지의 프랑스어 과정이 인기가 많은 비결은 교육의 질에 있다고 말한다.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강사진은 대학 내 최고 수준입니다. 프랑스에서 일했던 사람이 많아요. 경험도 많고, 유럽 유수의 대학이 제공하는 교육에도 꾸준히 참석해서 최신 교육 혁신에 발맞춰 교육을 진행합니다. 최근에는 고성능 모형과 로봇과 같은 의료 시뮬레이션 장치를 새로 도입했어요. 실습과 응용 교육을 강조해서, 학생들은 첫해부터 병원에 배치돼 환자들을 만나죠. 다양한 분야의 팀에서 일하는 법도 가르치고요.” 부조이아누 총장은 해당 대학이 프랑스어권 의과대학 국제학회(CIDMEF)의 공식 인증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브뤼셀에 본부가 있고 850개 대학 기관을 대표하는 유럽대학협회(Association des universités européennes)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페트루스 미르체아는 1992~2000년까지 UMF의 학장이자 CIDMEF 상임이사로 활동하면서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의 여러 의과대학 학장을 만나 인맥을 쌓았다. UMF에는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루마니아 의과 교수가 예전부터 많이 있었다. 1930년대부터 프랑스 의과대학에서 루마니아 학생들을 많이 받아들인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공산주의 시대에 제한적이나마 교류를 유지). 미르체아 학장은 마그레브 지역 학장들과 협력해 초기에는 튀니지 및 알제리 학생들을 대상으로 프랑스어로 운영하는 과정을 개설했다. “당시에는 주로 의사가 부족한 제3세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과정을 신설했어요. 프랑스 학생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개설할 생각은 없었죠. 프랑스에는 학생들을 교육할만한 교수진이 충분하니까요.”
당초 1997년에는 영어로 운영되는 과정을 먼저 개설했고, 프랑스어 과정은 북아프리카 출신 학생들을 수용하면서 2000년에 들어 처음 개설했다. 그러다 2007년에 루마니아가 유럽 연합(EU)에 가입해 루마니아 의대 졸업장의 효력이 프랑스에서도 인정되자 프랑스 유학생들이 이곳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클루지에 있는 바베슈-볼리아이 대학교 정치학 교수 세르지우 미슈코이우는 그렇게 해서 “UMF는 유학생들로부터 비싼 수업료를 받아 클루지에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주게 됐다. 더 포괄적으로는 UMF와 클루지를 국제화한다는 당위성도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클루지에서 만난 의대생들은 대부분 교육의 질에 만족한다고 했다. 프로보스트 회장은 교육의 질이 프랑스에 버금가는 수준이며, 실습이 조금 더 많고 특정 기술에 대한 접근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차이만 있다고 평가한다. “각 과목 강의는 15명으로 이뤄진 소그룹으로 실습과 연계해 진행됩니다. 해부학 수업에서는 정기적으로 해부 실습을 합니다.” 3학년에 재학 중인 셀레스틴 피니는 이렇게 설명한다. “일주일에 두 번씩 병원 내과에서 환자 청진 방법을 배우고, 수술실에서 참관하기도 합니다.”
교육 과정은 프랑스처럼 총 6년이며, 첫 3년 동안은 해부학, 의학 기호학, 생물학 분야의 준비 과정과 현장 실습을 한다. 나머지 3년 임상 실습 과정 중에는 다양한 학과 의료진이 감독하는 병리학, 의료 제도, 진료 방법을 배운다. 평가는 6개월마다 이루어지며, 다음 학년으로 진급하려면 모든 과목에서 평균점 이상을 받아야 한다. 6학년이 끝나기 전에 20% 내외의 학생이 낙제나 진로 변경 사유로 학업을 중단한다. 처음 3년 동안은 프랑스어로 수업이 진행되지만, 환자나 병원 직원과 소통을 위한 루마니아어도 필수다. 프랑스어권 학생들은 실습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루마니아어를 배우고 평가받는다. 6년 과정을 마치면 학생들은 유럽 연합 전역에서 인정하는 졸업장을 받고, 의과대학 3기 과정에 해당하는 수련의 과정을 시작한다.
루마니아에서 공부한 것이 ‘부정행위’?
클루지에 프랑스어 강좌가 개설된 이래 클루지에서 공부하던 대다수의 프랑스 출신 학생들은 프랑스로 돌아가 수련 과정을 밟고 싶어 했다. 그러려면 국가경쟁시험(épreuves classantes nationales, ECN)을 치러야 했다. 이 국가시험은 최소 기준이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학생들은 시험 성적에 따라 전공 분야와 소속될 병원을 선택할 수 있다. 이 시험을 준비하려면 3년간의 임상실습 기간 동안 배운 내용을 복습하고, 방대한 의과대학의 참고 문헌 내용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오직 최상위권 학생들만 외과, 안과, 심장혈관내과 등 인기 있는 전공을 택할 수 있다. 하위권 학생들은 정신과, 직업 의학과, 노인의학과나 (최근에 전문 전공으로 분류된) 일반 의학과 중에서 선택한다.
레미 말리키는 2009년에 클루지에서 공부했고, 지금은 프랑스 남동부에서 일반의로 일한다. “루마니아 교수들은 프랑스 교수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하기 때문에 국가경쟁시험에 제대로 대비할 수 없었어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혼자 힘으로 시험을 봐야 했죠. 시험결과가 별로인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일반의 자격만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루마니아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고 전문의가 되려는 학생들은 루마니아에 남아 수련의 과정을 밟기도 했습니다.” 수련의 과정이 끝날 무렵, 이 학생 중 일부는 프랑스로 돌아가기로 했다. 드물지만 루마니아에 남거나 UMF에서 강의를 하는 사례도 있었다.
유럽 국가에서 의학 공부를 마친 프랑스 학생들이 국가경쟁시험에 응시하게 되자 프랑스의사위원회(Conseil national de l’Ordre des médecins)에서 반발이 일었다. 2012년, 전 회장 미셸 레그만은 이런 시도를 ‘부정행위’라면서 ‘용납할 수 없는 편법’을 중단하라고 비난했다.(5) 2011년에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에서의 의학 공부 기회를 모두 소진한’ 학생들은 국가경쟁시험에도 응시할 수 없게 하는 법령을 채택했다. 그러자 국무원은 클루지의 프랑스어권 학생 협회인 CMC의 요청에 따라 “해당 내용이 유럽법에 어긋난다”며 이 법령을 무효로 했다. 그러나 루마니아의 프랑스 학생들은 시험 준비에 필요한 전산 자료에 접속할 수 없는 불이익을 받았다.
2015년 초, 클루지 의과대학의 임상 실습 과정에 등록한 프랑스 학생 두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또 다른 두 명이 자살을 기도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프랑스어권 의과대학 내의 심각한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고, 프랑스 당국은 위기 대응팀을 꾸렸다.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프랑스로 돌아갈 준비를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클루지 학생들의 막막한 상황도 간과할 수는 없다.
당시 클루지에 있는 프랑스 의학 연구소 소장이었던 브누아 바부세는 “우리는 의학뿐 아니라 학문이라는 관점에서도 이 위기를 살펴야 했습니다. 쉬운 문제가 아니었어요. 클루지의 프랑스 학생들이 국가경쟁시험 전산 플랫폼에 접속할 수 있게 하는 것도 풀어야 할 과제였죠. 이후 여러 각료 회의에도 참석했고, 사태를 수습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산 플랫폼 접속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 클루지 의과학생회에서 탄원서를 제출했고, 2016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과 2017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루마니아를 찾았을 때 위원회 책임자들이 의견을 물었다. 클루지에서 공부했고 현재 프랑스에서 일반의로 일하는 티파니 P.는 “전산 플랫폼 접속 권한이 절실했어요”라며 한탄했다. “우리는 6학년 하반기에 루마니아 경쟁시험을 준비했지만, 전산화된 프랑스 경쟁시험은 준비할 방도가 없었으니까요. 루마니아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최하위권으로 밀려나기 일쑤였어요. 극소수 좋은 점수를 받은 친구들도 있지만요. 저는 처음부터 일반 의학과를 선택해서 지금은 프랑스 병원에서 임상 수련 과정에 잘 적응하고 있어요.” 결국 해외 프랑스어권 과정 학생들은 2020년이 돼서야 전산 플랫폼에 접속할 수 있었다.
“루마니아에서 공부했다고 말하지 않아요”
앞으로 국가 경쟁시험을 폐지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편이 이뤄지면, 클루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다시 한번 열외가 될 것인가? 2023년 10월부터는 수련의 과정에 들어가려면 국가경쟁시험과 유사한 전산 국가시험(EDN)과 2024년 5월부터 미래 의사의 역량을 평가하기 위해 마련된 상황별 구술시험(Ecos), 두 가지 시험을 치러야 한다. 일부 상황별 구술시험은 4학년 중에, 최종 시험은 6학년 말에 치른다. 학과 성적도 반영되며, 최소 학점 충족 요건도 있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 공부한 학생이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요건이 명시된 문서는 전무하다. 2022년에는 전체 지원자 9,757명 중 333명이 국가경쟁시험을 치렀다.
클루지 의과학생회장 프로보스트는 이렇게 전망한다. “새로 개편되는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요. 어떤 기준을 적용해 자격을 검증할까요? 개편된 내용에는 다른 국가 의대 재학생들의 응시를 가로막는 요건이 많이 있더군요. 프랑스 대사관을 접촉해 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이렇다 할 명확한 답변은 받지 못했어요.”
클루지에서 공부하고 프랑스 병원에서 응급의학과 수련의로 일하는 리즈 B.는 동료들이 겪는 문제에 대해 설명했다. “저는 루마니아에서 공부했다는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아요. 편견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우리가 편법을 쓴다며 헐뜯거든요. 하지만 함께 일해 보면 그런 험담은 쏙 들어가요. 여하튼 이런 인식 때문에 점점 더 많은 클루지 출신 학생들이 루마니아, 독일, 스위스에서 수련의 과정을 밟기를 바라죠. 프랑스로 돌아온 동기는 절반도 채 안 돼요.”
독일 서부 함(Hanm) 병원 마취통증의학과 수련의 크리스토퍼 헤이칼은 “독일에서는 독일 전문의 시험을 통과해 실력 본위로 평가하는 병원에 지원만 하면 됩니다. 저는 무사히 시험을 치르고 루마니아에서 제대로 배웠다는 것을 증명해냈어요.” 의과 2기 과정의 개편된 요건은 클루지에서 공부한 프랑스 학생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더욱 힘들게 한다. 해외에서 수련의 과정을 밟는 학생들은 또 다른 언어를 습득하고 10년 가까운 세월을 해외에서 보내야 한다. 고국에 돌아가서 의사로 활동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 상황이지만, 정작 그런 프랑스에서 ‘모두를 위한 의료 서비스’란 여전히 요원한 이야기다.
상원에서 2022년 3월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프랑스인의 11%는 주치의가 없고, 인구의 30%는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의료 사막’에 산다.(6) 일반의 수는 2010년 이후 11% 감소했으며, 전국적으로 그 분포는 점점 더 불균등하게 나타난다.(7) 예를 들어,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의 일반의 분포는 인구 10만 명당 161명이지만, 상트르발드루아르의 경우는 110명에 불과하다. 현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는 비유럽계 외국인 의사들을 위한 특별 체류 허가제를 도입할 계획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클루지 학생들은 프랑스 병원에서 어렵지 않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 알리에, 앵드르주(州) 지역협의회는 UMF와 클루지 의과학생회와 연계해 프랑스어권 학생들에게 해당 지역 병원에서 일할 기회를 부여한다. 사르트주와 알리에주에서는 미래의 의사들이 향후 그곳에 정착하도록 장학금도 지급한다. 점점 더 많은 병원에서 이들을 채용하려고 할 뿐 아니라, 일부는 관계 구축을 위해 클루지를 직접 찾아가기도 한다.
글·필리프 바케 Philippe Baqué
특파원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Marc-Olivier Déplaude, ‘반혁명적 결집: 1968년 5월 의학과 교원 자율조합 재건과 ‘선발’을 위한 투쟁’, 파리, 제73호, 2009년.
(2) ‘실패한 의과대학 개혁. 수백 명의 학생이 유럽 학부로 이탈’, <Le Figaro Étudiant>, 파리, 2022년 10월 11일.
(3) Soazig Le Nevé, ‘의과대학: 학장 회의에서 출신 다양화를 위한 개혁에 대해 뒤섞인 평가, <르몽드>, 파리, 2022년 5월 16일.
(4) ‘의과대학: 벨기에로 떠나는 지망생들’, <Egora>, 2021년 7월 13일, https://www.egora.fr
(5) ‘1학년 2회 낙방: ‘부정행위’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CSMF, 2012년 2월 2일, https://lesgeneralistes-csmf.fr
(6) M. Bruno Rojouan, ‘균등한 의료 접근성 확보: 너무 늦기 전에’, 지속 가능한 국토개발 및 발전 위원회 정보 보고서, 상원, 파리, 2022년 3월 29일 작성.
(7) ‘프랑스의 의료 인구 통계 지도’, 프랑스 의사위원회, 2022년 1월.
루마니아 의사들, 프랑스 ‘의료 공백’ 채워
루마니아에서 공부한 프랑스 의대생들이 프랑스로 돌아가 수련의 과정을 밟는 데는 어려움이 많지만, 루마니아 의사와 전문의들은 프랑스에 파견돼 부족한 의사 자리를 메운다. 2007년 루마니아가 유럽 연합에 가입한 이후, 프랑스의 수백여 도시와 마을은 채용 대행사를 통해 추가 수당 지급, 세금 감면, 숙소 지원과 같은 혜택을 제공하면서 루마니아 출신 의사 유치에 나섰다. 프랑스 국립의료위원회에 따르면 2021년 프랑스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의사 19만 7,811명 중 1만 1,433명은 다른 유럽 국가 출신이며, 1만 3,984명은 유럽 이외 지역 출신이다. 2022년 프랑스-루마니아 의사 협회는 루마니아 의사 7,634명, 치과의사 1,210명이 프랑스에서 진료 활동을 한다고 추산했다. 전 프랑코-루마니아 교육부 장관 클로틸드 아르망은 “7만 명 넘는 루마니아 의사가 서유럽으로 이주했으며, 2009~2015년 기간에 전체 의사의 절반 이상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이들을 양성하는 데 국가가 지출한 비용은 약 80억 유로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루마니아의 농촌 지역 주민 수십만 명은 아플 때 찾아갈 의사가 없는 실정이다. 하지만 인력 해외 유출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부쿠레슈티의 마취과 의사이자 사회학자 라두 미하이 두미트레스쿠는 “이런 이주 형태는 취약한 제도를 더 나쁘게 한다”라고 주장했다. 지방 병원에서는 더 이상 의료 연속성을 보장하지 못하며, 전국 곳곳에 전문의와 의료 서비스가 부족하다. 루마니아 정부는 의료진의 해외 이주를 막기 위해 2017년에 급여를 두 배로 인상했다. 루마니아 의과대학 총장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의료 인력 유출을 막지 못합니다. 이주는 복잡한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매년 루마니아에서 교육을 이수한 의사 3,000명 중에서 루마니아 의료기관에 진출하는 인원은 1,000명에 불과합니다.”
글·필리프 바케 Philippe Baqu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