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파 마린 르펜의 화려한 '변신'
Spécial 프랑스 대선
지난 3월 중순 프랑스의 툴루즈와 몽토방에서 자신을 알카에다 소속이라고 밝힌 한 젊은이의 연쇄 총기 테러 사건이 발생하자, 국민전선(FN)은 다시금 자신들의 단골 주제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민과 이슬람이 문제라는 것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대선 후보 마린 르펜은 국민전선에는 다소 생소한 사회적 문제를 선거 쟁점화하던 터였다.
"자유주의 신학의 성령(聖靈)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이것이 이기적인 개인 행동의 총합에서 과학, 더 나아가 자연 질서에 더 적합한 집단적 행복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본다." 대선 유세가 한창일 때 출판된 마린 르펜의 책(1) 속에 등장하는 이 구절은 성삼위일체 이론뿐 아니라 전통적 우파에게도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다. 르펜은 이 책에서 '세계화한 국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일 뿐인 '급진적 자유주의'를 맹렬히 비난하며 이 '새로운 귀족정(政)'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제도권 좌파와 우파 모두 과두지배 체제의 이익에 봉사하는 급진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낳은 세계화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린 르펜은 아무리 양보해서 보더라도 극우파와 공통점이 전혀 없어 보이는 저자들까지 동원해가며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한다. 가령 필리프 아스케나지가 공저 <충격받은 경제학자들>(2)에서 쓴 글을 두 번이나 인용했고, 세르주 알리미의 저서도 두 권이나 인용했다. 한 번은 시장의 정신적 침투를 비판하기 위해, 또 한 번은 '언론 귀족'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르펜은 "세계화주의는 소비주의와 물질주의의 결합이다. 인류를 역사에서 이탈시켜 질 리포베츠키(루마니아계 프랑스 소장 철학자로 <행복의 역설> 등이 번역돼 있다)가 명명한 '공허의 시대'로 이끈다"고 쓰기도 했다. 에마뉘엘 토드에서부터 프랭클린 루스벨트까지, 카를 마르크스에서 모리스 알레까지 르펜은 동원할 수 있는 저자를 모두 인용하며 '세계화주의'(Mondialisme)를 비판한다.
르펜은 "정교분리, 공화국, 자유무역, 유로존 해체 등과 같은 중요한 주제에 대해 의견이 다른 동료들과 치열한 토론을 벌인 뒤" 철학자 장클로드 미셰아(고교 철학교사 출신으로 사회주의 교양도서를 다수 출간함)의 생각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미셰아에 대해 "그를 국민 철학자로 추앙하는 것을 용서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그는 미셰아의 <애덤 스미스의 곤경>(3)을 읽고 "좌파가 왜 자신의 이상과 노동자·민중을 대변해야 한다는 본분을 잊고 소외자와 불법체류자들 문제로 도망갔는지 이해하게 됐다"고 말한다.
르펜은 이상한 방식으로 반대파에 때늦은 경의를 표한다. "좌파는 탄생한 순간부터 해방을 향한 투쟁을 전개해왔다. 좌파의 정치적 역사는 계시적 진리에 맞선 이성의 이름으로 시작됐다. 철학자들과 백과전서파는 인간의 의식을 억압하는 파렴치한 교회와 투쟁했다." 이미 르펜에게 등을 돌린 극우파 계열 신문들(<리바롤> <미뉘트> <프레장> )은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좌우파 이론 모두 동원하는 극우파
르펜은 자신의 세계화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이민 문제를 언급할 때도 사회적 관점을 동원한다. 그는 "외국의 모든 노동자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닥칠 경우 프랑스 노동자의 삶은 더 피폐해질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국내화한 공장 이전"(값싼 노동력 유입과 공장의 해외 이전이 동일한 효과를 가져온다는 생각)과 "현대적 노예제의 추악한 현실"을 고발한다. 여기서도 르펜은 반대편의 생각을 태연하게 빌려다 쓴다. 가령 전 프랑스 총리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가 1957년 1월 19일에 한 말을 찾아내 인용하는 식이다. "프랑스는 경제 상황에 따라 이민 유입을 억제할 권리, 실업과 외부의 영향에 의한 삶의 질 저하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권리를 수호해야 한다."
"세계화는 현대적 노예제"
마린 르펜은 프랑스 공산당(PCF) 서기장 조르주 마르셰가 이슬람 사원인 파리 모스크 책임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더 많은 노동자를 실업자로 내몰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민을 그만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사회적 긴장'과 '게토 현상'을 언급한 사실을 들춰낸다. 그러나 좌파당(PG) 지도자 알렉시스 코르비에르는 르펜이 마르셰의 다음 문장을 인용하지 않은 점을 지적한다. "우리가 길잡이로 삼아야 하는 것은 증오와 단절이 아니라 이주노동자와의 연대와 이들에 대한 관심을 공유한 공동체다."(4)
세계화주의에 대항한 싸움은 마린 르펜에게 자유무역과 이민 비판을 위한 구실을 제공한다. 그는 "재산업화와 생산시설의 국내 복귀 정책만이 진정한 생태주의를 실현하는 길"이라면서 보호무역을 지지하고 유로존 탈퇴를 주장한다. 자신의 정책을 선전하기 위해 사회적 뉘앙스를 풍기는 주장을 반복적으로 인용하는 수법은 정치적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으로 보인다.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차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치안이나 이민 문제에 대한 마린 르펜의 입장은 5년 전 아버지 장마리 르펜이 내세운 정책보다 다소 완화됐지만 여전히 극우적 성향을 띤다.
이민 문제에 관한 그녀의 입장은 강경하다. 가령 "합법 이민자 수를 연간 20만 명에서 1만 명으로 줄일 것"이며 "출생지주의를 철폐하겠다"고 공언한다. 아버지 르펜이 내세운 '내국인 선호' 정책은 '내국인 우선' 정책으로 한층 강화됐다. 2007년 대선에 국민전선 후보로 출마한 아버지 르펜은 "각종 사회보조금과 가족지원금을 프랑스인들에게만 지급하겠다"고 선언했다. 오늘날 마린 르펜은 기업들이 "같은 능력이라면 프랑스 국적 소유자에게 취업 우선권을 줘야 한다"면서 공공주택 임대에도 같은 논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족지원금은 최소한 부모 중 한 명이 프랑스인이거나 유럽인일 경우에만 주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아버지 르펜과 딸 르펜의 차이
아버지와 딸 사이의 차이는 경제 분야에서 더 잘 드러난다. 아버지 르펜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1981~89년 재임)에 대한 존경심을 감추지 않았다. 푸자드주의자(푸자드주의는 중소 상공업자의 정치·경제적 불만을 배경으로 1953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반의회주의 극우운동을 말함)인 그는 자유기업의 옹호자로서 줄기차게 '국가 개입'과 '재정주의'를 비판했다. 반면 2012년 대선전에서 마린 르펜은 "금융계와 투기꾼들을 통제할 강한 국가"를 역설하면서 "민간은행이 어려움에 처할 경우 부분적·일시적으로 국유화를 고려할 수 있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아버지 르펜이 최고 소득층에 대한 과세율을 20%로 인하하자고 주장한 반면, 마린 르펜은 과세율 46%를 주장한다.
또한 "퇴직 연령을 65살로 다시 연장하자"고 했던 아버지와 달리, 마린 르펜은 정년을 "점차 60살로 낮추고, 40년 이상 보험료 불입자의 퇴직연금 100% 수급 원칙을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몇몇 정책이 변화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국민전선 지도자들은 "세상이 그만큼 변했다"고 대답한다. 마린 르펜의 다음 발언 속에는 프랑스의 '영광의 30년'에 대한 향수 같은 게 느껴진다. "경제권력 간 자유경쟁을 제한하는 국가 개입, 복지 지향적인 법률, 최저임금제, 값비싼 공공서비스, 수익성 없는 학교와 공기업, 관대한 보건 시스템, 가스·전기·교통·우편 서비스 독점 등을 특징으로 하는 프랑스의 혼합경제 체제는 급진 자유주의자들이 꿈꾸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린 르펜은 샤를 드골의 '강력한 책임' 개념에 기초한 '전략적 경제계획'을 부활시키겠다고 공언한다.
이상의 주장들은 아버지 르펜이 1970년대 규합에 성공한 프랑스의 다양한 극우적 관점과 어긋난다. 한때 국민전선을 이끌었고 '클럽 드 로를로주'(우파 정치단체)를 창설한 이방 블로는 "마린 르펜은 서구의 마지막 마르크스주의자다. 이민과 치안 문제를 걱정하며 그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은 자신과 마린 라 루즈(빨갱이 마린)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를 깨닫고 놀랄 것이다"라고 썼다.(5)
"서유럽의 마지막 마르크스주의자?"
대선 후보가 쓴 책을 우리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마린 르펜 후보의 선거 전략가 플로리앙 필리포는 "르펜이 책 <프랑스가 살기 위해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이 직접 썼다"고 말한다. 필리포는 국립행정학교(ENA) 출신으로, 장피에르 슈벤망의 공화시민운동당을 거쳐온 인물이다. 그는 이 책이 '2년간의 공동 작업' 산물이라는 사실 역시 인정한다.
이 책은 지지층을 다변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현재 국민전선은 극우파 내에서 독점적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기존 지지 기반을 다지면서 새로운 지지층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그 일환으로 마린 르펜은 지난해 9월 29일 국민전선의 싱크탱크 '이데 나시옹'(Idée Nation)의 주최로 열린 교육 관련 토론회에서 교육자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오랫동안 우리와 여러분 사이에는 오해가 있었다. 우리는 교육자 여러분을 적대시한다는 인상을 줬다. 오랫동안 우리는 대화를 하지도, 할 말을 찾지도 못했다. (중략) 오랫동안 우리는 여러분을 학교 파괴의 공범자이거나 수동적 방관자로 여기는 실수를 범했다. 여러분 대부분에게 그건 확실히 실수였다. 그런 시대는 이제 끝났다."
같은 방식으로, 불균형한 경제 시스템의 불공정성과 비일관성에 대한 비판은- 특히 경제위기의 맥락에서- 서민층의 지지를 호소하기 위한 현실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마린 르펜의 속임수
마린 르펜의 속임수를 몇 가지 파헤쳐보자.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의 국민전선이 표방하는 사회의 모습이 얼마나 허구인지 금세 알 수 있다. 르펜은 '강한 국가'를 역설하면서 공공정책검토팀(RGPP)을 대규모 공무원 감축의 원흉으로 지적하면서도, 지방정부의 '인원 동결 혹은 감축을 위한 계획'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다른 예도 있다. 국민전선은 '수입품에 사회기여세를 부과'해서 최저임금(SMIC)의 1.4배 이하 임금을 200유로 인상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급여에서 공제되는 사회기여세를 인하하는 방식만으로는 부의 재분배가 균형 있게 이루어지기는 힘들다.
국민전선은 잠재적으로 성향을 달리하는 두 부류의 유권자층 모두에게 적당히 먹혀들 수 있는 공약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낙태 문제가 대표적이다. 모든 종류의 임신중절에 반대하는 전통적 지지층과 여성인권을 중시하는 새로운 유권자층 모두를 만족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마린 르펜은 이 문제와 관련해 '여성이 낙태를 하지 않을 자유'라는 애매한 개념을 통해, 임신중절에 대한 의료보험 지원에 우선권을 주지 않고 보험예산이 어려울 때는 지원을 중단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국민전선의 단골 주제들에 대한 니콜라 사르코지 후보의 반격이 부분적으로 여론의 호응을 얻자, 극우파 후보 마린 르펜은 이민과 이슬람 문제에 더 강경한 태도를 보일 필요가 생겼다. 그럼에도 중산층과 서민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문제를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집권 대중운동연합(UMP)과 국민전선이 경쟁하는 속에서 마린 르펜은 국민전선의 역사적 뿌리와 완전히 단절한 채 당의 과감한 혁신만 내세울 수 없는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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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리크 뒤팽 Eric Dupin <프랑스 여행>(Seuil·파리·2011)의 저자.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프란츠의 레퀴엠> 등이 있다.
(1) Marine Le Pen, <프랑스가 살기 위해서>, Jacques Grancher, 파리, 2012.
(2) Phillipe Askenazy, Thomas Coutot, André Orléan, Henri Sterdyniak, <충격받은 경제학자들의 선언-유럽의 부채와 위기: 10가지의 거짓 확실성, 논쟁 중인 22가지 해법>, Les Liens qui libèrent, 파리, 2010.
(3) <애덤 스미스의 곤경: 자본주의를 왼쪽에서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한 몇 가지 이유>, Flammarion, 파리, 2006.
(4) Alexis Corbière, ‘마린 르펜, 프랑스를 위해 모순적이고 위험한 한 권의 책’, 2012년 2월 3일, www.placeaupeuple2012.fr
(5) Yvan Blot, ‘네오마르크시스트? 마린 르펜이 마린 라 루즈가 될 때…’, 2012년 3월 4일, www.atlantico.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