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도 모로, 영화에서 한 번 더 죽다
붉은 여단에 납치된 이탈리아 총리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인이 테러단체인 붉은 여단에게 납치·암살당한 사건을 픽션으로 다룬다면, 어떤 전개가 펼쳐질까? 20년 전,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은 시적 요소를 가미한 납치 영화를 제작했다. 그리고 최근 같은 주제로 제작한 미니시리즈에서는 또 다른 신념을 구현했다. 현실은 영화 속에서 환상 또는 광기의 연속으로 나타난다.
알도 모로 전 이탈리아 총리(1916~1978)와 마르코 벨로키오 영화감독(1939~).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모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다. 벨로키오는 이탈리아에서 수많은 영화산업의 위기를 거쳐 가족, 종교, 정신병이라는 3대 요소에 입각해 영화산업을 재창조하고 현대화함으로써 네오리얼리즘과 누벨바그의 가교 역할을 했다. 모로는 가톨릭 신자였고, 벨로키오는 反(반)교권주의자에 가까웠다. 모로는 정치인이었고, 벨로키오는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이었다. 태어난 시기도 23년이나 차이가 나며 서로 다른 세대에 속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각자의 삶에서 중대한 사건을 맞이한 시기는 각각 1963년과 1965년으로 비슷하다.
이탈리아 기독교민주당을 이끈 모로는 1963년에 정권을 잡았으며,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사회주의 내각을 통합했다. 이 정치적 업적을 통해 좌파 연대를 깨뜨리고 극우를 주축에서 몰아냈으며, 소속당과 함께 15년간 권좌를 지키는데 성공했다.
벨로키오는 1965년에 <호주머니 속의 손>이라는 작품으로 영화판에 등장했다. 피아젠차를 배경으로 펼쳐진 이 작품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스메르자코프와 유사한 反(반)영웅적 캐릭터가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두 사람은 당대의 문제들에 나름의 방식대로 맞섰는데, 모로는 이를 약화시키려 했고 벨로키오는 이를 자극했다. 이 둘의 행로는 장소와 시간을 함께 했다. 같은 나라, 같은 시기에 만난 것이다.
그러다 2003년 두 행로가 접점을 맞이한다. 벨로키오가 <굿모닝, 나잇(Buongiorno, notte)>이라는 영화 속에서 극좌 테러단체 붉은 여단이 알도 모로를 납치, 살해한 사건을 다룬 것이다. 1978년, 알도 모로는 ‘역사적 타협’의 일환으로 이탈리아공산당이 외부적 지원을 제공할 새 정부에 대한 신임투표가 진행되는 의회로 가던 중 납치당한다. 경호원 5명은 제거되고, 모로는 로마 교외의 아파트로 이송된다. 그는 비밀방에 감금당한 채, 붉은 여단의 수장인 마리오 모테리에게 약식 재판을 받는다. 특히 노동운동 억압과 관련된 정보부의 역할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뤘고, 마침내 그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후 긴 협상이 이어지지만, 결국 사형이 집행된다. 그의 시체는 로마 중심가에 위치한 기독교민주당과 이탈리아공산당 본부의 중간지점에 버려진 채 발견된다. <굿모닝, 나잇>은 키아라라는 인물의 고백을 통해 은밀한 납치사건의 ‘내막’을 보여준다. 키아라는 벨로키오가 안나 라우라 브라게티의 자서전 포로(Il Prigioniero)』에서 영감을 얻어 미적·지적 세계관 속에 재창조한 인물이다.
20년이 지난 현재, 벨로키오는 <바깥의 밤(Esterno notte)>이라는 제목의 6부작 미니시리즈로 납치사건을 재현했다. 최근 프랑스 아르테 채널에서 방영됐다. 에피소드마다 각각의 인물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납치 이전의 모로, 프란체스코 코시가 내무장관, 교황 바오로 6세, 붉은 여단 단원인 아드리아나 파란다, 모로의 약혼녀 그리고 마지막 에피소드에는 포로로 잡힌 모로가 등장한다. 영화와 시리즈의 제목에는 ‘밤’이란 단어가 공통적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세르지오 자볼리 기자가 진행한 <공화국의 밤(La notte della Repubblica)>이라는 유명 방송프로그램 이름을 딴 것이다. 이는 벨로키오가 ‘알도 모로의 암살은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이라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왜 모로의 사건으로 다시 돌아간 것일까?
<굿모닝, 나잇>의 전개 방식은 몽환적이다. 클라이맥스에서 이탈리아 레지스탕스의 기록사진, 텔레비전 영상, 벨로키오의 이미지 등이 키아라의 머릿속에서 포개진다. 그러다 키아라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모로는 정치범이다. 정치범은 레지스탕스다. 고로 우리 붉은 여단은 파시스트와 같다.’ 벨로키오는 이런 삼단논법을 통해 당대의 망상에 영화적 형태를 입힌다. 한편 이탈리아 좌파는 ‘붉은 여단이 모로를 죽이지 않고 풀어줬으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하는 방식으로 모로의 암살사건에 대응했다. 애도의 뜻이 담긴 공동 창작물은 욕망과 현실의 혼동을 빚어내고, 허구적 모로를 탄생시켰다. 만약 풀려났다면, 정치계를 불안정하게 뒤흔들 인물로 그려놓은 것이다. 실제의 모로는 강단 있는 중재자로서 정치적 안정을 지켰던 사실을 감안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벨로키오가 <굿모닝, 나잇>의 결말에 발휘한 상상력은 <바깥의 밤>의 시작점이 된다. 그러나 두 작품에는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 벨로키오는 <굿모닝, 나잇>의 결말에 비극의 시적 탈출구를 심어놓았다. 붉은 여단이 로마에 버린 모로가 맑은 아침 공기를 마시며 행복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바깥의 밤>은 모로가 풀려난 허구적 이야기를 훨씬 어두운 방식으로 표현한다. 모로는 병실에서 옛 동료들에게 둘러싸인 채 깨어난다. 그러나 모로는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동료들은 그의 새로운 감시자가 된다. 그의 죽음을 바란 기독교민주당을 비난하는 모로의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 여기서 길은 외부에서 내부로 이어지며, 이곳에 새벽은 없다.
이탈리아 영화는 종종 순수함을 고집하곤 하는데, 특히 알도 모로라는 인물을 묘사할 때 그렇다. 예를 들어 엘리오 페트리 감독이 레오나르도 시아시아의 소설을 각색한 <토도 모도>(1976)와 주세페 페라라 감독의 <모로 사건>(1986)이라는 영화는 음모를 파헤치고 진실을 밝히는 재검증 과정처럼 그려진다. 반면 벨로키오에게 영화의 본질이란 진실을 입증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환상에서 다른 환상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의 광기에서 다른 광기로의 전환이다.
<바깥의 밤>에서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도 바로 이 전환에 대한 것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소개하는 알도 모로는 벨로키오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사회 시스템에 동화되고, 유력인사 역할에 완벽하게 적응한 인물이다. 그러나 사랑도 증오도 할 수 없는 정체 상태에 갇힌 채, 실제적인 변화에 반대한다. 여기서는 <호주머니 속의 손>의 큰형과 <나는 허공에 뛰어 든다>(Salto nel vuoto)에서 미셸 피콜리가 연기한 판사의 모습을 띤다. 모로는 공산주의를 선택하지만, 그가 교황에게 꾸준히 설명했듯, 이는 오직 동일한 정부와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포로가 된 모로는 여전히 ‘벨로키오식’ 인물이지만, 첫 번째 에피소드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여기서는 <나는 허공에 뛰어 든다>에서 미켈레 플라치도가 연기한 불한당과 <내 어머니의 미소>(L'ora di religione: Il sorriso di mia madre)의 화가와 같은 모습을 띤다. 여기서는 폭도, 파괴자, 반역자이다. 모로라는 양면적 인물은 미치광이다. 벨로키오는 첫 번째 모로의 광기를 부르주아, 천주교, 전통적 가족 등 미친 체제에 순응한 사람으로 정의했다. 반면 포로가 된 모로의 광기는 현 사회에 맞서는 예술가 또는 창의적이고 전통 파괴적인 모습으로 구현했다.
<바깥의 밤>은 모로가 정치적으로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천주교를 벗어나는데 성공하고 억압된 감정, 특히 당 동료인 줄리오 안드레오티에 대한 증오를 표출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모로는 마침내 자유로워진다. 혹은 또 다른 광기의 포로가 된다.
글·외제니오 렌지 Eugenio Renzi
기자, 영화 평론가
번역·이보미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