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어떤 아르헨티나’가 될 것인가

2012-04-14     모리스 르무안

그리스 위기는 이미 전례가 있다. 감당하기 힘든 부채를 견디다 못해 채무 상환 불이행을 결정해버린 국가들이 있고, 1990~2000년의 아르헨티나도 있다. 아르헨티나가 상징하는 사례는 국가부도라는 재앙으로 치닫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리스가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준다.

 눈부신 아이디어라 생각한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1989년 집권한 페론주의자 카를로스 사울 메넴 대통령은 당시 아르헨티나를 휩쓴 인플레이션에 종지부를 찍고자,(1) 하버드대학 출신이자 독재정권 시절(1976~83) 관료였던 도밍고 카바요 경제장관과 더불어 아르헨티나 환율에 대한 엄격한 통제정책을 실시했다. 바로 '1페소 1달러 고정환율 정책'이었다. 메넴 대통령은 커런시보드 시스템(통화위원회를 통한 고정환율제 실시)을 헌법에 포함시켰다. '빅뱅'이라 부르며 초기부터 국제통화기금(IMF)이 적극 장려한 커런시보드 시스템 정책은 처음에는 성공하는 듯했고, 인플레이션은 사라졌으며, 경제성장이 공고해지는 듯 보였다.

2001년 1월 1일, 그리스는 마스트리흐트 요건을 충족시키며 유로화 시장에 합류했다. 그로부터 1년 후 유로화가 드라크마화를 대체했다.

아르헨티나의 '슬픈 아이디어'

멕시코 위기 이후(1994~95), 아르헨티나는 시장을 토대로 한 재원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거의 20%에 육박하는 고금리는 정부 예산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동남아와 러시아, 브라질 같은 신흥국가들을 강타한 경제위기로 달러화가 안전 투자처로 부상하면서 달러화 가치가 상승했다. 아르헨티나의 페소화와 달러화의 달달한 애정전선은 곧 아르헨티나에 비수를 꽂는다. 중앙은행의 자율성을 훼손해버린 아르헨티나 정부는 통화정책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것이다. 브라질 같은 주요 이웃 국가들이 화폐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유로화 대비 달러화 가치가 상승하자 아르헨티나는 시장 내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그렇게 1998년은 경제성장에서 경제침체로 돌아선 해로 기록되었다.

유로화권에 합류하며 그리스 산업은 드라크마화에 비해 가치가 높은 유로화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된다. 생산 비용이 비싸진 것이다.

메넴의 뒤를 이어 중도좌파연맹인 국가연대당 대표 페르난도 데라루아가 대통령에 당선된 1999년 10월 24일, 전 그리스 총리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조차 아르헨티나 재정이 파탄에 직면함을 부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3600만 명의 아르헨티나 국민 중 1400만 명이 공식적으로 빈곤층으로 분류되었다. 인류의 '완벽하고도 영원한 수호자'인 IMF는 아르헨티나가 긴축정책을 한다는 조건 아래, 부채 상환을 위한 100억 달러 지원을 신정부에 약속했다. 갓 고용된 하인처럼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1478억 달러에 달하는 공공부채에 대한 모라토리움 선언이나 디폴트 사태를 막고자 신정부는 구조조정안을 수립했다. 2000년 6월, 35일 동안 계속된 총파업으로 국가는 마비상태에 빠졌다.

2009년 11월 30일, 유럽 재무장관들의 우려 속에서 보수파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총리의 뒤를 이은 파판드레우 총리는 그리스 경제가 '집중관리' 상태에 있음을 인정했다. 2010년 3월 3일 파판드레우 총리는 첫 긴축정책 조치를 발표했다.

IMF, 세계은행(IBRD), 미주개발은행(IDB)의 경제학자들은 '구제안'을 강구해야 했고, IDB가 구제안을 들고 나왔다. 필요한 경우 언제든 비호감으로 돌변하는 스탠리 피셔 IMF 수석 부총재는 2000년 11월 23일 다음과 같이 통보했다.

"아르헨티나가 법령이나 법률을 통해 대통령이 공표한 모든 조치들을 이행하지 않는 한, IMF의 지원은 없을 것입니다."(2)

이에 따라 데라루아 대통령은 대통령령을 공포해 사회복지정책 규제 완화, 연금생활자에 대한 공공서비스 철폐, 노동시장 유연화, 국민건강 부문 자유화를 실시했다. 2010년 4월 23일, 그리스는 유럽연합과 IMF로부터 450억 유로의 첫 구제금융 지원을 받았다.

경찰과 시위대 간 충돌은 첫 희생자들을 낳았다. 달걀과 돌멩이 투척, 폭언, 폭력 위협뿐 아니라, 도로 점거, '카세롤라소'라 불리는 냄비시위까지 이어졌다. 2000년 12월 18일, IMF를 위시한 일단의 국제금융기관들은 아르헨티나의 무능력함을 적절히 활용했고, 추가 구제금융안을 제시했다. 3년간에 걸쳐 397억 달러를 지원하는 안이었다. 추가 구제금융 지원이 국가부도 위기의 아르헨티나를 구한 것이다. 더군다나 데라루아 대통령이 공공부문 지출의 추가 삭감을 발표하고, 2001년 3월 20일 페소-달러 페그제의 주역인 카바요를 경제부 장관으로 임명한 상황이니 말이다. 증권시장과 IMF, 시장에서는 (잠시나마) 카바요의 경제부 장관 취임을 환영했고, <파이낸셜타임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카바요가 보인 성과는 "전세계 정치인들과 국제투자자들 중 가히 전설적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자질을 보여주었다."(3) 카바요의 경제부 장관 임명 소식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에게도 희망을 안겨주었고, 이들은 공개적으로 만족감을 표시했다.

2010년 5월 2일 경제위기에 종지부를 찍고자, 유럽 재무장관들은 그리스에 1100억 유로에 달하는 '구제금융안'을 결정했다.

그리스의 비극

국가부도를 막아야 했기에 무엇보다도 일방적인 모라토리엄 선언은 카바요 장관에게는 재고의 여지가 없었다. 이때 카바요 장관이 생각해낸 것이 295억 달러에 달하는 단기채권을 30년 만기의 장기채권으로 전환하는 채권 스와프였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는 금리가 책정된 채권 스와프로서 재앙을 촉진할 따름이었다. 또 카바요 장관은 '적자 제로'를 내걸고 급여와 연금이 500페소(500달러)를 초과할 경우 13% 삭감했다. 이로 인해 봉급생활자의 92%, 연금생활자의 15%가 타격을 받았다. 중소기업이 수백여 곳 파산했고, 마치 중세시대 페스트가 창궐할 때처럼 경제적 공포로 인해 도로점거 투쟁에 나선 실직자들은 수백 명씩 모여 바리케이트를 쳤고, 2001년 7월 20일 국민은 총파업에 들어갔다.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와 무디스는 아르헨티나에 '기술적 채무불이행'으로 등급을 조정할 것이라 밝혔다. 미 재부무 대변인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만족할 만한 균형상태에 도달하려면 향후 추가적인 희생이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요구될 것입니다."(4)

2011년 6월 15일 시작된 총파업은 그리스를 마비시켰다. 280억 유로의 지출 삭감을 목표로 한 추가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국민시위가 벌어졌다. 경찰과의 잇따른 충돌에도 불구하고, 6월 29일 긴축정책안 표결이 실시되었고, 7월 22일 1090억 유로의 추가 구제금융 지원안이 결정되었다.

은행들이 페소화와 달러화에 대한 예금 인출 요구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 되자, 정부는 12월 3일부터 해외로 자본유출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특히 '코랄리토'라는 조치를 통해 저축예금에 대한 예금 인출을 동결시켰다. 과연 이같은 조치가 충분했을까? 한마디로 미덕으로 포장된 위선이었다. 정부 재정은 11.6%라는 기록적인 적자를 내고 있었지만, 긴축정책은 경제활동을 마비시켜 3년간 계속된 경기침체를 지속시켰다. 피치사는 아르헨티나의 공공부채 등급을 C에서 채무불이행인 DDD로 강등했다. IMF는 종전에 협의한 12억6천만 달러를 지급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헬기로 탈출한 대통령

아르헨티나는 일곱 번째 총파업에 돌입했다. 12월 12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곳곳에서 발생했고, 7명의 사망자와 378명의 부상자를 내고 진압되었다. 시위 중 복지 혜택을 모두 잃은 소외층이 슈퍼마켓과 상점을 약탈했다. 중산층들은 카세롤라소를 통해 요란하게 냄비시위를 벌였다. 시위를 이끄는 지도자도 없고, 내건 깃발조차 없이 수십만 명의 시민이 마치 성난 파도처럼 거리에 넘실거렸다. 게다가 데라루아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해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대응했다. 35명이 사망하고 4500여 명의 시위 참가자들이 경찰에 연행되었지만, 시위는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001년 12월 19일, 미움을 한 몸에 받은 카바요의 퇴진에 이어 내각이 사퇴했다. 이튿날, 임기가 절반이나 남아 있던 데라루아 대통령은 헬리콥터로 대통령궁을 떠났다.

2011년 10월 19~20일, 총파업과 폭력시위가 그리스를 마비시켰고 시위에 참가한 디미트리스 코트자리디스가 목숨을 잃었다.

'트로이카'라 불리는 IMF, IBRD, 그리고 그 지지자들이 내놓은 태만한 처방이 백일하에 드러난 가운데 국회는 페론주의자인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를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취임식에서 사 대통령은 "단 한 푼도 부채 상환을 하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그는 경기부양책 실시, 100만 고용 창출, 노동법 유연화와 퇴직연금 삭감에 대한 재검토를 약속했다. 신임 대통령이 내건 혁신적이고 현대적인 이미지와 달리, 오히려 구시대적 포퓰리즘 성향을 띤 그의 첫 정책 결정에 시장(市場)에선 우려가 흘러나왔다. 이 정책을 바라본 시장의 반응은 2001년 12월 28일 스페인어 일간지 <엘파이스>에서 잘 드러난다.

국민들이 구체적 해결책 제시를 요구하는 가운데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사퇴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라는 말을 남긴 채, 사 대통령은 취임 일주일 후 사임했다.

2003년 12월까지 남은 임기를 채우기 위해 페론주의자 에두아르도 두알데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보름 만의 다섯 번째 대통령이었다. 재정비를 마치기가 무섭게 정부가 의회에 제출한 '긴급법률안'이 2002년 1월 6일 승인되었는데, 경제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변혁을 담고 있었다. 1991년 부과된 고정환율제를 폐지하고, 경제부양을 목표로 페소화에 대한 30% 정도의 평가절하를 단행하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1월 3일자 <엘파이스>는 "포퓰리즘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견해나 태도는 한결 신중해졌다"고 평가했다. '포퓰리즘'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페소화 평가절하로 아르헨티나에서 제 집 앞마당인 듯 굴던 스페인 다국적기업들은 30억 유로를 손해볼 것이고, 스페인 증권시장은 이 기업들을 혹독하게 벌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경우, 유로화권 내 지위 유지를 위해 물불 안 가리는 태도 때문에 수출 촉진을 위한 통화 평가절하 조치는 정책 옵션이 될 수 없었다.

민영화된 공공서비스 분야에 진출해 있던- 주로 외국 기업인- 전매기업들은 40%에서 260%로 서비스료 인상을 요구했다. 그로부터 1년 후 두알데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내 외국 기업으로부터 자기들의 특권에 손대지 말라는 전화를 그렇게 많이 받은 것은 살면서 처음이었다"고 털어놓았다.(5) 1월 27일 거의 위협이나 다름없는 경고를 내놓으며 유럽연합 페드로 솔베스 통화담당 집행위원은 아르헨티나 경제정책이 "부실하고 모순적"이라고 비난했다. 크레디아그리콜, 산탄데르은행, 노바스코샤은행은 수만 명의 아르헨티나 예금소유주들을 무일푼으로 남긴 채 슬그머니 모습을 감췄다.

가차 없다고 할 만한 공식 발표들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정부는 IMF나 미국, 해외투자자들의 불만보다는 걷잡을 수 없게 될 사회 붕괴를 더 두려워했다. 그 결과 정부는 사 대통령이 선포한 모라토리엄 선언을 유지했다. 이에 IMF는 신임 대통령에게 '일관성 있는 정책'을 요청하며, "현 정책이 유지되는 한 IMF의 지원은 없을 것이며 아르헨티나는 1년 내 부채를 상환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일주일 만에 사임한 대통령

2011년 10월 27일 그리스에 대한 유럽의 추가 '구제' 지원을 위해 추가적인 긴축조치를 담은 협의안이 유럽연합정상회담에서 합의되었고, 10월 31일 파판드레우 총리는 구제금융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하지만 독일과 프랑스, 유럽연합과 IMF의 압력하에 11월 3일 국민투표 실시를 철회했다.

취임연설에서 두알데 대통령은 코랄리토 조치에 의해 동결된 예금들이 원래 통화로 반환될 것이라 약속했다. 하지만 두알데 대통령은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예금소유주들이 달러화가 아닌 페소화로 예금을 돌려받을 것이며, 환율은 1달러당 1.40페소일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이미 통화 환율이 1달러당 1.65페소인 상황에서 말이다. 4월이 되자 IMF는 회유와 협박을 해대며(물론 어떤 것이 나은지 전혀 알지 못했을 수 있지만), 주정부 재정 적자 해소를 위해 7억1천만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실소를 금치 못할 IMF의 재탕 조치에 동의하며, 두알데 대통령은 공공부문 제출 삭감을 주장한다. 이미 3개월 동안 기업에서는 17만 명을 해고했고, 실업률은 공식적으로 25%를 기록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장학금 폐지로 약 13만 명의 저소득층 주거지역 학생들이 학교를 포기했다. 통화 평가절하로 상점 내 국산 및 수입품 가격은 30%까지 올랐고, 밀가루 가격은 70%까지 뛰었다.

국민투표에 부친 구제금융

지난 2월 20일, 유로화권 재무장관들은 새로운 긴축조치 이행을 조건으로, 그리스에 대한 1300억 유로 추가 구제금융 지원에 합의했다. 얀 키스 데 야거 네덜란드 재무부 장관은 유럽연합과 IMF가 그리스를 '영구 감독'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감독이라? 아르헨티나의 입장은 이와 달랐다.

2001년 말부터 민중연합과 실직자 단체, 피케테로, 물물교환망, 보건건강과 교육 네트워크 등이 부상했다. 노동자들은 버려진 공장을 재조직해 자체 운영에 돌입했다.(6) 그동안 지나친 탐욕과 부패에 찌든 정치인, 정부 관료, 판사들은 감히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나라 전체가 이들을 혐오했다. 파산의 공포에 농촌 커뮤니티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도시에서는 카세롤라소 시위가 다시 확산되었고, 실업자 노조를 비롯해 배고픔에 지친 교외 거주자 등 여러 집단이 거리를 점거해 수도 진입을 막았다. 총체적 혼란 속에 "모두 꺼져버려라!"를 외치는 격분한 시민들이 다시 봉기했다. 이로 인해 2명이 사망하고 19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2002년 6월 26일 '아베야네다 학살'이라 불린 피케테로들에 대한 경찰의 거친 시위진압으로, 2명이 경찰의 총에 숨지고 33명이 부상을 입었다. 성난 국민 앞에 두알데 대통령은 임기가 6개월 남았음에도 조기 대선 실시를 제안했다.

12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한복판에서는 10만 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경제모델의 근본적 변화"를 논의할 민중 의회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2001년 12월 이후 중단된 IMF와의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많은 이들은 이라크, 라이베리아, 소말리아처럼 재정 면에서 배척받는 최하층으로 전락해버린 아르헨티나가 이미 반쯤 파멸에 접어들었다고 보았다. 프랑스 사회학자 알랭 투렌은 다음과 같이 매듭지었다. "스스로 변화를 추진하거나 결정 내릴 수 있는 역량이 전혀 없다. 하나의 단위로든, 국가로든, 정치 시스템으로든 아르헨티나는 죽었다."(7) 죽었을지는 모르지만, 아르헨티나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힘차게.

페론주의를 내세워 출마한 대선후보는 3명이었다. 카를로스 메넴, 단명한 전직 대통령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 그리고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도좌파 소속이자 산타크루스주 주지사 출신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였다. 2003년 4월 27일 키르치네르와 메넴이 각각 24.34%와 21.9%의 득표율로 1차 투표에서 승리했다. 대통령에 당선되면 '무질서와 혼란'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주저 없이 군대를 투입하겠다고 장담하던 메넴은 5월 14일 여론조사에서 "몰매를 맞아 힘을 잃고 처참히 짓밟힌" 후, 후보 사퇴를 선언했다. 5월 25일 취임연설에서 키르치네르는 사회정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시장에서 소외된 사각지대에 평등함을 실현시키겠다"며 국가의 역할 증대를 강조했다. 미국이 축하사절로 장관급인 주택도시개발부 멜 마르티네스 장관 단 한 명을 보낸 것과 대조적으로, 축하사절로 참석한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룰라 브라질 대통령이 열렬히 환영의 박수를 보내는 모습이 부각되었다.

외국투자자들은 민영화된 공공서비스 분야에 현저한 가격 상향 조정을 요구해왔다(이는 IMF가 요구한 내용이기도 했다). 하지만 키르치네르 대통령과 로베르토 라바냐 경제부 장관은 투기성 자본 유입을 제한하는 한편, 소비 촉진을 위해 최저임금 50% 상승을 발표했다.

키르치네르 대통령의 정책은 그동안 아르헨티나를 황폐시킨 정책과 정반대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1990년대 이후 계속돼온 미국과의 유착관계를 끊고 남미의 진보 대열에 합류한다. 키르치네르는 시장 내 국가와 정책의 적극적인 역할을 재차 강조하며, 재정 쇄신이 사회복지 향상, 산업의 공급 재건, 민중의 수요 지지와 긴밀히 연관된다고 보았다. 2002년 9월부터 페소화의 현저한 가치 평가절하를 통해, 산업을 보호하는 동시에 국내 시장을 회복하고 일부 수입품을 대체하는 데 성공하면서 경제는 성장으로 돌아섰다. 수출이 활성화되며 경제성장률은 급격히 상향곡선을 탔다.

아르헨티나의 경제회복을 주시하던 IMF는 아르헨티나 정부가 재정 흑자의 일부를 통해 부채를 상환하기를 희망했다. 이에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채권자들이 부채 일부를 탕감해준다면 부채 상환을 재개하겠다고 했다. 2003년 9월 IMF와 IBRD 두바이총회에서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직접 제안을 설명하면서 '싫으면 그만두라'를 태도를 보였고, 시장에 허리를 굽히는 대신 직접 협상을 택했다.

그 결과, 그는 2006년 9월까지 3년간 125억 달러에 대한 채무 상환을 연기하는 지급유예를 얻어냈고, 아르헨티나가 채무불이행 상태에 있는 24억3천만 달러의 상환 기간을 연장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IMF와는 기존 협상에 따른 정책 조치 이행 약속을 거부했다.

'아베야네다 학살'이 부른 조기 대선

키르치네르의 단호한 태도는 마침내 결실을 거두었고, 2005년 2월 25일 얻어낸 부채 재조정은 본보기라 말할 수 없지만 흥미로운 전례를 세웠다. 이날 아르헨티나는 1787억 달러의 국내외 부채 감면을 종용했다. 이는 820억 달러에 대한 75% 감면을 통해서였으며, 전후 통틀어 이례적인 감면이었다.(8) 이 금액 중 43.5%는 아르헨티나 거주민이 아닌 이탈리아인과 독일인인 개인예금자들 소유였고, 34.5%가 외국 기관투자자들 소유였으며, 22%만이 아르헨티나인 소유였다. IMF와 IBRD, 그외 기타 국제기관에 상환해야 할 금액은 이 협약에 포함되지 않았지만,(9) 이를 두고 키르치네르 대통령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포퓰리스트적 성향과 시위대들에 대한 형사 처벌 거부로 비난을 받았으며, 심지어 그를 독재적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가 아르헨티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우체국과 통신망, 수도, 항공교통처럼 전략적으로 중요한 기업 일부를 재국영화했고, 중요한 복지 프로그램을 운영했으며, 4년 만에 빈곤층 비율을 반으로 줄였다.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우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부채에 대해 세계 최고의 협상을 성공시켰다"고 2005년 2월 25일 두바이에서 발표했다. 12월 16억 달러 채권을 쥔 베네수엘라의 지원 덕분에 아르헨티나는 IMF에 진 채무 98억 달러를 한번에 상환하는 호기를 보였다. 물론 여기에도 비난은 따랐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이런 조치에는 중요한 목적이 담겨 있었다. 2001~2002년 파국의 책임이 있는 IMF가 다시금 아르헨티나 국정에 참견하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키르치네르의 결단

주권을 회복한 아르헨티나는 눈부시게 재건했고, 2003~2011년 국내총생산(GDP)이 3배로 증가했다. 물론 그리스의 수출업은 아르헨티나와 다르며, 2001년부터 아르헨티나는 중국의 천연자원 수요 증가와 저금리 대출에 힘입은 세계경제의 호황 혜택을 받았다. 그리스의 경제 재건은 아르헨티나 같은 긍정적 여건을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리스는 아르헨티나 사례에서 보여준 교훈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아르헨티나 사태를 지켜보며 던진 말이 이를 잘 요약한다. "이른바 경제학자라는 직함을 내세우는 사람이면 누구나 긴축정책 조치가 국가 예산의 조절 목표 달성에 별 효과가 없으며, 경제활동에 침체를 가져오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10) 그렇다면, 지금 그리스의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

*

글•모리스 르무안 Maurice Lemoine 언론인

번역•김윤형 hibou98@naver.com 파리3대학 통번역대학원 졸.

(1) 1985~90년 평균 1105%의 인플레이션이었다.
(2) <엘 파이스>, 마드리드, 2000년 11월 24일.
(3) <쿠리에 앵테르나시오날>에서 재인용, 파리, 2001년 12월 20일.
(4) <엘 누에보 헤럴드>, 마이애미, 2001년 7월 14일.
(5) <르몽드>, 2002년 1월 8일자.
(6) Cecile Raimbeau, ‘아르헨티나여, 점거하라, 시위하라, 생산하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5년 9월호.
(7) <엘파이스>, 2002년 4월 14일자.
(8) 부채 감면을 거부한 채권자들과의 오랜 협상을 통해 총부채의 약 93%에 대해 75%의 부채 감면이 2010년 마침내 받아들여졌다.
(9) 2001~2004년 아르헨티나는 이 기관들에 100억 달러가 넘는 금액을 상환했다. 하지만 파리클럽에 이자를 제외하고 아직도 67억 달러의 상환액이 남아 있다. 2010년 11월 파리클럽은 이 금액에 대한 재협상을 수용했는데, 2년 동안 아르헨티나 정부가 요구해오던 것처럼 IMF의 개입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10) <레제코>, 파리, 2002년 1월 21일자.


국가 부채의 역사

1868년: 미국
남북전쟁 말 미국은 미 연방의 부채에 대해 ‘무효’를 선언했다.

1898년: 쿠바
스페인에 승리한 미국은 쿠바가 스페인에 진 채무를 규탄했다.

1918년: 소비에트연방
볼셰비키는 제정 러시아가 지닌 채무를 거부했다.

1998년: 러시아
러시아는 민간 기업과 파리클럽(1)에 진 채무 상환 중지를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2003년: 이라크
미국은 이라크의 채무가 ‘추악한 부채’라 규탄하며, 채권국인 독일·프랑스·러시아에 부채 탕감을 요구했다.
2007년: 에콰도르
에콰도르는 감사보고서를 통해 공공부채의 대부분이 위헌이라 밝혔다. 에콰도르는 채권국에 32억 달러에 달하는 채권을 9억 달러에 되살 것을 요구했다.

2008년: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국민은 민간 은행인 란단스키로 인해 발생한 부채 상환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영국과 네덜란드, 기타 투자자들의 보복 위협이 있었지만, 2012년 2월 17일 아이슬란드는 피치(Fitch)사로부터 국가 ‘신용등급’을 ‘BB+’에서 ‘BBB-’로 한 단계 상향 조정받았다.

클로드 케마르의 ‘추악한 부채의 역사’(제3세계외채탕감위원회, 2011년 10월 22일과 23일 발표, 리에주) : 다미앵 미에, 에리크 투생의 ‘AAA: 감사, 부채탕감, 대안정치’(쇠유·파리·2012)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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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공식 채권국 모임으로서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리아, 벨기에, 캐나다, 덴마크, 스페인, 미국, 핀란드, 프랑스, 아일랜드, 이탈리아, 일본, 노르웨이, 네덜란드, 영국, 러시아, 스웨덴, 스위스가 주요 회원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