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 팔레스타인 문제의 열쇠

2012-04-14     장 피에르 필리위

지난 3월에 발생한 가자지구에서의 폭력 확대는 현상 유지의 불안정한 측면과 이스라엘 전략의 한계를 확인시켰다.

자치공동체인 가자지구는 1948~49년 전쟁에 의해 탄생했다. 전쟁 기간에 쫓겨난 많은 사람들이 가자에 몰려들었다. 통찰력 있는 이스라엘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은 네게브의 북서 지역에 많은 난민이 집중해 있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왜냐하면 시나이사막이라는 자연 장해물 때문에 난민들이 흩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웃 나라의 암만·베이루트·다마스쿠스 주변에 난민촌이 생긴 이유와 똑같다. 결과적으로 가자지구의 3분의 2가 거대한 난민촌으로 변해버렸다. 벤구리온은 가자지구를 병합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영토 병합은 1949년 로잔회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가자지구는 남부 전선의 뿌리 깊은 혹이 돼버렸고, 위협 공습과 무차별 포격의 훈련장이 돼버렸다.

수에즈 운하 위기가 발생한 1956년, 이스라엘이 침공하면서 유혈 진압을 시도했지만 국제사회의 압력에 못 이겨 가자지구에서 철수해야 했다. 당시 벤구리온은 가자지구를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의 철권통치에 맡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나세르는 1967년까지 가자지구에서 평화를 보장해주었다. 이스라엘은 1967년 6월 중동전이 발발하자마자 가자지구를 점령했지만, 전례 없이 완강한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봉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모셰 다얀 장군은 폭동자들을 잔인하게 진압한 뒤, 이스라엘과 요르단 서안의 자유 통행을 허용해 가자지구를 해체하려고 작정한다. 이 정책은 20여 년 동안 나름의 결실을 맺었다.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1993년 가자지구 '봉쇄'를 체계화하고 동시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대화하기로 결정했다.

가자지구를 없애버리는 것이 이스라엘 당국의 강박관념이 되어버렸고, 이스라엘은 위협받을 때 언제든지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전제로 가자지구의 질서유지를 팔레스타인 세력에 넘기려 했다. 이런 전략적 연속성은 1994년의 부분적 후퇴와 2005년의 일방적 철수가 이뤄질 때도 명백히 유지됐다. 그러나 라빈 총리가 평화를 추진하기 위한 장소로 간주했던 가자지구를 아리엘 샤론 총리는 평화가 완수된 지역으로 간주해버렸다.

불안과 공포, 폭력의 중간지대

2005년부터 이스라엘의 안전보장 접근책은 난관에 부딪혔다. 이스라엘의 안전보장 접근책은 역으로 그 폭력적 행위 때문에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국제적 결집을 낳게 되었다. 인도적 위기 상황에서 탄생한 '시민 대표단들'은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다시 가져다줄 수 없다는 한계에 직면했다. 가자지구 주민들은 2006년 1월 선거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의 승리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던 파타(Fatah·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 PLO 내 최대 조직)와 2007년부터 가자지구를 통제하는 하마스 사이의 대결 때문에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의 전략적 난관은 인도주의적 난관을 강화하고, 인도주의적 난관 자체는 팔레스타인 무대에서 지속되는 정치적 난관 때문에 악화되고 있다. 이미 전례 없이 혹독한 물리적 고립 상태에 처한 가자지구 주민 150만 명은 또다시 삼중 난관의 '포로'가 되고 있다.

물러설 수 없는 악순환

2005년 여름,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이 철수하고 정착촌이 해체된 지 한 달 뒤 '영원한 되풀이'라는 예언적 이름으로 공격이 시작됐다. 이스라엘의 공습과 폭격이 연이어 계속됐고, 마지막 기습은 지난 3월에 감행됐다. 이스라엘의 탱크병 길라드 샬리트가 2006년 6월 25일 포로가 되자, 이스라엘은 더 많이 침범하게 되었다. 2008년 6월∼2008년 12월,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에 유지된 휴전 협정이 깨지자 '완전 봉쇄' 작전에 따른 폭력 양상이 급격히 증가했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양쪽 희생자가 100여 명에 이른다. 그럼에도 2009년 이스라엘에 대한 로켓포 사격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2010년 전반기 6개월 동안 점령군이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주민 34명을 사살한 반면(그중 11명은 민간인), 사망한 3명의 이스라엘인은 모두 군인이었다.(1) 2010년 후반기 6개월 동안 팔레스타인 주민 37명이 사망했고(그중 민간인은 12명), 이스라엘 희생자는 1명도 없었다.(2) 이스라엘은 자신의 남부 국경 관리 방식을 찾았다고 생각하지만, 가자지구 주민들 처지에서는 지나친 대가를 치른 셈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여론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2011년 1월 25일 예기치 않게 발생해 18일 만에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을 퇴진시킨 이집트 혁명은 곧바로 이런 전략적 환상에 철퇴를 가한다. 역할이 뒤바뀌어, 수에즈 운하의 폭동으로 세상에서 단절된, 다시 말해 카이로에서 단절된 이집트 도시 라파에 터널을 통해 식량을 제공한 곳은 바로 가자지구다. 1979년 이집트와 맺은 평화협정에 의해 시나이반도에 모든 군대의 주둔이 금지됐다고 주장하던 이스라엘은, 전례 없이 수에즈 동쪽에 이집트 군대의 주둔을 허용하고 있다. 주둔 군대가 혁명적 소요를 진압해달라는 의도에서다.

길라드 샬리트의 이슬람 영웅들

2011년 10월 11일 카이로와 독일 정보국의 중재에 의해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포로 교환에 합의하게 된다. 일주일 뒤 길라드 샬리트 사병은 팔레스타인 포로 1027명과 맞교환된다. 먼저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합의된 리스트에 올려진 477명이 석방되고, 또 다른 포로 550명은 두 달 안에 이스라엘의 재량에 의해 석방된다. 하마스는 파타의 마르완 바르구티와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의 아흐메드 사다트라는 상징적 인물들은 석방을 얻어내지 못했다.

하마스는 파타, 인민저항위원회(PRC) 혹은 이슬람 지하드의 수많은 전사의 석방을 보장받았다. 특히 반(反)이스라엘 테러 행위에 참가해 여러 차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하마스 간부 10여 명과 '영웅적' 투사들의 석방을 보장받았다.

샬리트가 생포된 다음날 하마스가 전달한 핵심 요구사항들을 이스라엘이 받아들이는 데는 거의 2천 일이 걸렸다. 5년6개월 동안 이스라엘 군대는 하마스를 분쇄하려고, 적어도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게 하려고 계속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정부는 가자지구에 대한 하마스의 통제권에 어떤 위협도 미칠 수 없었다. 그러나 네타냐후 정부는 군사적 공격의 실패에서 어떤 교훈도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이슬람주의 운동은 터널 장악이라는 간접 수단을 통해 봉쇄망을 피하면서 가장 낮은 수준에서 투쟁 강도를 유지하고 있다. 유엔에 의하면, 이 지역의 터널 수는 약 600개에 이른다.

2011년 겨울, 가자지구의 유례없는 전투 활동은 튀니스와 카이로의 민중적 요구와 일치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집트 혁명을 지지하는 시위는 2011년 1월 31일 금지됐다. 그해 2월 11일 무바라크 대통령의 붕괴는 팔레스타인 반체제 인사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어주었다. '국민이 체제를 전복할 수 있다'는 슬로건은 가자지구에서 '국민은 분열을 끝내고 싶다'는 슬로건으로 바뀌어, 팔레스타인 국민의 더 큰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하마스와 파타에 등을 돌리게 된다. 2011년 3월 14일 젊은이 수천 명이 이 슬로건을 앞세우고 행진을 한다. 그 다음날 젊은이 수가 10배 이상 증가한다. 반면 요르단 서안의 시위는 훨씬 더 제한적이었다. 모임이 변질된 이유는 하마스 투사들이 팔레스타인 국기만 허용하는 시위자들에게 하마스 상징 문장(紋章)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예기치 못한 일에도 불구하고, 통합의 활력은 하마스와 파타 사이에 적어도 형식적일지라도 화해를 모색하게 한다. 중재하기보다 이슬람 운동을 억제하려고 주력한 바샤르 알아사드의 시리아가 쇠약해짐으로써, 알아사드는 하마스의 망명 지도부에 가자지구에서 나타난 요구를 더 평화롭게 받아들이라고 압박하고 있다. 2011년 5월 4일, 4년 전 메카에서 일시적인 '민족연합'을 체결한 이래 더 이상 만나지 않았던 두 지도자 칼레드 메칼과 마무드 아바스가 협정에 서명하기 위해 카이로에서 만난다. 라말라와 가자의 정보국들 사이의 협력 방안이 논의됐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이스라엘과의 협상 추구 원칙이 하마스에 의해 승인됐다. 하마스가 이 협상에 관여하고 있다고 여겨지진 않지만, 하마스는 그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한다.

소통, 개발, 비무장화만이 갈 길

많은 피를 흘리고 많은 기회를 잃어버린 뒤, 가자지구 주민들은 팔레스타인이 또 다른 팔레스타인과 전쟁해야 하는 시절은 이제 완전히 지나갔다고 믿고 싶어 한다. 2007년 6월부터 지옥에 떨어진 가자지구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양쪽의 실질적 화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 전환점의 최종 결정은 메칼과 아바스에게 달려 있다. 아바스는 라말라에 살고 있고, 메칼은 가자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카타르에 현안에서 배제된 채 살고 있다(다마스쿠스를 떠난 이래). 경쟁관계에 놓인 민병대들은 서로에 대한 복수심과 과도한 관료주의(3) 때문에 지속 가능한 접근이 어려운 상태다. 그러나 2개의 주요한 팔레스타인 운동단체가 서로 계속 싸운다면, 어떻게 가자지구 주민들의 올바른 미래와 공동체적 운명을 설계할 수 있겠는가?

역사에 의해 만들어진 띠 모양의 땅에서 3세대가 성장했다. 1947~67년의 슬픈 세대는 1967~87년의 짓밟힌 세대에게 길을 열어주었고, 이 세대는 다시 1987~2007년의 인티파다 세대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이 공동체적 악몽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악몽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소통 개선, 개발, 비무장화라는 삼위일체적 방법을 과감하게 채택하는 것이다. 이런 역동적인 발상이야말로 20년 전부터 끊임없이 계속돼온 흐름을 바꿀 수 있다. 가자지구 젊은이들은 지난해 3월 결집했을 때, 그런 불길한 흐름을 전복시키려는 단호함을 보여주었다. 숙명을 거부하려면 '가자지구 우선'이라는 오슬로 협정의 가장 전도양양한 전제로 되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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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장 피에르 필리위 Jean Pierre Filiu 최근 파야르 출판사에서 출간된 <가자의 역사>의 저자. 이 기사는 이 책에서 영감을 받아 작성됐다.

번역•고광식 kokos27@ilemonde.com 주요 역서로 <성의 역사> <방법서설> 등이 있다.

(1) 유엔 인도주의 업무조정국 주간 보고서, 2010년 7월 2일.
(2) 유엔 인도주의 업무조정국 주간 보고서, 2011년 1월 7일.
(3) 하마스는 가자지구에서 공무원 3만1천 명의 봉급을 지급하고, 팔레스타인 당국은 가자지구에서 요원 7만여 명을 유지하며 그들에게 급료를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