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먹고 자란 ‘보코하람’의 공포

2012-04-14     알랭 비키

특유의 사회·문화적 소요 사태로 부조리한 민주주의라는 뜻의 '데모크레이지'(Democrazy)라는 소리까지 듣는 나이지리아는, 스스로 '보코하람'(Boko Haram)이라는 괴물 종파를 만들어냈다. 맨 처음 이 종파가 태동하던 12년 전, 보코하람은 단지 진보 정당들의 무관심으로 생긴 공백을 채우려는 반체제 종교운동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부의 '프랑켄슈타인 박사'들은 이 종파를 지정학적 문제로 탈바꿈해버렸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대대적인 살상을 벌이는 공격과 보복의 무한 사이클의 핵심을 움직이는 중심 세력으로 만든 것이다.

집권당인 국민민주당에서 북부 기반의 야당 전인민당까지 포함하는 정치조직은 물론, 굿럭 조너선 대통령에게 조언하는 군사·안보계 인사들까지 2000년대 초 나이지리아 북동부에서 태동한 이 종파의 과격화에 기여했다. '성전(聖戰)의 확대와 이슬람 전파를 위한 사제들의 모임'을 만들어 극심한 탄압을 받기도 했던 이 단체는 이제 보코하람의 약어 'BH'로 통칭되는데, 현지 엉터리 영어로는 'book', 아랍어로는 '금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2009년 7월∼2011년 2월 초, 이 조직은 164차례의 테러·자살테러·처형·무장습격 등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이런 행위는 수도 아부자 중심에서까지 자행됐다. 이로 인해 935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중 상당수는 이슬람 종파에 속한 나이지리아 국민이었다. 보코하람의 악명은 '알카에다의 마그레브 지부'(AQIM·Al Qaeda in the Islamic Maghreb, 알제리 태생의 이슬람 무장 단체. 마그레브 지역과 사헬 지대 국가들에서 이슬람 혁명 달성을 목표로 함)와 소말리아의 이슬람운동 세력 사이에서도 높다. 보코하람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당황한 국제 언론은 짧은 생각에 1억6천만 명의 엄청난 인구를 자랑하는 거대 국가 나이지리아가 북부 이슬람 세력과 남부 기독교 세력으로 분리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의문을 품는다. 이는 이 나라에서 사회적 격차를 유발하는 진짜 요인이 무엇인지 망각한 처사다. 전체 인구의 60% 이상이 하루 2달러도 안 되는 수입으로 살아가며, 극빈층 인구도 여전히 줄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니제르·차드·카메룬과 국경을 접한 북부 연방 지대의 12개 주는 이 나라에서 가장 개발이 뒤처진 지역이다. 사니 아바차 장군의 군사독재 기간 5년이 끝나고 1999년 올루세군 오바산조 전 장군이 민선 대통령으로 권력을 잡은 뒤 남부와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됐다.

소수 종교집단의 폭력에 혼돈 거듭

조직의 정신적 지주 우스타즈 무하마드 유수프가 사망한 뒤, 그 이름을 따 '유수피야'라고 불리는 보코하람 대원들은 보르노주에서 핏빛 탈선의 길에 첫발을 내디뎠는데, 이곳 전체 주민의 4분의 3가량은 빈곤층이다. 이 정도면 나이지리아 내에서 심각한 축에 속한다. 생후 15개월 미만 아이들 가운데 2%만이 백신 접종을 받고, 교육 접근권 역시 아주 제한적이다. 젊은 층의 83%는 문맹이고, 취학 연령 인구의 48.5%는 학교에 가지 못한다. 4∼16살 무슬림의 34.8%는 한 번도 학교에 간 적이 없고, 심지어 코란 학습소도 간 적이 없다. "이런 요인들 때문에 이 지역 사람들은 폭력 등 좋지 않은 영향에 특히 취약하다."

무하마드 유수프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초반이다. 당시 그는 30살이었고, 포교를 하고 다니던 곳은 고향 '요브'로 보르노와 인접한 곳이었다. 마을에서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설교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칩거 상태를 권장하며 '정적주의' 전통을 수호하는 자들로 대도시 시장에 모인 군중을 대상으로 연설하곤 했다. 유수프는 그런 수만 명의 사람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냈고, 나이지리아의 또 다른 무슬림 아부바카르 구미를 따르는 신도들과 대립했다. 1992년 사망한 아부바카르 구미는 신(新)한발리학파 '얀 이잘라'(Yan Izala) 운동의 사상가였다. 그는 나이지리아 북부의 주 지역에서 이슬람법이 도입된 뒤에는 잠잠했는데, 그가 내건 주된 요구사항 가운데 하나가 관철됐기 때문이다. 그는 이 지역들에서 이슬람법 적용을 담당한 공식 위원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이슬람법 도입이 종교적인 것보다는 정치적 성격을 더 많이 띠자 사람들에게서 비난을 받는다. 실제로 정계 및 군사 쪽에서는 이를 중앙정권과의 완력 싸움에서 압박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이슬람교의 5대 덕목 가운데 하나인 '자캇'(Zakkat)조차 적용되지 않았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메디나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유수프는 이집트 슈크리 무스타파의 외골수적인 설교에서 영감을 받는다. 그의 설교는 축출과 추방을 근간으로 했고, 자국에 대해 격렬히 비판했다. 그에게 이슬람법의 엄격한 적용은 마호메트의 계율에 부합하는 이상적 정의를 구현한다. 그는 서구화로 타락한 공교육을 거부하고 투표 참여도 거부하며, 국내에서 유통되는 '마기(네슬레 브랜드) 치즈'와 '데리 밀크'(Dairy Milk) 등 주요 농식품 업체 브랜드에 대해서도 반기를 든다. 이렇듯 현대적인 것을 거부하는 성향이 있음에도, 보코하람에서 살인을 자행하는 사람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친(親)살라피즘 성향으로 유명한 이잘라 운동 신봉자들을 처형했다. 티자니야 및 카디리야 수피교단의 몇몇 인물도 처형 대상이었다.

나이지리아 북부는 1980년대 초 이미 서양 문물에 반대하는 무슬림 종파들의 대립에 따른 폭력 사태를 겪었다. 손목시계 착용까지 금지한 '마이탓신' 운동은 마이두구리와 카두나의 거리 전역으로 확산됐다. 북부의 주요 대도시인 카노 시장 부근에서 요새를 구축한 신도들의 무자비한 무력 사용으로 지난 2월 3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

2003년 가을, 요브 깊숙이 위치한 칸남마에 자리잡은 유수프의 '천상의 도시'가 경찰의 공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신도들이 목숨을 잃었다. 2003년 12월 보코하람은 치안군에 대한 첫 공격을 개시하고, 이어 보르노 주도인 마이두구리에 칩거한다. 그곳에서 2004년 4월 신임 주지사 알리 모두 셰리프의 당선을 위해 은밀히 준비한다. 셰리프 주지사는 이슬람법의 엄격한 적용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어 당선된 세리프 주지사는 보코하람의 유서 깊은 회원인 부주 푸아를 새로 신설된 종교부의 수장으로 임명한다. 보코하람은 마이두구리에 사원과 학교를 세우고, 이 시설들은 빈민가의 할 일 없는 청년, 학교에서 제적된 대학생, 가난한 공무원을 매우 빠르게 흡수한다.

2004년 10월 차드와 국경을 맞댄 칼라발주 부근에서 보코하람 대원들은 60여 명이 탄 경찰 수송차를 습격하고, 그 가운데 인질로 잡힌 경찰관 12명이 목숨을 잃는다. 아부자에서는 나이지리아 정보기관이 조사를 시작했으나, 오바산조 대통령에게는 이보다 더 시급한 과제가 있었다. 청년 무장대가 원유 생산지인 니제르 삼각지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정보기관에 체포된 유수프는 아부자로 옮겨진 뒤, 결국 자유의 몸으로 풀려난다.

2007년 4월에는 오바산조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우마루 야르아두아 대통령이 나이지리아 대통령에 취임한다. 마이두구리에서는 이제 보코하람이 여당 쪽 주지사 후보인 카심 이브라임 이맘을 위해 움직인다. 그런데 수차례의 정치적 암살로 얼룩진 선거가 끝난 뒤, 결국 셰리프가 재선에 성공한다. 권력을 잡기 위해 보코하람을 이용한 지 4년 뒤, 셰리프는 이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2009년 6월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신도 15명이 주정부 경찰에 의해 제거됐는데, 이들이 헬멧을 착용하지 않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희생자들은 며칠 전 동일한 질서유지군에 의해 처리된 측근 가운데 1명의 장례식을 함께했던 이들이다. 이에 유수프는 인터넷을 통해 복수를 다짐한다. 그해 7월 26일, 보코하람은 북부 4개 주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고, 은행과 경찰서를 점거한다. 연방 경찰 및 군대가 반격에 나서 사망자 800여 명이 발생했다. 재판 과정 없이 수백 건의 즉결 처형이 이뤄졌고, 유수프 본인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유수프를 처형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을 떠돌면서 보코하람 세력은 점차 과격화된다. 2009년 7월에 발생한 유혈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을 위해 어떤 정부 조사위원회도 설치되지 않은 상태다.

정부 탄압에 보코하람의 유혈투쟁 확산

그로부터 1년 뒤, 보코하람은 바우치에서 감옥 한 곳을 습격해 보코하람 신도 100여 명을 포함한 700명 이상의 죄수들을 탈출시켰다. 보코하람은 이제 전통적 근거지를 넘어 다른 지역으로 세력을 뻗어나갔고, 중부 조스주에서 잠복해 있던 세력까지 규합한다. 2000년 초반 이후, 이 지역은 격렬한 종교적 대치 상황의 진원지였다. 그 배경에는 플라토주에서 세력을 잡기 위한 정치적 투쟁이 밑바탕으로 깔려 있었다.

보코하람은 중앙권력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다가 10여 명으로 구성된 심의회 '슈라'(Shura)가 지휘권을 잡았다. 심의회는 '역사 분과'와 '국제 담당 분과' 등 2개의 분과 조직을 기반으로 한다. 유수프의 보좌관이던 아부바카르 셰카우가 이끄는 '역사 분과'는 경찰과 정치 지도자, '종교라는 방패막 뒤에 숨어 거짓을 일삼는' 이슬람 지도자(이맘)를 겨냥하는 활동에 집중한다. 이들은 폭리를 취하는 은행을 공격하고, 휴전을 대가로 이득을 취하면서 재정을 마련한다.

국제 담당 분과에서는 2009년 7월 탄압 이후 외국에 망명 중인 간부들을 규합한다. 맘만 누르가 이끄는 이 분과는 세계 지하드주의와 연계돼 있다. 보코하람의 작전 수단과 목표 대상이 변화된 것도 이 분과 조직 때문이다. 2011년 8월 23일 유엔 건물에 대한 자살테러는 나이지리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독교 예배당에 테러를 저지른 이들은 누르 쪽 사람들로 추정된다. 2011년 12월 25일, 아부자 외곽의 마달라에서 발생한 테러 역시 이들의 소행이었을 것이다. 지난 1월 20일, 보코하람은 북부에 위치한 카노주의 주도 카노를 공격했다. 경찰서와 정보 당국 사무실을 대상으로 한 8차례의 습격과 차량 폭파 등으로 18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나이지리아 국민의 외면을 무릅쓰고 무슬림 지역을 공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카노주에서 보코하람의 대표 셰카우는 이곳 주민들의 공감을 받고 있고, 2011년 총선에서 패한 이브라임 셰카라우 전 주지사에게 의존하는 측면이 많다. 이같은 긴장 전략은 미국 정부의 관심을 어느 정도 끈다고 할지라도 어느 누구에게도 이로울 게 없다.

학자인 모르텐 보아스는 이와 같이 강조한다.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보코하람이 정치 지도자 및 정부기관과 야합하는 것에 관한 소문이다. 현재 이에 관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런 소문이 떠돈다는 건 곧 일각에서 권력과 부를 거머쥐기 위해 필요할 경우, 언제든 보코하람을 그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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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알랭 비키 Alain Vicky 언론인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