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화적 조형물 ‘평화의 장벽’의 존치 이유

2012-04-14     에블린 피에예 | 작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10년 넘게 법을 어기고 우회하고 왜곡하며 무법자, 그것도 철저한 무법자로 살아가기란 보통내기로선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다. 먼저 인내심이 대단해야 하고, <평화의 장벽> 사건에서 보듯 번득이는 재능을 갖춰야 가능하다. 말문이 턱 막힐 만큼 모두가 놀라 자빠질 그런 재능 말이다.

<평화의 장벽> 사건이 보여준 무법 행위가 대단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그저 일반인들만 연루돼 쉽게 덮고 넘어갈 수 있는 성격의 평범한 사건이 결코 아니었다.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불법행위

2000년 3월 30일, 새 천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축하행사가 줄을 잇는 가운데 예술가 클라라 알테르와 건축가 장미셀 빌모트가 제작한 작품의 제막식이 거행됐다. 행사에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참석했다. 작품의 소유자는 베르제가 대표를 맡고 있는 한 유명 단체였고 아르셀로르, 피노 부아, 랑뱅 등이 작품 제작을 후원했다. '통곡의 벽'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길이 16m, 넓이 14m, 높이 9m에 달하는 <평화의 장벽>은 여러 개의 거대한 유리 장벽으로 구성돼 있다. 줄줄이 설치된 32개 스테인리스 기둥이 보는 이의 시각을 여러 개로 분절하며, 유리 장벽 위로 49개 언어, 19개 문자로 새겨진 '평화'라는 단어를 펼쳐 보인다. 인터넷이 연결된 30개 스크린은 평화에 얽힌 다양한 메시지를 전세계로 전파하고 있다. 메시지치고 참으로 육중하다. 작품 무게가 무려 52t에 이르니. 게다가 놀라울 정도로 눈에 잘 띄는 메시지다. 파리사관학교와 에펠탑을 사이에 둔 샹드마르스 광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사실 이 작품은 애초 3~4개월(전시 기간에 대한 정보가 불분명하다)만 전시하고 철거하기로 한 임시 설치물이었다. (1)

처음에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물론 설치물이 두 가지 측면에서 불법임은 분명했다. 작품이 설치된 장소가 특별관리구역에 속하고, 더욱이 설치물 자체가 엄연한 건축물임에도 사전에 어떠한 허가도 요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그저 여름만 지나면 철거될 것을. 그러면 다시 평소 경관을 되찾을 테고, 관련 법규도 아무 일 없었던 듯 계속 준수될 터였다.

무수한 여름이 지나고 몇 차례 장관이 바뀌었다. 하지만 장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항의가 빗발쳤다. 그러나 책임자를 찾아내는 것은 마술쇼 도중 사라진 카드 행방을 알아내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관계자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대체 누가 이 문제를 관할할 진정한 책임자인가? 토지 소유주인 파리시인가, 아니면 조형물 소유주라는 (베르제가 대표직을 맡았다는) 그 단체(불행히도 이 단체는 파산했다)인가? 그것도 아니면 설치 장소인 관광지를 관리하는 문화부인가? 공식적인 해답은 언제나 단순한 사실 주변만 뱅뱅 맴돌 뿐이다. 책임자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것. 2006년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시장이 파리7구 구청장에게 보낸 서한에도 이 점이 잘 드러난다. "2003년 장자크 아이야공 문화부 장관에게, 2005년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부 장관(당시 치안 문제가 걸려 있었다)에게 문의한 데 이어, 이번에는 르노 돈디외 드 바브르 문화부 장관에게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해보자고 서한을 보내놨습니다." 이후 몇 차례 논의가 진행됐고, 2008년 비로소 한 가지 사안이 결정났다. 각자 구조물 해체를 위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시간을 벌 수 있도록 전시 기간을 2년 연장하기로 허용한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결정이었다. 2009년 그들은 여전히 모색에 한창이었다. 모두가 요지부동이었다. 특히 장벽은 더욱 그러했다. 아니 모두가 요지부동인 것만은 아니었다. 꿈쩍한 것이 있었다. 클라라와 마렉 알테르 부부가 들고 일어났다.

불법 설치물의 화려한 존속

인생의 대부분을 중동 평화를 위해 헌신했고, 그 사실을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니기를 즐기는 소설가 겸 에세이스트로, 언론인 피요트르 스몰라르에게서 '허풍선이'(2)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 마렉 알테르는 각종 자잘한 진실 공방(영웅적 유년시절을 둘러싼 논란, 화려하지만 의심스러운 인맥과 활동)에 휘말려도 결코 냉정을 잃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푸틴을 지지했다고 비난받을 때도, 재계와 유착관계나 모순적 정치 성향으로 의심받을 때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까짓 사소한 불법행위 때문에 정의 실현을 외치지 못할 그가 아니었다. 알테르 부부는 기념물로부터 이익을 챙긴다고 비난한 파리7구 구청장 다티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결국 다티는 항소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부부는 관리 소홀과 작품 훼손 등에 대해서도 비난했다. 2011년 샹드마르스 <평화의 장벽> 존치추진위원회가 출범했다. 장프랑수아 코페, 리오넬 조스팽, 마르틴 오브리, 장피에르 라파랭, 언론인 이방 리우폴과 오드레 퓔바르는 물론, 'SOS 인종주의', '아베 피에르 재단', 반인종·반유대주의국제연대(LICRA), 프랑스유대인단체대표회의(CRIF), 프랑스흑인단체대표회의(CRAN), 크리소플사 등의 각 대표자가 동참했다. 참여 인사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대개 알테르 부부의 측근이거나 지인인 지지자들은 좌파·우파·무당파 등 온갖 차이를 극복한 채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이 시성 가득한 감동적인 호소문에 서명했다. "우리는 나날이 절실함이 더해가는 이 '평화'라는 보편적 단어에 헌정된 '생명의 찬가'가 더럽혀지거나, 더욱이 파괴되는 것을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이후 상황은 완전히 교착상태로 빠져들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문득 <평화의 장벽>이 존치되는 데 알테르 부부의 화려한 인맥이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스치기도 한다. 하지만 지인들도 그렇게 이야기할 테지만, 이 사건을 '엘리트층'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너무 대중 선동적이며 인기 영합주의적인 사고가 아닐까?

'평화'라는 이름 아래 진실 은폐

더욱이 엘리트층의 영향력이 항상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예도 수두룩하다. 이를테면 '푸아르 뒤 트론'과 '뇌뇌' 장터 축제 운영자이며 샹젤리제 크리스마스 장터 기획자인 '희대의 로비스트' 마르셀 캉피옹도 화려한 인맥을 자랑하기는 매한가지였다. 1999년 11월 말 캉피옹은 파리시장에게서 1년간 콩코르드 광장에 자신의 소유물 '대관람차'를 설치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냈다. 이윽고 허가 기간이 만료됐지만, 캉피옹은 대관람차가 설치된 자리에 깊은 애착을 보인 나머지 설치물을 철거하지 않았다. 그런 식의 무단 점거가 가능한 것은 단 1년뿐이었다. 결국 튈르리 공원에 10년 동안 대관람차를 설치하기로 한 새로운 계약을 맺었지만, 어쨌든 무단 점거를 고집하는 데 '바퀴'는 '장벽'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평화의 장벽>이 철거되지 않은 것은 예술작품에 대한 맹목적인 경애심 때문으로 보아야 할까? 1983년 퐁피두센터 전시회를 위해 제작된 리처드 세나의 작품 <클라라 클라라>의 사례를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50t에 달하는 이 두 개의 곡선 금속판은 임시 설치 기간이 지난 뒤 특별관리구역인 튈르리 광장에서 가차 없이 철거됐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이제 남은 것은 '상징'의 힘 때문이란 설명뿐이다. 더욱이 안 이달고 파리시 수석부시장도 이 점을 확인해주고 있다. 그녀는 "우리는 상징적·미학적 측면에서 깊은 애착을 갖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대체 무엇에 관한 상징이란 말인가?

자고로 한 도시나 나라는 기념물을 선택할 때 넓거나 좁은 의미의 정치적 선택을 감안하기 마련이다. 파리코뮌 시절 귀스타브 쿠르베가 (나폴레옹의 대군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방돔 광장 기념탑을 철거하자는 탄원을 제기한 것은, '공화국이란 개념에 반하는 전쟁과 정복 관념'이라는 상징성을 타파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수많은 희생 속에 파리코뮌이 붕괴되고 기존 질서가 회복되자, 기념물은 제자리로 복귀했다(쿠르베는 기념물 파괴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2011년 6월 20일 파리 시의회는 파리시의 거리에 로베스피에르의 이름을 붙이는 것을 불허했다. 이로써 파리시가 거부한 것은 자코뱅적 혁명이라는 상징이었다.

그렇다면 <평화의 장벽>은 대체 어떤 상징적 의미가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빌모트가 기념물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자세히 명시하고 있다.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 이 희망의 장벽이 온갖 종류의 참여를 통해 평화를 구현하는 모든 이를 지원하고, 그들의 정신을 기리며, 그들의 행위를 장려하기를 바란다." 다시 말해 영원히 존치하는 이 유명한 장벽은 바로 반(反)베를린장벽과 다름없는 셈이다. 그리고 평화(여기서 '평화'(Paix)라는 단어의 첫 글자가 대문자임을 유념하라. 이처럼 형식상의 격식을 통해 관념이 지니는 모호성을 상쇄하고 있다)란 분열, 갈등, 그리고 전쟁으로 점철된 어떤 구체적인 역사에 대한 대항물로 이해된다.

<평화의 장벽> 사건이 상징하는 바는 결국 우리 사회 유력자들이 중요시하는 무엇, 다시 말해 진실 은폐를 지속하기 위한 끈끈한 합의는 아닐까. 실질적 실천 없이는 그저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는 한 단어에 이토록 비장할 정도로 목매는 것은, 결국 아름다운 감정, 선한 의지라는 허울을 이용해 구체적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현실 속의 전쟁과 노사 갈등을 비롯한 각종 갈등을 덮어버리기 위한 것은 아닐까. <평화의 장벽>이 누리는 면책특권은 일종의 특혜만을 의미하지도, '엘리트층'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의 상업적 혹은 계층적 유착관계의 증거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평화의 장벽> 사건에서 나타나는 것은 당파를 초월한 철저한 일체성, 즉 '정치적인 것'이나 사회문제가 지니는 구체성에 대한 공통된 거부다.

처치 곤란한 현대판 '코끼리 석고상'

1814년 건축가 장앙투안 알라부안은 바스티유 광장에 설치할 분수대의 설계도를 발표했다. 그리고 거대한 코끼리 석고상을 만들었다. 이 석고상을 모델로 향후 청동상을 주조하려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유배를 떠난 뒤 계획은 폐기됐다. 그런데 보나파르트를 둘러싼 혁명에 대한 기억과 이 처치 곤란한 코끼리상은 대체 어찌할 것인가? 30년이 지난 뒤에도 코끼리상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았다. 파리 명예시민이자 독일 작가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설명하고 있듯이, "이 거대한 석고 괴물을 파괴하는 순간 훨씬 더 많은 작고 위험한 괴물들이 그 속에서 튀어나와 마을을 습격할 것을, 다시 말해 주권자인 인민이 왕이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3) 코끼리상은 혁명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846년 비로소 해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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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1) 여러 언어가 새겨진(교황의 크리스마스 메시지와 비슷하다) 첨단기술을 이용한 평화 기념물이란 콘셉트는 이후 다른 나라에도 널리 전파됐다. 파리시와 로레알이 지원한 예루살렘의 <평화의 천막>, 마렉 알테르가 프랑스 대표로 참여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정도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된 <평화의 탑>, 히로시마의 <평화의 문> 등이 대표적이다.
(2) Piotr Smolar, ‘허풍선이 마렉 알테르에 관한 조사’, <르뷔21>, 제4호, 2008년 10월.
(3) Heinrich Heine, <프랑스 정치·예술·사회적 삶에 관한 서한>, 레비 출판사, 파리, 18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