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ITT, 칠레 군부 쿠데타의 강력한 후원자

15분 안에 이 건물에서 폭탄이 터질 것이다

2023-07-31     예브게니 모로조프 | 팟캐스트 <산티아고 보이즈> 작가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인 1973년 9월 11일, 미국을 등에 업은 군사 쿠데타로 칠레에서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미국계 거대 통신기업인 ITT는 칠레 정부의 위치를 불안하게 만드는 데 석연치 않은 역할을 했으며, 현재 실리콘밸리의 거대기업들에게 길을 닦아줬다.

 

1973년 9월 칠레에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일으킨 유혈 쿠데타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제거되고 민주주의가 좌절된 지 2주가 지난 어느 늦은 밤, <뉴욕타임스>는 익명의 전화를 받았다. “적으세요, 두 번 말하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벌어질 놀라운 일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15분 안에 미국의 국제전신전화회사(ITT) 건물에서 폭탄이 터질 겁니다.” ITT 건물은 무작위로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ITT가 칠레에 저지른 범죄에 대한 보복입니다.”(1)

당시 ITT는 세계적 규모의 다국적 기업들 중 하나였다. 문어발식 경영을 펼치는 재벌기업 ITT 이사회 임원 중에는 CIA 전 국장과 세계은행 전 총재도 있었다. 미군의 최대 계약업체 중 한 곳을 베트남 전쟁의 주요 수혜자로 만들기에 이상적인 구성이었다. ITT는 미국 군산복합체에서 당당히 입지를 과시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시야를 확보하려면 ITT를 보십시오. 어둠은 더 이상 게릴라군의 것이 아닙니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죽은 해인 1967년에 나온 ITT의 야간투시경 광고 문구다.

ITT는 계열사에서 생산한 산업용 빵처럼 보이콧 대상이 됐다. 좌파 신문에는 “빵을 사세요, 폭탄을 사세요. 베트남의 ITT”라는 제목의 기사도 실렸다.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ITT 기업명이 ‘제국주의(Impérialisme), 반역(Trahison), 테러(Terreur)’가 아니냐는 말도 돌았다. 그렇다고 해도 맨해튼 한복판에 폭탄이라니…

 

ITT, 미국의 남미 지역 통신 장악을 후원

결국 오전 5시 40분, ITT 중남미 지부가 위치한 미국 뉴욕 매디슨가 437번지에서 폭탄이 터졌다. 로마와 취리히에 이어 2주도 채 되지 않은 시점, 다국적 기업을 겨냥한 세 번째 범죄였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현재의 ‘테크래시(실리콘 밸리가 촉발한 반발심을 뜻하는 유행어)’와 달리, 1973년 ITT를 대상으로 한 행동들은 분노의 트윗보다는 훨씬 더 큰 피해를 일으켰다. ITT 반대자들에게 ITT란 다국적 자본주의의 표상일 뿐만 아니라 자체 외교정책과 첩보 서비스, 정책 인사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힘을 휘두르고, 군인과 비밀경찰, 외교관과 퓰리처상을 수상한 기자들까지 홍보 담당관으로 거느리는 기업이었다. ITT는 국가권력의 모든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1973년에 출판된 책 『주권국가(L’État souverain)』의 제목은 거기에서 나왔다.(2) 

중세 영주처럼 사용자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며 실리콘밸리의 대기업들에 쏟아지는 ‘테크노-봉건주의’라는 현재의 비난은 사실 반세기 전에 나왔던 해묵은 불만이다.(3) 1980년 초에 ITT의 영광을 기린 책조차 첫 번째 페이지부터 영주의 이미지를 소환해서 독자들을 ‘1100년대 중세 유럽’으로 이끌고 다국적기업 ITT의 활동을 ‘봉건적 맥락’에서 그렸다.(4) 

그 둘의 비교가 전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가별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분석에는 큰 오류가 있다. 그리고 모든 국가가 기술 관련 대기업과 동일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일개 전화회선 회사가 세계적인 규모의 기업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군사적, 재정적, 기술적 지배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ITT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미국의 무조건적인 지원 없이는 ITT도, 실리콘밸리도 그토록 엄청난 성장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ITT는 에르난과 소스테네스 벤 형제가 1920년 뉴욕에 세운 기업이다. 처음에는 푸에르토리코와 쿠바에 보유한 전화 설비를 관리하기 위한 상점 정도였다. 현재의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의 세인트 토마스에서 태어난 두 형제는 카리브해를 잘 알고 있었고, 그곳에 미국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다. 두 형제는 가족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적었지만 아주 야망이 컸다. 푸에르토리코로 이주하기 전 소스테네스는 몇 년 동안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일했고, 그곳에서 JP 모건과 훗날 시티뱅크가 되는 회사와 인연을 맺게 됐다.

1920년대 중반 ITT는 멕시코와 우루과이,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스페인으로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1929년 ITT는 중남미 전 대륙 전화선의 3분의 2와 케이블 절반을 집어삼켰다.(5) ITT의 놀라운 확장세는 벤이 월스트리트와 돈독한 관계를 맺고 부채를 끌어들인 덕분이었다. 그리고 당시 세계적인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미국이 중남미에서 영국을 몰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인 덕분이기도 했다. 전쟁 담당 국무장관이었던 엘리후 루트는 1921년 의회 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남미 통신을 장악하기 위해 목숨을 건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ITT의 도움을 받아 당연히 미국이 승리했다. 1930년대 발표된 흥미로운 보고서에 따르면 ITT는 “전 세계 통신시장에서 영국의 독점을 깨기 위해 다른 모든 기업과 정부가 반세기 동안 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9년 만에 해냈다.”(6) ITT의 I가 제국주의를 뜻하는 I라는 말에 일리가 있다.

 

피델 카스트로와 ITT의 악연

전반적으로 남미 통신시장을 장악하려는 전쟁은 차질 없이 진행됐다. 남미의 많은 국가들이 미국의 환심을 사고자 다른 외국 사업자들에게 요구했던 값비싼 참여 비용(인프라 시설 투자나 일방적인 관세 인상 금지 등)을 면제해주면서 ITT에 레드카펫을 깔아줬다. 몇몇 정부에서 ITT와 미국의 관계를 우려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후였다.

첫 번째 우려는 통신 보안에 관한 것이었다. 다른 우려는 경제 민족주의의 대두와 관련이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이나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 등 경제 민족주의의 열렬한 대변자들은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한 뒤에야 ITT를 해산할 수 있었다. 어느덧 미국 국방부의 주요 공급업체가 된 ITT는 전화 회선 사업자로서의 수명이 끝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대한 비싸게 자산을 매각할 생각이었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기다리며, ITT는 수익을 무리하게 쥐어짜고 요금을 인상하고 투자를 막았다. 그 결과 서비스의 질은 떨어지고 가격은 올랐다. 지역 주민들은 분노했지만 ITT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게 막강한 미국 기업을 어느 누가 국유화하려고 하겠는가?

그런데 어떤 사람이 과감한 행보를 보였다. 1990년대 초 쿠바의 젊은 변호사가 계약을 어겼다며 ITT를 고소했다. ITT는 법정에 끌려나왔고, 변호사의 고객이 승소했다. 그러나, 쿠바의 독재자였던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법원의 판결을 무시했다. 그 고객의 젊은 변호사가 바로 피델 카스트로였다. 그는 그 당시의 굴욕을 잊지 않았다. 1959년 카스트로 혁명 이후 가장 처음으로 국유화된 외국계 기업 가운데 ITT 쿠바 자회사가 있었던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해당 조치는 ITT에 큰 충격이었지만 앞날을 알리는 징조이기도 했다. 

1962년 브라질의 한 주지사가 현지 자회사를 장악하자 ITT는 냉전 시대 에피소드처럼 상대를 포장하고 그에 맞서기 위해 미국과의 연줄을 동원했다. 이 일은 2년 뒤 군사 쿠데타 때 다시 부상했다. 브라질은 ITT 자회사를 국유화한 뒤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굴욕을 겪었기 때문에 ITT의 로비 캠페인은 성공적으로 드러났다. 1920년대 말 ITT 제국은 남미 자산을 매각한 뒤 벌어들인 엄청난 수익으로 보험회사와 호텔, 렌트카 회사 등 온갖 종류의 자산을 사들였다. 대부분이 현지에 있는 자산이어서 국유화될 위험은 전혀 없었다. 1970년대가 되자 ITT가 보유하고 있는 전화망은 푸에르토리코(ITT의 역사적인 후방기지)와 칠레(1927년에 설립)에 있는 전화망뿐이었다.

 

칠레에서도 살바도르 아옌데와 악연

ITT가 칠레 정부에 한 약속은 아주 모호하면서도 철저하게 ITT에 유리한 계약이었다.(7) 기독교계 민주당 소속으로 1964년에 당선된 에두아르도 프레이의 정부는 1960년대에 ITT 현지 자회사의 주식을 조금씩 매입한다는 계획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 대비 효율이 떨어지는 조치라며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1970년대 대선에서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는 ITT를 국유화하고, 엔지니어로 관리자를 대체하고, 칠레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까지 전화망을 확장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승리를 거뒀다. 

ITT는 1970년 이전부터 아옌데의 집권을 두려워했다. 6년 전, ITT 이사회 임원인 전 CIA 국장 존 맥콘은 사회주의자인 아옌데의 당선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1970년 대선 몇 달 전에도 ITT는 CIA에 연락을 취해서 좌파의 승리를 막기 위해 자금을 대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CIA는 현금이 부족하지 않아서 그 제안을 거절했지만, ITT가 아옌데의 반대파들에게 현금을 마구 뿌려대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뜻밖에도 아옌데가 당선된 후 ITT에 접촉한 것은 CIA였다. 예비 부품이나 유지보수 인력 공급을 거부하면서 칠레 정부에 압력을 넣을 수 있지 않을까? 리차드 닉슨의 말에 따르면 CIA의 목표는 아옌데가 임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군이 병영을 떠나도록 해서 “칠레 경제가 울부짖게끔” 하는 것이었다. 해당 전략은 갑자기 중지됐다. 아옌데는 집권한 이후 곧바로 ITT를 국유화하기보다는 ITT와 협상을 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노조를 포함한 ITT 직원들은 더욱 급진적인 조치를 요구했다. 아옌데는 진솔함을 발휘해서 대통령궁에 있을지도 모를 녹음기를 찾아달라고 ITT에 부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1년 아옌데는 생각을 바꿔 ITT 칠레 자회사를 장악하고 유령회사를 통해 부당이익을 거둔 혐의로 경영진을 체포했다. 이에, ITT는 미국에서 격렬한 캠페인으로 맞섰다.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과 친분을 쌓고, 6개월 이내에 칠레 대통령의 입지를 뒤흔들 18가지 조치를 제안하기도 했다. 또한 주요 야당 신문인 <엘 메르쿠리오>에 자금을 지원하도록 CIA를 부추기기도 했다. ITT 내부에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언론은 경영진과 닉슨 행정부 인사들 간의 대화 내용을 공개했고, 미국 외교 정책에 대한 ITT의 영향력을 규명하기 위한 청문회를 열도록 상원을 압박했다.(8) 하지만 해당 수사 이후에도 책임자들을 기소하지 못했고, 어느 누구도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다. 3개월 후 아옌데는 칠레 군부의 피노체트가 일으킨 쿠데타로 사망했다.

 

월스트리트와 ITT의 역설적 관계

ITT는 국유화에도 별로 타격을 입지 않았다.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킨 지 얼마 후 피노체트로부터 보상금 조로 1억 2,500만 달러를 받았고, 닉슨 정부로부터도 3,000만 달러를 받았기 때문이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미 상원의 보고서에도 불구하고(어쩌면 그 때문에) ITT가 칠레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해 의혹이 확산됐다. 당연하게도, ITT는 활동가들의 표적이 됐다. ITT 본사 건물에 폭탄이 있다고 <뉴욕타임스>에 알린 신원미상의 남성은 극좌 지하조직인 ‘웨더 언더그라운드’ 소속이라고 주장했다. ITT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은 ITT의 역사적인 발생지인 푸에르토리코까지 번졌고, 푸에르토리코는 ITT 자회사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자회사 매각으로 막대한 보상을 받았지만, 사람들의 분노는 식지 않았다. 결국 매각된 지 몇 달 후에 ITT 본사가 폭발했다. 

ITT는 존립하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월스트리트와 국방부와의 연줄을 기반으로 영향력을 키우는 성장 모델을 실험하는 실험실과 같았다. ITT의 여러 계열사 간의 시너지는 회계상의 속임수에 불과했지만, 처음부터 글로벌 비전과 대기업 지배력을 갖춘 글로벌화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ITT의 경영진은 단기 수익과 주가에 집착하게 되면서 핵심 서비스에 대한 장기 투자를 등한시했다. 그 점이 바로 ITT가 시대를 앞서나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다른 미국 기업들은 대부분 1980년에 들어서서야 그와 비슷한 유혹에 무릎을 꿇었다. 

ITT는 1960년대 중반부터 금융화를 받아들였다. 당시 방위산업체 직원이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것보다 보험회사를 인수하기를 선호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ITT 경영진은 라자드 은행에 있는 지인들에게 힘을 빌려 자신들의 탐욕을 기발한 다각화 전략으로 포장하면서 월스트리트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폭발적인 성장에 대한 욕구는 종말의 시작을 뜻하기도 했다. ITT는 당시 실리콘밸리에서 꽃피기 시작하던, 장기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투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칠레에서 벌어진 쿠데타로 인해 ITT는 향후 수십 년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이미지에 손상을 입었다. 

역설적인 것은, 경이로울 만큼 ITT의 초기 성장을 이끌었던 미국과 월스트리트와의 가까운 연줄이 ITT의 몰락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현재 실리콘밸리의 거대 기업들도 첩보와 금융 사이에서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ITT의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 듯하다. 

 

 

글∙예브게니 모로조프 Evgeny Morozov
200여 건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9개 에피소드 짜리 팟캐스트 <산티아고 보이즈>(초라 미디어, 포스트유토피아 제작)의 작가. 본 기사도 해당 팟캐스트를 기반으로 한다.

번역∙이연주
번역위원


(1) Paul L. Montgomery, ‘ITT office here damaged by bomb’, <The New York Times>, 1973년 9월 29일.
(2) Anthony Sampson, 『The Sovereign State. The Secret History of ITT』, Hodder and Stoughton, London, 1973년.
(3) ‘Critique of Techno-Feudal Reason’, <New Left Review>, London, n°133-134, 2022년 1월~4월호. 
(4) Robert Sobel, 『ITT: The Management of Opportunity』, Times Books, New York, 1982.
(5) Daniel R. Headrick, 『The Invisible Weapon. Telecommunications and International Politics. 1851-1945』, Oxford University Press, 1991년.
(6) Ludwell Denny, 『America Conquers Britain: a Record of Economic War』, Alfred A. Knopf, New York, 1930년.
(7) 해당 챕터가 칠레에 배정되어 있음. Eli M. Noam (dir.) 『Telecommunications in Latin America』, Oxford University Press, 1998년.
(8) 미 상원이 주재한 청문회 보고서 2권: ‘Multinational Corporations and United States Foreign Policy’, Government Printing Office, Washington, 197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