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도를 내버려둬라

2012-04-14     주강현

제주도 강정 문제가 여전히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새로운 논리 하나가 개발되고 있다. 중국이 이어도란 섬을 탐내고 있으므로 가까운 곳에 해군기지가 있어야 한다, 원유를 비롯한 해양물류 루트를 지키는 것이 우리의 이익선에 절대 필요하다, 고로 강정 해군기지는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이런 유의 기사들을 읽으면서 이어도에 관해서만큼은 확실히 명토 박아둘 필요를 느낀다. 이어도를 둘러싸고 그동안 설왕설래가 많았던데다, 해군기지 필요성까지 연결되니 장차 사태가 묘한 방향으로 흐를 조짐이 이미 나타났기 때문이다.

1. 패권 논리로 변질된 이어도

무속연구의 원로 현용준 제주대 명예교수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이어도는 제주도민 바다의 이상향이다. 모 방송사에서 바다 속의 암초를 섬이라고 일반에게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그것이 이어도라고 믿게 만든 것을 보면 방송의 힘이 얼마나 큰 것임을 가히 알게 한다." 토박이 학자의 글이니 백번 신뢰해도 무방할 것이다. 에릭 홉스봄의 표현을 빌리면, 이어도는 '만들어진 전통'이며 그것도 20세기의 신(新)전통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물살 굽이치는 백령도가 심청이 뛰어든 곳과 가깝다고 하여 심청이 동상도 세워두었지만 그곳이 과연 심청이가 뛰어든 곳일까? 흥부 고향이 지리산 아래 남원이라고 하여 한때 흥부마을을 지정하고 서로가 자기 쪽이 흥부네, 놀부네 마을이라고 다툰 적도 있다. 백번 양보하여 이어도가 오랜 구전(口傳)성을 지닌다고 해도 그 실체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어도의 현주소를 찾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은 절제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인지하는 이어도는 대체로 몇 단계 전개 과정을 거친다.

2. '소코트라 록'과 '파랑도'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상선이 1868년(고종5) 제주 남해안에서 미확인 암초를 확인했다고 본국에 보고한다. 그러나 측량은 실패한다. 32년 뒤인 1900년 6월 5일 영국 상선 소코트라호가 암초와 접촉하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영국 해군본부에 보고한다. 해군본부는 1901년 측량선 워터위치호를 파견해 암초 위치와 수심을 확인하고 '소코트라 록'(Socotra Rock)으로 명명한다. 해도 제작자가 배를 침몰시킨 수중 암초를 소코트라로 해도에 등재하면서 그 명칭이 항해자들에게 공식화된다.

일제강점 뒤 소코트라 암초는 일본인 취향의 이름인 '파랑도'로 개명된다. 1938년에는 아예 직경 15m, 수면 위 35m의 콘크리트 인공구조물을 설치해 나가사키∼고토(五島)∼제주도∼소코트라 암초(파랑도)∼상하이를 연결하는 해저 케이블(920km)을 가설하려고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적어도 일제강점기까지는 소코트라나 파랑도와 이어도를 연결짓는 사람이나 문헌 기록은 전혀 없었다.

해방 이후 일본 해군이나 영국 해군 지도에 등장한 소코트라 암초, 혹은 파랑도를 찾겠다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한-일 간에 이 암초가 종종 문서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의 평화선 선언과 관련해 언론인 홍종인, 해군과 산악인 등으로 구성된 '파랑도 탐사대'가 이틀간 투입됐으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실패한다. 박정희 정부에서도 '파랑초(礁) 탐사'는 계속 이어진다. 일제강점기까지 일본인들은 잘 알고 있던 파랑도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데 계속 실패한 것이다. 당시 누구나 다 파랑도 탐사대라고 했지 '이어도 탐사대'라고 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1980년대 들어 이번에는 대중적 영향력을 지닌 방송인들이 투입됐다. 해도상의 소코트라 암초를 찾는 요란법석은 1984년 제주도 KBS팀과 제주대학의 공동탐사로 연출됐다. 그해 5월 8~15일 동경 125도 10분, 북위 325도 7분에서 암초 하나를 찾아내고 이 수중 암초를 파랑도(波浪島)로 명명한다. 그동안 해도에 '소코트라 록'으로 등재돼 있었으나 실체 확인은 안 된 수중 암초였다. 일본인들이 해저 케이블 중계지를 만들려 했던 수중암초를 찾아낸 것이다.

방송은 파랑도 발견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파급력은 대단했다. 그런데 파랑도를 이어도와 연결짓는 입장이 강력히 전개된다. 영국인들이 해도에 등재한 소코트라 암초, 일본인들이 명명한 파랑도를 다시 찾아낸 것뿐인데 이를 그동안 전설처럼 만들어진 이어도와 연결시키려 한 것이다. 방송의 위력에 의해 제주 사람뿐 아니라 육지인도 이어도와 파랑도를 연계짓는 각인을 경험하게 된다. 1987년 제주지방해양수산청에서는 파랑도를 공식적으로 이어도로 명명하고 해도에 기재한다. '상상의 섬' 이어도가 파랑도 수중 암초 바로 그곳임을 국가적으로 명명하게 된 것이다.

1974년 발표된 이청준의 베스트셀러 소설 <이어도>의 첫 대목이 해군함정의 탐사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도 이런 시대상을 반영한다. 1984년 방송사의 파랑도 탐사는 거꾸로 이청준의 <이어도>에서 영향받은 측면도 있을 것이다.

3. 상상의 섬 이어도의 역사적 실체

해석이 구구할 때는 다시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 다카하시 도루(일본 민속학자로, 1932년 제주도 이어도 설화를 처음 채록했다) 이래 '이어도' 전설이 유포된다(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회에 약술한다).

△ 다카하시가 학문적 작업을 통해 만들어낸 이어도가 존재했다면, 수중 암초 소코트라와 파랑도는 이어도와 별개인 해도상에 존재하는 실체였다.

△ 해방 이후 수중 암초 파랑도의 위치를 다시 찾아내려는 노력이 가시화되었다.

△ 이청준의 소설 등을 통해 이어도 전설이 아주 오래전부터 전승된 것으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그리하여 오늘날 다수의 문인이 이어도에 관해 수많은 시를 쓰면서 이어도는 어느덧 전설의 섬을 뛰어넘어 확신을 지닌 신화의 아우라를 창조하게 된다.

△ 방송 등을 통해 전설상 이어도의 실재 위치를 찾는 작업이 벌어진다. 수중 세계의 미지 공간을 찾는 것은 인간 본연의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전설에 불과한 이어도의 실체를 찾겠다는 노력 자체가 어찌 보면 코미디 같았다. 이어도를 1900년 영국 배를 침몰시킨 소코트라 수중 암초와 연결짓는 움직임이 가시화된 것이다.

△ 기왕의 수중 암초 소코트라(혹은 파랑도)가 이어도라는 판정이 내려졌고, 국가는 이를 해도에 등재하고 공식화한다. 해도 등재는 자연적 암초에 국가가 개입하는 결정적 행위다.

△ 제주도는 1999년 '제주인의 이상향 이어도는 제주 땅'이라는 이름의 수중 표석을 세운다. 2003년 해양수산부와 한국해양연구원(KORDI)은 이어도종합해양과학기지를 세웠는데, 제주도에 건의해 해도상 소코트라 암초도 이어도로 표기하기에 이른다.

한국해양연구원의 전국 여론조사에 의해 1987년 제주지방해양수산청이 수중 암초를 이어도라 공식화한다. 1987년 수중 암초가 있는 곳에 아예 '이어도 등부표'를 세운다. 2001년 국립지리원이 1984년에 발견한 수중 암초를 이어도로 공식 명칭화한다. 과거의 소코트라 암초(혹은 파랑도)가 해명상 이어도로 확정됐고, 곧이어 이어도 해양과학기지가 세워진다.

백과사전에는 아예 "이어도, 離於島, leodo.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마라도로부터 남서쪽으로 149km 거리에 있는 수중 섬. 파랑도라고도 한다"고 등재된다. 전설, 과학기지, 파랑도, 이어도, 離於島 등이 별 검증 없이 하나로 통일돼 등재된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 같은 슬로건이 보편화되고 있다. "전설의 섬 이어도에 우뚝 선 첨단 해양과학 기술의 결정체/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 Ieodo Ocean Reaearch Station/ 꿈과 환상의 섬 이어도!/ 대한민국 해양과학의 전초기지로 21세기 해양강국의 꿈을 만들어갑니다!"

4. 국가주의와 진실

21세기 초반의 사정은 더 확정적이다. 이어도과학기지 주변을 둘러싼 중국과의 영토분쟁 조짐이 보이자 전설 속의 이어도와 해양영토 획정을 일치시키려는 알리바이 만들기가 요구된다. 그러나 이어도해양과학기지가 서 있는 수중 암초는 중국과의 협상에서 충분히 우리나라가 이길 수 있는 해역이다. 지정학적 위치상 우리나라에 유리하기 때문에 그 수중 암초의 명칭이 이어도든, 전혀 다른 명칭이든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오늘의 이어도해양과학기지와 환상의 섬 이어도가 다른 것이라고 하여 우리나라가 중국에 불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오늘의 이어도해양과학기지가 위치한 곳이 중국명 쑤옌자오(蘇岩礁)이며, 그 근거는 고대 지리지 <산해경>에 있다는 주장과 다를 것이 없다. 중국인들은 이런 한심한 주장을 늘어놓고 있다. "동해 밖 태황 가운데 산이 있으니 이름하여 의천소산이라 한다"(東海之外 大荒之中 有山名曰의(불깐 개 의)天蘇山). <산해경> 시대의 쑤엔(蘇山)을 오늘날의 이어도해양과학기지 수중 암초로 과대포장하려는 어처구니가 중국 쪽에 있다면, 오늘의 현실적인 수중 암초를 이상향 담론으로서 이어도와 실재적으로 연결지으려는 어처구니가 우리나라 쪽에 있다고 할까.

이어도 구전의 실체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그 이어도가 오늘의 해양과학기지가 서 있는 수중 암초와 동일한 것이라는 주장이 가능할까. 전설 속의 이어도가 덜 규명된 상태인데, 그 가공의 전설을 오늘날의 해양과학기지와 일체화하려는 시도는 무리다. 중국과의 해양영토 분쟁 문제라는 측면에서 해양과학기지가 전설 속의 이어도와 일체화돼야 한다는 강박증, 혹은 국가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리 중국과의 관계에서 예상되는 문제가 있다 해도 역사·문화적 진실과 실체는 정확히 해둘 일이다. 무리한 해석은 무리한 결과를 빚고, 무리한 해석으로 얻어낸 국가 방략은 국가적 손해로 귀결될 것이다. 해양주권 문제에는 언제나 냉정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흥분할 일이 아니다.

5. 심성(心性)의 역사

이어도 이상향 담론을 아무런 무리수 없이 우리가 접수했다는 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흡사 담합이라도 한 듯 이어도 담론을 확대재생산해온 우리의 심성사(心性史)를 주목해야 한다.

이어도는 심성사에서 말하는, 이른바 집단심리의 감성지도(感性地圖)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실제 해도에 존재하지 않는 이어도란 섬을 감성지도에 등재시킨 집단심리의 망탈리테(Mentalite's)를 주목한다. 시칠리아나 안달루시아 등 남부 지중해에서 밀레니엄의 새로운 운동이 벌어졌다면, 남녘 제주도에서는 머나먼 이어도를 심성지도로 그려낸 뒤 이상향으로 설계해나가는 심성사적 운동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집단심리적으로 전개됐음을 주목해야 한다. 한때 독립왕국이었으나 육지 복속 이후 오랫동안 역사적 소외를 겪어왔고, 고단했던 지난 20세기 역사를 고려해본다면 능히 짐작될 일이다.

그 어딘가의 섬에 전혀 새로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이데아 담론, 즉 이어도 같은 존재는 전 지구적·역사적 차원에서 확인된다. 서양에서 구전돼온 아틀란티스가 또한 그러했다. '만들어진 이어도 담론'의 이론적 정립 과정에 인류의 보편적인 섬-파라다이스 관념이 배경으로 돼 있는 것이다. 섬-파라다이스라는 인류의 심성사적 집단심리가 이어도 형성 과정에서 암묵적으로 작동한 셈이다.

20세기 심성사에서 애써 가꿔온 이어도를 내버려둬라. 행여 그 이어도를 팔아서 과학기지가 서 있는 암초 주변을 국제 분쟁화하려는 섣부른 주장도 내려놓아야 한다. 이어도는 본디 우리가 꿈꿔온 이상향의 한 방식이다. 이상향에서 갈등과 분규는 부질없는 짓이다. 오늘의 이어도과학기지가 성립되기까지, 아니 이어도란 명칭이 대중성을 얻게 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찬찬히 복기해본다면, 그 근해를 동아시아인은 물론 그 주변을 오고 가는 모든 배가 항해의 자유를 누리면서 가꿔나갈 평화의 바다이지 잠수함·항공모함 등 살벌한 이름들을 끌어들일 장소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제주 남쪽에 너른 해양영토가 존재한다는 사실, 수중 암초에 이어도해양과학기지를 세워 지구온난화에 대비하고 태풍예보 시스템을 작동시키고, 장차 예상될 중국과의 해양주권 문제에도 한 역할을 하도록 준비한다는 사실은 분명히 선견지명이 있다. 온통 독도에만 눈길이 쏠려 있을 때, 이어도연구회처럼 남쪽 해양주권에 주목하는 시민사회단체도 있다. 그만큼 대한민국의 역량이 허술하지 않다는 증거다.

그러한즉, 앞으로 더욱 이어도를 사랑하고 보듬어나갈 일이다. 이어도 사랑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광분하듯 애국주의적 선동과 국가주의적 폭력으로 끌어들이는 유인책을 선택하면 최악이 될 것이다. 이어도에 관한 장황한 학습을 앞에서 그야말로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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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주강현 민속학자. 저서로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등이 있다. 최근 <유토피아의 탄생: 섬 이상향 이어도의 심성사>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