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완전히 파괴하려던 ‘모건도 계획’

루스벨트와 처칠이 독일의 운명을 결정했을 때

2023-07-31     피에르 랭베르 | 기자

독일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 1950년대에 ‘경제 기적’을 이뤄냈다. 사람들은 전후 독일의 눈부신 재건이 연합군의 독일 점령과 마셜 플랜, 냉전 동안 대립했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체제의 모델이 된 두 국가의 탄생 덕분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1944년 늦여름, 연합군은 전혀 다른 시나리오를 계획하고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고급 승용차들, 성곽 주변을 에워싼 삼엄한 경비, 수많은 외교관 그리고 기자들의 무리. 흑백으로 촬영된 뉴스 영상은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시가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흰 모자를 잠깐 동안 비췄다. 이날은 1944년 9월 15일, 캐나다에서 제2차 퀘벡 회담이 열리던 중 두 정상은 패배한 독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까다로운 주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동부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는 소련 군대의 진격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덕분에 전쟁의 향방은 명확했다. 모두가 독일군의 패배가 임박했음을 예상했다. 물론, 실제로 독일은 꽤나 오랫동안 저항하며 버텼지만 말이다.

루스벨트 미 대통령과 처칠 영국 총리는 회담 당시, 예정에 없던 비밀 각서를 체결했다. “독일을 농경 및 목축 국가로 변모시키기 위해 루르 지방과 자를란트 지방에 위치한 군수 공장들을 제거하는 계획”에 관한 것이었다. 회담장 뒤에서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막역한 친구이자 이웃인 헨리 모건도 미 재무장관이 기뻐하고 있었다. 그는 동료들에게 “내 인생에서 가장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48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1) 크리스마스트리 재배를 전문으로 하던 농민 출신의 이 장관은 ‘독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몇 주 전부터 미 대통령에게 간단명료한 해법을 제시했다. 바로 독일을 완전히 끝장내 버리는 것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9월 13일 만찬에서, 모건도 장관에게 처칠 총리와 앤서니 이든 영국 외무장관 앞에서 계획의 큰 틀을 설명해줄 것을 요구했다. ‘모건도 계획’을 살펴보면 먼저 “군수 산업 전체의 완전한 해체 및 군사력에 필수인 화학, 제철, 전력 생산 등 다른 주요 부문 제거 또는 파괴”를 통해 독일을 비무장 상태로 만들고, 폴란드와 소련 그리고 프랑스가 독일 영토의 일부를 합병한 뒤 나머지 영토는 남북으로 분할한다는 내용이다.

이 계획에 따르면, 라인란트에서 킬, 그리고 “산업 역량의 중심이자 전쟁의 소용돌이가 몰아친” 루르 지역에서 모든 공장들을 해체해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가들에 배상하고, 광산과 남아있는 설비들은 폭파하거나 “폐기”한 후 국제 사회가 관리한다. 또한, “기술자와 숙련공 및 그 가족은 모두 해당 지역을 영구적으로 떠나도록 권장한다”는 야심찬 사회공학 작전으로 평화 계획을 뒷받침한다. “고등교육기관을 다시 여는데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수 있기 때문에” 남아있는 국민들의 호응을 얻기는 힘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모건도는 유엔이 작성한 중대 전범자 목록에 기재된 이를 현장에서 모두 총살하고, 정치적·인종적 동기 또는 전쟁 범죄를 통해 타인의 사망을 초래한 사람은 누구든 사형에 처해 비(非)나치화를 단행하기로 했다.
나치의 친위대 슈츠슈타펠과 비밀경찰 게슈타포, 다른 나치 정보기관들에 몸담았던 이들은 주변 국가에서 강제 노역에 처해진다.(2)

 

처칠, “한 나라 전체를 벌할 수는 없다!”

미 재무장관의 설명을 듣던 영국의 처칠 총리와 이든 장관은 식사를 멈췄다. “총리는 내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낮게 속삭이며 곁눈질을 했다”고 모건도는 회상했다.(3) 시가를 문 남자는 “아주 거칠고 폭력적인 언어로” 계획을 격렬히 비난했다. “그 잔인하고 반기독교적인 계획은 영국을 독일의 폐허에 묶어 둘 것이다. 한 나라 전체를 벌할 수는 없다!”고 처칠은 소리쳤다. 다음날, 모건도는 전쟁으로 출혈이 심했던 영국에게 65억 달러의 추가 지원을 약속했다. 사실, 영국 외무부는 배상금을 징수하기 위해 독일 경제의 신속한 회복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처칠 총리가 ‘교수’라고 칭하며 신망하던 고문 처웰경은 패전국 독일의 시장을 영국이 차지할 수 있을 것임을 총리에게 암시했고, 결국 처칠 총리는 모건도 계획을 받아들였다. 처칠은 “자업자득이다”라고 중얼거렸다. 놀란 이든 장관 앞에서 총리는 직접 각서 내용을 읽어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영국 외교관들은 독일이 목축업 국가로 변화하는 것을 완강히 반대할 것이 분명했다.

반면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최고사령관에게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스탈린은 테헤란 회담(1943년 11월 28 ~ 12월 1일) 이후 처칠 총리, 루스벨트 대통령과 함께 독일 해체에 동의했지만 막대한 배상을 요구해왔다. 소비에트 연방의 심각한 인적・물적 손실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종전 이후 추산에 따르면 미국인 1명당 독일인 13명 그리고 소련인 70명이 목숨을 잃었다. 1944년 10월 중순 소련을 방문한 처칠 총리는 스탈린에게 모건도 계획을 열성적으로 소개했다. 독일의 공장 및 공작 기계들을 손에 넣길 바라던 만큼이나 패배한 적국의 탈공업화에 호의적이었던 소련의 지도자는 모건도 계획의 변증법적 측면을 특히나 높이 평가하며 이렇게 말했다. “독일이 복수할 가능성을 없애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25~30년마다 새로운 전쟁이 발발해 젊은 세대를 몰살시키고 말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가장 강경한 조치가 결국엔 가장 인간적인 조치가 될 것이다.” 스탈린이 “독일인 중 150만 명 이상이 보복을 생각할 것이다”라는 의견을 말하자 처칠은 영국 여론의 저항이 예측된다고 하면서 “전장에서 가능한 많이 죽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건도 계획, 영국과 미국 내 반발 초래 

루스벨트는 이런 생각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아버지의 온천 치료 때문에 독일 바트나우하임에서 짧은 기간이나마 교육을 받았던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그곳의 주민들을 “혐오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홉 살의 어린 시절 이미 독일 동급생들을 “멍청하다”고 평가했다. 1944년 여름, 모건도는 아주 쉽게 루스벨트를 설득했다. “우리는 독일에게 강경하게 대해야 한다. 나치뿐만이 아니라 국민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독일 민족을 거세하거나, 과거의 사람들처럼 행동할 수 있는 이들을 계속 출산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며 열변을 토했다. 독일의 항복 이후 독일인들을 집단적으로 철저하게 재교육시키는 것만이 호전적인 성향을 억누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는 코델 헐 미 국무장관에게 “새로운 전쟁을 일으킬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독일이 패전국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각인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건도는 본인이 제안한 계획이 너무 무르다고 생각했다. “우선은 파괴가 먼저고, 국민들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그 다음에 생각할 것이다.” 모건도의 극단주의는 유대인 말살에 대한 공포에서 기인한다. 그는 독일계 유대인 이민자 가족의 후손이다. 또한, 1914~1915년 주튀르키예 미국 대사를 지내고, 아르메니아 대학살과 독일 지도자들의 학살 공모를 비난했던 동명의 아버지 헨리 모건도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별다른 특색 없이 정통적인 성향을 가진 미국 재무부의 수장 헨리 모건도는 미국에서 모두에게 환영받지는 못했다. 1944년 11월 미국 대선 당시 루스벨트와 함께 부통령 후보로 나섰던 해리 트루먼은 “모건도가 사리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조심스레 말하기도 했다. 미국 민주당의 중요 기부자였던 글래디스 스트라우스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유일한 유대인”을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며 비난했다.

하지만 모건도의 곁에는 십여 년 전부터 그를 보좌한 명석한 경제학자 해리 덱스터 화이트가 있었다. 화이트는 1944년 7월 브레턴우즈 회의를 공동 조직하고,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 반대되는 미래 국제통화 시스템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주장했다. 모건도 계획의 큰 줄기를 그린 것도 바로 화이트였다. 계획 경제에 대한 관심과 국제조직 안에서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이 협력하기를 바랐던 마음 때문에 냉전시대에 소련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어쨌든 모건도와 화이트는 퀘벡 회담에서 얻은 결실에 만족했다.

 

미 국무장관, “독일을 미국화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그러나 이들의 성공은 미국 정부의 균열을 드러냈다. 모건도의 생각에 반대하는 헨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과 코델 헐 국무장관은 처칠 총리와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명한 각서를 모욕처럼 받아들였다. 스팀슨 장관은 “복수를 위한 야만적인 유대인주의”이자 “문명에 대한 범죄”라며 분노했고, 코델 헐 장관은 “극단적인 기근 계획”이라며 비판했다. 독일의 미래에 대해 “수백 시간을 노력해온” 헐 장관의 눈에는 무능한 재무부 장관 하나가 자신이 애써 가꾼 화단을 짓밟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가 비판했던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조건들이 나치주의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미국 외교관들은 기억했다. 그러니 헐 장관의 입장에서 모건도는 잘못된 길을 자처하는 셈이었다. 헐 장관은 “독일을 평화롭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일을 미국화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유럽에 대한 독일의 경제적 지배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 중요하지만 세계화라는 큰 흐름 안에서 호전적인 성향을 없애는 것 역시 필요하다. 

1944년 8월 14일에 작성된 미 국무부 문서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독일의 자급자족 경제를 상호의존적인 세계 시장에 통합할 수 있는 경제로 대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헐 장관은 독일이 배상금을 지불할 수 있도록 분할 대신 연방주의를, 탈공업화 대신 산업 재배치 및 국제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퀘벡 회담이 끝난 직후, 헐 장관은 모건도 계획이 나치들의 필사적인 저항을 야기하고 유럽 전체를 빈곤에 빠지게 할 것은 물론이며 대량 학살을 초래할 수 있다고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강력히 경고했다. “독일 국민 가운데 단 60%만이 토지를 일구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나머지 40%, 약 2,800만 명은 죽게 된다.” 

 

모건도 계획은 폐기 … 마셜 플랜 등장 

이런 상황을 우려한 루스벨트는 계획 실행을 늦췄다. 그러나 9월 말 모건도 계획은 언론에 유출됐고, 선거 운동 중이던 공화당에서는 이를 문제 삼으며 비판했다. 모건도는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영국 외무부와 새로운 국무부 장관도 모건도 계획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였다. 나치 정권의 선전부 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도 이 계획을 비판했고, 아돌프 히틀러 역시 신년 메시지에서 이 계획을 언급했다. 1945년 2월 4~11일에 열린 얄타회담에서는 독일을 목축 국가로 만들자는 안건이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다. 그래도 모건도 장관은 자신의 주장 중 일부가 점령지 독일의 미국 군사 정권에 대한 지침에 반영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1945년 5월 10일 트루먼 대통령이 서명한 문서에서는 “독일인들은 그들이 초래한 것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총독들에게 “독일의 경제 회복을 위한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모건도 계획은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망 이후 폐기됐다. 국제기구에서 소련과 미국의 협력을 이루겠다는 해리 덱스터 화이트의 비전 역시 함께 사라졌다. 미국의 역사학자 게이브리얼 콜코는 독일을 파괴하겠다는 아이디어에는 “러시아의 과격주의를 없애고 러시아를 새로운 세계 자본주의 경제로 재통합”시키려는 목적이 담겼다고 평가했다.(4) 그러나 냉전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독일의 위협은 소련의 위협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미국의 안보에 가장 큰 위험은 서유럽 경제의 붕괴 가능성과 그로 인한 공산주의 세력의 부상이다”라고 말하며 우려했다. 그러므로 제대로 무장한 서유럽에 독일을 재통합하고 재산업화하며, 국제자유무역 진영을 구성해 소비에트 연방에 맞서야 한다. 이 야심찬 주장은 마셜 플랜이라 불린 또 다른 중대한 계획이 됐다. 

 

 

글·피에르 랭베르 Pierre Rim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김자연 
번역위원


(1) ‘Report on Quebec conference’, 1944.9.19., Morgenthau Diaries, vol. 772, 1944.9.15.-19., FDR Library’s digital collection, http://www.fdrlibrary.marist.edu. 
(2) 'Suggested Post-Surrender Program for Germany'는 다음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음.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4Quebec/d86  
(3) 인용문 출처: John L. Chase, ‘The Development of the Morgenthau Plan Through the Quebec Conference’ (<The Journal of Politics>, 시카고, vol. 16, n° 2, 1954년 5월), Warren F. Kimball, 『Swords or Ploughshares? The Morgenthau Plan for Defeated Nazi Germany. 1943-1946』(J. B. Lippincott Company, 필라델피아, 1976), Michael Beschloss, 『The Conquerors: Roosevelt, Truman and the Destruction of Hitler's Germany. 1941-1945』(Simon and Shuster, 뉴욕, 2003), Ted Morgan, 『FDR. A biography』(Simon and Schuster, 뉴욕, 1985), Cordell Hull, 『The Memoirs of Cordell Hull』(Macmillan Company, 뉴욕, vol. 2, 1948), John Dietrich, 『The Morgenthau Plan. Soviet Influence on American Postwar Policy』(Algora publishing, 뉴욕, 2013), Jean Edward Smith, 『FDR』(Random House, 뉴욕, 2007), Benn Steil, 『Le Plan Marschall 마셜 플랜』(Les Belles lettres, Paris, 2020).
(4) Gabriel Kolko, 『The Politics of War. The World and United States Foreign Policy. 1943-1945』, Pantheon Books, 뉴욕,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