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살 너머의 북한 예술가를 찾아서
2000년대, 예술 수집가들은 북한의 현대예술 시장이 개방될 것으로 전망했다. 아프리카, 아시아의 국가들이 만수대 창작사에 작품을 주문했다. 그러나, 유럽은 잠잠하다. 수백 명의 예술가들의 작업실인 이곳에, 지금까지 작품을 주문한 유럽 국가는 독일이 유일하다. 북한 예술가들의 작품은 서구인들의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평양 중심가에 있는 만수대 창작사 내, 최창호의 작업실에 있었다. 함께 앉아 있던 최창호가 갑자기 일어났다. 그리고는 스케치 노트를 가지러 벽장을 향해 돌진했다. 예상치 못했던 그의 행동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조선화’라고 불리는 북한 수묵화의 살아있는 거장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일정에 없던 그 만남은, 가이드의 이벤트였다. 나의 공식 가이드는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그날 아침 우리가 깜짝 놀랄 만남을 준비했던 것이다.
1960년생인 최창호는 동아시아 전역에서 명성과 칭송을 누리는 북한 산악지대의 압도적이고 장엄한 풍경에 대해 이야기했다. 최창호의 이야기에는 그가 태어난 북부지역의 거친 산지에 대한 깊은 애착이 묻어났다. 그는 그 지역의 거친 기후가 그곳에 적응해 살아가는 주민들의 강인함과 완고함 속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는 또한, 자신이 그 모든 것에 앞서 그리기를 좋아하는 대상은 그의 가족이 속해있는 노동자 계급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스케치 노트를 펼치고는, 자신의 진정한 열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만수대 창작사는 북한 예술창작의 중심지다. 1959년에 설립된 이곳에 천여 명의 예술가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여기에 3천여 명의 ‘예술노동자들’이 추가된다. 이들은 회화 위에 자수를 놓거나 조각, 모자이크, 기념비적 예술품 제작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예술적 테크닉을 구사하는 예술 기능인들이다.
북한에서 예술가로 산다는 것
북한의 수도, 평양 한복판에 자리잡은 만수대 창작사는 계속 확장돼왔다. 이곳은 노동당 총비서 김정은과 노동당의 직속 관할 하에 있다. 정부는 평양 지하철 장식에서부터 만수대 위에 서 있는 지도자의 동상 건립에 이르기까지, 주요 공공예술품을 소속 작가들에게 주문한다. 만수대 창작사에서 급여를 받는 소속 작가 최창호 역시, 그렇게 주문받은 작업들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일련의 스케치들은 주문받은 작업들과 무관한 것들이다.
몇 개월 전, 그는 전시회 준비를 위해 한 예술가 집단의 수장이 돼 중국의 북동쪽에 위치한 만주 지방에 전시회 준비를 위해 파견됐다. 그는 그 신성한 땅을 밟으며, 조국을 짓밟은 일제에 맞선 1930년대 ‘빨치산들의 투쟁’을 떠올렸다.(1) 그는 당시 항일투쟁을 벌이던 유격대원들의 삶을 상상하며, 게릴라 전투를 벌이던 그들의 삶과 동지애를 묘사하는 연작(작품 시리즈)을 시작했다. 그들의 치열한 투쟁과 시련, 그리고 시련 속에서 더욱 돈독해지던 동지애는 오늘날 북한 인민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공통의 기억이다.
그 주제와 기억은 최창호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로 다가왔고, 그는 몇 년에 걸쳐 그것을 형상화하는 작업에 헌신했다. 그는 밤새 스케치북을 검게 채워 갔다. 다른 작가들이 시내를 산책하는 동안에도, 그는 호텔에 남아 그림을 계속 그렸다. 나는 이날 최창호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 북한에서 예술가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통찰할 기회를 얻었다. 이 만남은 20년간의 연구를 통해 습득했고, 2018년 여름 현장 연구를 통해 마무리된 북한에서 예술작업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확인하게 해줬다. 우리는 당시 네덜란드의 사진작가 앨리스 윌리, 만수대 창작사와 평양 미술대학의 몇몇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했다.(2)
최창호의 예술 주제는 지극히 즉흥적이고 본인의 신심이 발휘된 것이지만, 공공예술이라는 이론에 의해 정의된 위계의 틀 안에 뿌리내린, 즉 태생적 조건 하에 갇힌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위계의 제일 꼭대기엔 수령의 초상화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김씨 일가의 자손들을 북한 혁명의 역사적 지도자이자, 인민의 사랑을 받는 건국의 아버지, 조국의 영원한 수호자로 만들어 주는 인물의 우상화 작업의 핵심 요소다.
현대성과는 동떨어진 북한 예술
이 초상화들은 역사적 회화들, 혁명적 과거 그리고 그것들과 밀접한 지도자의 전기들로 구성돼 있다. 역사적 장면에는 항일 게릴라전투 장면과 “반제국주의 조국해방전”(1950~1953년 일어난 한국전쟁을 지칭)의 장면뿐 아니라, “노동자의 낙원” 건설을 묘사하는 장면들도 담겨 있다. 후자는 당과 정부에 의해 설계된 국가적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환기시키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소위 ‘주제화’ 라 불리는 ‘주제 의식을 담은 회화들’은 권력이 예술에 부여하는 교육적 기능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었다. 여하튼, 이런 회화들은 순수한 역사적 교훈을 재구성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감정으로 채색된 기억들을 환기시키는 것에 그 목적을 둔다. 학교의 교육 프로그램, 신문, 대형 스크린에 나오는 드라마, 소설 혹은 공공장소를 장식하는 기념물과 모자이크에서까지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런 추모의 서사다. 이를 통해 감정에 물든 기억을 일깨우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이는 역사적 사건의 진정한 현재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기도 한데, 이는 적절한 시간적 여백과 “올바른” 이데올로기적 조명 하에서만 판독될 수 있다. 북한 권력이 정의하는 북한 예술의 이론에 따르면, ‘존재에 대한 적절한 사고’를 가진 예술가여야 이런 예술작품을 생산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엄격한 이데올로기적 훈련을 받은 후에야, 직업 예술가의 지위에 근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린 학생들의 유연한 정신에 예술가의 인민, 당, 지도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의 개념을 장착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당의 노선을 전파하기도 한다. 대중에게 현실에 대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해석’을 제공한다는 예술가의 의무를 수행하려면 이 노선을 완벽하게 습득해야 한다. 우리는 예술가 오은별에게 한 가지 주문을 했다. 북한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그림으로 표현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오은별은 국가에서 주관하는 사건들을 실시간으로 그림을 통해 논평하는 자신의 모습, 기록자로의 자신을 그려냈다. 그리고는 ‘근로 노동자 대중’들이 실제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그것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자신을 대상화하는 기묘한 심정에 대해 털어놓았다.
예술가의 재능은 사회적 역할을 위한 것
오은별의 그림이 보여주듯, 북한 예술은 ‘객관적인 현실’을 다룬다. 또한 민중의 감상과 감정을 예술을 통해 반영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다. 이른바 ‘자유로운 예술’과는 단호하게 거리를 둔다. <자유 예술>은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표현에 치우친 예술로 간주된다. 이런 점에서, 북한 예술은 현대성과는 거리가 멀다. 북한 정권이 탄생할 때, 새 정부는 그들의 멘토이자 영감의 원천이던 소비에트 연합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통을 온전히 제 것으로 취했다. 모든 사회주의 혁명의 정점에 해당하는 시도인, 가슴과 정신을 혁명하게 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예술과 문화는 이들에게 선전과 선동의 필수 도구다. 북한 정권은 이런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런 성격의 예술이 작가에게 개성을 발휘할 여지를 준다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정해진 목적에 도달하려면 예술작품은 시각적으로 탁월해야만 한다. 이는 뛰어난 예술가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바로 이것이 북한의 예술 교육이 두 가지 핵심 요소에 기반하는 이유다. 그 첫 번째는 기하학, 원근법, 연필 데생, 생물 데생, 색채, 구도 등 예술가라는 직업인의 기초를 엄격히 가르치는 고전적 훈련 체계다. 두 번째는 미학, 철학, 예술사(북한, 세계) 등 이른바 이론 교육이다.
예술가는 자신만의 개인적 표현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우선 확립된(동시에 허락된) 스타일과 테크닉들을 두루, 완벽하게 습득해야 한다는 것이 북한 예술 교육의 기본 바탕이다. 그들의 작업이 캔버스에 오일로 그리는 유화이든, 보다 전통적인 방식인 종이 위에 먹으로 그리는 묵화이든 말이다. 이런 식의 예술가 훈련은 언어 습득에 비유할 수 있다. 일단 하나의 언어를 완벽하게 습득한 후에야, 예술가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기는 주제화, 풍경화, 풍속화, 정물화 순
교육을 통해 예술의 사회적, 정치적 역할에 대해 숙지하고 사회가 자신에게 부여한 의무에 대해 인식한 예술가는, 관객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감동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아나선다. 이런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 예술가는 관객에게 익숙한 시각적 문법에 자신의 스타일을 맞춘다. 성공하려면 정해진 규범을 준수해야 한다. 절대 규범을 위반하고 다른 길을 가서는 안된다. 창의성은 이런 틀 안에서만 표현될 수 있다. 예술가의 창조성이 기여하는 바는,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관점을 관객에게 제시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특정 주제에 바쳐진 그림이든, 풍경화든, 정물화든, 궁극적인 예술의 목표는 인민의 존재에 흥을 돋우는 데 있다.
물론, 예술가들은 주어진 틀 안에서 작업의 주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만수대 창작사 소속 예술가들처럼, 특별한 주문을 받는다거나 집단적인 작품 생산에 참여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어떤 작가들에게는 그것이 농장에서 땅을 일구며 일하는 농부들이나, 거대한 공사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몇 달 동안 그리는 일이다. 또 다른 작가들에게는 자연의 정취에 압도돼 그 수려함을 묘사하거나, 정물을 세밀하게 재생해내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
어떤 예술가들은 특정한 기술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것에 주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예술가들은 역사의 중요성을 인민들에게 알리는 것에 주력하기도 한다. 각각의 예술가가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키고 표현하는 방법이 어떻든, 북한 예술가들은 자신의 모든 재능을, 그들에게 부여된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 수행에 바쳐져야 함을 인식하고 있다.
침략자 일제에 저항하는 빨치산 투쟁에 관심을 기울인 최창호의 결정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김일성의 지도자로서의 정당성과 절대적인 자치 이데올로기(주체사상)를 바탕으로 한 이런 에피소드는, 인민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노력하도록 고취시키는 선동도구로 종종 이용된다. 예술가는 이런 감수성을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활용하는데, 이는 정치적 기회주의로서가 아닌 개인적 선택에 의해 이뤄진다. 예술가가 빨치산 전사들에게서 느끼는 단순하고도 직접적인 동지애와 동일한 진실성은 그가 광부나 제철 노동자 등 현재의 노동자 계급 전체에 대해서 느끼는 바이기도 하다. 그의 깊고 선율을 띤 목소리,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 말투, 그의 차분함, 화려한 의복에 대한 경멸, 그의 개성을 만들어내는 이 모든 것들은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자신이 인정하듯, 섬세한 꽃으로 가득 채워진 꽃병을 그리는 것은 그의 스타일이 아니다. 이런 작품들이 북한 예술에서 엉뚱한 존재로 간주되는 것은 아니지만, 특이하게도 주제에 따른 위계질서가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또 다른 면에서도 북한 예술은 19세기 유럽의 아카데미 예술을 연상시킨다.
북한 예술계의 규율에 따르면, 주제화(특정 주제에 바쳐진 회화)가 가장 인기가 많고, 그다음이 풍경화, 풍속화, 정물화 (화조도 류의) 순으로 인기의 순위가 구분된다. 첫 번째 카테고리(즉, 주제화)는 그것이 지니는 교육적 목적과 이데올로기적 무게로 미술 이론에서 불균형한 위치를 차지하며, 막강한 위치를 점하지만, 풍경이나 자연을 그린 그림도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한다.
예술은 존재를 아름답게 꾸며주고 민중의 미적 교육을 담당하는, 보다 평범한 목적도 지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술적 판단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으면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작품의 사상적 측면과 동시에 미학적(사상예술성) 측면에 근거해 설정된다. 전원의 목가적 풍경을 담은 작품들은 애국심을 고양시키도록 돼 있고, 선명한 색깔로 표현된 정물화들은 땅에서 수확한 농산물의 풍요로움을 찬미하는데 바쳐진다. 한편, 풍속화, 풍경화, 정물화들은 역사 예술적 문화유산에서 그 소재를 취하기도 한다.
스케치북을 한 장씩 넘기며, 최창호는 죽는 날까지 그림을 그려도 될 만큼 그릴 재료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줬다. 크로키로 된 밑그림이 회화로 완성되기까지는 3~4년이 족히 걸린다. 그림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구성되고, 일관된 설득력을 지닌 작업이다. 그렇게 태초의 생각을 정제해 구현한다. 시각적인 매력을 위해, 예술가는 작품이 표현되는 시대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 또한 작품의 지리적 틀에도 익숙해져야 하며, 적절한 인물들을 모델로 찾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그가 수집한 인상들과 에피소드들은 그림의 현실적 측면에 기여한다. 또한 그의 상상력을 풍요롭게 하고, 머릿속에서 구상하던 작품의 윤곽을 보다 선명하게 만든다.
실수나 정정을 허용하지 않는 황금새장
연구에 연구를 거듭할수록, 그림의 구상은 점점 명확해지고, 마침내 종이에 물감을 칠할 정신적 준비가 갖춰지기에 이른다. 이젠 모든 것이 집중, 관심, 확신에 찬 동작의 문제다. 조선화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화와 달리, 조선화는 그 어떤 실수나 정정도 허용하지 않는다. 붓이 종이를 건드리는 순간, 붓은 물 흐르듯 그대로 움직여야만 하는 것이다.
북한의 전문 예술가들은 미클로스 하라츠티(Miklos Haraszti)가 사회주의 정권 하의 헝가리 예술가들에 대해 묘사한 것과 비슷한 황금 새장 안에 갇혀 진화해왔다.(3) 그들은 다른 인민들보다 훨씬 혜택을 받으며 안락한 특권층의 삶을 누린다. 김정은이 자신을 예술에 대한 궁극의 수호자로 설정하고, 그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예술가들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물질적 풍요의 원천이다. 자신의 작업실이 국가가 주문한 작업을 위한 것이라는 현실을 제외하면, 북한의 직업예술가들은 대체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며, 창의성을 개발할 수 있는 여가시간을 누린다. 물론, 규정이라는 ‘황금새장’ 안에서 말이다.
황금새장 안에 갇혀있을 뿐, 이들이 서구의 예술가들보다 예술에 덜 헌신적이거나 덜 열정적이지는 않다.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작가들의 기질과 성격이 자신들이 선택한 작품과 주제, 그것을 다루는 방식을 통해 투명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들의 작품은 현재의 국제적 예술 운동과 단절된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점이 그들의 재능과 그들의 예술이 지니는 중요성을 덜어내지는 않는다.
북한이 종종 국제사회에 대한 하나의 위협일 뿐인 존재로 간주되고, 주류 미디어들은 북한 지도자의 거짓된 태도에 초점을 맞추는 국제적 맥락 속에서, 우리는 그 어떤 구체적 논의도 없이 표적화된 제재의 체제에서 일반화된 제재 체제로(4) 건너뛰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런 일이 없으려면, 우선 대화가 절실해 보인다. 창살 너머의 북한 예술가들을 바라보며, 그들과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글·코엔 드 세스터 Koen de Ceuster
엔지니어, 교사, 작가. 최신작으로는 질 클레망이 서문을 쓴 『Des plantes et des hommes 식물과 인간』, éditions du Canoé, Paris, 2023이 있다.
번역·정수리
번역위원
(1) 한국은 1910~1945년 일본에 의해 식민통치를 당했다. 다양한 정파의 독립군들이 일제에 저항할 때, 북한에서는 김일성(1912~1994)과 만주에서 활약하던 그의 빨치산 부대가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주장한다. 북한 정부가 주장하는 공식 서사에는 김일성이 일제의 억압을 피해 1940년 말부터 소련에 있었고, 조선이 해방된 후 4주 만에 소련에서 배를 타고 귀환했다는 사실이 빠져있다.
(2) Koen De Ceuster, “Les cadres idéologiques et pratiques d’un terrain en Corée du Nord 북한 현장의 이념적, 실천적 틀” Valérie Gelézeau 와 Benjamin Joinau 의 다음 공저서에서 인용, 『Faire du terrain en Corée du Nord. Écrire autrement les sciences sociales 북한에서 현장 일구기, 사회과학 다르게 쓰기』, Atelier des cahiers, Paris, 2021년.
(3) Miklos Haraszti, 『L’Artiste d’État. De la censure en pays socialiste 예술가와 정부.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검열에 관해』, Fayard, Paris, 1983년.
(4) 유엔안전보장 이사회는 2016년 북한의 4번째 핵실험 이후 대북 제재를 광범위하게 확대했다. 한인사회 발전을 위한 노둣돌(뉴욕에 거주하는 한인의 최대 규모의 진보적 비영리 비정부 단체로 다른 도시에도 있음), <The Impact of Sanctions on North Korea>,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 사무소, 2021년 3월, www.ochcr.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