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에코노미쿠스에게도 과연 문명이 있을까?
몇 년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의 무대는 프랑스 남서부 도르도뉴 도내의 ‘페리고르’라는 지역이다. 2020년, 이 지역 주민들은 우편물을 한 통씩 받았다. 우편물의 내용은 “2021년부로 폐기물 수거를 종료한다”라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식에 황당해하면서도 한편으로 우려하던 사람들은 일단 어찌해야 할지 확실한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리고, 문제의 ‘그것’이 등장했다. ‘그것’들은 공동묘지 옆에 쭉 늘어서 있었다. 이른 아침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러 간 사람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쓰레기 수거함이었다. 4~5개의 대형 수거함들이 회색의 몸통에 노란색, 갈색, 녹색 뚜껑으로 구분돼 무덤 옆에 일렬로 서 있었다. 죽은 자들의 집 옆에 커다란 쓰레기통으로 경계가 세워진 격이었다.
수거함 바로 옆에는 “2021년부터 가정 내 폐기물은 주민 자율 수거함으로 배출해야 합니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주민들이 그 ‘자율성’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몸소 일러주는 우편물도 배달됐다. 발신자는 ‘도르도뉴 도내 폐기물 통합 노동조합’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등장한 이 조직은 운영 면에서도 모호한 근본 없는 조직이었는데,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금까지 폐기물 수거와 처리를 담당하던 공공서비스를 대체하는 곳이라는 점이었다. 환경미화원이 도로를 돌며 폐기물을 처리하던 비용이 그전까지는 세금으로 충당됐으나, 이제는 ‘폐기물 처리와 비용 관리’를 위한 ‘환경개선 촉진비’로 대체된다. 이로써 주민들의 부담은 기존에 비해 무려 4배가 늘었다.
일단 실제로 배출하는 쓰레기의 부피에 따라 이용료를 계산한다는 것이 첫 번째 부담이고, 버리는 양이 얼마든 가정 당 허용된 배출 봉투 개수가 제한된다는 게 두 번째 부담이다. 따라서 배급된 봉투에 유기성 폐기물을 꽉꽉 채워 배출해야 한다. 그런데 이 지역의 여름 기온은 34℃까지 올라가므로 주민들은 악취나는 쓰레기를 집안에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 그나마 봉투가 가득 차면, 이것을 ‘주민 자율 수거함’에 직접 가져와서 버려야 한다. 그런데도 환경미화원이 직접 쓰레기를 수거하던 때보다 이용료는 3배 더 비싸다.
이렇게 주민들이 감수해야 하는 모든 불편과 부담은, ‘환경개선 촉진’을 위해서라고 한다. 심지어 노인이나 몸이 불편한 사람도 무거운 쓰레기봉투를 들고 수 킬로미터를 걸어가서 버려야 한다. 쓰레기 배출이 ‘자율’적으로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 vs. 호모 에코노미쿠스
이번에는, 수천 년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이야기를 해보겠다. 도르도뉴에 ‘발레 드 롬(Vallée de l’homme, 인류의 계곡)’이란 곳이 있다. 여기에는 고고학을 연구한 브뢰유 신부가 “선사시대의 시스티나 성당”이라 일컫던 ‘라스코 동굴’이 베제르 강을 따라 이어진다. 3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발원한 곳은 아프리카였지만, 베제르 유역에는 호모 사피엔스가 창조한 작품들이 많기도 하고, 완성도도 남다르다. 14개로 분류된 유적지에서 출토된 600만 개의 유물은 모두 레제지 선사유물박물관에 총망라돼 있다. 제작 연대는 후기 구석기로, 호모 사피엔스의 역량이 정점에 달한 시기다.
당시 사회 집단은 점점 복잡한 양상을 띠었고, 조르주 바타유의 지적처럼 예술 작품을 만들어낼 정도로 집단 전체의 상상력이 발달해 있었다.(1)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고인류와 차별화되는 부분은 바로 존재에 대한 상징적 사고와 표현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특히 사피엔스 종은 죽음에 대한 상징화가 가능했다. 죽음을 상징적으로 인식하고 표현하는 것은 네안데르탈인 때부터도 가능했지만, 이를 그 정점으로 끌어올린 존재는, 다름 아닌 호모 사피엔스였다.
이 인류의 계곡에서 호모 사피엔스는 태초의 인류가 됐는데, 오늘날의 호모 에코노미쿠스 (경제적 인간, 즉 ‘합리적인 소비를 추구하는 사람’을 뜻한다. 주류경제학에서 정의하는 인간의 기본 전제다. - 역주)는 바로 그곳에서 죽은 자와 쓰레기를 한 곳에 뒤섞고 있다.
2021년의 파리는 또 어떤가? 명망 있는 파리 5대학 의대의 프레데리크 다르델 총장은 시신기증센터 직원 두 명과 함께 ‘사체 훼손’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다른 것도 아닌, 사람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방치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호모 사피엔스는 종의 영속성을 보장하고자 장례라는 상징적 의식까지 포기하며 ‘자율적으로’ 연구실에 시신을 기증했다. 그런데, 그런 시신들이 더러운 바닥 위에 층층이 쌓였고, 그 사지가 잘려나갔다. 그리고 장기에는 담배꽁초가 처박힌 채 썩어갔다. 시체안치소에는 벌레와 쥐가 들끓었고, 실내는 온도 조절 장치가 고장 난 채 냉골로 방치됐다. 시신은 대규모로 소각되거나 자동차 트렁크 안에 쑤셔 박히기 일쑤였고, 일부는 자동차 충돌 테스트용으로 팔려나갔다. ‘기증된 시신’에 대한 쓰레기 취급은 상징적 의미에서 또 한 번의 살인이었다.
범인은 누구일까? 바로 ‘호모 에코노미쿠스’라 불리는 신인류다. 범죄에 사용한 도구는 ‘비용 관리’라는 명목이다. 사실 해당 센터는 시신관리 부실 문제로 2012~2019년 꾸준히 경고를 받았다. 촉탁 의사의 내부 보고서도 이 문제를 지적했고, 회계 컨설팅업체 KPMG의 감사보고서는 물론, 고등교육부의 내부시찰 보고서도 사체관리 행태를 문제 삼았다. 보다 못한 윤리위원회 대표는 사직서를 내고 떠났다. 시신기증센터장이 보낸 숱한 경고 메일에는 “미개하고 야만적인 상황이 펼쳐질 날이 멀지 않았다”라는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했을까? 문제가 불거진 후에도 다르델 총장은 여전히 (자문 업무 수행 차) 프레데리크 비달 교육부 장관 비서실을 드나들었다. 그나마 사건이 터진 여파로 그는 국립 보건의학 연구소장 자문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합리적 경영을 내세우는 오늘날, 문명사회에선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서 자행되며 나날이 기승을 부린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계산기를 들고 손익을 따지기에 급급하며, 이 수치화된 세계에서 상징적인 존재는 설 자리가 없다. 대학도 연구실도 자본의 논리가 우선이다. 연구목적으로 기증받은 시신이 25년간 방치되지 않았나? 호모 에코노미쿠스에게, 기증이란 더 이상 긍정적인 행위가 아니다. 기증받은 시신도 보관하려면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비용이란 ‘관리’의 대상이다. 쓰레기든 죽은 자든 관리가 필요하다.
지탄받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1세’
엘리제의 그 누군가가 감히 ‘비문명화’란 단어를 입에 올렸던가? 일단 최소한 한 건의 살인 사건은 있었다. 랭스의 한 정신병자가 정신적인 보상 기전 상실(스트레스로 인체의 장기가 올바르게 작동하지 못하여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상태-역주)로 발작을 일으키며 간병인 세 명을 칼로 찔렀고, 피해자 중 한 명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차원적인 이 사건에서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살인자가 분명히 존재하는 사건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게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칼을 든 사람이 범인일 테니까.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논리로는, 답은 가까운 곳에서 찾아야 한다. 수사가 오래되면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사회면의 ‘흔한’ 살인 사건들은 이상하리만치 서로 닮아있다. 범인은 늘 “중증 정신 질환을 앓은 전력”이 있고, 언론에서도 이를 귀신같이 알아채며 지적한다. 그런데 얼마 후 다른 문제 하나가 제기된다. 이 사회가 ‘비문명화’되고 있다며 사회를 다시 ‘문명화하려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만일 수사가 지속됐더라면 우리는 어쩌면 이 사회를 다시 ‘문명화’하겠다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점을 찾았을 것이다. 모두들 하나같이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정책을 실행했거나 실행하고 있으며, 혹은 이를 지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추진하는 정책은 일단 부자들의 세금을 줄여주고자 고심하며, 정부의 공공서비스를 차근차근 붕괴시켜 나간다. 병원을 해체하고 정신과와 심리치료기관을 없애버린다. 공공서비스가 부담해야 할 몫은 줄이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간도 축소한다. 자신과 타인에게 위험천만한 존재들이 기본적인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떠도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호모 에코노미쿠스에게 중요한 것은 ‘일부’의 계산 논리뿐, 그 외의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
가령 구성원에 대한 돌봄과 치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사회에서 정신 질환의 역학 연구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지 따위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관심사가 아니다. 사회적인 고통이 잠재적으로 개인의 정신적 고통으로 이어지면 이 개인은 결국 감당하기 힘든 시련을 겪게 되어 방어기제를 상실한 채 살인에 이르는 발작을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관심사는 아니다. 따라서 정신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늘고 자살 기도자도 많아진다. 일찍이 저명한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분석한 대로 사회 구성원을 자살로 몰고 가는 특정 사회의 법칙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결국 돌봄과 치료의 사회 구조가 무너짐으로써 자연 상태에 방치된, 혹은 방치될 사람들만 억울할 뿐이다.
이 세계를 차근차근 무너뜨리면서도 다시 문명화하겠다고 나선 보건부 장관은 보여주기식 조치들을 내놓았다. 병원 입구에 도어락과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겠다는 것이다. 재무장관 역시 부자들의 세금을 계속 낮춰주겠다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사회의 비문명화를 개탄하며 지탄받은 저들의 수장을, 우리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1세’라 칭하기로 했다. 그는 경제적 인간으로서 왕좌에 오르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힌다. 망자의 집은 쓰레기 처리장으로 전락하고 의대 시체안치소는 대책 없이 방치되며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제도적 관리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과연 누가 이 사회를 비문명화하는 것일까? 오늘날의 문명사회를 문명화 이전의 원시 사회로 되돌리는 주범은 누구인가? 사명감을 안고 떠들썩하게 나대면서 이 사회의 비문명화에 힘쓰는 지독한 투사가 하나 있긴 하다. 그래서 자신이 뭘 잘못하고 있는 줄도 모르면서 이 사회를 때려 부수고 망쳐놓는다. 이 사회를 휘젓는 자본의 폭력 위에서 통치 기반을 다진 그는 사회 도처에서 문명화 수준을 끌어내리고, 비문명화의 과정이 극에 달하도록 부추긴다.
그런데 이런 비문명화 작업이 정신 나간 극우 쓰레기의 엉뚱한 공작이 아니라면, 비문명화란 인간 집단의 본질적 특성인 내향 회전성 폭력, 즉 현상 유지를 위해 내적으로 파고드는 폭력성을 견제할 제도의 파괴로서 이해돼야 한다. 사회의 재문명화에 힘쓰겠다면서 정작 이 사회를 비문명화하는 주범들의 행위는, 바로 이 폭력성 견제 제도의 파괴다. 그리고 이 비문명화 과정의 선봉에 선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호모 에코노미쿠스 1세다.
발굴된 유적을 보면 호모 사피엔스가 장애인을 돌봤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이 죽는 순간까지도 함께 보듬어준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한 무덤에서는 성인과 장애아가 합장돼 있었는데, 이는 저세상에 가서도 아이를 곁에서 돌봐주겠다는 상징적 의지의 발현이 아니었을까? 문명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여기에서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자리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저들에게 ‘타인’이나 ‘기부’는 관심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의 관심사는 ‘나’뿐이며, 이들은 남에게 내주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관심사는 내 손 안에 들어오는 것뿐이다. 이 사회의 문명화 수준을 퇴보시키는 장본인들의 비문명화 담론은 그런 인식이 겉으로 끔찍이 표출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손에 칼을 든 누군가에게 찔려 간병인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이는 결국 호모 사피엔스가 호모 에코노미쿠스에게 살해당한 것이기도 하다. 이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구체적인 얼굴상은 에코노미쿠스 1세에게서 확인된다. 그가 내리는 결정 하나하나와 그에 따른 구체적인 영향 하나하나가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세계를 대변한다. 저들의 세상에서 돌봄과 치료는 존재하지 않으며, 망자의 안식처인 무덤은 쓰레기장으로 전락하고, 죽은 자의 몸은 더럽혀지고 훼손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에서 죽은 이들에 대한 존중에 이르기까지,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문명사회의 오랜 근간이었던 상징적 체계들을 훼손하고 파기했다. 즉, 인간이 문명화의 길로 접어들게 한 구조적 체계를, 인류가 인류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문명 그 자체를 무너뜨렸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현세의 현대적 인간임을 자처한다.
누가 감히 ‘비문명화’란 단어를 입에 올렸나?
글·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que Lordon
경제학자 겸 철학자.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의 연구책임자, 유럽사회학연구소(CSE)의 연구원 역임. 주요 저서로는 『La malfaçon. Monnaie européenne et souveraineté démocratique 결함. 유럽 통화와 민주적 주권』(2014), 『D’un retournement l’autre 또 다른 전환을 향해』(2011), 『Capitalisme, désir et servitude. Marx et Spinoza 자본주의, 욕망과 종속. 마르크스와 스피노자』(2010) 등이 있다.
상드라 뤼크베르 Sandra Lucbert
작가. 디지털 자본주의와 인간소외를 주제로 한 글을 쓰고 있다. 주요 저서로 『La Toile 거미줄』 등이 있다.
번역·배영란
번역위원
(1) 『Lascaux ou la Naissance de l’art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L’Atelier contemporain, Paris,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