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20년, 무엇이 달라졌나

‘서태지 데뷔 20년’ 산업적 의미

2012-04-14     서정민갑

서태지가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지 벌써 20년이 지났다. 지난 3월 중순,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매체는 서태지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뮤지션이었는지 경외하듯 추억하는 보도를 쏟아냈다. 서태지는 한국에서 개체의 뮤지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성취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반은 1집 180만 장, 2집 220만 장, 3집 160만 장, 4집 240만 장이 팔렸다. 총 800만 장이라는 엄청난 판매고를 올린 것이다. 또한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은 가요 순위 프로그램과 연말 연예 시상식을 항상 독식했다. 그들의 음악만이 아니라 패션도 금세 유행했다. 그리고 그들의 음악적 메시지는 시대를 향한 발언으로서 가치를 획득했다. 그들은 단순한 뮤지션이 아니라 '시대의 아이콘'이었고 '시대의 리더'였다. 1995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한민국 학계와 언론계가 뽑은 '광복 50년 한국을 바꾼 100인'에 가수로서는 최초로 선정되고,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의 3집 수록곡 <발해를 꿈꾸며>가 고등학교 7차 교육과정의 '음악과 생활' 교과서에 수록된 것은 대표적인 증거다.

산업으로서의 서태지

그 후 20년, 한국 대중음악은 다시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 변화 가운데 어떤 것이 서태지 때문이고 어떤 것이 서태지와 무관한지 엄격히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의 대중음악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정리하고, 그 가운데 서태지의 발자취가 어떻게 새겨 있는지 꼼꼼히 발굴해보자.

서태지 혹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이후, 큰 변화는 한국 대중음악 시장이 10대 중심으로 재편됐다는 것이다. 1970∼80년대 한국 대중음악 시장의 소비층은 특정 세대에 국한되지 않았다. 10대부터 40대까지의 연령층이 균등하게 음악시장 소비자로 존재하며, 테이프(Tape)와 LP를 구매했다. 그들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새로운 음악을 접했고, 도시 곳곳에 자리잡은 음반가게에서 일상적으로 음반을 구입했다. 이 과정에서 라디오 DJ와 친구나 형 같은 지인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당시 인기 가수들은 특정 세대에 한정되지 않았다. 1980년대 국내에서 최고의 대중음악 스타였던 조용필은 10대의 우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청장년층에게도 폭넓게 사랑받았다. 다른 뮤지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TV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기 가수들의 음악은 세대를 아우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심수봉·주현미 같은 트로트 가수의 노래도 10대에게까지 부담 없이 수용됐다. 합법적으로 출반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2집이 50만 장이나 팔린 것도 단순히 대학생들의 수요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

1990년 대중문화의 경계선

그러나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면서 한국 대중음악은 10대를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됐다. 1992년의 10대들은 1973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로서 경제 개발의 성과 위에서 자라났다. 이들은 이전 세대와 달리 절대적 빈곤에서 해방된 세대로서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컬러텔레비전과 전자오락 같은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래서 대중문화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즐기며 소비하는 데 익숙했고, 그만한 경제력을 지녔다.

1990년대 초반의 한국 대중음악은 주류 음악과 비주류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라디오를 매개로 섞이고 있었음에도 1980년대 음악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91년 음악 순위 프로그램 <가요톱10>에서 1위를 한 뮤지션이 태진아·김지애·김완선·이상우·신승훈·노사연·심신·이범학·김정수인 사실은, 당시 한국 대중음악이 1980년대 어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물론 1980년대에도 뉴웨이브나 일렉트로니카 스타일의 음악이 등장했지만, 이들의 음악에는 언제나 한국 음악 특유의 '뽕끼'가 내재했다. 1970년대의 통기타 세대가 그러했듯, 1990년대에 맞게 새로운 감성과 세대를 대변할 수 있는 음악과 문화적 상징이 구축돼야 할 시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랩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며 단숨에 10대와 20대의 우상으로 등극했다. 이들이 선보인 랩은 기존 한국 대중음악의 어법과는 완전히 달랐다. 열창하는 감정 과잉의 음악이 대세던 현실에서 랩은 감정을 드러내는 어법 자체가 달랐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랩은 한국적으로 재현된 것이지만 열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거의 음악과 명확하게 다른 정서를 구현했다. 그들의 음악은 한국적인 면도 있었지만 서구적이고 도시적인 편에 가까웠다. 그들은 세계적 트렌드인 랩을 동시대 음악으로 직수입해서 존재하지 않던 장르를 등장시키고 대중화했다. 랩과 힙합은 대세가 되었고, 한국 대중음악은 세계적 흐름과 좀더 밀착하기 시작했다. 결국 '서태지와 아이들'은 1980년대의 음악과 1990년대의 음악을 단절시켰다.

서태지와 케이팝

서태지가 한 역할은 새로운 장르를 소개하고 이식한 것만이 아니었다. 당시 젊은 세대들에게 서태지가 내놓은 음악은 새로운 음악으로만 소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태지의 음악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를 구분하는 문화적 상징이었다. 서태지는 랩을 이해하고 반응하며 따라할 수 있는 세대와, 도무지 랩에 적응할 수 없는 세대로 대중음악 세대를 확연히 갈라버렸다. 그리고 서태지는 전자의 절대적 지지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이들에게만 기반한 음악으로도 충분한 인기와 상업적 이익을 거둘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서태지는 한국 대중음악을 세대적으로도 갈라버린 것이다. 그렇게 서태지는 당시 '신세대' 혹은 'X세대'의 상징이 되었다.

그 뒤 한국 대중음악에서 10대의 비중은 갈수록 커졌다. 1993년 <가요톱10> 1위 수상자들이 현진영·015B·철이와 미애·김원준·노이즈·김준선·서태지와아이들처럼 대부분 10~20대 취향의 뮤지션이었고, 성인 취향의 음악인은 이무송과 김수희 정도였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전격 해체한 뒤에는 그들을 통해 확인된 10대 시장을 겨냥한 아이돌 상품이 속속 출시됐다. H.O.T.와 젝스키스, S.E.S.와 핑클 등 1세대 아이돌은 대중음악 시장의 주도권을 완전히 10대에게 넘겨주었다. 장르적으로는 힙합을 가미한 댄스음악이 주류가 되었다.

반면 30대 이상 성인들은 한국 대중음악 시장에서 철저히 밀려났다. 그들에게는 1980년대 인기 가수들의 옛 노래나 김광석·동물원·안치환 같은 포크 기반의 뮤지션, 세미 트로트 스타일의 음악만이 반복적으로 향유됐다. 서울 대학로와 신촌의 라이브 클럽도 하나둘 문을 닫았고, 대신 경기도 미사리의 라이브 카페가 한동안 붐을 이뤘다. 아이돌 중심의 천편일률적인 대중음악 시장에 대한 반발과 음악적 대안을 함의로 등장한 인디음악 역시 주류 대중음악에서 표현하지 못하는 장르적 다양성과 작가적 자의식을 일궈가며 성장했지만, 홍대 앞을 중심으로 일부 젊은 세대들에게만 향유됐을 뿐 청장년층 성인들에게는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한번 단절된 감성은 다시 이어지기 힘들었고,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의 경제위기는 성인들의 대중음악 소비를 극도로 위축시켰다. 지난해 문화방송 <나는 가수다>가 방송되기 전까지 30대 이상 성인들은 대중음악 시장에서 거의 이방인이었다. 이 프로그램이 성인 시청자에게 폭발적 호응을 얻은 것은 거의 20년 만에 그들이 알고 그들의 감성과 기호에 맞는 음악을 다시 TV를 통해 세련되게 제공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속속 등장한 아이돌은 몇 차례 변화를 거쳐 동시대의 대중음악 트렌드를 빠르게 흡수하고, 동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세계화 전략을 수행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케이팝(K-Pop)으로 급부상했다. 이 과정에서 JYP·SM·YG 같은 연예기획사들은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기획력과 마케팅 능력을 갖추며 한국 대중음악 시장의 절대적 지배자가 되었다. 서태지가 자신의 노력과 감각만으로 선풍적 인기를 불러일으켰다면 서태지 이후의 대중음악 시장은 충분한 자본을 바탕으로 철저히 기획된 준비와 마케팅으로 진행되는 식으로 달라졌다. 더 전문화되고 고도로 상업화되는 발전을 이룩한 것이다. 한국의 아이돌 음악은 세계적 유행을 어설프게 흉내내는 수준에서 벗어나 해외에서도 각광받을 만큼 완성도를 갖춰갔고, 이 과정을 통해 대중음악의 수입국에서 세계적 협력을 통한 수출국으로 탈바꿈했다. 한국의 아이돌 음악은 10대들만의 음악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 문화상품으로 새롭게 가치가 부여됐다. 음악의 소비 지역도 국내를 넘어 동아시아와 유럽, 중남미 지역으로 확대됐다. 그럼에도 10대와 20대를 중심으로 향유되는 댄스음악 위주라는 사실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한국 대중음악(산업)의 미래는?

대중음악이 전달되는 매개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음악을 향유하는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우리는 테이프나 LP, CD로는 음악을 거의 듣지 않게 되었다. 그 많던 음반가게도 거의 사라졌다. 1998년 3530억 원 규모던 음반시장은 2009년에는 802억 원 수준으로 줄었다. 라디오 역시 과거의 힘을 잃은 지 오래다. MP3가 등장하며 음원으로 음악을 듣는 것이 일상화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이 활동하던 시기에도 막강했던 TV의 권력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다른 매개체가 활성화되고 인터넷에 연계된 스마트폰 등의 기술적 발전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음악을 향유할 수 있게 만들었지만, 최근 1∼2년 동안 한국에서 가장 인기를 끈 음악은 TV의 각종 음악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된 음악이었다. 홍대 앞을 중심으로 라이브 클럽들이 생겨나고, 거의 모든 장르의 음악이 홍대 앞 카페와 라이브 클럽, 인터넷, 페스티벌 등을 통해 일상적으로 유통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대중음악 시장의 질서를 좌우하는 것은 서울 여의도에 있는 TV 방송사의 힘이다. 현재 아이돌의 인기를 유지해주는 원동력도 바로 TV와 연예기획사가 공조해서 만들어내는 각종 연예·오락 프로그램이다. 물론 한국 아이돌의 음악이 해외로 알려지는 데 인터넷의 영향이 매우 컸지만, 인터넷이 TV의 영향력을 넘어선다고 말하기는 아직 어렵다. 심지어 이제는 대규모 연예기획사들이 직접 TV와 손잡고 신인 발굴 오디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제 한국 대중음악 시장의 규모가 2009년 2조7407억5300만 원에 육박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대중음악인들의 평균수입은 여전히 낮다. 연예기획사와 이른바 '연습생'의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계약 관계 역시 크게 개선됐다고 보기 어렵다. '서태지와 아이들' 4집에 수록된 <시대유감>이 공연윤리심의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게 된 이후 사전검열제도는 사라졌지만 '청소년 유해매체 판정'이라는 방식으로 검열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지난해 '담배'와 '술'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노래에 대해 기계적으로 적용됐던 청소년 유해매체 판정은 사회적 논란 속에 수정됐지만, 대중음악에 대한 권력과 기성세대의 일천한 인식은 여전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던 대중음악 산업 지원 정책도 김대중 정부부터 가시화됐지만 여전히 체계적·장기적이지 못하고 일부에 국한된 실정이다. '빠순이'로 통칭되던 팬덤은 여전히 '사생팬'이라는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god, JYJ 팬덤의 적극적인 개입이라는 진일보한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대중음악 시장에서 20~30대 여성의 영향력이 커진 것도 중요한 변화다.

지난 20년동안 달라진 것은 대통령의 이름만이 아니다. 장르 변화와 기술 발전, 매체 변화는 유행과 맞물리며 새로운 취향, 장르, 세대, 지역, 시장을 창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20년 뒤 한국 대중음악의 키워드는 과연 무엇이 될까? 분명한 것은 서태지조차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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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대중음악웹진 <가슴> 편집인, 대중음악웹진 <보다> 기획위원 지냄. ‘<Red Siren’ ‘권해효와 몽당연필’ 콘서트 등 공연 기획 및 연출. 네이버, 다음, <보다>, <백비트>, <재즈피플>, <고래가 그랬어> 등에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