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체인저로 등장한 BRICS 외교

2023-08-31     피에르 하잔 l 제네바의 인도적 대화를 위한 센터 고문

신흥 경제 5개국 협의체인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가 6개 신규 회원국 가입을 승인했다. 이로써 사우디아라비아, 아르헨티나, 이집트, 아랍에미리트, 에티오피아, 이란 등 총 6개국이 추가로 BRICS의 회원국이 됐다. 다양성이 커진 만큼 국제 질서의 공동비전을 제시하는 데 어려움도 있겠지만, BRICS는 지도를 벗어난 차원의 지정학을 보여준다.

 

새로운 게임의 법칙이 등장했다. 그것은 헤게모니를 잃은 서구와 연대하기에는 사이가 너무 먼 개발도상국(Global South)들이 서로 치열하게 협상하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한 범세계적인 문제들이 산적한 가운데,  두 당사국들이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며 위험한, 일시적인 동맹관계를 맺는다.(1)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포로 교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가 힘을 합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외교관계가 중국의 중재로 정상화되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2) 

 

어제의 적과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시대

중재의 세계가 변하고 있다. 세계는 기구들 간 협정(지역 간 동맹과 다양한 조약)에 들어섰다. 때로는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기구들까지도 협정을 맺는다. 인도의 싱크탱크인 옵서버 리서치 재단(Observer Research Foundation)의 사미르 사란 회장은 이런 협정을 ‘유한 책임 파트너쉽’이라고 표현했다.(3) 이런 소다자주의(小多者主義, Minilateralism,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한정된 특정 지역에서의 다자간 소통을 우선적으로 이뤄야 한다는 이론-역주)는 단기간에 손을 뗄 수 있는 가변적이고 조잡한 다자주의(多者主義, Multilateralism, 지역적·공간적 한계를 넘어선 포괄적 상호주의)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전에도 세계는 국가를 포함한 각자의 이득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국제 정세가 상대적으로 안정되면 동맹국에 더 견고한 기반을 마련해줬다.

이제는 어제의 적과 동맹을 맺을 수 있다. 상대가 ‘기회’라고 판단하는 기간만큼은 순수한 합의에 의한 협정이 존속된다. 2022년 7월 22일, 폭력적인 분쟁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터키와 UN의 중재 하에 곡물 수출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양국은 조약을 연장했지만, 러시아는 1년 후 갱신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우크라이나 곡물 유입에 긴장하는 주변국 농민들> 46p. 기사 참조). 이해득실을 저울질하던 러시아는 지난 7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담에서 곡물의 대체 공급(무상 곡물 공급)안을 발표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우방국 국민들에 대한 러시아의 잠재적인 영향력을 전략적으로 고려한 끝에 정책에 반영한 것이다.

또 다른 예로, 2022년 10월 레바논과 이스라엘은 미국의 중재로 해상 경계 확정안에 합의했다. 레바논은 이스라엘을 절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전쟁상태인 두 나라가 합의를 맺은 것이다. 대표적인 레바논의 정치군사 조직들 중 하나인 헤즈볼라는 항상 이스라엘을 파괴하겠다는 의지를 밝혀왔다. 반대로 미국과 이스라엘은 헤즈볼라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했지만, 레바논은 이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있다.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나자 각국은 다른 이데올로기에 대한 작은 융통성을 보여줬다.
시리아 내전에서도 실용주의가 등장했다. 러시아는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자 이스라엘, 미국, 터키와 각각 비공식적인 협정을 체결했다. 분쟁과 연루된 외부 강대국들 사이의 이런 협정은 전례 없는 일이다. 협정으로 이스라엘군은 러시아의 방공 시스템을 신경 쓰지 않고 시리아군과 헤즈볼라를 덮칠 수 있게 됐다. 이런 특권의 대가로, 이스라엘은 미국의 압력에도 러시아 제재안에 난색을 표명하고,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하지 않았다. 이런 교환의 정치경제로 이익을 보는 쪽이 있으면, 손해를 보는 쪽도 있는 법이다.

2020년 9월, 당시 미 대통령이었던 도널드 트럼프는 이스라엘과 몇몇 아랍 국가들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고자 ‘아브라함 협정’을 체결했다. 1991년 4월 29일 유엔 안보리에서 서부 사하라의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 결의안 690’이 채택됐음에도, 아브라함 협정의 대가로 모로코는 미국으로부터 서부 사하라 지역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았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이해득실에 의해 또 다시 그냥 넘어갔다. 이런 협정들은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서구식 헤게모니의 종식은 국제기구와 지난 30여 년간 서구가 세워놓은 규범들을 약화시켰다. 유럽과 미국이 항상 이 규범을 지키지는 않았을지라도 말이다.

 

샤덴프로이데, 비서구권 국가들의 속내 

푸틴이 전쟁 범죄혐의로 기소됐음에도, 국제형사재판소 지위를 최초로 공인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여전히 러시아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를 입증하듯 48명의 아프리카 국가 대표들이 지난 7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담에 참여했다. 우크라이나 공격이 시작된 지 꼭 1년 후인 2023년 2월,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러시아, 중국과 함께 군사훈련을 하기로 결정하며 서구를 조롱했다. 낙인찍고 제재하는 정치는 국제관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공고히 해줬으나, 이제 잘 통하지 않는다. 일부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에 대한 좋은 예로, 지난 5월 18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아랍 연맹에 복귀했다. 그는 이제 아랍세계에서 환영받는 인물이 됐다. 자국민을 유혈진압하고, 화학무기를 사용하고, 수십만 명의 국민을 죽이고, 나라를 황폐화시킨 장본인이 말이다. 최고 권력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총리이자 왕세자가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을 맞이했다. 

미 대통령 후보시절 바이든은, 정적인 자말 카슈끄지를 청부살해한 무함마드 빈 살만을 ‘파리아(Pariah, 버림받은 자, 불가촉천민)’라고 표현했었다.(4) 2022년 7월 바이든 미 대통령은 자존심을 꺾고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에게 석유 생산량을 늘려달라고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미국 행정부는 이란 고립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이슬람 국가들과 비공식인 핵무기 조약을 모색했다. 

글로벌 노스(Global North, 주로 북반구에 위치한 선진국을 통칭하는 용어) 이외에는 아무도 러시아를 제재하지 않고 있다.(5)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이유는 예전에 국가의 해방 운동을 도와준 구소련에 대한 충성심, 곡물가격 상승, 그리고 무엇보다 멀리서 벌어지는 전쟁의 무고한 희생자에 대한 감정 때문이다. 곡물가격 상승으로 가장 고통받는 가난한 국민들은 이 고통이 서구 정책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개발도상국(Global South) 중 일부 강국은 실용주의적인 이유를 더했다. 그들은 러시아 석유를 저렴한 가격으로 얻고, 무기 공급처를 다양화하고, 지정학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러시아를 제재하지 않는다. 

비서구권 국가들에는 좀 더 근본적인 무언가, 상징적이면서도 동시에 정치적인 무언가가 작용한다. 그것은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에서 느끼는 기쁨-역주)다. 국제사회의 도움을 요청하는 처지가 된 서구를 향해 그들은 이런 심리를 느낀다. 역할이 뒤집힌 것이다. 통상적으로 징계를 내리던 자가 우월함과 거만함을 잃었다. 부유하고 강하던 자가 이제는 국제적인 연대를 간청하고 있다. 그들은 몇 세기 전부터 규범을 정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최종 결정하고, 이를 어기는 자를 선택적으로 제재해왔다. 

서구는 현재 대가를 치르고 있다. 2003년 이라크를 불법으로 침공하고, 1999년 코소보와 2011년 리비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이후에도 서구는 2021년 아프가니스탄을 붕괴시키고,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백신 보호무역 정책을 펼쳤으나 이제는 장기간 이중잣대 정책을 지속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최근 몇 년 전 트럼프 미 행정부는 다자주의를 멸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결국, 서구는 스스로 도덕적 권위에 타격을 가한 것에 대해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인도의 외무장관 수브라마냠 자이샹카르는 수없이 느꼈던 점을 솔직히 말했다. “유럽의 문제는 전 세계적인 문제이지만, 전 세계의 문제는 유럽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정신상태를 바꿔야 한다.”(6) 대부분의 개도국은 미국과 유럽에 동조하라는 명령을 더 이상 따르지 않을 만큼, 스스로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한다.(7) 지난 2월 뮌헨 안보회의에서 개도국들은 국가채무, 기후, 환경, 과거 식민지 후유증이 우선과제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식민주의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는 ‘서구 대 전 세계의 나머지 국가’라는 표현을 내뱉는 이들이 아직도 미국에 있다. 인구로 보면, ‘나머지 국가’가 전 세계의 85%를 차지함에도 말이다.

 

‘차가운 평화’ 속 게임의 법칙

이제는 대세가 된 ‘차가운 평화’ 속에서 중견국(Middle power)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운다. 세계의 7대 주요 선진 강대국인 G7의 총 국부는 BRICS(남아공, 브라질, 중국, 인도, 러시아)에 추월당했다. BRICS에는 알제리, 사우디아라비아, 인도네시아, 멕시코 등 가입 희망국을 포함해 20여 국가가 모였다. 이 국가들이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높이고자 단합해도, 아직은 국제관계에서 새로운 비전을 제공하지는 못할 것이다. 서로 이해관계가 다양하고 때로는 충돌하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가장 기본적인 대비 원칙이 우선시된다. 각국은 재빠르게 군비 증강에 나섰다. 2022년 전 세계의 국방비 지출액은 2조 2,400억 달러로 신기록을 달성했다.(8) 이는 2021년보다 실질적으로 ±3.7%된 금액으로, 유럽의 국방 예산이 30년 만에 최고액을 기록하며 상승하게 됐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한국은 전 세계에서 국방비 지출이 가장 높은 10대 국가에 속한다. 일본은 향후 5년간 국방 예산을 두 배로 늘리려고 한다. 
그러나 소다자주의의 실용주의나 군비경쟁은 전 지구적인 문제 해결에는 전혀 유용하지 않다. 국제 안보를 위한 거대한 구조물을 짓거나, 폭력과 갈등의 불평등한 원인을 감소시키거나, 기후 취약지역에 사는 30억 이상의 사람들을 위해 기후위기에 맞서 해결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잔해 위에, 강대국들의 회의로 운영되는 UN이 창설됐다. 현시대의 범세계적인 과제들을 해결하려면, 창의성을 발휘해 국제사회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고안해야 한다. 

새로운 게임의 법칙에서는 국제연합총회의 역할이 안보리보다 확대돼야 하지 않을까? 또는 정부와 시민사회 연합의 역할이 더 커져야 하지 않을까? 함께이자 동시에 개별적인 방식이 필요할 것이다. 

 

글·피에르 하잔 Pierre Hazan
제네바의 인도적 대화를 위한 센터 고문. 『Négocier avec le diable, la médiation dans les conflits armés 악마와 협상하기, 무력충돌 내 중재』, (Textuel, Paris, 2023년)의 저자.

번역·김영란
번역위원


(1) John Mearsheimer, ‘Pourquoi les grandes puissances se font la guerre왜 강대국은 전쟁을 하는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3년 8월호.
(2) Maria Fantapppie, Vali Nasr, ‘A New Order in the Middle East?>, Foreign Affaires, 뉴욕, 2023년 3월. Akram Belkaïd, Martine Bulard, <Pékin, faiseur de paix? 평화 메이커 중국?’,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3년 4월호.
(3) Samir Saran, ‘The New World - Shaped by Self-Interest’, <Indian Express>, Noida, India, 2023년 5월 23일.
(4) David E. Sanger, ‘Candidate Biden Called Saudi Arabia a “Pariah”. He Now Has to Deal With It’, <New York Times>, 2021년 2월 26일
(5) Alain Gresh, ‘Quand le Sud refuse de s’aligner sur l’Occident en Ukraine 우크라이나 문제에 대해 서구의 동조 요청을 개도국이 거절했을 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2년 5월호.
(6) ‘Explained: What Jaishankar Said About Europe, Why Germany Chancellor Praises Him’, <Outlook> 2023년 2월 20일. OutlookIndia.com 
(7) Anne-Cécile Robert, ‘La guerre en Ukraine vue d’Afique아프리카의 시선으로 본 우크라이나 전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3년 2월호.
(8) <World Military Expenditure Reaches New Record High as European Spending Surges>, 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 2023년 4월 24일, www.sip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