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강낭콩에 ‘미국놈’들이 특허를 냈다고?”
멕시코산 강낭콩, 호박, 옥수수의 슬픈 이야기
올메카 문명, 마야 문명, 그리고 아스테카 문명까지, 오늘날 우리가 멕시코라 부르는 중앙아메리카 끝자락의 민족들은 당시 서구권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식물인 강낭콩, 호박,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들이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식물학적 지식과 경험은 콘키스타도르와 미국의 악질 상인들에 의해 파괴됐다.
누가 기억할까? 강낭콩은 그 옛날 멕시코인들이, 신에게 받은 선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멕시코인들의 조상에게 강낭콩을 선물한 케찰코아틀 신은 깃털 달린 신비한 뱀의 형상을 지녔다. 흔히 식용되는 플라젤렛빈, 북부의 아리코 랭고, 코코 드 팽폴, 방데주의 모제트, 아리코 타르베. 이 콩들에서 뭔가 이국적인 느낌이 드는 이유일 것이다. 강낭콩에 붙은 지역명들은 이들이 모두 같은 열대 칡 식물에서 파생됐다는 사실을 잊게 한다.
『잭과 콩나무』를 읽었거나 정원을 가꿔봤다면 알 것이다. 강낭콩(Phaseolus vulagris)의 줄기는 감고 붙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1) 강낭콩의 줄기는 홀로 위로 자라기에는 연약해, 뭔가를 나선 형태로 휘감으며 빛을 향해 나아간다. 언제나 반시계 방향으로 말이다. 로마인들은 여기서 불길한 징조를 봤을지도 모른다.
케찰코아틀은 옳았다
그러나 로마인을 포함해 유럽인이 강낭콩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였다. 로마인들은 깃털 달린 뱀인 케찰코아틀이 인간의 식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해 제공했던 옥수수와 호박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긴 세월, 케찰코아틀은 인간을 만족시킬 식물을 찾아 헤맸다. 그러던 중에 케찰코아틀은 불개미가 옥수수 낱알을 가지고 가는 모습을 봤다. 그는 불개미를 따라가다가 산에까지 올랐는데, 그 개미가 좁은 틈 안으로 사라져버리자 검은 개미로 변신해 불개미를 끝까지 따라갔고, 그곳에서 다양한 종자들로 가득한 엄청난 보물창고를 발견했다. 그것들을 가져오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케찰코아틀은 그 일을 잘 해냈다. 그리고 그날부터 멕시코인들은 강낭콩을 먹게 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시기에, 세상에는 아스테카 문명도, 마야 문명도, 멕시코도 없었다. 중앙아메리카 최초의 농부들이 고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도록 신이 자비를 베풀었다는 대목도 의아하다. 옥수수가 처음부터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멕시코인들의 조상은 야생 테오신트를 집에서 길렀는데, 이 화본과 식물(식물 분류학에 따라 볏과에 속하는 식물. 벼, 옥수수 등 곡류가 많다-역주)의 이삭 형태는 다 익으면 부서지기 일쑤였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이삭 형태의 옥수수를 얻기까지 수도 없는 선택의 과정이 있었고, 뿌리에 심줄이 많은 칡 식물을 강낭콩으로 바꾸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사람들이 이 옥수수와 강낭콩과 호박이 훗날 갖게 될 특별한 가치를 이해하는 데에도 긴 세월이 필요했다.
여하튼 케찰코아틀은 옳았다. 강낭콩은 콩과 식물로, 산화 아민의 합성에 필수적인 질소를 고정한다.(2) 이로써 강낭콩은 땅을 비옥하게 하고, 옥수수의 줄기는 강낭콩의 지지대가 돼주며, 호박잎은 땅을 빽빽하게 뒤덮어 땅의 습도를 유지하고 침식을 막는 역할을 하는, 완벽한 조합이 완성된다. 이 세 식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생태계를 형성하는 것을 넘어서서 인간에게 균형 잡힌 식생활을 제공한다. 강낭콩은 옥수수에 유일하게 없는 두 개의 산화 아민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놀라운 삼위일체는 나우아틀어로 ‘밭에 뿌려진 씨앗들’을 의미하는 밀파(Milpa, 화전에 다양한 종자들을 한꺼번에 심어 수확하는 농업-역주)의 형태로 미대륙 전역으로 서서히 확산해 나갔다. 이 덕분에 남부의 뜨거운 땅에서 배를 굶주리며 살아가던 농부들은 처음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됐다.
기원전 1200년 무렵, 북부의 메마른 땅에서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한 유랑 민족이 남부로 건너와 이 농부들과 섞였고, 풍부한 식량을 바탕으로 사회적 피라미드를 형성했다. 여기서 중앙아메리카 최초의 문명인 올메카 문명이 탄생했다.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올메카 문명에 대해서는 오늘날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7개의 거대한 석조 두상만 남아있을 뿐이다. 아시아인의 모습을 한 이 신비로운 아기의 얼굴들은 베일에 싸인 올메카 문명을 상징한다.
아스테카의 멸망
그러나 올메카 문명인들은 최초의 피라미드와 최초의 비석을 세웠으며, 최초의 신들을 숭배했고, 최초로 인간을 제단에 바쳤고, 심지어 마야 문명의 문자에 영감을 줬을 가능성도 있다. 올메카 문명은 그 후 수백 년 지속되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졌다. 그러나 한 번 지펴진 중앙아메리카 문명의 불씨가 쉽게 꺼지지는 않았다. 적어도 콘키스타도르(정복자라는 뜻으로, 16세기 초에 멕시코와 페루를 정복한 에스파냐인들-역주)가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뒤로 2,000년 동안 모든 평원과 계곡과 고원에서, 도시가 건설되고 번성하고 이웃 도시와 싸우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650년경에는 테오티우아칸과 몬테 알반, 사포테카 문명이, 900년경에는 마야의 도시들이 있었다.(3) 지금은 공사가 중단된 듯한 부지와 궁전 벽에 그려진 그래피티, 그리고 방화와 폭동의 흔적과 왕족 학살의 증거만 남았다. 그곳은 폐허뿐이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 경쟁, 계급사회, 절대권력자들, 너무 커진 도시와 너무 높은 피라미드. 이 모든 것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점점 더 많은 노동을 했던 농부들의 희생 덕분에 가능했다. 화전 농업에 기반한 ‘밀파’는 땅의 재생 주기를 매우 길게 잡아야 했다.
인구가 수만 명 심지어 수십만 명이 넘는 도시 여러 개를 먹여 살리기 위해 계속해서 농사를 짓다 보면 결국 숲은 사라지고 땅은 메마르고 생태계는 파괴됐을 것이다. 그러면 기근이 닥치고 폭동이 일어나고, 그러다가 가뭄이라도 한 번 들면 도시는 멸망했을 것이다. 결국 도시에 살던 사람들은 자연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공동체를 다시 만들고, 옥수수와 강낭콩으로 배를 채우는 생활로 돌아갔다. 아스테카 문명의 마지막은 마야 문명의 마지막보다는 덜 복잡했다. 그 마지막을 함께 한 사람은 바로 에르난 코르테스였다.
아스테카인들은 북부의 사막지대에서 왔다. 1345년경에 중앙고원의 호수 섬에 정착해 그곳에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을 세운 아스테카인들은, 주변 지역을 무력으로 정복해 통일된 왕국을 건설하고 조세를 징수했다. 아스테카인들은 인신공양에 특히 열중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4개의 문명과 그 각각을 지키는 4개의 태양이 있었고, 그 태양들은 모두 멸망했으며 자신들은 5번째 태양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앞선 4개의 문명처럼 이 문명도 곧 사라질까 두려워했다. 또한 제5의 태양 시대가 시작했을 당시에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몇몇 신이 심장과 피를 바치자 비로소 움직임이 시작됐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 사회를 지속시키려면, 계속 인간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논리였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발상이다.
1519년, 샤를 퀸트에게 충성하던 스페인의 콘키스타도르 에르난 코르테스는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근대주의를 퍼뜨렸다. 도대체 어떤 운명의 저주 때문에 아스테카인들은 코르테스를 그토록 기다리던 케찰코아틀로 착각했던 것일까? 아스테카왕국 제9대 수장인 모크테수마는 코르테스에게 설탕 없이 향신료와 바닐라를 넣고 카카오를 차갑게 우린 음료, 쇼콜라틀(Xocolatl)을 대접했다. 아마 코르테스는 그 음료보다 음료가 담긴 황금 잔에 더 눈길이 갔을 것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곧 본색을 드러냈고, 아스테카인들은 그들이 신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됐다. 베르날 디아스는 이 전쟁의 결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길바닥에는 시신이 즐비했고,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악취가 진동했다.”(4)
아스테카 문명의 비밀을 찾아서
아스테카인들, 그리고 그전에 마야인들은 아코디언처럼 접힌 고문서(codex)에 그들의 과거, 지식, 노래를 문자와 그림의 형태로 기록했다. 화가이자 조각가인 알브레히트 뒤러는 이 제본된 수사본의 그림을 보고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반면 디에고 데 란다 주교는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였는데, 1566년에 쓴 『유카탄반도 물건들의 관계』에서 이렇게 썼다. “그 책들은 온통 미신과 사탄의 거짓말로 가득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리라고 지시했다.”
고문서에는 수수께끼도 나온다. “끝부분에 흰 머리카락이 있고 초록색 깃털이 나는 것은?” 답은 양파다. 수도가 함락되고 책들이 불태워지고 주민들이 죽임을 당한 후에, 학자들은 사라진 문명의 비밀을 찾는 작업에 착수했다. 일부 원주민들도 작업에 힘을 보탰다. 스페인이 침공하기 전, 한 원주민 의사는 허브를 이용한 치료법을 고문서에 기록했다. 그는 아스테카인들이 치료에 사용하던 허브의 종류를 조사한 뒤 각 허브의 모양과 색깔을 놀랍도록 상세하게 그렸다. 우리는 이 의사의 세례명인 마르틴 데 라 크루스밖에 알지 못한다. 그는 아마도 아스테카의 귀족 아이들을 교육하고 전도하기 위해 스페인의 부왕이 만든 산타크루스 학교의 의뢰를 받아 이와 같은 작업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아이들의 대부분은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 고문서는 처음에는 나우아틀어로 쓰였다가 1552년 후안 바디아노라는 인물에 의해 라틴어로 다시 작성됐는데, ‘원주민 출신’이라는 수사본의 기록으로 미뤄볼 때 그는 산타크루스 학교에 다니던 어린 아스테카 학생이었을 것이다. 비록 나우아틀어로 쓰인 원본은 소실됐지만, 『Libellus de medicinalibus indorum herbis(원주민 약초 사전)』은 『크루스-바디아노 고문서』라는 제목을 달고 바다를 건넜다. 이 책은 스페인 왕족의 손을 거쳐 주교의 서재로 들어갔고, 그 뒤로 바티칸의 기록 보관소에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1929년에 드디어 세상으로 나왔다.
아스테카인들의 의학, 과학, 예술 수준을 보여주는 이 살아있는 증거물 속에는 총 250종의 식물이 있다. 그중 아가베, 미모사, 카카오, 바닐라, 독말풀, 서양 가새풀 등 185종은 삽화도 있다. 28페이지에 수록된 아킬레아의 끝이 뾰족한 나뭇잎과 산형화서는 그 표현의 정교함이 놀라울 정도다. 아킬레아라는 이름은 아킬레우스가 다친 적을 치료하는 데 이 약초를 사용했다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아스테카인들은 이 풀을 ‘땅의 깃털(Tlalquequetzal)’이라고 불렀는데, ‘원주민 출신’ 작가의 그림에는 이런 느낌이 아주 강렬하게 살아있다.
‘옥수수 없이는 국가도 없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풀을 알 수는 없다. 옥수수와 강낭콩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원주민들은 그들의 도시, 신, 책을 잃고도 케찰코아틀의 선물만은 잃지 않았으니까. 옥수수와 강낭콩이 그것이다. 모크테수마와 멕시코가 원주민을 학살해도, 자급자족을 가능하게 해주던 ‘밀파’의 농부들이 전쟁과 혁명 속에서 사라져가도, 원주민들은 옥수수와 강낭콩을 끝까지 지켰다. 그러나 현대경제의 사도들은 새로운 법칙을 만들었다. 자급자족은 수익을 제한하고 제5의 태양을 위협하므로, 제단에 살아있는 인간의 심장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유무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돼 멕시코, 미국, 캐나다 간의 무역 장벽이 철폐됐다. 그 결과 미국의 옥수수가 시장으로 쏟아져 나와 옥수수 가격이 폭락했다. 멕시코의 농가들은 비료, 살충제, 정부 지원금으로 무장한 북미의 거대한 옥수수 농장들과 경쟁할 수 없었다. 한순간에 실업자 신세가 된 수백만 명의 멕시코 농부들은, 관세 면제 혜택을 받으며 멕시코의 저렴한 인건비를 이용해 돈을 버는 다국적 기업(maquiladoras)에 들어가 미국 이민만을 유일한 희망으로 품고 살아야 했다. 멕시코의 농업 생산 기반은 이렇게 무너졌다.
역사상 최초로 멕시코는 옥수수를 수입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5)
옥수수 가격이 폭락한 다음에는 가격 폭등이 이어졌다. 2007년은 ‘토르티야 위기’의 해였다. 리오데그란데의 남부에서 기근이 발생했고 모든 부는 북부에 집중됐다. 대규모 시위대의 깃발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였다. ‘Sin maiz no hay(옥수수 없이는 국가도 없다)’ 그렇다면 강낭콩은 과연 무사했을까?
그 미국 놈은 특허를 가지고 있다고!
1990년대에 래리 프록터는 멕시코의 시장에서 다양한 종자가 섞여 있는 강낭콩 한 포대를 사서 미국 콜로라도로 돌아와 포대에서 노란 강낭콩만을 골라 땅에 심었다. 프록터는 이 작업을 단 두 번 반복하는 아주 간단한 선택 과정을 거쳤다. 음식으로 치면 파인다이닝에 나올 법한 요리를 패스트푸드로 만들어 내놓은 것과 같았다. 이렇게 노란 강낭콩을 두 번 수확한 프록터는 노란 강낭콩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다.
- 특허라고?
- 네가 그것을 발명했고 그것이 네 소유라는 사실을 적어 놓은 문서 말이야.
- 그 미국 놈이 노란 강낭콩을 발명했다고? 노란 강낭콩은 우리가 올메카 문명 때부터 길러오던 거잖아!
- 그런데 그걸 어떻게 증명해? 그 미국 놈은 특허를 가지고 있다고!
‘Pobre Mexico, tan lejos de Dios y tan cerca de los Estados Unidos(신과는 멀리 있고 미국과는 가까운, 불쌍한 멕시코)’라고 멕시코인들은 한탄했다. 다시 한번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강낭콩의 ‘지적 재산권’을 주장할 수 있는 동시에 그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멕시코에는 노란 강낭콩이 30종도 넘게 존재했고, 식물학자들은 1만여 종의 강낭콩(Phaseolus vulgaris) 가운데 노란 강낭콩의 특성을 종자별로 세심하게 분류해 놓았다. 그런데 그 미국 놈은 특허 출원서에 단순히 ‘노란 강낭콩’이라고만 썼고, 워싱턴의 특허청은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프록터는 미국에서 판매되는 노란 강낭콩에 대해 22%의 로열티를 주장했다가 여론의 반대에 부딪히자, 멕시코산 노란 강낭콩의 수입을 중단시키고 소송에 돌입했다. 그 여파로 멕시코산 노란 강낭콩의 판매량은 급락했고, 전 세계인들은 ‘생물 해적행위(Biopiracy)’라는 신조어를 알게 됐다.(6) 노란 강낭콩은 생물 해적 행위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치열한 법정 싸움이 계속됐다.
이 소송은 10년 동안이나 지속돼 총 5번의 판결이 나왔고 수만 달러의 변호사비가 지출됐지만 결국 특허는 취소됐다. 프록터는 더 이상 노란 강낭콩에 대한 로열티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전쟁은 여전히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생물에 대해 특허를 출원해 자연을 개인 소유화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멕시코는 전세계에서 옥수수를 가장 많이 수출하는 국가다. 신과 화산이 잠에서 깨어날 만큼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이 땅을 빌려 쓰고 있다네
그렇다면 신과 화산이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질문에 15세기의 한 아스테카 시인은 이렇게 답했다. “노래하고, 노래하고, 또 노래하라. 노래는 곧 구원이리니. 그리고 노래는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일이리니.”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일부는 에밀리아노 사파타(멕시코의 혁명가-역주)의 귀환을 꿈꾼다. 멕시코에서는 유령의 힘이 다른 어떤 곳보다도 세다. 어떤 이들은 샤를 도를레앙과 동시대에 살았던 아스테카의 왕이자 시인 네사우알코요틀이 남긴 말을 기억한다. “오 나의 친구들이여. 우리는 이 땅을 잠시 빌려 쓰고 있을 뿐이라네.”
멕시코인들은 밀파의 전통을 이어받은 후손이다. 다양한 작물을 동시에 재배하면서, 그들은 과학과 전통 지식의 만남, 그리고 농업에 기반한 사회 구조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식량 주권을 꿈꾼다. 2022년에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이 밀파 문화를 세계중요농업유산제도에 등재했다.(7) 우리는 밀파를 연구하고 보완하는 한편, 소규모의 목축업을 유지하고 생태계를 풍성하게 하는 데 필요한 향료 작물과 사료작물에 관한 조사를 추가하고,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의 혼농임업(Agroforestry)과 밀파를 접목한다. 밀파는 사람들이 적당한 규모의 농장을 운영하면서 균형 잡힌 식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줄 뿐만 아니라, 농업생태학의 상징과도 같다.
마크 뒤퓌미에는 이런 이론과 실제를 조합하면 90억 인구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밀파는 매우 똑똑한 농업이다. 밀파는 농부들이 대를 이어 축적한 노하우의 집합체로, 사라진 다양한 종자들을 다시 경작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무엇보다도 과학적 연구에 기반해 있다. 과학적 연구는 토양의 생물학에 관해 이미 수많은 성과를 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8)
지금 우리 눈앞의 상황은 대단히 부당해 보이지만, 또 누가 알랴? 케찰코아틀에게 아직도 할 말이 있을지. 사파타도 마찬가지고.
글·알랭 아마리글리오 Alain Amariglio
엔지니어, 교사, 작가. 최신작으로는 질 클레망이 서문을 쓴 『Des plantes et des hommes 식물과 인간』(éditions du Canoé, Paris, 2023)이 있다.
번역·김소연
번역위원
(1)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강낭콩은 학명이 Phaseolus vulgaris인 강낭콩의 재배품종(선택된 품종)이다.
(2) 실제로는, 콩과 식물의 뿌리에 공생하는 박테리아가 질소를 고정하고, 이 박테리아는 광합성 과정에서 만들어진 식물의 당을 소비한다.
(3) ‘옥수수의 민족’
(4) Bernal Díaz del Castillo, 『Histoire véridique de la conquête de la Nouvelle-Espagne 누에바에스파냐 점령에 관한 진짜 이야기』, La Découverte, Paris, 2009.
(5) Karen Lehman, Au Mexique, les fausses promesses de l’Alena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거짓된 약속,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6년 11월호
(6) Cf. 마리모니크 로뱅(Marie-Monique Robin)의 다큐멘터리 <Les moissons du futur 미래의 수확물>(2012)
(7) 세계중요농업유산제도(Globally Important Agricultural Heritage Systems, GIAHS), FAO, https://www.fao.org/giahs/fr/
(8) Marc Dufumier, 『50 idées reçues sur l’agriculture et l’alimentation 농업과 식량에 관한 50가지 고정관념』, Allary éditions, Paris, 2014
※ 이 기사의 삽화들은 아스테카인들이 사용했던 약초와 그 효능을 정리한 마르틴 데 라 크루스의 식물도감에서 가져왔다. 도감에 나오는 식물의 대부분은 오늘날 확인되지 않는다. 삽화 설명문은 1939년에 윌리엄 게이츠가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현재 이 삽화들은 멕시코 국립 인류학 박물관의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