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이슬람 여성들이 움직인다
민주주의와 페미니즘의 연계
지난 5월, 생물학자 라이야나 바르나는 사우디아라비아 여성 최초로 우주 비행사 임무를 수행했다. 주목할 법하다. 그러나 마그레브(아프리카 북서부 일대)와 마쉬렉(Machrek, 마그레브에 대응되는 용어로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쿠웨이트 등을 포함한 지역), 골프만 연안 국가들에서 여성들의 상황을 대변하는 사건은 아니다. 이 지역 여성들은 양성평등에 있어 현 정권의 법적 근거가 되는 민족주의 페미니즘에 기대할 것이 없다. 오직 그녀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와 세속주의를 위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2022년 9월 여학생 마흐사 아미니의 사망으로 촉발된 이란의 시위는 오늘날 근동에서 여성해방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1)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서구의 시선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서구 세계에서는 이 지역 젠더 갈등에 대해 불평등의 주체를 착취하거나 풍자하는 경향이 있고, 동양의 여성이라는 ‘타자’를 해방하거나 거부할 권한이 자기에게 있다고 오판하기 때문이다. 또한 근동 여성에 대한 소위 뿌리 깊은 억압을 공격 대상으로 삼거나, 여성을 식민주의에 이어 문화적 진정성에 대한 반동적 열망의 희생자로 제시하는, 마찬가지로 편향된 두 가지 선택지 안에서만 생각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2)
이 지역 여성들의 투쟁을 이해하려면 보다 탄탄한 지식이 필요하다. 서구인들과 근동인들 모두에게 젠더라는 사회적 대상이 구축되는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조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가부장제에 도전하고 지금까지 소외됐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은 물론 부담스러운 과거의 문화 잔재를 명확히 밝혀낼 수 있다.
여성혐오, 그 식민주의의 잔재
유럽 식민주의가 아시아 지역에 남긴 폐해 중 여성혐오의 사회 구조만큼 이 지역에 지속적인 영향을 준 것도 없다. 당시 식민지나 피식민지를 막론하고 모범적인 성평등 국가는 없었다. 가부장제의 힘은 보편성이다. 그렇지만 근동에서 젠더와 남성 특권에 대한 개념은 19세기 이후 이 지역을 재편한 유럽에서 보이는 위계와 제도와는 상당히 달랐다.
한 가지 큰 차이점은 법규가 아닌 비공식적 규범에 관한 것이다. 근동에서 사회 생활은 분명 이슬람 법학자들의 의견과 경전으로 규정됐지만, 재정 관리, 법률 심의, 계약 체결 등 여러 분야에서 여성에게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했다. 가령 부부를 비롯한 가족관계 내에서 여성의 역할과 관련해 샤리아(Charia, 이슬람 법 체계)에 명시된 젠더 구조는 여러 측면에서 유연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종교적 개념과 사회의 실용적 요구를 모두 반영한 결과다.
유럽 식민주의는 이 체계를 두 가지 방식으로 변화시켰다. 한편으로는 그 이전까지 공동체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해석되던 샤리아의 규범을 통일된 신성한 법규로 규정했다. 여성과 여성의 보호자가 아닌 남성, 즉 여성과 가족관계가 없는 남성 사이에 규정된 엄격한 차이는 이런 변화를 잘 보여준다. 한때 종교적 의미를 지닌 다소 융통성 있는 행동 규범이었던 것이 이제는 강압적으로 지켜야 할 법적 의무가 됐다. 다른 한편, 식민주의는 이런 규칙을 법원, 군대, 공공 당국을 통해 지역 사회에 강제되는 일련의 민법 및 형법에 반영하게 했다.
계몽전제주의라는 장애물
유럽의 지배로 인해 비공식적인 종교 규범이 다원적으로 혼합돼 있던 이슬람교는 예외 없는 명령 집합체로 변모했다. 여기에는 이슬람과 이슬람 신자들을 후진적이고 반문명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식민지 세력의 시각이 담겨있다. 여성은 억압과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슬람 신자들을 ‘문명화’하려는 제국주의의 욕망은, 오히려 지역사회를 권위주의적 통치, 획일적 폭력, 경제적 착취에 노출시켰다. 여기에서 여성들도 희생자였다. 여성들은 해방된 것이 아니라 유럽의 젠더 구조 인식을 표현하는 새로운 법적 기구로 편입됐다.
동성애자의 권리와 정체성 문제는 식민 통치 아래에서 지역 전통이 재편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많은 이슬람 사회에서 젠더와 성 정체성에 관한 개념은 종교적으로 금지된 인간관계와 성행위를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서구 세계 입법자들은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사이에 엄격한 경계선을 그었다. 성은 비정상적으로 여겨지는 모든 행위를 범죄화하는 방식으로 성문화됐다. 이는 동성애를 근동의 전통적인 관점으로 보는 대신에 근동의 문화에 낯선 부류의 관계로 억지로 편입시켰다.(3)
서구 세계에서 페미니즘과 여성의 권리가 개념화되는 방식에는 일련의 역설이 개입했다. 식민지 관리들은 본국에서도 여성에게 투표권이나 정치 경력 접근권이 없었음에도, 이슬람교 민족의 여성 탄압을 비난했다. 또한 경제 거래에 있어서도 근동의 여성이 이슬람식 재산 기부제도인 와크프(Waqf)를 통해 계약을 체결하고, 자선 및 학술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유럽 여성이 누리는 자율성은 훨씬 적었다. 게다가 20세기 중반 서구에서 동성애가 여전히 범죄로 간주되고 이성애가 거스를 수 없는 기준이었던 상황에서 여성해방운동이 시작됐다. 2000년대 초반, 서구 세계가 성소수자(LGBTQ+)들을 인정하기 시작했을 때도 이중 잣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의 과거 행태는 잊고 이성애가 아닌 행위를 비난하는 이슬람 사회를 비난했다.
‘이슬람 여성’에 대한 ‘제한적 해방’
서구적 관점에서, 이슬람 사회에서 양성평등이란 서구의 사상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목표였다. 이런 관점은 오랫동안 전 세계 규범에 영향을 미친 헤게모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유럽식 페미니즘 도입의 강요는 설득력 있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도시 중산층 여성들의 교육과 독립을 독려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과정에서 권위주의를 부추기고 지역 정체성을 무시하는 문화적 고정관념을 앞세웠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처럼 전쟁 후 국가 건설을 통해 또는 기술주의적 수단을 사용하는 정부에 의해 추진된 이런 노력은 이슬람 사람들이 여성해방을 서구 제국주의와 동일시하는 반응을 불러왔다.
이런 작동원리는 현대사 전반에 걸쳐 재생산됐다. 우선, 식민지 정부가 양성평등이라는 명목으로 억압적인 법률을 제정한 점이 가장 잔인한 사례다. 예를 들어 소련은 1930년대 중앙아시아에서 여성에게 베일을 벗으라고 강요했다. 프랑스도 1958년 알제리에서 같은 일을 했다.(4) 이 정책은 전통적인 엘리트와 종교 당국을 표적으로 삼았지만, 결과적으로 진보와 식민주의 사이의 혼란을 조장했다.
둘째, 선진국에 직접적으로 의존하거나 선진국을 열망하는 태도로 인해 전제주의 정권 내부에서 동일한 논리가 작용했다. 근동 지역 버전의 ‘계몽전제주의’는 시민이 아닌 ‘이슬람 여성’을 해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정권의 사회적 기반을 넓히기 위해 세속적 보수주의를 종교적 반대 세력에 대항하는 무기로 사용하려는 전제권력의 구조에 여성인권 문제를 편입시켰다.
이란의 샤(Chah, 페르시아-이란 통치자), 아프가니스탄의 전 국왕 모하마드 자헤르 샤(1933~1973), 튀니지의 전 대통령 지네 엘-아비딘 벤 알리(1987~2011), 사우디아라비아의 현 왕세자 모하메드 벤 살만 등이 이 전략을 이용했다. 그때마다 민주화 요구를 차단하고자 여성에게 제한된 권리를 부여했다.(5) 여성 몇 명에게 장관직을 부여하고, 교육 및 경제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고, 결혼을 동등한 관계 간 계약으로 정의하는 것은 원칙적 입장이라기보다 검증된 전술에 가깝다.
이런 국가 주도의 페미니즘은 권위주의 정부의 도구 중 하나다. 정권의 지위와 위신을 공고히 하려고 여성에게 허락된 긍정적인 진보를 악용한다. 또 사회 지도부에서 강요하는 세속주의를 통해 종교의 영향력을 제한한다. 이는 시리아의 바스당이나 이라크, 아랍 민족주의 공화국과 같은 단일당 정권이 역사적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전략이다. 오늘날에도 모로코와 이집트처럼 전통을 이용해 이슬람의 해석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국가에서 전제주의 정권을 견고히 다지는 데 활용되고 있다.
사회적 기반이 없는 서구의 후원국
이 작동원리의 세 번째 버전도 주목할 만한데, 여성해방과 양성평등을 위해 근동에서 활동하는 다자간 기구와 비정부기구(NGO)가 끊임없이 동원된다는 점이다. 국제연합(UN)부터 현지의 소규모 NGO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여성 단체를 지원하거나 설립하고 정부가 여성들의 교육과 고용에 대한 접근성을 개선하도록 장려한다. 서구 페미니즘을 도입하는 다른 형태와 마찬가지로, 이런 사회운동은 운신의 폭이 좁은 정부를 피해 단편적인 사회, 경제적 주체인 여성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민주화의 걸림돌이 된다.
이런 접근방식은 또한 ‘토크니즘(Tokénism)’, 즉 일부 인구를 제한된 방식으로 해방한 일을 사회 전반의 정치적 격변으로 소개하는 상징적 정치를 유지하는 효과를 낳는다. 우리는 1980~1990년대 파키스탄에서 베나지르 부토가 집권했을 때 현지의 불평등한 양성 관계의 현실에 무척 미미한 영향을 미쳤음에도, 서구 국가들이 얼마나 열광적으로 환영했는지 잊지 않았다. 결국 여성의 권리는 서구 후원국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붕괴되는 몇 안 되는 제도적 구조에 국한해 논의되고 있다. 2021년 탈레반에게 버려진 아프가니스탄이 그 단적인 사례다.
위로부터의 페미니즘 전략은 식민지나 국가 주도, ‘인도주의’ 형태와 무관하게 두 가지 중요한 문제에 직면한다. 한편으로는 여성 인권의 개념을 공공 분야의 일부로 축소함으로써 전제 정권을 공고히 한다. 이는 인권 침해와 정치적 자유의 부족이라는 보편적인 문제를 간과할 뿐만 아니라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이 여성 인권 문제를 악용할 빌미를 제공한다.
일례로, 모하메드 벤 살마네 사우디 왕자는 자국 여성들에게 자동차를 운전할 권리를 줬지만 여러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을 구금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의 권리는 전적으로 군주제에 좌우되며, 여성 자신의 요구는 반영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했다. 한편, 이런 전략은 외부에서 도입된 사상을 선택적으로 강요함으로써 문화적 정통성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현지 보수 세력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자연스럽게 이슬람 전통을 구실로 삼아 여성의 지위가 법적으로 변화하는 데 반대하는 가장 비타협적인 이슬람주의 노선을 강화한다.
페미니즘의 새로운 지평
근동에서 여성주의 운동이 기반을 마련하려면, 서구에서 등장한 해결책을 모방하는 것에서 벗어나 현지의 자원과 경험에 더 많이 의존해야 한다. 이런 역사적 사례도 충분하다. 이 사례들은 세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 범주는 튀르키예의 케말리즘과 튀니지의 부르기바주의처럼 민족주의에 세속주의를 녹여내려는 시도다. 서구의 개입 없이 시작된 이 전략은 서구에 직접적으로 의존하지 않았다. 식민지 점령이 끝난 후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경제 기반과 계급 구조까지 사회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이런 차원에서 세속주의는 오늘날 이집트,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처럼 전제적 목적을 위해 종교를 독점하고 도구화하는 권력의 무기가 아니라 국가의 역할을 재정의하기 위한 의도적인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케말리즘이 정치 제도에 대한 모든 종교적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면, 부르기바주의는 오히려 이즈티하드(Ijtihad, 코란과 샤리아를 재해석하려는 노력)를 통해 종교를 통제해 전반적인 근대화 노력에 복무하도록 하려 했다.
따라서 정치와 종교 영역을 분리하는 것이 사회적 관계를 재정의하고 법체계를 개편하며 여성이 경제생활과 정치적 활동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긴다면, 여성해방은 세속주의와 연관된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종교계와 보수적인 사람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단점이 있다. 이슬람주의자와 같은 새로운 종교적 주체들이 세속주의가 이슬람 사회의 문화적 정체성을 훼손한다고 비난하는 상황에서 울레마(Oulémas, 이슬람 법학자)와 같은 전통적인 엘리트에게 법리적 특권과 도덕적 의무를 포기한다는 것은 신앙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모든 영향력을 포기함을 의미한다. 오늘날 튀르키예와 튀니지에서 볼 수 있듯이 세속주의와 종교 간의 대립은 깊은 정치적 균열로 나타난다.
두 번째 범주는 이슬람 페미니즘이다.(6) 이 사상은 1970년대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과 튀르키예의 레파(Refah, 번영당), 이란 혁명에 의해 시작된 이슬람주의 개혁의 하나로 발전했다. 서구 페미니즘이 대상으로 삼았던 도시 중산층 계급 사이에서 이슬람주의 운동이 확산된 사회적 변화의 결실이다. 또한 샤리아에 대한 협의의 해석에 근거를 둔 급진적 근본주의 노선과 거리를 두고자 하는 많은 이슬람주의자의 열망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집트의 자이나브 알가잘리(2005년 사망)를 비롯해 이란의 파에제 하셰미 라프산자니, 튀니지의 수마야 가누시, 모로코의 나디아 야신 등 저명한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이 모두 ‘강경한’ 이슬람주의로 유명한 아버지를 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녀들이 추구하는 운동은 신앙과 실천의 독특한 조합이 특징이다. 한편으로는 베일, 검소함, 정절 등 눈에 보이는 신앙심의 증표를 고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과 경제 및 정치 활동 참여를 통해 여성을 공적 영역에 편입시키기 위한 운동을 벌인다. 이런 페미니스트들의 종교적 입장은 피크흐(이슬람 법 해석)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데 반대하며 샤리아를 맥락에 맞게 해석하려고 한다. 가령 이들은 이혼과 상속 문제에서 여성에게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모든 개혁에 찬성한다.
하지만 이슬람 페미니즘은 체계적인 운동으로 나타난 적이 없다. 가장 강경한 보수 세력과 자유주의적 세속주의의 유혹 사이에 끼어 있었고 여전히 끼어 있다. 그래서 이란에서처럼 종교적 급진주의자들의 압력에 굴복하거나, 튀니지의 사이다 우니시의 사례처럼 결국 사상적 입장을 포기하게 된다. 내부에서부터 이슬람을 개혁할 수도, 외부를 향해 자유주의 세속주의와 연대할 수도 없는 이슬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세 번째, 즉 마지막 범주인 민주적 페미니즘은 시민권 개념에 기반을 둔 평등을 추구한다. 이는 2011년 아랍의 봄 민중 봉기 때처럼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좀 더 보편적인 운동의 일부다. 민주적 페미니즘은 샤리아의 진의나 적용에 대한 논쟁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젠더에 관한 대중 담론을 억제하는 이분법(이슬람 대 세속주의, 정통성 대 서구화)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 활동가는 베일을 평등의 걸림돌로 보지 않는다. 베일을 벗는 것, 쓰는 것 모두 자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주적 페미니스트들은 대체로 젊다. 이들은 SNS에서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과거의 정치 시대를 구성해 온 민족주의적이든 종교적이든 낡은 이데올로기와 거리를 둔다.(7) 이들의 전투적인 활동은 이데올로기적 용어가 아니라 양성평등이 민주적 삶의 전제이며 평등주의적 관점을 수용하지 않고는 시민임을 자처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서구 페미니즘을 관통하는 논쟁을 의식하면서도 여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자기들의 언어와 자기들이 처한 맥락에서 이런 논의를 재정의하고자 한다. 이들은 자기들의 투쟁을 민주주의를 위한 더 광범위한 투쟁의 일부로 간주한다. 그리고 전제 정권에 의한 여성의 도구화를 거부한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명운은 민주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래의 민주적 페미니즘
이 모든 가능성 중에서 민주적 페미니즘만이 미래로 가는 교두보가 될 수 있다. 식민지 점령과 식민지 이후 국가 건설의 산물인 케말리즘과 부르기바주의는 특정 역사적 맥락을 벗어나서는 거의 재현될 수 없다. 이슬람주의 페미니즘은 그 운동을 촉발한 흐름에 의해 소외됐다. 반면 민주적 페미니즘은 활동가들이 여성성의 개념을 재정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에 그 개념을 편입시킬 수 있는 어휘와 관점을 제공한다.
2011년 ‘아랍의 봄’ 봉기는 근동을 민주화하려는 시도에는 실패했다.(8) 그러나, 민주적 페미니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 봉기가 튀니지에서 시작된 운동보다 오래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활동가들이 무너뜨릴 수 없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집트에서는 압델 파타 알시시 장성이 무슬림형제단에 의해 선출된 정부에 위협을 느낀 여성들을 내세워 2013년 반혁명 쿠데타를 얼마간 정당화했다.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민주주의를 전복시킨 정권이 민주주의를 수호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이란에서도 이슬람 혁명은 새로운 정권의 사회적 기반으로서 여성의 권익 향상에 중점을 둔 민주적 선거를 약속했다. 선거에 기반한 정치와 사회운동의 축으로서 이란 여성은 민중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됐다.
이 지역 전반에 걸쳐 2011년부터 민주적 페미니즘이 시민 사회 내에서 확산됐다. 이제 민주적 페미니즘은 SNS, 시민 사회, 교육계 및 공개적 토론의 장에서 접할 수 있다. 이런 움직임은 농촌 출신이나 불우한 환경의 젊은 여성을 포함한 새로운 활동가들에게 참여의 문을 열어줬다. 페미니즘은 더 이상 부르주아적이고 도시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SNS에 관련 글이 확산되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 페미니즘은 보편적 당위성을 획득했다. 아랍 국가에서 많은 남성이 경제적 이주를 시도하고 비공식 경제에서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은 덕분에 페미니즘이 버틸 수 있었다. 특히 ‘렌티어리즘(Rentiérisme, 투자소득주의)’은 자국의 노동력을 활용하려는 걸프만 연안 여성들을 노동시장으로 인도했다.
이런 움직임은 대대적인 정치적 변화에 비해 조용하지만, 영향력은 절대로 적지 않다. 개인 생활의 가장 은밀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변화와 연결된 이 운동은 반드시 정치적 무대에 드러날 것이다. 또한 시민들은 권위주의의 영역 밖에서 자신의 권리를 꿈꾸고, 전제주의적 조작이 아닌 사회적 힘으로 이뤄낸 양성평등을 구현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와 페미니즘의 유기적 연결은 전통과 현대를 구분짓는 시대착오적 대립을 뒤엎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민주적 페미니스트들에게 표현의 자유는 문화적 정통성을 가장 잘 보장하는 권리로, 이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모든 시민이 갈망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런 전개는 지역 전체의 정치 생활을 재편 중이다. 베일은 점점 더 여성의 정숙함을 나타내는 표식이 아니라 시민권을 둘러싼 정치적 전쟁터가 됐다. 베일의 사회 분열적 성격은 점차 사라졌다. 튀니지에서는 베일을 쓰지 않은 여성들이 인권의 이름으로 베일을 쓴 여성들을 옹호하며 부르기바주의에 반발하고 있다. 양측 모두 카이스 사이에드 대통령이 혁명 이후 민주주의를 짓밟는 현실에 반대하고 있다.
이란에서는 반대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이곳에서는 베일을 쓴 여성들이 쓰지 않은 여성들 편에서 정권의 억압적인 폭력에 맞서 함께 시위를 벌인다. 이들은 베일 착용을 개인적인 선택으로 여기는 대신 모든 여성에게 베일을 강요하는 상황에 반발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위로부터의 페미니즘’과는 달리 이란에서는 양성평등을 위한 투쟁이 아래에서부터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으로 촉발된 봉기는 이란이 얼마나 자체적 상징주의에 사로잡혔는지 드러냈다. 베일은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니라 종교 정권과 사회의 많은 부분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한때 이슬람 혁명의 문화적 표식이었던 것이 이제는 정권의 약점이 됐다. 이란 당국이 강제 베일 착용을 폐지한다면 흥분한 군중을 통제하기 위해 더 많은 부분에서 양보를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의심할 나위 없이 급격한 변화의 물꼬를 트게 될 것이다. 근동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란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은 종교와 세속화를 이 두 구분을 초월해서 인권에 대한 보편적 요구로서 다시 평가해야 한다.
글·히샴 알라위 Hicham Alaoui
중동 및 북아프리카 문제 연구원. 『Security Assistance in the Middle East: Challenges ... and the Need for Change (ouvrage collectif co-dirigé avec Robert Springborg)』(Lynne Rienner Publishers, Boulder(미국), 2023)와 『Pacted Democracy in the Middle East. Tunisia and Egypt in Comparative Perspective』(Palgrave Macmillan, 런던, 2022)의 저자.
번역·서희정
번역위원
(1) Mitra Keyvan, ‘Les Iraniennes allument un brasier social 이란의 젊은 여성 시위, 히잡 반대에서 정권 타도로 확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2년 11월호.
(2) Sahar Khalifa, ‘Femmes arabes dans le piège des images 이미지의 덫에 갇힌 아랍 여성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5년 8월호.
(3)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상황과 비교하기 위해 Kago Komane, ‘Gay-bashing in Africa is ‘a colonial import’’(Daily Maverick, 2019년 6월 25일, https://www.dailymaverick.co.za) 참고.
(4) Jean-Pierre Sereni, ‘Le dévoilement des femmes musulmanes en Algérie 알제리의 이슬람신도 여성들의 베일 벗기’, OrientXXI, 2016년 9월 13일, https://orientxxi.info
(5) Olfa Lamloum & Luiza Toscane, ‘Les femmes, alibi du pouvoir tunisien 튀니지 권력의 빌미가 된 여성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8년 6월호. / Florence Beaugé, ‘Une libération très calculée pour les Saoudiennes 정교하게 계산된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의 해방’ 프랑스어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8년 6월호.
(6) Françoise Feugas, ‘Ces féministes qui réinterprètent l’islam 이슬람을 재해석하는 페미니스트들’, OrientXXI, 2014년 9월 5일. / Mona Ali Allam, ‘Ces lectures féministes du Coran 코란의 페미니즘적 해석’, OrientXXI, 2019년 10월 30일, https://orientxxi.info
(7) Akram Belkaïd, ‘#MeToo secoue le monde arabe 아랍 세계를 뒤흔드는 미투 운동’,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1년 8월호.
(8) Hicham Alaoui, ‘Le triomphe fragile des contre-révolutions arabes 아랍의 반혁명의 허약한 승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2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