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세중립국 오스트리아의 힘겨운 중립
중립국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로 다가서는 오스트리아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군의 손으로 만들어진 오스트리아는 공산주의 진영 및 남반구 국가와의 다리 역할을 하며 서구권에서 특수한 입장을 고수해왔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변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대외정책을 재고해야 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오스트리아의 중립외교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2022년 5월 군인, 재계 인물, 유명 작가 로베르트 메나세를 비롯한 작가 등 40여 명은 러시아 침공 앞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이 “견딜 수 없으며 위험하다”며 “열린 토론”을 요청하는 글을 발표했다.(1) 요청문에 핀란드나 스웨덴처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자는 내용은 명시돼 있지 않지만,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도 않았다.
이후 오스트리아 주요 언론사들은 중립외교 정책의 미래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우크라이나에 무기 원조를 해야 하는가? 군수물자가 오스트리아를 경유하도록 허락할 것인가? 우크라이나 군대 훈련, 혹은 지뢰 제거 작업에 참여해야 하는가? 1955년부터 오스트리아 대외정책의 핵심이었던 중립성이 흔들리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중립성이란?
오스트리아 국민의회를 대표하는 4개 정당으로 보수파인 오스트리아 국민당(ÖVP), 사민주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SPÖ), 녹색당, 그리고 민족보수주의 오스트리아 자유당(FPÖ)이 있다. 이들의 발언에 따르자면 중립 정책은 아직 앞길이 창창하다. 러시아 침공 이후 카를 네함머 오스트리아 연방총리는 이렇게 공언했다. “오스트리아는 과거에도 중립, 현재도 중립, 앞으로도 중립으로 남을 것입니다. 논의는 이것으로 끝입니다.”(2) 가장 적은 의석을 보유한 정당인 신오스트리아와 자유포럼(NEOS)만이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설문조사 결과 국민의 70~80%가 익숙한 현상유지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립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찬성파와 반대파 모두 현실에서 중립성이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정부는 북대서양조약기구의 비행기가 영공을 드나드는 것을 묵인해왔다. 1991년 걸프 전쟁 당시 미국 전차가 영토를 통과해 이동했던 것을 묵인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중립성에 대한 해석은 시간이 지나면서 크게 변했다.(3)
제2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함께 패전국이 됐고, 4개 지역으로 분할통치될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독일과 달리 오스트리아는 위기를 모면했다. 1955년 오스트리아는 소련과 협상 끝에 향후 영세중립(Permanent neutrality) 정책을 유지한다는 전제조건 하에 오스트리아의 완전한 주권을 보장하는 모스크바 각서(Moscow Memorandum)를 체결했다. 이 각서를 기반으로 4개 연합국과 국가조약을 맺음으로써 오스트리아는 독립국이 됐다.(4) 같은 해, 오스트리아 의회는 영세중립을 성문화해 연방헌법 조항으로 채택했고, 연합군은 철수했다.
독일 또한 비슷한 길을 갈 수도 있었다. 1952년 스탈린은 독일 양측에 중립을 전제로 한 통일을 제안했다. 당시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여당이던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 간부 일부가 제안 수락을 진지하게 검토할 것이라 발표했다. 그중에는 야코프 카이저 연방전독일문제부 장관도 있었다. 그러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와 미국의 반대에 부딪혔다. 오스트리아가 영세중립을 선언한 그해에 서독은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했다.
이 시기 중립에 대한 논의는 비단 군사동맹에 국한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와 독일 모두 경제정책의 중립을 꾀했다. 기독교민주연합 내 좌파세력은 소련식 계획경제와 앵글로색슨식 자본주의 사이 중도를 택했다. 1947년 정당이 발표한 알렌 프로그램은 핵심 산업의 국영화, 그리고 “기독교식 책임에 기반한 사회주의”를 담고 있다. 아데나워 총리와 연합국은 이런 경향을 저지하며 서독 주요산업을 민간에 남기고자 했다. 주요 산업 대부분은 크반트(BMW), 포르셰-피에히(폭스바겐)나 플릭 가문처럼 나치 독일에 협력한 이들의 손에 놓여 있었다.(5)
오스트리아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오스트리아는 1946~47년 두 차례에 걸쳐 도입된 ‘국영화법’을 통해 은행 및 핵심 산업, 에너지 산업을 국영화했다.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협동조합이나 공공부문이 소유한 부동산은 독일에 비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했다. 오늘날 빈 소재 아파트의 약 1/2이 협동조합이나 공공기관소유다. 반면, 베를린에서 이 수치는 1/4이다.(6)
크라이스키가 얻어낸 ‘소극적 안보 보장’
중립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오스트리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됐다. 이와 관련 깊은 인물로 오스트리아 사민주의 정치가 브루노 크라이스키가 있다. 1953~59년 외무차관, 1959~1966년 외무장관, 1970~1983년 총리를 역임한 크라이스키는 ‘능동적’ 혹은 ‘참여’ 중립 정책을 펼쳤다.(7) 1960년대에 크라이스키는 서구권 외무장관 사상 최초로 불가리, 루마니아, 헝가리를 방문했다. 그는 다가올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1969~1974년)의 데탕트(긴장 완화) 정책에 물꼬를 텄다. 둘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스웨덴으로 함께 피난길에 오를 만큼 친한 사이였다.
크라이스키는 1973년 7월부터 1975년 8월까지 헬싱키와 제네바에서 개최된 유럽 안보 협력 회의(Conference on Securityand Cooperation in Europe, CSCE)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975년 8월 1일 헬싱키 협정이 최종 승인됨으로써 냉전 종식의 제도적 기틀이 마련됐다. 이 흐름은 1995년 빈에 본부를 둔 유럽안보 협력 기구(OSCE)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크라이스키의 주도로 유엔 산하 기구 다수가 빈에 자리를 잡았다. 크라이스키가 외교적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오스트리아의 국제적 명성이 커졌고 일종의 ‘소극적 안보 보장’(핵보유국이 비핵보유국에 핵공격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함)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크라이스키는 이스라엘 정부와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끌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화해에 관여했고 1993년, 마침내 오슬로 협정이 체결됐다. 오스트리아는 비동맹 운동을 통해 스웨덴(올로프 팔메 스웨덴 총리도 크라이스키의 친구였다)을 비롯한 다른 중립국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며 ‘새로운 세계 경제 질서’를 추구했다. 오스트리아가 국제사회에서 맡은 역할은 작은 영토에 비해 훨씬 큰 것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부른 논쟁
1967~1983년 크라이스키가 당수를 맡았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은 외교 및 경제적 이유로 유럽공동체 가입을 반대했다. 1986년 창립된 녹색당도 뜻을 같이 했다. 하지만 같은 사민주의 노선이던 프란츠 프라니츠키 총리는 1989년 유럽공동체 가입 신청을 했고, 1991년 7월 31일 유럽위원회가 이에 대한 의견서를 발표했다. 유럽위원회는 “경직성”과 “뚜렷한 동업조합주의 성향”, 공공부문의 “상대적으로 약한 생산성이 경쟁력을 위협한다”라고 개탄하는 한편, 오스트리아의 중립성을 “특수한 문제”로 간주했다. 1990~2000년대 이뤄진 대규모 민영화, 그리고 유럽위원회의 구조조정안을 따르면서 오스트리아 정부는 첫 번째 유보조항을 걷어냈지만, 동시에 경제적 독립성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중립성 원칙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유럽연합의 공동 외교 안보 정책(CFSP)에 활발히 참여했다. 유럽연합조약 중 ‘아일랜드 조항’은 국방정책이 “특정 회원국의 특수성”을 침범하지 않는 것을 명시한다. 실제로 오스트리아는 유럽군 및 유럽평화기금(European Peace Facility, EPF)에 참여하고 있다. 유럽평화기금은 위기 지역에 무기를 수출하는 것으로 비판을 받기도 하는 기금이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유럽군 조직에 참여하고자 1990년 국가조약의 몇몇 조항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소련은 이에 항의했고 서구 강대국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대외정책의 방향성을 둘러싼 논쟁이 불거졌다. 보수-녹색당으로 이뤄진 정부 내에서 중립성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예컨대, 클라우디아 타너(국민당, 보수파) 국방장관은 우크라이나 지뢰 제거 작업 원조를 거절하는 입장이고, 알렉산더 판데어벨렌(전 녹색당 소속) 대통령이자 군 통수권자는 공개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여당들이 만장일치로 채택한 사항이 있으니 바로 대규모 재군비다. 오스트리아는 2025년까지 군비를 두 배로 늘릴 계획이다.
주요 정당들을 벗어나면 논쟁의 규모는 훨씬 커진다. 경제 로비스트 군터 펠링거가 이끄는 소수단체는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주장하지만 대중과 정계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한편, 다른 중립 반대파 오스트리아가 유럽연합에 더 깊이 들어가, 유럽연합 차원의 국방이 가능해질 것이라 기대한다. 로베르트 메나세의 경우, “힘에 의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의 일환으로 주권 유럽을 소망한다. 위기상황에서 자국을 방어할 수 있고, ‘중립국 오스트리아라는 허상’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메나세는 오스트리아가 초강대국의 충돌 한복판에 놓일 위험이 있다며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반대한다. 핵심은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다.
다리를 잃어버린 오스트리아
린츠 평화연구회 소속 제랄드 오베란스마이르 같은 중립 찬성파는 어느 한 공동체에 소속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이런 공동체는 점점 군사화 되고, 제국주의, 혹은 신식민지주의 강대국처럼 행동하기 쉽다. 영국 수필가 티모시 가튼 애쉬라면 찬성했을 선택지지만 말이다.(8) 빈 대학 소속 정치학자 하인츠 가트너도 유럽의 외교 주권을 지지한다.
참여 중립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가트너는 2014년 3월, 목전에 다가온 전쟁을 피하고자 우크라이나를 오스트리아처럼 중립국화할 것을 제안했다. 얼마 후 헨리 키신저가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9) 2014년 당시 외무장관 제바스티안 쿠르츠가 주장을 이어받았지만 공식 정부 인사였던 만큼 이내 입장을 철회했다. 가트너는 이를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압력이 작용한 결과로 여긴다.
참여 중립의 황금기는 명백히 과거의 일이 됐다. 2010년대에 오스트리아가 북대서양조약기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무기금지조약 체결에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다른 문제에선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입장에 순응했다. 2022년 3월 우크라이나 정부가 제안한 휴전협정은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포기를 담고 있었다. 제안은 오스트리아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오스트리아는 튀르키예, 이스라엘, 브라질, 인도 및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이 시도했던 것처럼 솔선해서 휴전협상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서구에서 고조되는 긴장,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핵무기의 위협 앞에서 독립적이고 믿을 만한 유럽 국가가 남반구 비동맹 국가를 향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 가트너는 “집단적 사고는 생각을 가로막기 마련”이라고 일깨운다. 새로운 군비 경쟁에 나서기보다,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를 본보기 삼아 국제 진영 사이 다리를 놓아줄 제도기관을 옹호한다. 과거 오스트리아는 이 같은 다리 역할의 전문가였다. 이제는 형식적인 중립국으로 힘겨운 다리 찢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 6월, 카를 네함머 총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 소속 유럽 국가들과 함께하는 유럽 방공시스템인 스카이쉴드(Sky Shield)에 가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여전히 중립국인 채 말이다.
글·파비앵 샤이들러 Fabien Scheidler
기자, 『La Fin de la mégamachine 거대기계의 종말』 (Seuil, Paris, 2020)의 저자.
번역·정나영
번역위원
(1) ‘Prominente fordernernsthafte Diskussion über Verteidigungspolitik’, <Der Standard>, Vienne,2022년 5월 22일.
(2) ‘Nehammer: Österreich bleibt neutral’, <Kurier>, 2022년 3월 8일, https://kurier.at
(3) Franz Cede & ChristianProsl, 『Anspruchund Wirklichkeit. Österreichs Außenpolitik seit 1945』, Studien Verlag, Innsbruck, 2015.
(4) 연합국의 요청으로 국가조약에 중립에 대한 내용이 명시적으로 기재되지는 않았다.
(5) David de Jong, 『Nazi Billionaires. The DarkHistory of Germany’s Wealthiest Dynasties』, Mariner Books, New York, 2022.
(6) ‘빈의 공공주택 건축과 베를린의 주택 건축 지원’, 2018년 9월 28-29일 베를린 학술대회발표논문집, Kommunalpolitische Forum, https://www.kommunalpolitik-berlin.de
(7) ‘참여 중립’이란 하인츠 가트너가 만든 표현이다. Heinz Gärtner (총괄), 『Engaged Neutrality. An Evolved Approach to the Cold War』, Lexington Books, Lanham, 2017.
(8) Timothy Garton Ash, ‘Postimperial Empire’, <Foreign Affairs>, New York, 2023년 5-6월.
(9) Heinz Gärtner, ‘Kiew solltesich Neutralität Österreichs ansehen’, <Der Standard>, 2014년 3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