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프랑코 그림자, 스페인 국민당 재기할까?

2023-08-31     마엘 마리에트 l 기자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가 지난 8월 22일 우익 국민당(PP)의 알베르토 누네스 페이호 대표를 차기 내각을 구성할 후보자로 지명했다. 펠리페 국왕은 이 발표에 앞서, 페이호 국민당 대표 및 현 총리대행을 맡고 있는 페드로 산체스 사회당(PSOE) 대표와 각각 사전 협의를 거쳤다. 이에 앞서 실시된 7월 23일 총선에서 산체스 전 총리의 PSOE당은 바스크, 카탈루냐, 갈리시아 지방의 지역 민족주의 정당들의 지지를 얻어 121석을 얻었으나 집권당이 되지 못했다. 프랑코의 후광을 등에 업은 국민당은 137석으로 과반수를 못 넘긴 채 제1당이 되었다. 좌파정당 수마르는 31석을 얻었다.

 

지난 5월 29일 TV 연설에서, 스페인 총리 페드로 산체스는 심각한 얼굴로 조기 총선을 선언했다. 2018년 집권을 시작한 스페인 정부의 수반은 연말로 예정됐던 투표를 7월 23일로 앞당겼다. 이 발표는 그가 대표를 맡고 있는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이 시의원 및 지방 선거에서 참패한 다음 날 나왔다. 스페인의 주요 보수 정당인 국민당(PP)이, 지금까지 사회당이(직접 또는 연정으로) 이끌었던 10개 지역 중 6개 지역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것이다. 

물론 그중 5개 지역에서는 우익이 절대 우위를 점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익은 극우 정당 복스의 지지를 확보해야 하지만, 협상은 이미 성공한 적이 있다. 국민당은 스페인의 3,4번째 도시인 발랑스와 세비야 시청도 접수했다. 좌익은 2022년부터 알베르토 누네스 페이호가 이끄는 국민당을 깎아내리면서, 이 ‘반동적 기류’를 차단하고, ‘초보수적 물결’을 막거나 나아가 ‘극우를 저지’해야 한다는 말을 반복해 왔다. 이런 전략이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만큼 효과가 없었음에도, 이렇게 비난을 일삼는 근거는 무엇일까?

국민당의 기원은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과 그 추종자들이 피로 얼룩진 스페인 내전(1936~1939)에서 승리한 뒤 세운 프랑코주의 체제에 있다. 국민당 지도자들 대다수는 프랑코주의 엘리트의 후손이다. 특히 이들 중 소수 개혁파는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한 후 스페인을 민주주의로 이끌었다. 1976년 10월, 독재정권 당시 정보 관광부 장관을 지낸 마누엘 프라가 이리바르네가 인민동맹당(Alianza Popular, AP)을 창당했고, 이 인민동맹당이 10여 년 뒤 지금의 국민당이 된 것이다. 국민당의 원래 목표는 카우디요(Caudillo, 스페인어로 ‘지도자’, 여기서는 프랑코 장군을 가리킴-역주) 정권의 정치 가문을 아우르는 7개 정치 조직을 연합하는 것이었다. 프랑코주의 고위 인사 7명, 일명 ‘위대한 7인’이 주도한 7개 정치조직은 ‘기술관료, 기독민주주의자, 팔랑헤 당원과, 민족주의 및 오푸스 데이(Opus Dei, ‘신의 사역’을 뜻하는 라틴어로, 에스파냐인 신부 에스크리바가 1928년 창설한 가톨릭 종교단체-역주)’(1)로 강하게 결속된 가톨릭 전통주의자를 말한다.

인민동맹당 전 사무총장 호르헤 베르스트린헤는 “인민동맹당은 프랑코주의의 종식 이후 절차에 협력하고 과도기에 참여하며, 프랑코가 남긴 정치적 공백을 메우고자 설립됐다”라고 설명했다. 이 조직의 구성원들은 ‘정권에서 밀려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1978년 12월 6일의 현행 헌법으로 이어지는 제헌선거 절차에 참여했다. 베르스트린헤는 “그러나, 인민동맹당 의원 절반은 헌법에 투표하기를 거부했다. 가장 큰 이유는 헌법이 지역에 부여한 자치권 때문이었다”라고 덧붙였다.

 

희미해지는 프랑코의 그림자 

1982년과 1986년 총선에서의 실패(스페인 사회노동당의 압도적 승리)와 파벌들 사이의 분열은 내부 위기로 이어졌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프라가 이리바르네는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당내 서열을 강화하는 새로운 강령을 제정한다. 이렇게 인민동맹당은 국민당이 됐고, 1987년 이후 카스티야 이 레온 자치구의 젊고 야심 찬 주지사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는 1989년에 프라가 이리바르네의 뒤를 이어 국민당 대표가 됐다. 

이후 개혁의 시간이 시작됐다. 아스나르는 “자유주의, 보수주의, 기독-민주주의 사상의 자유로운 공존”이 목표인 대규모 통합 우익 정당을 건설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자신의 젊은 팀과 함께 스페인 전역에서 존재감을 확립시킬 임무를 맡은 강력한 정당을 제시했다. 새 지도부는 당을 제도화하고, 선거에서 더 나은 성과를 거두기를 희망했다. 아스나르가 말하는 ‘공존’에는 제한이 있다. 그는 1996년 제12차 국민당 회의 직전에 이렇게 말했다. “국민당에는 오직 220볼트의 전류만 흐른다. 콘센트는 내가 제어한다. 콘센트에 손가락을 넣는 사람은 누구나 감전된다!”(2) 

마드리드 카를로스 III 대학 정치학자 파블로 시몬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익은 스페인 사회노동당에 대적할 만한 강력한 정당을 만드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우익은 거의 20년 동안 야당에 머물렀다. 거기서부터 아스나르 집권기에 매우 수직적이고 계급적이며 중앙집권적인, 당대표 중심의 구조가 구축된 것이다. 현 당대표인 알베르토 누네스 페이호는 지도부가 단일 후보를 선택했을 때 당선됐다. 그러니 사실상 그는 지명된 것이나 다름없다.” 역사학자이자 비영리 활동가인 파블로 카르모나는 이것이 내부 분열을 극복해야 한다는 의사 표명일 뿐 아니라, 권위주의적인 당이 고수하는 어법의 하나라고 본다. 

카르모나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매우 프랑코적인 전통이다. 내전이 끝나갈 무렵, 프랑코는 그의 유명한 ‘단일화법’을 통해, 무슨 일이 있어도 위계질서는 지켜져야 한다는 군사적 논리에 따라 자신이 다수의 정치권력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개의 팔랑헤 당 ‘파시스트 정치조직’을 하나의 보호막 아래 단일화하기로 결정했다. 이로부터 국민당에서처럼 인민동맹당 내에서도 지역주의의 적(敵), 좌익, 공산주의, 프리메이슨 등에 맞서 단결해야 한다는 사상이 나온다.” 이어서 파블로 시몬이 “영토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협상이 힘겨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도부는 결국 대부분의 지방 및 지역 지도자들로부터 어느 정도 동조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국가 지도부가 지방 차원에서 후보자들을 종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역사학자 훌리안 카사노바에 따르면, 스페인 우익의 가장 큰 문제들 중 하나는 “유럽의 우익과 달리, 스페인 정치 전통에 따르려고 분투한다는 것”이다.(3) 예를 들어 영국 우익은 프랑코주의와 달리,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유명한 보수주의 사상을 주장할 수 있다. 따라서 국민당, 그 전에는 인민동맹당이 역사적 선례를 인용해 스페인 보수주의를 합법화하려고 했다. 포스트프랑코주의 우익이 19세기 말에 사망한 안토니오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에서 비롯된 자유-보수 전통을 이용했을 때, 이 전략은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데 꼭 필요했다. 

역사학자 카를로스 다르데는, 이 전략이 민주주의의 허울을 쓰고 그 지도자들을 “프랑코의 자식들이 아닌 카노바스의 자손들”(4)처럼 보이게 하려 했다고 썼다. 또한 전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1979~1990 재임)와 전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1981~1989 재임)이 1980년대에 행한 신자유주의-보수주의 반(反)혁명도 참고했다. 역사학자 하비에르 투셀이 보기에 “전통적 우익 출신의, 신세대 국민당 멤버들(팔랑헤 당원이었던 아스나르처럼) 다수가 급진적 자유주의자로 변모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 자유주의는 보수주의 우익과 연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근대적인 이론적 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5) 프랑코의 그림자는 국민당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역사적 복잡성을 극복해야 한다”

이에 대해, 카르모나는 “이는 사회주의자들을 몰아내고 대중성을 얻을 수 있는 신자유주의 논리에 근거해 담론을 쇄신하자는 발상이었다”라고 분석했다. “강력한 개입주의 경제정책을 펼쳤던 프랑코주의의 유산을 일부 극복하고, 보다 유럽적인 보수주의, 보다 교조적인 자유주의, 보다 대서양주의적인 태도로 선회해야 했다.” 국민당의 많은 지도자들은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나 대서양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실용주의를 표방한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가 집권 당시 제창했던 ‘제3의 길’이 선거에서 성공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고, 자신들이 아스나르가 주장한 ‘개혁의 중심’과 이념적으로 유사함을 강조했다. 이후 20년간 야당에 머물렀던 우익은 유럽 우익을 지지하는 전통적 유권자들 덕분에 1996년 3월 3일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고 집권에 성공했다. 

마드리드 카를로스 III 대학 정치학자이자 교수인 기예르모 페르난데스 바스케스는 “당시 남성, 고소득자, 가톨릭 보수주의자,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집권당의 주축을 이루었다”고 분석했다. 한편 그는 “도시의 유권자만큼 시골의 유권자도 중요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우익은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따라서 국민당은 향후 유권자를 확대하고, 특히 의회에서 안정적 다수를 구성하고자 강령을 완화했다.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려면 스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두 민족주의 정당인 카탈루냐통합당(CiU)과 바스크국민당(PNV)의 지지가 필요했다. 이 두 정당은 사회-경제적인 성향이 국민당과 유사하다. 아스나르는 그 두 정당의 보수주의적 인지도를 볼 때, 스페인 통합에 큰 위험요소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한 듯하다.

그러나 아스나르와 그의 첫 정부는 창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규제완화, 세금 감면, 민영화, 긴축 재정, 유럽연합 경제통화동맹 우선 가입 등 신자유주의의 방법론들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와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대중을 놀라게 했고, 낙태 합법화를 철회하지 않았다. 이것은 전략적인 조치였다. 국민당은 2000년에 이어진 총선 때 의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확보한 뒤, 공립 초등학교 및 중학교에 종교 의무교육을 재도입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아스나르는 이렇게 소속 당의 이념적 뿌리와 더 긴밀하게 연결되는 정책을 이어나갔다. 

1990년대 중반부터 아스나르는 스페인에 “어떤 역사적 복잡성”을 극복하자고 촉구했다. “최근의 프랑코주의적 과거는 우리가 차지했던 지위를 부정하거나 부끄러워하는 태도를 좌익에 부추겼다.”(6) 아스나르 정부에서 역사 수정주의는 주로 보수주의자들에게 나타난다.(7) 언론인이자 작가인 피우 모아를 필두로 한 ‘신진 역사학자들’은 ‘공산주의의 위협’ 앞에서 프랑코주의가 부흥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보기에는, 오직 군사정부만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 프랑코주의는 스페인을 번영과 민주주의로 이끌었을 것이다. 프랑코주의는, 자유주의적인 보수단체 내에서 전체주의가 유럽을 위협하는 시기에 ‘불가피한 현상’으로 널리 인식됐다. 

아스나르 정부는 카우디요 정권에 호의적이기는커녕, 교회와 우익 언론(스페인에서 독자가 가장 많은 일간지 <엘 문도(El Mundo)〉, <ABC〉, <라 라손(La Razòn)〉과 스페인 가톨릭교회가 소유한 그룹 COPE의 라디오)이 지지하는 이념적 프로그램들을 장려했다. 역사학자 프란시스코 에스피노사 마에스트레에 따르면 “피우 모아는 황금 시간대에 공중파 TV에 출연할 만큼 위상이 높아졌다. 아스나르는 이번 여름 피우 모아의 책을 읽을 예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8) 

 

‘스페인의 황금시대’를 찾아 미국과 손잡다
 
또한 아스나르는 특히 왕립역사아카데미(RAH) 같은 기관들이 발간한 저작물들을 통해, 스페인의 ‘황금시대’를 강조하며 스페인 역사를 재해석하는 프로그램의 제작과 보급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002년 1월 마드리드에서 열린 제14차 전당대회에서 발표된 한 문헌에는 스페인이 “역사와 보편적 문화에 대한 기여와, 유럽과 아메리카라는 두 세계에 뿌리 내린 역사적 프로젝트”(9)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쓰여 있다. 국민당이 정복자 스페인의 현대적 ‘황금시대’와 다시 연결을 맺으려는 의지를 보이면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스페인은 미국과 더 가까워졌다. 프랑코는 1953년에 정권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경우 스페인 쪽에서 그 고립을 깰 수 있다는 협정을 미국과 맺은 바 있다. 

2003년 봄, 아스나르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스페인의 다른 정당들과 여론을 무시하고, 전쟁 개시 전에 정부가 의회에 승인을 요청해야 한다고 명시한 헌법을 위반하며 워싱턴을 지지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의 침공을 반대하는 프랑스와 독일에 맞서, 아스나르는 스페인이 대서양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에 기초한 ‘강력한’ 새 유럽의 리더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다음 해에 스페인 사회노동당이 재집권함으로써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2003년 3월 아조레스 정상회담에서 찍은 사진에는 스페인 총리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옆에서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보수 성향의 싱크탱크인 전략연구그룹(GEES)은 “몇 년 전이었다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10)이라며 기쁨을 표했다. 이 사진은 아스나르의 국민당이 해외에서 펼친 정치에서 절정의 순간으로 남을 것이다. 총선 3일 전인 2004년 3월 11일, 마드리드 한복판에서 발생한 이슬람의 공격은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국민당이 확실히 우위였던 판세를 뒤집었다. 정부는 투표 전날까지 바스크 독립단체 자유조국바스크(ETA)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거짓 주장을 멈추지 않았다. 거짓이라는 증거가 속속 드러남에도 말이다. 결국 정부에 대한 신뢰는 추락했다. 

아스나르가 취한 지정학적 제스처는 민족 감정을 강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동반한다. 이런 태도는 국민당이 헌법 제정 과정에서 포스트프랑코주의 우익의 급진적인 스페인 민족주의를 부르짖으며 모든 형태의 지방자치를 거부하게 만들었다. 1979년에 젊은 아스나르는 이미 일간지 <누에바 리오자〉에 이렇게 썼다. “스페인의 위대함도 통합을 거쳐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11)

국민당 창당멤버이자 프라가 이리바르네의 측근이며, 1989~2000년 바르셀로나 의원을 지낸 카탈루냐 출신의 마누엘 밀리안은 이렇게 말했다. “1989년 국민당이 창당됐을 때, 나는 연방의 방식으로 지역에 따라 고유한 개성과 성격을 지닌 당의 지역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스나르는 듣지 않았다. 그는 스페인 통일왕국의 주역이었던 ‘카스티야’를 추종했다. 그에게 스페인은 절대적으로 ‘하나’다. 그는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1989년 아스나르가 설립했고 현재 의장을 맡고 있는 신보수주의 싱크탱크인 분석사회연구재단(FAES) 소속 역사학자 페르난도 가르시아 데 코르타사르는 “변방 민족주의의 지방 부족주의에 직면한 (…) 스페인이라는 국가의 도덕적 우월성을 명분 삼아”(12) 이 정책의 합법성을 정당화했다. 

2005년에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자파테로의 사회당 정부가 2006년에 채택 예정인 카탈루냐 자치령 개혁 절차에 착수했을 때, 국민당과 주요 우익 언론은 카스티야의 ‘언어적 박해’를 외치며 카탈루냐 상품 불매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새 자치 법령이 일부다처제와 안락사를 허용한다고 거짓 주장을 펼쳤으며, 법조문이 스페인의 ‘분열’과 ‘분단’을 조장한다고 주장해 스페인 사회의 양극화를 부추겼다. 밀리안에 따르면, 국민당의 이런 태도는 “카탈루냐의 독립 요구와 더불어 오늘날 관찰되는 초국가주의”를 설명한다.

2010년, 국민당의 요청에 따라 헌법재판소는 카탈루냐 자치법을 부분적으로 효력 정지했다. 밀리안은 “이 불씨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결말, 즉 2017년 10월 카탈루냐의 일방적 독립 선언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스페인 정부의 요구에 따라 헌법재판소를 불법으로 규정한 국민투표 후, 경찰의 무력탄압이 있던 날 이 지역 주민들은 독립에 찬성 입장을 밝혔다. 몇 주 동안 긴장, 시위, 파업, 양극화가 스페인을 둘로 갈라놓은 끝에, 마리아노 라호이 정부는 모든 중재를 거부하고 결국 스페인 역사상 최초로 헌법 제155조를 발동했다. 헌법 제155조는 국가가 권위주의적으로 한 지역 전체의 자치권을 중단할 수 있는 조항이다. 

라호이는 2004년 아스나르에 의해 당대표로 임명됐다. 우익 일간지 <엘 문도〉의 기자 루시아 멘데스에 따르면, 라호이의 적법성은 “2011년 선거에서 승리할 때까지” 의심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국민당은 2008년의 부동산 거품 붕괴와 그로 인한 심각한 경제 위기로 선거마다 기록을 경신했고, 그 결과 로드리게스 자파테로의 사회당 정부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국민당의 신보수파인 아스나르 지지자들은 라호이가 종교적 가치 수호, 낙태 또는 동성 결혼 같은 사회 문제에 너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비난하면서, “지금까지 당 내부에 머물렀던 갈등이 외부로 표출됐다”고 했다.

 

시우다다노스와 복스, 우파의 부상

분석사회연구재단(FAES) 이사장인 하비에르 자르잘레요스에 따르면 그의 정책은 ‘당의 탈이념화’라는 특징을 가지며, 이를 위해 국민당은 이제 “강령에 충실한 운영, 상식, 사법적 정통성, 순조로운 의회 쪽으로”(13) 선회할 것이다. 멘데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런데도 “라호이에게 치명적이었던 것은 카탈루냐 문제였고 이를 빌미로 시우다다노스(Ciudadanos, 시민당, 중도우파)와 복스(Vox, 극우파)는 국민당과 국민당의 위기관리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6년간 정부 수반을 지낸 라호이는 국민당이 4,300만 유로의 뇌물을 수수한 ‘귀르텔 사건’의 제도화된 부패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자, 스페인 민주주의 역사상 최초로 내각 불신임 결의안에 의해 2018년 6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라호이의 뒤를 이어 사회당의 페드로 산체스가 총리에 취임했다. 국민당의 악몽은 현실이 됐고, 우파는 산산조각 났다. 

우선, 2006년 카탈루냐에서 출범한 지역 정당인 ‘시우다다노스’는 ‘분노한 이들’의 움직임으로 구현되는 정치적 대표성의 위기가 있었던 2015년부터 이미 강력한 발전을 경험했다. 오늘날 스페인의 정치 지형에서는 거의 사라진 이 자유로운 정당의 현대적 이미지는, 계속되는 부패 사건으로 얼룩진 국민당의 이미지와 대조됐다.

또한, 2013년에 창당한 극우파 ‘복스’의 부상도 엿볼 수 있다. 복스는 2017년 10월 카탈루냐 위기 때 스페인 전역에서 조직된 국가 수호 시위를 주도했고, 국민투표에 반대하는 뜻에서 스페인 국기를 발코니에 걸어두는 ‘발코니 혁명’을 이끌면서 존재감을 얻었다. 복스는 눈부신 부상으로 지난 5월 28일 지방선거 및 시의회 선거에서 스페인의 세 번째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정치학자 페르난데스 바스케스는 우리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국민당은 언제나 스페인 민족주의 정당이었고, 많은 사람이 카탈루냐 국민투표 이후 라호이가 너무 무기력하게 반응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라호이가 더 일찍 카탈루냐를 막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그래서 복스는 콤플렉스 있는 우파를 구현한다고 라호이를 비난했던 국민당의 전직 지도부로 구성됐다. 그들은 2002~2003년의 아스나르의 DNA가 당의 DNA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 우익들은 경제적 자유주의, 스페인 통합, 바스크와 카탈루냐의 민족주의 거부 등 많은 부분에서 일치한다. 그들을 구별하는 것은 바스크와 카탈루냐 민족주의와 사회 문제들을 얼마나 신랄하게 보느냐 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복스의 경우, 어느 정도는 프랑코 시절의 과거에 대한 향수를 전제한다”고 카르모나는 분석한다. 게다가 이 세 정당(국민당, 시우다다노스, 복스)의 지도부 중 상당수가 분석사회연구재단(FAES)을 거쳤고, 언론계 출신도 있다. 

일례로, 인테레코노미아의 사장 훌리오 아리자가 있다. 인테레코노미아는 아스나르의 두 번째 임기 동안 우파가 활개를 쳤던 2000년대에 떠오른 신보수주의 성향의 막강한 디지털 미디어 네트워크로, 훌리오 아리자는 “시우다다노스와 복스가 이곳에서 탄생했다. 우리는 그들이 유럽 선거에서 패해 선거를 접고자 했던 2014년의 힘겨웠던 시기에 특히 그들을 지지했다. 그들은 모두 인테레코노미아에서 투쟁했다. 2019년까지 시우다다노스 당대표였던 알베르트 리베라는 매주 회사를 방문했다”고 자랑했다.(14) 

현재 이 언론사의 수많은 진행자와 기자들은 국민당, 시우다다노스, 복스에 선거 명부와 이념적 중심들을 공급한다. 그들은 오늘날 이사벨 디아스 아유소와 20년 동안 신보수주의의 기반이 돼온 마드리드의 국민당이 구현하는 ‘열등감에서 벗어난’ 이 우파의 담론을 하루 종일 방송한다. 페르난데스 바스케스는 미디어가 지나치게 재현하는 이런 흐름의 영향은 “이 언론기관의 상당수가 마드리드에 기반하고 지역의 국민당 정부로부터 꽤 많은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의해 부분적으로 설명된다고 말한다. 

2018년에 국민당 대표에 임명된 파블로 카사도 역시 이 아스나르파 신보수주의 출신이다. 당의 이념을 ‘재편’하기로 결심한 그는 심각한 내부 갈등 끝에 2022년에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시몬은 카사도의 뒤를 이어 13년간 갈리시아 지방의 대표로 활동했던 누네스 페이호의 선택에 대해, “일이 잘못됐을 때 그들은 어떻게 하는가? 그들은 균형 잡기와 재시작을 반복한다”라고 조롱했다. 누네스 페이호는 “경제적 운영, 신뢰성, 그가 ‘대표직’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사회적 혹은 ‘도덕적’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시몬에 따르면 그의 보수주의는 “보기보다 더 현실적이다.” 

이어서 시몬은 국민당이 아직 운영되고 있다는 것에 다시 집중하는 전략적 움직임은 “당으로서는 거의 유전적이거나 사활이 걸린 문제다. 인민동맹당과 함께 탄생한 이래, 프랑코의 당이라는 이미지를 제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사회당의 역사적 지도자인 알폰소 게라는 이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들은 수년 동안 중심을 향해 갔는데, 아직도 중심에 도착하지 못했다. 대체 왜 그렇게 시간이 걸리는가?”(15)

 

글·마엘 마리에트 Maelle Mariette
기자

번역·조민영
번역위원


(1) Jesus Ynfante, ‘Résurrection de l’Opus Dei en Espagne 스페인 오푸스 데이의 부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6년 7월호.
(2) Juan González Ibañez, ‘El enchufe lo tengo yo y quien mete el dedo se electrocuta 콘센트에 손가락을 넣는 사람은 감전된다’, 〈El País〉, Madrid, 1996년 1월 9일.
(3) Ángel Munárriz, ‘La victoria de “los moas” : el revisionismo alcanza la cúspide de la derecha española “모아”의 승리: 수정주의가 스페인 우파의 정상에 도달하다’, 〈infoLibre〉, 2021년 7월 3일, www.infolibre.es
(4) Miguel Ángel Villena, ‘La sombra de Cánovas del Castillo llega hasta los “neocons”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의 그림자가 “네오콘”에 이르다’, 〈El País〉, 2008년, 11월 2일에서 인용.
(5),(11),(12) Javier Tusell Gómez, 『El Aznarato. El gobierno del Partido Popular, 1996-2003 엘 아스나라토. 국민당 정부, 1996-2003』, Aguilar, Madrid, 2003.
(6) José Mariá Aznar, 『Espaná, la segunda transición 스페인, 두 번째 전환기』, Espasa Calpe, Madrid, 1995.
(7) Pauline Perrenot & Vladimir Slonska-Malvaud, ‘Le franquisme déchire toujours l’Espagn 스페인을 분열시키는 프랑코 독재 정권의 망령’,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11월호, 한국어판 2020년 2월호.
(8) Francisco Espinosa Maestre, ‘El revisionismo en perspectiva : de la FAES a la Academia 수정주의의 조짐: FAES에서 아카데미아까지’, 〈Conversación sobre Historia〉, 2019년 9월 14일, https://conversacionsobrehistoria.info
(9) Josep Piqué & María San Gil, ‘El patriotismo constitucional del siglo XXI 21세기의 헌법적 애국심’, 2002년 마드리드에서 열린 제14차 국민당 의회에서 발표된 문서.
(10) Ignacio Cosidó, ‘Espaná, Europa y Estados Unidos : el poder militar 스페인, 유럽, 미국: 군사력’, Grupo de Estudios Estratégicos(GEES), 2003년 12월 16일.
(13),(14) Jesús Rodríguez, ‘La derecha se libera de complejos y ya no quiere ser de centro 우파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더 이상 중심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El País〉, 2019년 4월 14일.
(15) ‘Viaje al centro, pero ¿de quién? 중심으로의 여행, 그러나 누구를 위한 여행인가?’, 2020년 4월 5일, theobjectiv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