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에 갇힌 ‘테헤란젤레스’의 망명자들
“우리 성을 적지 마세요. 가족들이 아직 이란에 있어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자리 잡은 대규모 이란 커뮤니티는 흔히 연대감이 강하고 부유하며 진취적이고 그들끼리 잘 뭉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란 정권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높지만(일부는 이란 정권이 무너지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지만) 이곳 디아스포라(특정 민족이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집단을 형성하는 것 또는 그런 집단-역주) 내 정치적 부조화는 여전히 심각하다.
웨스트우드 대로는 로스앤젤레스 중심부, 캘리포니아 대학교(UCLA) 캠퍼스와 트렌디한 웨스트우드 빌리지 지구(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에 등장한 아르데코 영화관 폭스 시어터 타워가 있음) 바로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 웨스트우드 대로는 거대한 로스앤젤레스를 가로지르는 다른 직선 도로들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로체스터 애비뉴를 지나 웨스트우드 대로에 들어서면 마치 테헤란의 어느 거리를 로스앤젤레스로 옮겨놓은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간판 대부분이 페르시아어로 돼 있고, 카펫 상점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서적과 캘리그래피를 판매하는 서점도 있다. 청록색 도자기와 차 세트, 물 담뱃대, 이란식 주사위 게임인 타크테 나르드 세트를 판매하는 장인들도 있다.
“차이나타운은 많지만, 테헤란젤레스는 하나”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미국과 이란은 외교 단절 상태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이란으로 여행하려면 수많은 경유지를 거쳐야 해서 여행사도 아주 많다. 그런데 이곳의 레스토랑 간판에는 테헤란이나 페르시아, 샤프란, 장미, 난초가 들어가 있다. 길거리에서 들리는 대화 대부분은 페르시아어로 이루어진다. 배관공이 밴에서 내려 손님에게 페르시아어로 말을 하기도 한다. 지하 주차장 입구 표지판도 영어와 페르시아어로 돼 있다.
이런 웨스트우드 대로에도 전형적인 미국 느낌이 나는 곳이 있다. 드라마 <베터 콜 사울>에서 밥 오덴커크가 맡은 캐릭터처럼 자신의 서비스를 선전하는 변호사의 광고판이다. 다만 광고판 속 변호사의 이름은 앵글로색슨식이고 성은 이란 성이며 광고판 문구는 페르시아어로 돼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란계 미국인은 미국 전역에 거주하고 있고,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노스캐롤라이나나 켄터키에서 자랐다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왔다고 했다. 하지만 이란 태생으로 UCLA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케반 해리스는 “미국에 차이나타운이 많지만 테헤란젤레스는 단 한 곳뿐이다”라고 말했다.
상점 창문에 1979년 전복된 왕조의 상징인 사자와 태양 문장이 그려진 삼색기가 걸려 있는 곳이 많다. 퇴위당한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 국왕(1919~1980)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곳도 있다. 거리 양쪽에는 신호등과 가로등에 강렬한 청록색 포스터가 매달려 있고, ‘여성·생명·자유(Zan·Zendegi·Azadi)’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2022년 9월 16일 22세의 마흐사 아미니가 테헤란에서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된 뒤 구금 중에 사망하면서 촉발된 시위 슬로건이다.(1)
이란 달력에서 봄의 첫날이자 새해를 뜻하는 노루즈 축제를 맞이해 파흐랑문화재단은 웨스트우드뿐만 아니라 인근 윌킨스 대로(이란 출신 인구가 많아서 ‘페르시아 회랑’이라는 별명이 붙음)와 관광객이 많이 찾는 할리우드 대로 등 번화가 여러 곳에 포스터를 붙였다. 웨스트우드에는 마흐사 아미니의 초상화가 곳곳에 걸려 있고, ‘여성·생명·자유’라는 영어와 페르시아어 문구가 적힌 티셔츠와 모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모서리가 너덜너덜해진 포스터는 이란계 미국인 커뮤니티가 9월부터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직한 수많은 지지 시위를 떠올리게 한다.
로스앤젤레스 제5지구는 웨스트우드 대로와 로체스터 애비뉴 사이 사거리 이름을 ‘여성·생명·자유 광장’ 교차로로 변경할 계획이다. 윌킨스 대로와 교차하는 지점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현재 위치가 ‘테헤란젤레스’의 심장부인 페르시안 광장임을 알리는 금색 현판이 있다. 익명의 기부자로부터 기증을 받은, 붉은 글씨로 시위 슬로건이 적힌 거대한 흰색 표지판이 이곳 사거리를 굽어보고 있다. 레스토랑에서는 사프란 라이스와 함께 케밥 쿠비데가 나온다. 이란계 미국인들이 이란이나 이란의 금기 사항과는 거리가 먼 이곳에서 와인과 함께 먹을 수 있는 그릴 요리로, 분명히 캘리포니아산이다.
종교에 무관심한 사람들
2023년 4월은 라마단 기간이다. 하지만 테헤란젤레스에는 전혀 그런 기미가 없다. 카페와 레스토랑은 붐비고, 히잡을 쓴 여성들도 아무도 없고, 수염을 기른 사람들은 힙스터(hipster. 대중의 유행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패션이나 문화를 추구하는 사람-역주)들뿐이다. “라마단이요?” 익명을 요구한 이란계 미국인 상점 주인이 깔깔 웃으며 말한다. “이곳에서는 지금이 라마단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이란 커뮤니티의 권익을 증진하는 로비 단체인 이란계미국인공공업무연맹(PAAIA)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란계 미국인 중 무슬림은 약 27%에 그친다. 약 32%는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이며, 또한 약 25%의 종교는 유대교, 아르메니아 정교, 아시리아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바하이교(2) 등이라고 한다. 한편, 2014년을 기준으로 미국인은 8%만이 스스로 무신론자 또는 불가지론자라고 답했다. 25% 이상이 낙태하는 여성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장 근본주의적인 복음주의자(3)라고 답했다.
이란계 미국인 커뮤니티에 머무는 동안, 히잡을 쓴 사람을 단 한 명 만났다. 이곳에서 종교인은 기독교 전도자 두 명이 전부일 것이다. 이란계 미국인들이 이슬람 종교에 무관심하다. 죽음에 관해서도 담담하다. 동쪽으로 한 블록 떨어진 웨스트우드 공동묘지에는 이란계 미국인 수백 명이 묻혀 있지만, 1990년 망명 생활 중에 사망한 가수 하이예데의 무덤을 제외하고는 메카 쪽을 바라보는 무덤은 거의 없다. 2000년에 사망한 시인 나데르 나데르푸르의 비석에는 손가락질당하는 이란이 무너지면 그의 유해가 본국으로 송환될 것이라고 적혀 있기까지 하다. 9월에는 사라 포셋과 마릴린 먼로가 묻힌 이곳 공동묘지에 마사 아미니 기념관이 세워질 예정이다.
로스앤젤레스 남부 오렌지 카운티에는 무슬림 이란계 미국인이 많이 살고 있다. 2018년 9월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모하메드')의 손자 후세인이 순교한 날을 추모하는 아슈라 행사 기간 동안 독실한 시아파 신자 수십 명이 공공장소에서 쇠사슬로 자신의 몸을 직접 때리는 의식을 치렀다. 언론인 닐루파 만수리는 “무슬림이 아닌 이란인들은 그들에게 공동체의 수치라며 야유를 보냈다”라고 말했다. 만수리는 런던과 워싱턴에 본사를 둔 야당 언론 <이란 인터내셔널>의 로스앤젤레스 특파원으로 2009년 녹색운동 당시 체포되기도 했다.(4)
“역설적인 것은 그들의 시위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경찰이 개입했다는 점입니다.” 이슬람교를 믿는다고 해서 이란 정권에 충성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웨스트우드에서 몇 마일 떨어진 모터 애비뉴에 있는 시아파 모스크(관계자들은 우리의 인터뷰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에는 ‘여성·생명·자유운동’을 지지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PAAIA 자료에 따르면 이란계 미국인의 절반가량이 여전히 이란에 가까운 가족들이 있으며, 인스턴트 메시징 앱을 통해서 이란 가족들과 정기적으로 연락하고 있다. 이란에서 휴가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적어도 2022년 9월까지만 해도 그랬다. 우리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이란 당국이 이중 국적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이중 국적자들이 심문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는 등 이란 여행은 이제 너무 위험하다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란계 미국인들”
웨스트우드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두 남성은 “우리 성을 적지 말아주세요. 가족들이 아직 이란에 있어요”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많은 이란계 미국인들이 그렇듯, 존과 제임스라는 영어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죠. 중국계 미국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인종차별을 당한 적이 있을까? 70대의 제임스는 “‘인질극’이 벌어졌을 때만”이라고 대답했다. “그럴 때면 이탈리아인이나 라틴계인 척했어요.” 1979년 11월, 주테헤란 미대사관이 습격을 당했고, 1981년 1월까지 444일 동안 직원들이 인질로 잡혀 있었다.
40대의 존은 차별받은 적은 없다고 대답했다. “여긴 로스앤젤레스이고 모두 타지 사람들이죠. 에티오피아인들이 사는 동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열려 있어요. ‘레드넥(미국 남부지역의 보수적인 백인 시골 남성-역주)’이 많은 남부 지역에서는 인종차별이 심했을 겁니다.” 존은 1979년, 생후 7개월이었을 때 미국에 왔다고 했다. “부모님은 저를 말에 묶었고, 쿠르드족 월경 안내인들은 우리더러 산을 넘게 했습니다. 샤(국왕-역주)가 물러나기 몇 달 전, 아버지가 알고 지내던 미국인이 물라(이슬람교 율법학자-역주)들이 정권을 잡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으셨죠. 다른 이란인들은 이미 변화를 감지하고 1976~1977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미국에 투자했죠. 그들의 자산은 20배로 뛰었고, 큰 부자가 됐습니다.”
사회학자인 케반 해리스는 “남부 캘리포니아의 많은 사람들처럼 이란 이민자들도 1970년대에 부동산에 투자했다. 가격은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이란 이민자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란 이미지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업계에서 일하거나 엔지니어, 컴퓨터 과학자, 자유업(고도의 전문적인 지식을 수단으로 하는 독립자영업자 또는 그 직업-역주) 종사자들이다. 우버를 창업한 다라 코스로샤히, 이베이 창업자 피에르 오미디야르(프랑스 태생), 패션 디자이너 비잔 팍자드(2011년 사망) 등이 모두 이란 출신이다.
존은 “30만 달러가 든 결혼식 파티에 가본 적이 있다”라고 말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하지만 우리는 <선셋의 샤들(Shahs of Sunset)>에 나온 사람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란 커뮤니티가 가진 명성 덕분에 <브라보 케이블> 채널에서는 2012년부터 2021년까지 <선셋의 샤들>이라는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을 방영했는데, 해당 프로그램에서는 비벌리힐스에 사는 부유한 이란계 미국인들이 나왔다.
웨스트우드에서 동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이 세련된 지역에는 많은 디아스포라가 살고 있다.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이란계 미국인인 지미 델샤드는 비버리힐스 시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델샤드 전 시장은 1939년 쉬라즈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스무 살에 두 형제와 함께 이란을 떠났다. “우리는 미네소타에 살았습니다. 학비를 마련하려고 델샤드 트리오라는 그룹을 결성해서 결혼식에서 연주를 했죠. 저는 산투르(이란의 전통악기-역주)를 연주했고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을 때 이란 출신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20세기 초 시카고에 정착한 소수의 상인들을 제외하면 샤 왕정이 몰락하기 전까지 미국에는 이란계 이민자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유학 때문에 미국에 머물렀다. 이란의 독재자는 청년들이 자국 캠퍼스에서 봉기하는 것보다 외국 대학에 다니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슬람 혁명 이후 많은 이란인들이 도피길에 올랐지만, 1979년 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많은 청년들은 민주주의를 꽃피우겠다는 희망을 안고 이란으로 돌아갔다. 익명을 요구한 파리흐는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위해 돌아갔지만 체포됐습니다”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호메이니는 혁명을 왜곡했습니다. 이란의 좌파는 이슬람 혁명 이후 숙취와 함께 정신을 차렸습니다”라고 사회학자 케반 해리스는 말했다. “그들에게 ‘샤’는 제국주의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호메이니와 함께 있게 됐죠…” 탄압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선호했다. 초기 이란계 이민자들은 소수 민족, 이라크 전쟁(1980~1988) 동안 아들의 징집을 걱정하는 부모, 탈영병, 그리고 1999년 이란 학생 시위, 2009년 이란 대통령 선거 항의 시위, 2022년 마흐사 아미니 사망 이후 촉발된 이란 시위 등 계속된 시민저항운동의 물결과 함께 했다.
망명자들의 다양한 사연
로스앤젤레스에서 VTC(운전기사가 딸린 승용차-역주)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는 바흐만은 이라크 전쟁 참전 용사로 이란 정권이 “헌병대에 입대해서 시위대에게 총을 쏘라”고 하자 탈영했다고 말했다. 그는 휴대폰으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스타들과 함께 등장하는 자신의 모습이 담긴 스크린샷을 보여주며 “할리우드에서 엑스트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게 제 꿈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어떤 택시기사는 씁쓸한 표정으로 털어놓았다. “나는 이슬람 혁명을 일으킨 바보들 중 한 명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떠났다. 탄압과 부패뿐이었다.”
프레드의 경우에는 도망을 쳐야 했다. “2009년 이후 바하이교도인 저는 이란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파리사는 20년 전에 이란을 떠났다. 그녀는 “터키에 있던 망명 초기 몇 달은 히잡을 벗지 않았어요. 억압이 내면화된 거죠”라고 떠올렸다. 10년 전에 미국으로 온 40대 레자는 “1999년과 2009년에 시위에 참가했어요. 저도 부모님도 독실한 신자는 아닙니다. 이란이 추구했던 모습은 실제 국가의 모습과는 동떨어져 있어요.”라고 말했다.
원래의 이란계 미국인 커뮤니티는 대부분 왕정주의자였지만, 40년간 다양한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변화했다. PAAIA가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왕정 회복에 찬성하는 사람은 12%에 불과하다.(5) 케반 해리스는 “왕정에 대한 낭만적 향수를 품고 있는 사람들과 팔레비 정권으로부터 실제 혜택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왕정주의자’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의견이 갈리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60대인 에릭은 “제 삼촌은 경찰 때문에 돌아가셨지만 저는 샤를 좋아합니다. 샤는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셨어요. 전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샤의 아들인 레자 팔라비는 1960년생으로 현재 메릴랜드에 살고 있으며, 입헌군주제를 선호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에릭은 이란으로 ‘가끔’ 돌아갔다고 했다. 하지만 시위에 참가한 친척이 살해되자 충격을 받아 9월에 “이란 여권을 불태워버렸다”고 했다.
현재에 대한 거부는, 과거의 미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로스앤젤레스 남부에 위치한 어바인 대학교의 페르시아 연구과 전 학과장 나스린 라히미에는 이렇게 전했다. “사람들은 당시의 삶을 그리워합니다. 하지만 샤 정권은 국민들이 봉기하게끔 만들었습니다. 당시 저는 어렸지만 집 밖의 강요된 침묵과 사회에 퍼진 공포를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되돌아온 사람들은 고문으로 망가졌고요.”
그녀는 또한 샤 정권의 혼란스러움과 지나친 야심, 그리고 1971년 페르세폴리스에서 열린 왕정 수립 2,500주년 기념 행사의 사치스러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떠올렸다. “고대 사극 같았어요!” 왕정의 연속성은 신화와 같다. “2,500년 동안 여러 왕조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학살했습니다. 샤 자신도 쿠데타를 일으킨 대령의 아들입니다.” 1921년 영국에 의해 왕위에 오른 수비대장 레자 칸이 그의 아버지다.
이란계 미국인의 과반수(60%)는 현재 의회공화제를 원한다. 개혁된 이란 이슬람공화국의 출현을 희망하는 이들은 극소수(12%)에 불과하다. 2005년 개혁가 모하마드 카타미 대통령의 뒤를 이어 보수적인 마흐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그 희망은 사라져버렸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마지막 단계이지 첫 단계가 아니다”라고 웨스트우드 상공회의소의 루즈베 파라하니푸르 회장은 말했다.
파라하니푸르 회장은 1953년 영국-이란석유회사의 국유화를 단행했다는 이유로 CIA가 선동한 쿠데타에 의해 실각한 모하마드 모사데그(‘모시’라고 부름) 전 총리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파라하니푸르 회장은 1999년 학생 봉기의 주도자 중 한 명이었다. “체포됐고 고문당했습니다. 그러다 보석으로 풀려났죠. 재판 직전 한 신문에 오보가 났습니다. 제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 오보 덕택에 살았습니다. 터키로 가는 장거리 버스 짐칸에 숨어 이란을 떠났으니까요.”
조로아스터교도인 파라하니푸르 회장은 난민 신분으로 2000년 5월 웨스트우드에 도착했고, 지역 사회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그들은 저에게 300달러를 빌려주고 식료품점 위의 방 한 칸과 일자리를 제공했습니다.” 20년이 지난 현재 그는 웨스트우드 대로에 세 번째 레스토랑을 오픈했다. 할리우드 사진으로 장식된 전형적인 미국식 정찬을 제공하는 레스토랑이다. 이란 체제에 반대하는 그는 지칠 줄 모르고 2009년 여름 녹색혁명을 돕기 위해 이란으로 비밀리에 출국하기도 했다. “위성 전화기를 들고 산속에 있었습니다. 테헤란에 도착하기 전에 돌아서야 했습니다. 너무 위험했으니까요.”
“여성·생명·자유운동은 이란 정권의 마지막 장”
그는 ‘모시’와 마하트마 간디의 초상화로 장식된 회의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곳에서 이란의 붕괴를 위해 일하는 각계각층의 반체제 인사들을 만납니다. 무섭지 않습니다. 그렇게 적으셔도 좋습니다.”라고 그는 웃으며 설명했다. PAAIA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란계 미국인 가운데 이란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은 7%에 불과하다.(6) 지난 10월, 일부 이란 정권 지지자들이 ‘여성·생명·자유운동’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테이블이 있는 그의 페르시아만 레스토랑 기물을 파손했다.
이란 언론에는 그에 관한 기사가 정기적으로 실리고 있다. “그들은 심지어 그리스 식당을 열었다는 이유로 저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란을 싫어한다는 증거라고 하더군요. 페르시아와 그리스는 고대에 적대국이었으니까요!” 그의 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샴페인 한 병이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다. “여성·생명·자유운동은 이란 정권의 마지막 장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몇 장은 길어질 수 있죠.”
뉴욕에 거주하며 언론과 소셜 네트워크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이란계 미국인 언론인 마시 알리네자드가 이란 정권의 요원들에게 납치될 뻔한 일도 있었다. 웨스트우드 주민들 가운데 이란 정권의 스파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반대로 로스앤젤레스에는 전직 사바크(혁명 전 이란의 국가치안정보국-역주) 요원도 있다.
지난 2월, 여성·생명·자유운동을 지지하는 시위에 샤의 사악한 정치경찰인 사바크의 전 수장이 참석해 이란계 미국인 커뮤니티에서 소동이 벌어졌는데, 이에 대해 만수리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는 세대의 문제입니다. 일부 오래된 왕정주의자들이 보기에 사바크는 테러리즘에 맞서 싸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우리 세대가 보기에는 사바크가 자행하는 탄압이나 이란 정권이 자행하는 탄압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이란 정권은 사바크의 사진을 가지고 시위에서 주장하는 바를 폄훼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여성·생명·자유운동을 지지하며 단결된 이란계 미국인 커뮤니티에서도 왕정주의 과거와의 관계나 제재 문제를 놓고 여전히 의견이 나뉘고 있다. 제재를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이란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소셜 네트워크에서 악담을 들을 수 있다. 2015년 7월 14일 비엔나에서 체결된 미국과 이란 핵 합의(2018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파기함)도 논쟁을 불러일으켰다고 PAAIA의 모라드 고르반 상무이사는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란의 행동이 달라지고 정상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란 핵 합의를 지지했습니다.”
1979년을 기준으로 나뉘는 이민자 세대
현재 이란계 미국인의 수는 최소 50만 명으로 추산된다. “최근 인구 조사에 따르면 우리는 49만 8,000명 정도입니다”라고 고르반 상무이사가 말했다. “하지만 설문지에는 ‘이란인’ 항목이 없습니다… 아마 100만에서 150만 명 사이일 겁니다.” 확실한 것은 이란계 미국인 코미디언 마즈 조브라니가 비꼰 것처럼 로스앤젤레스 내 이란 커뮤니티의 밀집도를 보면 그들끼리 뭉쳐서 살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이란계 미국인 가운데는 영어를 거의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셨을 겁니다.”라고 레자는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들은 페르시아어만 해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습니다.” 모국어인 페르시아어만 사용하는 사람들은 단지 1979년 미국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들만이 아니다. 40대인 파리사 파르하디는 라디오 채널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VOA)>의 페르시아어판 기자로 20년 전에 이란을 떠나왔다. “어느 날 오랜만에 미국인 친구와 저녁을 먹었습니다. 갑자기 그때 제가 4년 동안 영어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 모든 사회생활과 일은 페르시아어로 이루어집니다.”
레자는 이란 커뮤니티에서 분열이 생겼다고 말했다. “제가 보기에 1979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온 사람들은 샤의 초상화와 70년대 관행과 함께 이란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이란에서 자랐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세대의 문제가 아닙니다. 1979년에 부모님을 따라 이민을 온 제 또래의 이란계 미국인들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며 자랐지만, 저는 어린 시절 테헤란에서 살 때 페드로 알모도바르나 에미르 쿠스투리카의 영화를 몰래 숨겨서 거래하곤 했습니다.” ‘1979년에 이민 온 사람들’은 또한 미국의 민주주의적 삶에 적응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델샤드 전 비벌리힐스 시장은 자신이 참여한 첫 선거 캠페인을 떠올렸다. “이란계 미국인들은 유권자 등록을 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언젠가는 이란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이란이 무너져도 그들의 미국 국적 자녀들은 이란에 가서 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투표해야 한다고요!” 그는 “동구 출신 유태인과 지중해 연안 출신 유태인을 화해시키기 위해” 지역 유태교회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거리에서 길을 묻고 있는데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9월 11일 직후였죠. 저는 중동 출신 이민자들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정치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고르반 상무이사는 이란에서 계속되는 봉기로 인해 미국 내 이란계 미국인의 이미지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미국 대중은 이란인들이 용기를 내서 봉기하고 이란계 미국인들이 그들을 지지하는 것을 봤고, 이란 정권이 그들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미국 언론은 여성·생명·자유운동을 지지하는 이란계 미국인 커뮤니티의 로스앤젤레스 시위를 다뤘다. 르반 상무이사는 지난 2월, 시위 음악이 된 아티스트 셰르빈 하지푸르의 노래 “<바라예(Baraye)>가 그래미상을 수상하면서 여성·생명·자유운동이 대중에게 알려지게 됐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 시절 2017년에 선포된 ‘여행 금지령’으로 인해 이란을 포함한 7개 무슬림 국가 국민의 미국 입국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이란계 미국인들도 고통을 받았다.
“어떤 전쟁도 민주주의를 주지 않는다”
역설적인 것은 “많은 노인들이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못하더라도 트럼프에게 투표했다”는 점이라고 레자는 말했다. “노인들은 트럼프가 교양이 없다고 경멸합니다. 하지만 트럼프의 잔인한 성격으로 이란 정권을 전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세대는 민주당에 투표를 했고요. 트럼프를 보면 아마디네자드를 떠올리게 하는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PAAIA에 따르면 이란계 미국인 중 18%만이 정권 전복을 목적으로 외부 군대가 개입하는 것에 찬성한다.(7) 하지만 페르시아만 레스토랑을 걸프전(1991)과 관련된 인상적인 물건들로 장식한 파라하니푸르 회장조차도 “어떤 전쟁도 민주주의를 선사하지 않는다”라며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나르게스 함지안푸르와 파리드 키아는 윌킨스 대로에서 이란 예술가들을 위한 아트 갤러리를 운영한다. 4월 어느 저녁 그곳 아트 갤러리에서는 이란에서 시위 장면을 찍은 뒤 해외로 나와 대형 사이즈로 인화한 사진들을 전시했다. 판매 수익금은 비밀리에 시위를 취재해 온 이란 사진작가들에게 전달될 예정이었다. 다양한 세대의 망명자들이 아트 갤러리에 모여 한 손에는 와인 잔을 든 채 2022년 9월에 시작된 봉기가 성공을 거두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마히 모크타리는 3년 전 미국에 도착했다. 그녀의 팔뚝에는 2011년 2월 14일 시위에 참가했다가 사망한 동생 모하마드의 초상화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활동가로 일하는 모크타리는 “소셜 네트워크 덕분에 우리의 투쟁을 더 쉽게 공유하고 전 세계에 전달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미 1999년과 2009년 시위에 참가한 전력이 있는 레자는 신세대는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은밀하게 카세트테이프를 주고받았지만, 이제는 VPN을 이용해 검열을 우회하고 유튜브에 동영상을 게시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란 당국 역시 기술을 이용한다. 2023년 4월 초, 이란 당국은 안면인식기술을 사용해 베일을 쓰지 않은 여성들을 추적하겠다고 발표했다.
글·세드릭 구베르뇌르 Cédric Gouverneur
기자
번역·이연주
번역위원
(1) Mitra Keyvan, ‘Les Iraniennes allument un brasier social 이란의 젊은 여성 시위, 히잡 반대에서 정권 타도로 확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22년 11월호.
(2) 바하이교는 시아파가 기다리던 12대 이맘이 후세인 알리 누리(1817~1892)의 모습으로 이미 돌아왔다고 생각한다. 바하이교 신자 30만 명이 이단으로 몰려 박해를 받았다. ‘Iran. Les attaques 1implacables visant la minorité religieuse baha’ie persécutée doivent cesser 이란. 박해 받는 소수 종교 바하이교 신자를 노리는 무자비한 공격은 중단돼야 한다.’ <국제앰네스티>, 2022년 8월 24일, www.amnesty.org
(3) ‘Religious Landscape Study’, Pew Research Center, 2007년, 2014년, www.pewresearch.org
(4) Sharareh Omidvar, ‘Vers un Iran post-Ahmadinejad 아흐마디네자드 이후 이란을 향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블로그(La valise diplomatique)>, 2010년 6월 10일.
(5),(6),(7) ‘National public opinion survey of the Iranian American community’, 2023, www.paa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