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 세상이 꿈틀대는 소리가 들리는 곳
아비뇽 페스티벌의 장면들
티아구 호드리게스 예술 감독의 지휘 아래 제77회 아비뇽 페스티벌이 개최됐다. 이번 페스티벌은 영미권 작품을 공식 초청해 눈길을 끌었으며 빈투 뎀벨레, 카롤리나 비앙키, 카라 데 카발루, 레베카 샤이옹 등이 선보인 참신한 작품과 표현 양식에 담긴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적 분석에 주목했다.
미국 극단 엘리베이터 리페어 서비스는 존 콜린스의 연출로 <볼드윈과 버클리의 캠브리지 토론회(Baldwin and Buckley At Cambridge)>를 선보였다.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은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적 분석의 선구자인 제임스 볼드윈이다. 단순하고 고전적이면서도 파격적인 이 작품은 1965년 2월 18일 캠브리지 대학 학생회가 주최한 토론회를 재현한다. 인종, 성, 계급 차별을 비판한 작가 제임스 볼드윈, 그리고 매거진 <내셔널리뷰(National Review)>를 창간한 보수주의 및 반공산주의 언론인 윌리엄 버클리 주니어는 두 학생이 발의한 주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연단에서 마주 보며 설전을 펼치는 볼드윈과 버클리로 분한 두 배우의 인상적인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아메리칸 흑인의 희생으로만 가능한가?”라는 주제는 미국 사회의 치부를 단도직입적으로 드러낸다. 열띤 논쟁이 이어지고 볼드윈(대배우 그레이그 사전트 분)은 쉽게 상대를 제압한다. 특히 버클리(벤 윌리엄스 분)는 체험한 적 없는 구체적인 경험에 근거한 볼드윈의 논고를 반박할 수가 없다. “백인들이 할 일은 애초에 ‘깜둥이’가 필요했던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나는 ‘깜둥이’가 아니라 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미스트랄 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이 공연의 무대는 3면이 객석에 둘러싸여 있다. 관객과의 가까운 거리는 관객을 공연의 일부로 만든다. 마치 관객을 무대 위 토론에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듯하다. 비록 현실에서는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 토론의 주제는 지금도 유효하며 특히 미국과 프랑스에서 최근 벌어진 사건들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1965년 볼드윈과 버클리가 토론한 차별과 경찰의 폭력 진압은 그저 지나간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지금도 뉴욕과 낭테르에서 새로운 행태로 계속 자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버클리는 ‘아메리칸 드림’은 모두가 이룰 수 있으며 헌법은 모두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한다는 추상적인 담론을 내세운다. 볼드윈은 흑인에 대한 착취와 일종의 흑인 종속 상태라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이에 반박한다. ‘프랑스식 보편주의’ 개념에도 적용할 수 있는 논거다. 니나 시몬의 노래 ‘That’s All I Ask’가 흘러나오는 응접실을 배경으로 한 마지막 장에서 볼드윈은 그의 친구이자 작가, 극작가 겸 시민권 운동가인 로레인 핸스베리(에이프릴 마티스 분)와 대화를 나누며 교감한다. “조급함의 무게를 견딜 수 없다.” 우리는 이 조급함의 무게를 이미 체감했다.
‘Off’ 부문을 빛낸 <유프라테스>와 <샤하다>
비공식 작품들로 구성된 ‘Off’ 부문에는 1,491개의 공연이 참가했다. 시내 곳곳에서 열리는 이 수많은 공연들을 찾아다니다 보면 나침반이 필요할 듯 보이지만 참신한 작품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유프라테스(Euphrate)>는 튀르키예, 시리아, 이라크를 가로지는 유프라테스강의 이름을 딴 17세 여고생의 이야기다. 노르망디 지방 출신 어머니와 튀르키예 출신 아버지를 둔 유프라테스는 학교제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반항아다. 여유롭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부모님은 유프라테스가 인정받는 직업을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스타니슬라스 로케트와 올리비에 콩스탕이 연출한 이 1인극에서 유프라테스 역을 맡은 닐 보스카는 마치 본인의 실제 삶 속 인물들을 연기하듯 무대 위에서 수시로 의상과 소품을 바꿔가며 각기 다른 목소리 톤과 몸짓으로 열연을 펼친다.
마임, 춤, 아크로바틱에 통달한 보스카는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보스카의 연기는 이제 막 유년기를 벗어나 미래를 설계할 힘이 없는 나이에 직업 선택을 강요받는 17세 소녀의 내면에 분출되는 갈등을 잘 나타냈다. 이 작품은 또한 다문화 가정 출신 청소년들이 품고 있는 자신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탐구한다. 프랑스 국적의 유프라테스는 시리아 접경 지역 마을 출신인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전혀 모른다. 아버지가 전쟁 지역인 고향 마을에 딸을 데려갈 일은 만무하다. 아버지는 유프라테스에게 튀르키예어도 가르치지 않았다.
자신의 근원을 알지 못하는 결핍감에 시달리던 유프라테스는 결국 혼자서 아버지의 고향으로 향한다. 상상으로만 그려왔던 친척들은 그녀를 따듯하게 맞이했지만 정략결혼을 가까스로 피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한다. 이에 앞서 이스탄불 국립 박물관을 찾은 유프라테스는 터키 최초의 무슬림 여배우인 아피페 잘레의 초상화를 발견한다. 1902년에 태어난 잘레는 배우가 되기 위해 관습과 사회·종교적 금기를 뛰어넘어야 했다. 1923년 무스타파 케말이 공화정을 수립하기 전까지 터키는 무슬림 여성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금했다. 잘레의 용기에는 큰 대가가 따랐다. 잘레는 결국 39세의 나이로 정신병원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다. 유프라테스는 잘레를 자유와 해방의 상징으로 여기며 자신과 동일시했다.
극작가 겸 연출가인 피다 모히센의 글이 원작인 <샤하다(Shahada)>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모히센은 프랑수와 세르반테스와 공동연출한 이 작품에서 자기 자신을 연기한다. 인생의 절반은 시리아에서, 나머지 절반은 프랑스에서 보낸 모히센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인 이 작품 속에서 모히센은 두 인물로 구현된다. 바로 쉰을 바라보는 예술가, 아버지로서의 자아를 성찰하는 현재의 모히센과 혈기 넘치는 젊은 모히센(시리아 출신 배우 라미 에르카브 분)이다.
현재와 과거의 모히센은 거울을 바라보듯 서로 대화를 나눈다. 샤하다(Shahada)는 아랍어로 증언, 순교, 무슬림의 신앙 고백을 뜻한다. 청년 시절 학식 있는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모히센은 아랍사회주의부흥당, 속칭 바트당에 가입하고 다마스에서 연극에 입문한다. 연극에 대한 열정은 그가 배운 종교 교리 해석과 충돌했다. 그가 배운 종교 교리는 서구에 대한 거부감과 ‘급진주의의 유혹’을 부추길 정도로 극단적이었다. 프랑스에 도착한 모히센은 연극과 종교의 모순적인 요구로 괴로워했다.
현재의 모히센은 젊은 날의 자신을 불러내어 예리하고 진지하면서도 재미있는 대화 속에 과거의 무지와 강요받은 사고를 해체해 나간다. 그의 목표는 양립할 수 없는 두 세계관을 통해 사고의 여정을 이해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모히센 자신은 물론, 그의 딸들과 딸 세대의 청년들을 위해서다. 경험을 통해 일부 청년들이 급진적 이슬람주의에 끌리는 것을 이해하는 모히센은 이를 계몽해야 할 책임감을 느끼며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을 위해 “사랑에 헌신하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성스러움에 이르는 삶”을 향한 길을 모색한다.
모히센의 개인적 성찰이 급진주의에 매료된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혹은 급진주의에 맞설 수 있는 분석 요소를 제공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독특한 이야기로 풀어낸 모히센의 성찰은 현재에도 유효한 이야기를 조명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글·마리나 다 실바 Marina Da Silva
연극평론가
번역·김은희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