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장애인’들의 현장을 기록하라

독자 에세이 3월호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를 읽고

2012-04-14     강여사·정서방

"아들 집에 가려던 장애인 노부부가 탄 지하철의 장애인 리프트가 추락하는 바람에 부인이 숨지고 남편은 크게 다쳤습니다."(2001년 1월 23일 한국방송 뉴스)

2001년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버스를 타자>(감독 박종필)는 장애인의 죽음을 알리며 시작한다. 이내 화면이 바뀌고, 선로 위에 선 한 남자가 달려오는 지하철을 온몸으로 가로막는다. 그의 뒤로는 중증장애인 수십 명이 줄지어 누워 있다. 지하철 선로와 그들의 몸은 견고한 쇠사슬로 꽁꽁 묶여 있다.

영화 <버스를 타자>를 기억하는 이유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 싸움은 시작됐다. 그 기저엔 '장애인의 70.5%가 한 달에 다섯 번도 외출을 하지 못한다'는 현실적 배경이 깔려 있었다. '이동'은 모든 인간 활동의 기본 조건이다. 이동의 자유가 전제될 때, 즉 집 밖으로 자유롭게 나설 수 있을 때, 우리는 원하는 교육을 받고, 살기 위해 노동을 하며, 문화와 마주칠 수 있다. 타인과 관계를 형성하고, 세계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낼 수 있다. '시민'으로서, 그리고 자유의 황금기에 '시민'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인간'으로서 비로소 재탄생할 수 있다. 그러나 장애인에게 인간적 삶의 가능성은 애초부터 주어져 있지 않았다.

2001년 휠체어를 탄 중증장애인들이 '이동의 자유'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그들은 지하철 선로를 점거하고, 자본의 속도를 따라 달리던 지하철을 멈춰 세웠다. 버스를 점거하고 평생 올라보지 못한 곳으로 드디어 올라섰다. 몸과 휠체어를 쇠사슬로 칭칭 감고서야 그들은 비로소 비장애인이 매일같이 경험하는 일상, 그러나 그들에게는 '처음 느껴보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버스를 타자>는 이 자유의 '현장'을 기록한다. 이 영화는 노동자보다 더 생소한 존재, 우리 인식 속에서 잊힌 채 살아가는 어떤 자들의 현장을 기억하는 '현카'(현장 카메라)다. 기록이 기억을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 기억을 '의미'로 재구성한다. 우리가 기억하고, 새로이 의미를 부여하는 이 현장 속 주인공들의 요구사항은 간단하다. 첫째, 전국의 모든 지하철 역사에 승강기를 설치하라. 둘째, 장애인도 대중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대책을 강구하라. 즉, 저상버스를 도입하라.

기본권은 말 그대로 기본적으로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하는 권리다. 당시 사회구조에서 장애인의 대중교통 이용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실현 불가능한 기본권에 저항하며 장애인들은 단체로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내리면서 이 사회의 배제 일상을 폭로했다. 상식이 되어버린 구조적 억압과 차별을 폭로하면서 하나의 기억이 되었다.

장애인들의 집단 승하차로 운행이 늦어지자 한 시민이 호통을 친다. "당신들 때문에 30분이나 늦어지고 있잖아!" 그 말에 누군가 답한다. "시민 여러분, 우리 때문에 30분이 늦어졌다면 죄송합니다. 그러나 장애인들 대부분이 30년 평생을 집 밖에 나와보지도 못하고 갇혀 지냅니다. 이에 대해 이 사회는 책임져야 합니다!"

<버스를 타자>에서 장애인들은 더 이상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시민이라면 당연하게 누려야 하는 권리를 쟁취하는 주체로 등장한다. 이와 함께 그들은 목놓아 외친다. "착한 장애인이길 거부한다!"

이제까지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이라는 존재는 어떤 이미지로 드러났는가. '장애인'은 단골로 등장하는 명망가들의 유세 수단 혹은 행정의 대상일 뿐이었다. 즉 그들은 단순히 복지의 수혜자일 뿐이었고, 몸을 씻겨주는 손, 밥을 떠먹여주는 손을 필요로 하는 이들일 뿐이었다. 타인의 손이 닿지 않으면 살 수조차 없는 이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이 사회는 사랑을 베풀었다. 장애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런 '돌봄'을 받는다. 상대방의 선한 마음 안에서 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는 은폐된다. 장애인을 무성적 존재로, 욕구가 거세된 인간으로 만드는 건 역설적이게도 이 사회의 시혜와 동정, 그리고 봉사다. 이때 장애인은 '정상인'들이 베푸는 사랑을 고마워하는 선량한 약자가 되고, 사회(혹은 장애인을 돌보는 사람)는 돌봄을 베푸는 선량한 강자가 된다. 시혜적 관계로 구성된 이 '착한 사회'는 그렇게 착한 장애인을 '거둬들이고 보호'하면서, 그 이면에 깔린 권력관계를 은폐한다.

"착한 장애인이길 거부한다!"

장애를 극복한 이들의 '인간 승리'는 이 사회의 선량함을 홍보하는 단골 메뉴가 된다. 이 '기회의 땅'에서 장애인들은 신체적 장애를 극복해 비장애인의 대열에 합류한다. 비장애인의 인간 승리도 대단한데, 장애인의 인간 승리는 오죽 감동적이겠는가. 그러나 이 휴먼다큐는 인간 승리를 할 수 없는 장애인들 개개인에게는 희극적 비극일 뿐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는 이로써 한층 더 공고화된다. 장애인의 장애는 극복돼야 하는 것으로 설정되고, 모든 장애인의 목표는 비장애인들의 '정상적인' 삶이 된다. 이와 함께 장애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사회구조의 문제는 망각된다. 착한 사회 속에서, 즉 선량한 기회의 땅에서 모든 문제는 장애인 당사자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그러나 '장애'는 과연 부정돼야 하는 것일까? 장애인들은 스스로 장애를 극복하고 정상성의 궤도 속에 편입되지 않는 한, 시혜적 대상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일 뿐인가? 장애가 '부정돼야 하는 것'이 될 때, 장애를 가진 이들 역시 부정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인간성도, 주체도 은폐될 수밖에 없다.

장애를 시혜적 혹은 개인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이 사회구조에 대한 물음 속에서 다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인식을 전환한다면 장애인은 더 이상 그가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질 수 없다. 오히려 현 사회구조가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구성됐기 때문에 장애인이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전혀 새로운 문제의식이 생산된다. 예컨대 단순히 장애인이라서 지하철과 버스를 탈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지하철 승강기가 설치되고 저상버스가 100% 도입된다면,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도 버스와 지하철을 탈 수 있다. 비장애인과 똑같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다면 장애인은 더 이상 봉사를 받는 시혜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사회적 조건에 따라 단순한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능동적 주체로 거듭날 수도 있다.

그래서 <버스를 타자>를 통해 '기억'되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드러내는 의미는 매우 크다. 모든 인간 활동의 기본 조건인 이동권은 구조적으로만 획득될 수 있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형성된 현 구조가 바뀔 때만 장애인들은 스스로 집 밖을 향할 수 있다. 이런 인간적 삶을 개척해나가기 위한 주체로서 장애인이 선다. 그러나 장애인 개인의 이동이 '봉사적 차원'에서만 가능하다고 여겨온 우리 사회에서 '이동권'은 개념적 차원에서조차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이동권'은 장애인들의 투쟁 끝에 2003년에야 비로소 국립국어원 신어로 등록됐다).

'인권'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

이동권 투쟁을 기점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게 된 이들은 기존에 '장애인의 날'이라 불리던 것을 2002년부터는 '장애인차별철폐의 날'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평생 사회에서 배제된 채 살아가다가 1년에 단 한 번 축제의 장에 초대돼 환하게 웃는 장애인의 얼굴. 아름다운 사랑과 봉사의 이미지로 '인권'이란 단어를 모욕하는 이 '착한 사회'의 손길을 그들은 더 이상 고마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착한 사회'에 저항하며 구조의 변혁을 외친다. 이제 "차별에 저항하라, 장애인 차별을 철폐하라"고 외치는 '나쁜 장애인'들이 거리를 점령한 것이다. 영화 <버스를 타자>가 남겨준 '기억'은 이렇게 기존 비장애인의 시선에서 그린 착한 장애인의 모습을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장애인의 시선에서 사회구조의 문제를 담는다. 그들이 쟁취한 구조적 변화의 내용을 담는다. 그들의 일상은 이 시대를 증언하는 목소리, 기록된 저항의 기억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