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에스테, 기억에서 지워진 피의 국경
서유럽의 가장자리
이스트리아는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 변방의 영토였다. 이후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에 차례로 합병됐다가 마침내 슬로베니아령과 크로아티아령으로 나뉘기까지 지난한 국경 분쟁을 겪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슬로베니아 소수민족(공산주의자 또는 기독교)의 대다수가 당한 박해와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2차 세계 대전의 희생자들을 이용했다.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가까운 국경입니다. 유고슬라비아 시절, 이 국경은 낯선 미지의 세계로 열려 있었거든요.”
여행작가 파올로 루미츠는 발코니에서 트리에스테만의 산업지대를 둘러싼 고원을 바라보며 말했다.(1) “트리에스테는 아드리아해의 끝자락 막다른 곳에 있지만, 망명자들이 서유럽으로 향하는 길에 지나는 관문이자 도시였어요.”
1990년대에 이탈리아의 이 넓은 항구는 유고슬라비아를 분열시킨 전쟁을 피해 피난 온 이민자들이 거쳐 가는 곳이었다. 오늘날 이곳은 유럽연합으로 가려는 이민자들이 지나는 ‘발칸 경로’의 주요 관문이 됐다. 1993년, 망명자들을 돕기 위해 설립된 이탈리아 연대 연합(CIS)의 잔프란코 스키아보네 회장은 “망명자들을 많이 도왔다”라며 말을 이어갔다. “최근 몇 달, 망명자 수가 2배로 늘었습니다. 2022년에는 1만 5,000명이 등록됐는데, 주로 아프간에서 온 사람들이었죠. 전에도 이런 상황을 겪어 봤어요. 조르지아 멜로니 정부는 ‘이주민 비상사태’를 선포했지만, 접수센터에서 수용할 수 있는 할당 인원을 줄였습니다. ‘비상사태’라는 구호는 순 엉터리예요.”
매일 저녁, 자원봉사자들이 역 맞은편 리베르타 광장 공원에서 교대로 신규 이주민을 맞이한다. CIS에서 접수센터를 운영하는 다비데 피티오니는 “터키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 발칸반도를 건너려면, 밀수꾼들에게 1만 달러만 주면 된다”라고 설명했다. 트리에스테에서는 어디에나 국경이 있다.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카르스트 고원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페세크(또는 페르네티) 검문소가 있고, 검문소를 지나면 슬로베니아로 이어진다. 슬로베니아가 2004년에 유럽연합에, 2007년에는 솅겐 조약에 가입하면서 도로가 개통됐다.
그러나, 모든 이들에게 개방된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 경찰은 1996년 슬로베니아와 체결한 양자 출입국 협정에 따라 오랫동안 페세크로 들어오는 망명자들을 거부해왔다. 이렇게 추방된 이주민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까지 강제송환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조처는 유럽연합 난민의 망명에 관한 규정에 어긋나 2021년에 이탈리아 법원은 자국 정부에 유죄판결을 내렸다. 스키아보네가 설명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강경히 대응했지만, 슬로베니아 정부의 반대로 협정은 재개되지 않았답니다.”
이탈리아의 국가적 관심사로 떠오른 ‘추모의 날’
텅 빈 주차장과 버려진 건물이 있는 페세크 검문소는 논란거리인 추모유적지 포이바(Foiba, 구덩이) 디 바소비차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이탈리아의 정치인 안토니오 타야니는 2019년 2월 10일 공식 ‘추모의 날’ 행사 당시, 바로 이곳에서 “이스트리아 이탈리아 만세, 달마티아 이탈리아 만세!”를 외쳤고,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분노로 들끓었다.(2) 당시 유럽의회 의장(전진 이탈리아 및 유럽 국민당)이었던 타야니는 2022년 10월 조르지아 멜로니(극우 성향의 정당인 이탈리아 형제들 소속)가 구성한 정부에서 외무장관을 맡았고, 현재 국경 보호를 보장하고자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의 파트너십을 주장한다.
이 ‘추모의 날’은 제2차 세계 대전 말에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자행한 학살의 희생자들을 기리고자 2004년 제정됐다(파르티잔은 파시스트이거나 파시스트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포이바에 매장했다). 구 이탈리아 공산당의 분파인 좌파 민주당(이후 민주당으로 명칭을 변경)이 제안한 이 법안은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트리에스테주 이탈리아 파르티잔 전국협회(ANPI)의 두산 칼크 부회장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원래 목적은 당시 상황을 우익 세력이 왜곡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라며 설명했다. “그런 면에서 이 법은 동부 국경 지대에서 일어난 폭력의 피해자를 모두 포용한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탈리아인을 상대로 자행된 범죄만 기억하게 됐네요.”
포이바 문제는 이탈리아에서 국가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지난 몇 년간 광장이나 거리에 노르마 코세토의 이름을 붙인 도시가 전국적으로 100개가 넘는다. 비시나다(비지나다) 마을에 살던 노르마 코세토의 이야기는 <라디오 텔레비전 이탈리아(RAI)>에서 영화로 제작되고, 연재만화로 제작돼 피에몬테주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배포됐다.(3) 이 젊은 여성은 1943년 가을, 이탈리아가 항복한 이후 이스트리아 봉기 중에 강간당하고 포이바에 던져졌다. 수십 년 동안 괴롭힘과 박해를 견뎌온 슬라브인들은 당시 이탈리아인, 특히 파시스트 정권을 지지하던 사람들에게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다.
모두가 함구하는 암묵적 합의
동부 국경은 오랫동안 이탈리아 우파의 텃밭으로 여겨졌다. 1915년에 이탈리아가 전쟁에 개입한 것은 (트렌토, 고리치아, 트리에스테 지방과 이스트리아, 그 인근의 섬, 달마티아 해안을 점령해) 국가 통합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전에는 베네치아였던 이 모든 지역이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토였다. 1915년 6월부터 1917년 9월까지 이손초강의 깊은 계곡에서 총 12차례에 걸쳐, 베르됭 전투의 이탈리아판이라 할 수 있는 이손초 전투(산악전)가 벌어졌다. 이탈리아는 희망을 다 이루지 못했다. 이탈리아군은 트리에스테를 탈환했지만, 연합군은 달마티아 대부분을 1918년에 개국한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국(1918년 발칸 반도에 수립된 미승인국으로, 그해 12월,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통합됐다-역주)’에 넘겼다.
전쟁 중 팽창주의로 전향한 과거의 사회주의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참전 용사들의 좌절감과 ‘도둑맞은 승리’라는 주제를 활용했다. 역사학자 라울 푸포는 “우리는 유럽 접경의 크라이나 민족”이라고 말한다. 기독교민주당의 지역 지도자를 지낸 라울 푸포는 국경관련 역사 전문가다. “포이바 문제는 숱한 왜곡을 불렀어요. 정확한 희생자 숫자도 알 수 없고요.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파시스트 관리, 경찰관, 사법부 구성원 등 수천 명이 숙청됐습니다. 총살되거나 수용소에서 죽은 사람도 있지만, 이는 포이바를 이야기할 때 거론되는 ‘대량 학살’ 정도는 아니었죠.” 포이바 데 바소비차에 얼마나 많은 시신이 묻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콘크리트로 막은 구덩이는 한 번도 발굴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2차 세계 대전 말 유고슬라비아가 탐냈던 트리에스테는 마침내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됐다. 1947년에 ‘트리에스테 자유 지구’가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연합군이 관리했지만, 1954년 이탈리아(A구역)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B구역)으로 분할됐고, 1975년에 오시모 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이 경계선은 국제 국경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이 구역에 사는 모두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죠.” 이 역사학자의 부인은 이스트리아 난민 출신으로, 집단 이주가 포이바보다 훨씬 중요한 현상이라고 본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20만~30만 명의 이탈리아인이 유고슬라비아를 떠났고,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가 A구역과 B구역으로 자유 지구를 나눈 후 1954년에는 이주민 수가 정점에 달했다.
이런 망명자들 중 상당수가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주에 정착했다. 그중 일부는 지배층이 됐고, 모두가 반공 성향의 우익과 중도당에 투표했다.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 사이의 국경이 차츰 개방되자 A구역과 B구역 주민들은 상대국으로 왕래할 수 있게 됐다. 이탈리아인들은 값싼 담배와 술, 휘발유를 구하러 유고슬라비아로 갔고, 유고슬라비아인들은 청바지와 같은 서구 소비재를 사려고 트리에스테로 몰려들었다. 푸포는 “매우 번창했던 시기였어요”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사업을 하지 않는 트리에스테 주민들은 ‘발칸 무리’가 주말마다 마을을 침입한다고 생각해서 도시를 떠났어요.”
현재 이탈리아 의회에서 슬로베니아 소수민족을 대표하는 의원은 타티아나 로이츠 상원의원뿐이다. 이탈리아에는 약 10만 명의 소수민족이 있지만, ‘민족’ 조사는 거부한다. “파시즘의 잔재 때문에 조사를 거부할 겁니다. 성을 ‘이탈리아식’으로 바꾼 사람도 많습니다.”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의혹만으로도 탄압을 받았던 이탈리아의 슬로베니아 소수민족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도 계속 의혹에 시달렸다. “트리에스테와 고리치아 지방은 우리의 문화적, 언어적 권리를 인정했지만 우디네 지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로이츠 의원이 설명했다.
프리울리 계곡은 공산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이탈리아 내무부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협력해 만든 비밀 첩보 기관 ‘글라디오(Gladio)’의 활동 무대였다. 글라디오는 이탈리아 공산당(PCI)의 집권을 막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던 1970년대의 이른바 ‘긴장 전략’의 막후에서 작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슬로베니아 산악 마을 인구를 줄여 국경 지역 ‘청소’에도 일조했다. 2022년 상원 선거에 앞서 민주당 권역 명부 전당대회를 이끈 로이츠 의원은 교회와 기독교 민주주의를 통해 이탈리아 사회에 더 잘 통합된 가톨릭 집안 출신의 ‘백계(白系)’ 슬로베니아인이다. 하지만 1948년 티토와 스탈린의 분열이 지금까지도 치유되지 못할 상처를 남겼음에도 슬로베니아 민족의 대다수는 여전히 ‘좌익’을 지지한다.
트리에스테가 내려다보이는 고원에 있는 트레비차노(트렙체)는 슬로베니아인들의 보루다. 마을 중앙에는 전쟁 중 전사한 주민 104명을 추모하는 비석에 붉은 별이 새겨져 있으며, 대다수는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이른바 빨치산) 대열에 속했다. 민주당의 지역 활동가 마우로 크랄은 “우리가 1947년에 처음으로 그 사람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멜로니 총리가 집권한 지 6개월 만인 4월 25일, 해방 기념식이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열렸다. 그런 가운데, 이탈리아 사회운동(MSI)부터 이탈리아의 형제들까지, 극우파의 아바타로 불리는 이냐치오 라루사 상원 의장이 “반파시즘은 헌법에 명시되지 않았다”라는 (허튼) 주장을 폈다.(4) 트리에스테에서는 경찰을 대대적으로 배치해 무정부주의 시위자들이 공식 행사에 들어가지 못하게 통제했다.
이탈리아 국립 당파 협회(ANPI) 지역 회장 파비오 발론 옆에 있던 칼크 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파는 어두운 기억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반파시즘에 대한 모든 기록을 지우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이미 1948년 공산당 서기장 팔미로 톨리아티가 승인한 파시스트 범죄 사면법으로 이미 ‘유화 조치’가 있었어요.” 발론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공유된 기억을 이야기한 것은 좌파의 실수였어요. 기억은 주관적이니까요. 역사적 사실은 과학적으로 규명해야 합니다. 오늘날 가치가 전복되면서 당파적 범죄 혐의를 선전하는 극우를 비판할 때 수정주의자라고 비난을 받는 것은 반파시스트들입니다. 이탈리아에는 뉘른베르크식 재판도 없었고, 파시즘을 타파하려는 노력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전쟁 후 집권당이 이탈리아 공산당에 맞서려고 과거 파시스트들을 이용했죠.”
베를린 장벽 붕괴의 충격은 역사 수정주의의 물꼬를 텄고, 2차 세계 대전 말에 일어난 사건에 관한 논쟁이 다시 이탈리아에서 제기됐다.
역사를 다시 쓰겠다는 합의도 없어
슬로베니아 측에서도 오랜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2021년, 슬로베니아 코페르 대학의 인류학자 카티아 흐로바트비를로게트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인의 탈출에 관한 첫 책에서 한때 금지됐던 주제를 다뤘다.(5)
“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를 떠난 이탈리아인들은 이탈리아 출신의 파시스트나 공무원들이어서, 대부분의 슬로베니아인은 문제가 해결된 줄 알았다”라고 한 역사가는 설명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망명자들은 파시스트로 간주됐고, 일부 ‘빨갱이’ 마을에서는 기차에서 내리지도 못했어요. 망명자 중에는 크로아티아인과 슬로베니아인, 그리고 정체성이 모호한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서구에서의 더 나은 삶을 꿈꿨죠.”
유고슬라비아 당국은 때에 따라 이런 이주를 장려하기도 했지만 막기도 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남은 사람들에게는 함구령이 내려졌어요.”라고 말했다. 증인들을 인터뷰하다 보면 대화는 곧잘 눈물로 끝났다. 스테파노 루사는 얼마 남지 않은 슬로베니아계다. 이 50세 언론인은 ‘카포 디스트리아(Capo d'Istria)’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프로그램 명칭은 슬로베니아의 주요 항구 도시 코페르의 이탈리아어식 이름에서 따왔다. 스테파노 루사는 “이탈리아어 텔레비전 방송도 있다”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 지역 이탈리아 인구가 2,000명도 안 되는 점을 생각하면 특이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유고슬라비아 시대에 선전 도구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텔레비전 방송은 이탈리아 북부 전체로 전파됐고, <라디오 텔레비전 이탈리아(RAI)>보다 먼저 컬러 방송으로 전환했어요. 꽤 대담한 영화를 내보내기도 했는데, 그 덕에 인기가 참 좋았죠.”
스테파노 루사는 웃으면서 “오늘날까지 이런 미디어가 살아남은 이유는 슬로베니아가 이탈리아 소수민족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선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1991년 독립 이후에 슬로베니아의 우파는 공산주의자와 파르티잔의 범죄를 수시로 거론했다. 매우 보수적인 성향의 야네스 얀샤 총리는 2022년 4월 총선에서 패배하고 퇴임을 며칠 앞둔 시점에, 5월 17일을 ‘공산주의 범죄를 반성하는 날로 정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하지만 중도좌파 로베르트 골로프 정부가 해당 법령을 취소하면서 우파의 분노를 자극했다. 그렇게 해서 추모 논쟁에 불이 붙었고, 다시금 이 작은 나라를 분열시켰다. “주로 나치에 협력한 슬로베니아의 도모브란스트보(domobranstvo, 자체적인 지역방위군)의 역할에 관한 논쟁이 주를 이뤘고, 이탈리아인들이 겪은 일은 거의 언급되지 않아요.” 류블랴나 출신 역사가 네벤카 트로하는 유고슬라비아가 붕괴할 때까지 기록 보관소가 폐쇄돼 있던 와중에 이 주제를 처음으로 거론한 사람 중 하나다. “유고슬라비아의 문화유산을 인정하는 좌파와, 슬로베니아 애국주의의 이름으로 과거 부역자들의 행적을 미화하고 싶어 하는 우파가 문제를 함구하는 암묵적 합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크로아티아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이스트리아 북서쪽 끝에 있는 크로아티아의 작은 도시 부예(Buje)는 아드리아해에서 약 10km 떨어진 바위 절벽 위에 들어서 있다. 구시가지와 미식으로 유명한 이스트리아 반도는 관광객을 끌어들이지만, 오래된 집들이 폐허로 변해가는 이곳과는 무관한 일이다. 이곳의 (이탈리아계) 부시장 초라도 두시흐는 이렇게 설명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주민 절반이 마을을 떠났고, 소유자가 등록되지 않은 집들이 수두룩했어요. 이곳 주민들은 농민이었고, 파시스트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는데 수많은 사람이 집에서 쫓겨났고,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어요. 이 동네 커피집 주인은 딸이 이탈리아 군인과 함께 떠났다는 이유로 파르티잔들에게 납치됐는데, 아무도 그 사람을 다시 보지 못했답니다. 그 이후,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온 노동자들이 공장 주변에 형성된 마을로 모여들었죠.”
마을 광장에는 여전히 파르티잔 기념비가 서 있다. 유고슬라비아 시절에 세워진 비석은 크로아티아가 독립하면서 상당수가 철거됐지만, 이스트리아에는 여러 거리와 광장에 ‘티토 원수’의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다. 1990년대 이스트리아의 부의장을 지낸 시인 로레다나 볼륜은 이렇게 설명한다. “오래된 상처를 다시 건드리게 될까 봐 아무도 이런 기념비를 철거할 엄두를 못 내요. 우리의 역사를 다시 쓰겠다는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파르티잔에 대한 기억은 모두가 받아들이는 공통의 역사로 남을 겁니다.”
1991년 크로아티아가 독립한 이후, 크로아티아령 이스트리아반도는 독특한 정치 노선을 택했다. 크로아티아 내에서 높은 지지를 받는 민족주의 정치 노선을 거부한 것이다. 중도좌파 지역주의 정당 이스트리아 민주의회(starski demokratski sabor)는 크로아티아령 이스트리아반도를 거점으로 삼아 30년 넘게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크로아티아어와 이탈리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이스트리아는 1918년까지는 오스트리아 영토였다가, 이후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마침내 슬로베니아령과 크로아티아령으로 나뉘기까지 국경이 복잡한 그물처럼 얽혀 있었다.
해안 마을 우마크에서 이탈리아어를 가르치는 마리안나 옐리치츠흐 부이치는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는 이탈리아로 가는 것이 지금보다 더 쉬웠는데, 역설적으로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모든 게 전보다 복잡해졌어요.”라고 지적한다. 경계 지대는 곧 이스트리아의 정체성이나 마찬가지다. 민족주의자들은 독창적인 서사를 투영해 서로를 구분하려고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교류와 다국어 사용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역사의 상처를 덜 입은 세대이자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 세대라고 자부하는 옐리치츠흐 부이치는 고향 이스트리아를 무척이나 아끼며, 이스트리아-베네치아 방언이 영토 정체성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믿는다. “이스트리아에서 사람들이 예전부터 사용해온 언어예요. 20세기에는 이탈리아어와 크로아티아어를 의무로 배워야 했거든요. ‘이스트리아-베네치아 축제’를 창설하기도 한 이 활동적인 40대 여성은 부예의 중심가에 있는 한 카페에서 걸음을 멈추고 코소보 출신 알바니아계 주인에게 인사를 건넨다. “보세요. 이분도 이스트리아-베네치아 방언을 써요.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니까요!”
전후에 수많은 이탈리아인이 옛 B 지구를 탈출했지만,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유고슬라비아로 건너간 사람도 있다. 자코모 스코티는 이런 ‘역이주’를 감행한 마지막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이다. 1928년 나폴리 지역에서 태어난 자코모 스코티는 1943년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이후 영미 군의 민간인 보좌관으로 이탈리아 전역을 돌아다니다가 트리에스테에서 국경을 넘어 유고슬라비아로 밀입국했다. 전직 기자였던 자코모 스코티는 유고슬라비아에서 골리 오토크가 여전히 민감한 주제였던 시절, 이 불운한 사람들의 삶을, 처음으로 거론했다.
“수많은 이탈리아인이 재건 작업에 참여했지만 일부는 곧 고국으로 돌아갔어요. 생활고와 굶주림에 시달렸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티토와 스탈린이 헤어졌던 1948년에 심각한 문제를 겪었고 일부는 ‘교도소 섬’ 골리 오토크에 갇히기도 했답니다.”
트란살피네 광장, 화해의 상징으로 변신
유명한 반군국주의 노래는 “고리치아, 저주받은 고리치아”라고 외친다. 이 곡은 1차 대전 당시 프랑스 군대가 부르던 <크라온의 노래(Chanson de Craonne)>에 비견된다. 트리에스테 만에서 북쪽으로 약 20킬로미터 거리에 있고, 슬로베니아 국경에 있는 이손조강 유역에 있는 이 도시는 지역 역사의 축소판이다.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이스트리아와 달마티아를 빼앗아 통일을 이루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 두 나라에 걸쳐져 있는 도시를 굽어보던 몬테산토 대성당은 잿더미로 변했다.
고리치아(고리차)는 1918년에 이탈리아에 귀속됐지만 1945년에는 잠시 유고슬라비아로 넘어갔다가, 1947년 9월 16일에 철조망이 트란살피네 광장을 둘로 가르면서 새로운 국경이 세워졌다. 유고슬라비아령에서는 1948년부터 르코르뷔지에의 슬로베니아인 제자이자 건축가 에드바르트 라우니카르의 지휘로 자원병들이 투입돼 노바고리차(새로운 고리치아)라는 신도시가 들어섰다. “티토는 노바고리차를 국경을 넘어 확산할 사회주의의 전시장으로 만들고자 했어요.” 스토얀 펠코는 회상했다. 그는 2025년 유럽 문화 수도 프로그램의 책임을 맡았다. 유럽 광장으로 개명한 과거의 트란살피네 광장은, 이제 두 도시의 화해를 상징하는 장소가 됐다. 펠코는 이렇게 설명한다.
“지난 10여 년간 두 지자체는 교통 등 공공 서비스를 공동으로 조직했어요. 2020년 3월에 슬로베니아 당국이 코로나19 확산을 억제하기 위해 갑자기 A구역에 장벽을 올렸을 때 두 도시 인구가 얼마나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답니다. 고리치아에는 슬로베니아계 소수민족이 많이 살고, 더 좋은 학교를 찾아 노바고리차로 이주하는 이탈리아인들이 늘고 있어요.”
이제, 노바고리차의 부동산은 고리치아보다 비싸다.
글·장아르노 데랑스 Jean-Arnault Dérens, 로랑 제슬랭 Laurent Geslin
기자, 특파원. 최근 공저, 『Les Balkans en cent questions. Carrefour sous influence발칸 반도에 관한 100가지 질문. 영향권 내의 교차점』(Tallandier, Paris, 2023)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Paolo Rumiz,『Aux frontières de l'Europe 유럽의 국경들』(2011)과 『Le Phare, voyage immobile 등대, 움직이지 않는 여행』(2015)의 저자
(2) 오늘날 이스트리아반도는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슬로베니아로 나뉘며, 달마티아는 대부분 크로아티아의 영토며, 나머지 영토는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나뉜다.
(3) Roberto Pietrobon, ‘Foiba rossa, propaganda nera. Un fumetto revisionista nelle scuole del Piemonte’, 2020년 2월 15일,www.micciacorta.it
(4) Benoît Bréville, ‘Assauts contre l’histoire 역사에 대한 공격’,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3년 6월호.
(5) Katja Hrobat-Virloget, ‘V tišini spomina: “eksodus” in Istra, Založba Univerze na Primorskem / Založništvo tržaškega tiska’, Koper-Trieste,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