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프랑스의 배신, 프라하 시민들은 오열했다

프랑스 특파원이 본 1938년 오스트리아, 체코 위기

2023-09-26     안 마티외 l 로렌 대학교 부교수

1938년 9월 뮌헨 협정 체결로, 나치 독일의 정복을 막고 평화를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던 것일까? 그해 3월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4월 체코슬로바키아 나치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최후통첩을 했을 때, 현지에 있던 프랑스 언론인들은 세계 2차 대전의 시작을 감지했다.

 

“신문 인쇄가 시작된 순간, 오스트리아 빈에서 쿠르트 슈슈니크 총리가 사임했다는 전화가 왔다. (...) 거리에는 나치들만 보였다. (...) 오스트리아에서는 독일인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오스트리아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1938년 3월, 좌파 자유 일간지 <뢰브르(L’Œ uvre)>의 외교 칼럼니스트 준비에브 타부아가 황급히 독자들에게 전한 내용이다. 그해 3월 11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가 새 총리로 취임했다. 당시 쿠르트 슈슈니크 총리는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12일 오후 히틀러는 그의 고향 오스트리아 린츠에 도착했다. 14일, 빈에서 안슐루스(Anschluss, 오스트리아 독일 합병)가 선포됐다.

당시 오스트리아에는 프랑스 언론사에서 파견한 특파원들이 있었다. 오스트리아를 잘 알았던 특파원 마들렌 자코브는 1934년 2월 주간지 <뷔(Vu)>에서 파견돼 ‘붉은 빈(1918~1934년 사회민주당 집권 시기-역주)’의 파멸을 취재했었다.(1) 잠깐 스페인 내전 현장으로 떠났었던 그녀는 이번에는 노동자총연맹(CGT)의 주간지 <메시도르(Messidor)> 소속으로 오스트리아에 돌아왔다. 그녀는 여기서 주간지 <뷔>의 전 편집장이자, 사진의 대가 뤼시앵 보겔과 재회했다. 1938년 3월 18일 주간지 1면을 장식한 그의 사진은 ‘나는 오스트리아의 사망을 목격했다’라는 제목의 르포 기사에 힘을 실었다. 

 

나치 문양, 히틀러, 광기 그리고 치욕

마들렌 자코브는 오스트리아의 일부 도시에서 나치 문양인 하켄크로이츠(Hakenkreuz)가 얼마나 빠르게 퍼졌는지를 전해줬다. 안슐루스 선포 전에 그녀는 그라츠 시에 갔었다. “역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나치 문양(하켄크로이츠)이 가득했다.” 그녀는 문양 속에 침투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히틀러와 추종자들의 깃발 아래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직돼 있었다. “상점에서는 ‘하일 히틀러’를 외치며 나치 경례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나치 브로치와 나치 엽서를 팔았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하켄크로이츠는 마을 도처에 가득했다. 브로치, 넥타이핀, 시계 상자 심지어 시내 전차 트램에도 히틀러의 초상화가 있었다.”

3월 13일 빈 공항에 발을 내딛자마자 이런 갑작스런 변화를 마주친 프랑스 특파원도 있다. 저명한 특파원인 앙드레 비올리스는 ‘하켄크로이츠가 그려진 200대의 비행기, 모노클(한쪽 안경)을 끼고 허리를 뒤로 젖힌 채 거만하게 행진하는 장성들, 회녹색의 독일 군복을 입은 대규모의 보병대원들’을 보고 끔찍한 충격을 받았다고 <방드르디(Vendredi)>지에 기고했다. <방드르디>는 인민전선 동맹의 3가지 성향(공산주의, 사회주의, 극단주의)을 대변하는 정치문학 주간지였다. 비올리스는 <방드르디>의 공동 편집장이었지만, 인민전선은 그 수명이 막 다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비올리스는 실상 <스 수아르(Ce soir)> 신문의 특파원으로 한 달간 중앙유럽으로 파견됐다. <스 수아르>는 <파리수아르(Paris-Soir)>에 맞서 프랑스 공산당이 1937년 3월 창간한 신문이다. 사업가 장 프루스트가 소유한 언론사 <파리수아르>는 언론인 겸 작가인 루이 아라공과 장 리샤르 블로크가 운영했다.

 

“방치한다면 유럽 청년들은 히틀러주의자가 된다”

빈에서는 몇 시간 동안 야간 횃불 행렬과 함께 나치들의 무력시위가 이어졌다. 1935년 자르 국민투표 당시 마들렌 자코브와 동료들은 이미 이런 광경을 목격했었다.(2) 반유대주의 반대 연맹(LICA)의 기관지 <르 드루아 드 비브르(Le Droit de vivre)>에서 오스트리아인 월터 메링은 빈에 만연한, 쇠락의 분위기를 전했다. “나치가 동원한 야간 횃불 행렬은 아침부터 전 지역의 대로변에서 이어졌다.”

히틀러의 개선을 상징하는 횃불 행렬은, 저속한 연극의 서막에 불과했다. 앙드레 비올리스의 충격적인 목격담은 <방드르디>에 다음과 같이 보도됐다. “사람들은 바짝 엎드려 복종했다. (...)  전날 밤 오스트리아의 자유를 소망하며 인도 위에 분필로 썼던 글들은, 비겁하고 무기력한 군중의 발길에 짓밟혀 지워졌다.” <스 수아르>에서는 놀란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어찌나 비열하던지, 어떤 시민들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고 독일 경비대로 달려가서, 차려 자세를 취하고 그 유명한 독일식 군대 인사를 했다.”

반유대주의 극우 주간지 <즈 쉬 파르투(Je suis partout)>의 칼럼니스트 프랑스와 도투르는 오스트리아 청년들이 열성적으로 히틀러의 이상주의를 신봉하는 것에 우려를 표명했다. “히틀러가 독점적으로 유대인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함으로써 이익을 보는 것을 계속 방치한다면, 유럽 청년들은 파시스트에 그치지 않고 히틀러주의자가 될 것이다.”

마들렌 자코브는 고함치는 시민들을 보고 놀랐고, 앙드레 비올리스는 ‘극도로 흥분한 외침과 환호’에 충격을 받았다. 마들렌 자코브는 “광기가 거리를 지배했다”라고 표현했다. 앙드레 비올리스는 나치즘을 전염병에 비유해 “거리에는 독일 군인과 장교들이 창궐했다”라고 묘사했다. 

이렇듯 두 특파원은 비유법을 통해 ‘더 이상 국민이 아닌 국민의 변신’을 표현했다. 그들은 노예화에 굴복하지 않는 오스트리아인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마들렌 자코브는 “가정집 창문 너머에서 눈물을 억누르며 흐느끼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 광기 어린 행렬이 이어졌고, 차마 그 광경을 볼 수 없었던 이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넘쳐흘렀다. 고통스런 치욕의 눈물이었다”면서, “그날 밤 굳게 닫힌 창문 뒤에서 치욕과 분노를 억누르고 있을 진정한 애국자들을 생각했다”라고 썼다. 프랑스 좌파 언론인들이 쓴 ‘치욕’이라는 단어는 프랑스의 보편적인 이상이 파괴되고, 인권이 유린당했음을 표현한 것이다. 

 

“독이 뿌려진 이 도시를 떠날 때다”

며칠 후, 그들은 외국인에 대한 달라디에 시행령을 비판하기 위해 ‘치욕’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것이 그들, 프랑스 언론인과 오스트리아 언론인의 차이점이었다. 프랑스 언론인은 여전히 비판하고 저항할 수 있었지만, 오스트리아 언론인은 목숨을 위협받았다. 금지된 정치적 견해가 담긴 글도, 몸도 철저히 숨겨야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마들렌 자코브는 빈을 배회했다. 공산주의자들, 왕정주의자들, 기독교들 등 나치즘, 파시즘에 반대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선동도구인 글과 팜플렛을 찢거나 불태워 숨겼다. 행동파 언론인은 그들이 짐을 꾸리는 것을 돕기도 했다. 나치에 맞선 이들에게는, 도망만이 살길이었다. 자코브는 “이미 나의 친구들 중 상당수가 체포됐다”라고 썼다. 3월 18일, 앙드레 비올리스는 빈에서의 마지막 르포 기사를 썼다. 그 기사는 이렇게 끝난다. “이 매력적인 도시를 떠날 때가 됐다. 이제는 독이 뿌려져버린 이 도시를.”

언론인들의 목적지는 체코슬로바키아였다. <스 수아르> 소속의 앙드레 비올리스는 사진작가 킴과 함께 프라하, 카를로비바리, 엘보겐, 에게르, 브라티슬라바를 돌았다. 킴은 스페인 내전과 인민전선 사진으로 유명한 사진작가다. ‘유럽의 중심’이라는 타이틀의 11개의 연재 기사는 5월의 첫 보름 동안 연기된 후 발표됐다. 프라하에 도착한 비올리스는 외국의 한 고장에서 느낀 놀라움을 담담하게 서술했다. 이곳에서의 놀라움은, 매우 정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빈에서 본 것보다 더욱 부자연스러운 군복들, 아스팔트 위를 걷는 군화 소리, 히스테릭하고 억지스러운 웃음, 부자연스러운 태도 또는 맹목적인 광신자들.”

프라하 특파원들의 모든 기사에는 공통적으로 ‘침착’이라는 단어가 쓰였다. 1936년 여름, 스페인에서 특파원들은 스페인 내전 승리에 대한 확신을 논증함과 동시에 놀라움을 표현하고자 이 단어를 사용했었다. 그러나 2년 후 1938년 4월 스페인은 폭탄으로 뒤덮였고, 대량학살이 일어나고 패전했다. 더 멀리 아시아에서는 1937년 7월 발발한 중일전쟁의 비극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 희망이 있을까? 여하튼 언론인들의 발걸음은 체코슬로바키아를 향했다. 

 

체코는 침착했으나… 영국의 오판으로 전운 속에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L’Humanité)>의 국외 정치부 기자, 가브리엘 페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머물렀다. 첫 기사에서부터 그는 확신했다. “체코는 겁먹지 않았다. 체코가 보여준 침착함은 오히려 반격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체코 국민들은 위험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맞설 준비가 돼 있고, 당황하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용기로 격한 선동가들에게 맞서고 있다.” 페리에게 ‘침착’과 ‘흔들림 없는 용기’는 동의어였다. 스페인의 반(反)파시즘부터 체코의 반(反)나치까지 ‘용기’라는 주제는 일방에만 존재한다.

이런 침착과 용기를 몸소 보여주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체코의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이었다. 담화의 필요성을 인지한 그는 수많은 인터뷰를 진행했다. 스페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메시도르(Messidor)> 특파원 필리프 라무르는 취재를 위해 체코슬로바키아에 머물렀던 9월, 베네시 대통령을 만났다. “유럽 전체가 불안에 떠는 가운데, 침착함을 잃지 않는 한 인물이 유럽의 중앙에서 군사 공격에 대항해 인류 문명의 방어를 선도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국왕, 스페인의 마누에 아사냐 그리고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의 특별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문장 속에는 다가올 비극적인 운명이 감춰져 있었다.

특파원들은 체코 국민들과 대통령은 “침착하다”라고 반복했다. 그러나 4월부터 체코 영토 내에서 전쟁이 발발한 가능성이 커지자, 방공 훈련이 시작됐다. 비올리스는 이를 목격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 곧 닥칠 위험에 대해서는, 지도 위에 나와 있었다. 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체코는 모든 국경지대에서 독일군의 습격을 받을 것”이라고 그녀는 보도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국민 모두가 침착함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1935년 나치 숭배자인 콘라드 헨라인이 이끄는 나치정당 주데텐 독일인당이 체코 서부지역인 주데텐란트의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거뒀다. 1938년 5월 지방선거는 나치 이데올로기의 지배력을 공고히 해줬다.

1938년 4월 24일 콘라드 헨라인은 주데텐란트 지역의 자치를 주장하며, 8가지 요청 사항이 담긴 칼스배드 프로그램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요구했다. 4월 28일부터 29일까지 열린 런던 회담에서 영국과 프랑스 지도자들은 베네시 대통령에게 콘라드 헨라인과 협상할 것을 요구했다. “이 시기에 이미 알 수 있었다. 영국의 지원이 있어야 개입할 수 있었던 프랑스는, 영국의 보증을 얻어내려 했으나 실패했다. 두 국가 간에는 어떤 협정도 없었으나,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은 영국의 손에 달려있었다.”(3) 프랑스는 로카르노 조약(1925년 10월 16일)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군사적으로 돕기로 약속돼 있었다. 

1935년 5월 2일 프랑스와 소련의 양자 원조 협정 체결 후, 5월 16일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가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3년 후,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의 권유에 따라 독일과의 평화를 추구했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와 외무부장관 조르주 보넷은 정치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돕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프랑스 외무성에서 보관 중인 달라디에 문서에 쓰인 1938년 3월 29일 역사학자 르네 지롤트의 기록에 따르면, “주데텐란트 반란 문제에 대해 프랑스가 기권하게 하기 위해 독일이 자발적으로 도왔다”라고 한다.(4)

사회주의 신문 <르 포퓔레르(Le Populaire)>의 특파원 루이 레비는 6월 말부터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취재를 시작했다. 그도 체코 국민들의 ‘침착함’부터 언급했다. “사람들은 저녁이 되면 카페에서 자문했다. (...) 사람들은 토론하고, 간략한 공보물을 읽었다. 그들은 침착했다.” 루이 레비는 1937년도에 이미 이 나라를 취재한 적이 있다. 국제연맹에 파견됐던 국제외교 전문가인 그는 “네빌 체임벌린이 프라하를 제대로 여행했다면, 체코인들에게 침착함을 권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조롱하듯 덧붙였다. 

 

공포와 증오를 연료로 삼은 ‘나치화’

“엘보겐에서 들었던 끔찍한 군화 소리가 여기서도 들려왔다. 회색 군복의 남자들과 발키리들이 보였다” 앙드레 비올리스는 4월 주데텐란트를 여행하면서 들었던 소리를 잊을 수가 없었다. “칼스배드에서 행진하는 군화 소리에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마들렌 자코브는 이전에도 1934년 오스트리아에서, 그 다음해에는 자르에서 군화 소리를 비롯한 몇몇 특징적인 소리에 공포에 떨었었다. 중부 유럽의 나치화가 체계적으로 퍼지고 있었다. 주데텐란트 취재를 시작한 프랑스 특파원들의 글 속에 ‘공포(Terreur)’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비올리스는 칼스배드와 인근 지역에 대해 “상점의 배척, 검열, 협박, 위협, 자르 국민투표 전에 자르에서 겪었던 끔찍한 일들이 여기에서도 횡행했다”라고 썼다. 1937년 6월, 루이 레비는 주데텐란트의 체계적인 스파이 조직망에 대해 서술했다. 1938년 7월 레비는 공포에 대해 “교활하고 은밀하게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독일인이 운영하는 모든 기업체에서 공포를 이용한다.” 공포는 폭력을 부르고, 정당의 정치인들은 공포에 떨었다. “후보자 자녀들은 학교 폭력에 시달렸다. 그들이 매일 들은 욕설 중 가장 약한 말이 ‘붉은 돼지’였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침착했다. 오히려 특파원들이 대변인이나 선동가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주데텐란트와의 문제에 관해서나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할 때는 정부의 불안이 드러났다. 5월, 가브리엘 페리는 “체코 공화국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기탄없이 도움을 받아야 한다. 평화를 지켜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7월 루이 레비는 “동맹과 적, 모두 프랑스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라고 외쳤다. 며칠 후, <방드르디> 특파원 필리프 디오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은 세계평화와 프랑스의 안전과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권리를 보장한다”라고 보도했다. 공산주의 주간지 <르가르(Regards)>의 특별 특파원 프란츠 칼 바이스코프는 1938년 4월, 기사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주데텐란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알자스다. 알자스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트라스부르는 조만간 독일령 주덴텐란트 소속이 될 것이다.”

이런 비유는 당시 언론인들의 상상 속에서 이뤄졌다. 안슐루스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우려로 국경 문제가 언론에 대두되기 시작했다. <스 수아르>의 기사들에 잘 나타난다. 2월과 3월, 특파원 엘리 리샤르는 ‘하켄크로이츠의 국경들’이라는 의미심장한 부제의 연재 기사를 썼다. 그는 독일 인근 지역과 벨기에를 주의 깊게 조사한 후, 벨기에의 말메디 시에서 “독일인들은 확실히 이곳에서 은밀하게 작업하고 있다”라고 썼다. 

4월, 장 리샤르 블로크는 어떻게, 왜 스위스가 위험한 상황인지 설명하며 경고하는 기사를 썼다.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이후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 한쪽 편 건물에는 수많은 작은 깃발들로 장식된 반면, 건너편 건물들은 깃발도 없고 초라하다는 것이다. 한쪽 편 인도는 독일인들만 다니고 건너편 인도는 스위스인만 다니게 될지도 모른다.”

‘동쪽 지역은 이상 없는가?’ 9월 말부터 발행된 연재 기사의 제목이다. 전직 <파리수아르> 기자이자, 유명한 특파원인 스테판 마니에는 알자스로 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상황을 진단했다. “물론 독에 닿은 것은 체코슬로바키아다. 그러나 두 국가의 충돌로 인해 관찰자들은 알자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발열이 일어나는 첫 위기의 징후들을 발견했고, 적절한 평화 온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병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겨갔다.(5) 

 

“체코슬로바키아의 비극은 막장에 이르렀다”

모든 특파원들은 국경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여겼다. 히틀러의 스파이, 가짜 종업원, 가짜 상인을 마주친 주민들은 무너지기 쉽기 때문이다. 나치 선동가들은 성공적으로 신규 추종자를 대거 끌어들였다. 스테판 마니에르는 “나치의 선동은 지역에 상관없이 같은 전략을 펼쳤다”라고 전했다. “알자스, 오스트리아, 보헤미안(체코슬로바키아)에서 지역민들의 증오심, 미신, 원한을 이용했다”라는 것이다.

1938년 9월 1일 히틀러는 베르히테스가덴 시에서 콘라트 헨라인을 만났다. 7일 해외 정치 칼럼니스트 폴 니잔은 <스 수아르>에 “체코슬로바키아의 비극은 막장에 이르렀다”라고 기고했다. 이 기사를 토대로 그는 이듬해에 ‘9월의 연대기’라는 책을 발간했다.(6) 15일 주데텐란트의 퓌러(총통)인 콘라트 헨라인은 주데텐란트 지역의 독일 합병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베를린의 <스 수아르> 특파원 조르주 테보는 “독일 언론은 점점 심각한 분위기를 조장했다”라고 알렸다. 독일의 라디오 방송국들은 10분 간격으로, 모든 개연성과는 반대로 주덴텐란트의 상황이 엄중해지고 있다고 방송했다.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군사 대비를 비난했다. 체임벌린은 베르히테스가덴 시에서 히틀러를 만났고, 콘라트 헨라인 요구의 적법성을 인정해줬다. 달라디에도 같은 입장이었다.

<르 드루아 드 비브르>의 특파원 상트 브라뒤는 칼스배드에서 나치 시위대를 본 후 “이것은 희극적인 아니 비극적인 패러독스”라며 다음과 같이 상황을 묘사했다. “평화로운 세상을 위협하는 난폭한 미치광이가 우리 앞에 있음에도, 미친 행동을 중지시키러 달려오는 게 아니라 우아한 외교관을 보내 중재한다.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자연스럽게 미치광이를 돕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배신했다”

9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9월 22일 프란츠 칼 바이스코프는 <스 수아르>에서 “프랑스가 결국 체코슬로바키아를 배신했음을 알게 된 시민들이 길가에서 울고 있다”라고 알렸다. 프랑스의 도움을 촉구했던 프랑스 특파원들의 논조는 배신에 대한 비난으로 바뀌었고, 프라하 시위대의 외침을 전했다. “프라하 시민들이 울고 있다. 히틀러에게 바짝 엎드린 달라디에! 우리는 저항하고 싶다! 우리는 강한 공화국을 원한다!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죽기를 택할 것이다!”라고 프란츠 칼 바이스코프는 전했다. ‘침착’은 ‘망연자실’로 바뀌었다. 

공화국의 행동과 시민 교육을 위한 주간지 <라 뤼미에르(La Lumière)>의 특파원 뱅상 사보는 8월 중순부터 프라하에 머물렀다. 그의 기사는 9월 23일 처음 실렸다. “영국의 결정은 체코슬로바키아 시민들을 비탄에 젖게 했다. 모두가 반발했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믿지 않으려 했다. ‘프랑스가 우리를 배신했다고? 그럴 리 없어.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야. 곧 풀릴 거야.’라고 외쳤다.”

반면 프랑스와 영국의 행동을 칭송한 언론도 있다. 순응주의 일간지 <르 프티 파리지앙(Le Petit Parisien)>의 한 논평가는 “독일과 체코의 갈등이 극심한 상황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그 어느 때보다 긴밀한 동맹을 유지하고 있다”라고 썼다. “유럽의 평화는 지켜낼 수 있다”라고, 프랑스 외무부와 친한 우파 신문 <르 탕(Le Temps)>은 민중의 불안을 억누르려 했다. 일부 언론은 방법, 회담 내용, 향후 조약을 정당화하기 위해 ‘평화’라는 단어를 제목에 기재했다. ‘평화’라는 단어는 프랑스의 책임 있는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

급진주의 일간지 <레르 누벨(L’Ère nouvelle)>의 편집자는 9월 24일 논평에서 “지금은 모든 프랑스 국민들이 정부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영국의 동맹국인 프랑스 같은 대국의 침착한 결단이 이런 시기에 평화를 지킨다”라고 했다. <랭트랑지장(L’Intransigeant)> 신문에서 루이 라차루스는 “믿지 말자. 불순분자들을 믿지 말자! 우리는 누가 너희를 보냈고, 어떤 목적이 있는지 모른다. (...) 스페인에서 불간섭조약으로 애국심을 모욕했던 이들이 아닌지 알아보자”라고 분노를 표했다.

1938년 9월 29일, 마침내 뮌헨조약이 체결됐다. 몇 달 전인 3월 18일, 마들렌 자코브는 격분해 “오늘 오스트리아는 죽었다. 그리고 유럽은 방조했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었다. 9월 30일, 앙드레 비올리스는 시민 구호단체의 기관지 <라 데팡스(La Défense)>에 다음과 같이 비난과 분노를 쏟아냈다. “무엇이 이런 항복과 무기력으로 이끌었는가? 에티오피아, 중국, 스페인이 무참히 학살당했고, 오스트리아가 노예가 되더니 이번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차례다. 그렇다면 그다음은? 승리에 도취한 파시스트들이 꽃길을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 

 

 

글·안 마티외 Anne Mathieu
로렌 대학교 부교수. 『Nous n'oublierons pas les poings levés. Reporters, éditorialistes et commentateurs antifacistes pendant la guerre d'Espagne 우리는 쳐든 주먹을 잊지 않을 것이다. 리포터, 논설위원 그리고 스페인 내전 기간 반파시즘 해설자들은』(Syllepse, Paris, 2021년)의 저자.

번역·김영란
번역위원


(1) Jean-Numa Ducange, ‘Vienne la Rouge 붉은 빈’,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2년 5월호.
(2)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르(Sarre) 지역은 국제연맹 위임통치령이 됐고, 90%가 넘는 주민들은 독일로 편입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3) Bernard Droz, Anthony Rowley, 『Histoire générale du ⅩⅩe siècle 20세기 역사』, Seuil, <Points histoire 역사적 순간들> 총서, Paris, 1986년.
(4) Réné Girault, <La décision gouvernementale en politique extérieure 정부의 외교 정책>, René Rémond, Janine Bourdin, 『Edouard Daladier, chef de gouvernement. Avril 1938 - septembre 1939. 1938년 4월~1939년 9월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 Presses de Sciences Po, Paris, 1977년
(5) Gunter Holzman, ‘J’ai assisté à la montée du nazisme 나는 나치즘의 부상을 목격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5년 5월호.
(6) 『Chronique de septembre 9월의 연대기』, Gallimard, Paris, 197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