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시장 막후의 ‘숨은 세력’

프랑스, 17년 만의 정 권교체

2012-05-14     조프레 괴앙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금융계를 향해 맹공을 퍼붓는다. 세계를 완전히 장악한 금융계를 상대로 통제의 고삐를 더 단단히 죄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그들이 말하는 금융계의 실체가 대체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시장'은 실체 없이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탓에 현 금융위기와 한참 추진 중인 긴축정책의 진정한 수혜자가 누구인지는 언제나 어두운 베일 속에 가려 있다.

프랑수아 바이루 대통령 후보를 공공연히 지지하는 전직 은행가 출신의 사회주의자 장 페를르바드는 2005년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자본주의자의 실체를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중략) 자본주의와 결별하자는 것은 대체 누구와 단절하자는 말인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이름 모를 세계화된 시장의 독재를 종식하려면 대체 어떤 기관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일까?" 피에르 모루아 총리의 차석 보좌관을 지낸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정체불명의 적 앞에 마르크스는 무력하다."(1)

언론과 금권세력은 사실상 한통속이다

거대 금융자본을 대표(그는 '방카 레오나르도 프랑스'의 사장이자 '부이그' 그룹의 이사였다)하는 그가 금융 과두세력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놀랄 만한 일일까? 오히려 더 놀라운 것은 주류 언론이 앞다퉈 금권세력을 실체가 모호한 탈정치적 이미지로 보도하는 점이 아닐까. 이를테면 마리오 몬티 이탈리아 총리 선출을 둘러싼 언론의 보도 행태는 담론이 어떻게 진실을 은폐하는 연막으로 작용하는지 여실히 보여준 완벽한 예였다. 은행가들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는 몬티 내각에 대해 언론들은 '테크노크라트' 혹은 '전문인' 따위로 포장하기에 급급했다. 심지어 일부 온라인판 일간지는 '시민사회 인사들'이 이탈리아 정부의 사령탑을 맡았다고까지 보도했다.(2)

몬티 총리가 대학교수를 대거 기용한 사실을 두고도 이탈리아 정책의 과학성은 이제 떼논 당상이라는 식의 보도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몬티 내각 인사들의 면면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몬티 내각의 대다수 장관들은 이탈리아 유수 기업의 이사회에 참여하고 있다. 이를테면 코라도 파세라 경제개발부 장관은 '인테사 상파울로'의 사장이며, 토리노 공과대학 교수인 엘사 포르네로 노동부 장관은 인테사 상파울로의 부사장이다. 토리노 공과대학 학장인 프란체스코 프로푸모 교육·연구부 장관도 피렐리에 이어 '유니크레디트 프라이빗뱅크'와 '텔레콤 이탈리아'(인테사 상파울로, 제네랄리, 메디오 방카 등이 지배하는 기업)에서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피에로 그누디 관광체육부 장관도 유니크레디트 그룹의 이사직을 맡고 있다. 밀라노 가톨릭대학 공공재정학 교수인 피에로 지아르다 의회 담당 장관도 '방코 포폴라레'의 부사장과 피렐리의 이사를 겸임하고 있다. 물론 몬티 총리라고 별반 다른 것은 아니다. 그는 과거 코카콜라와 골드만삭스의 고문이자 피아트와 제네랄리의 이사로 활동했다.

유럽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금융시장이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맹렬히 비난하는 가운데, 정작 옛 사회자유주의 거물급 인사들은 금융계를 향해 발길을 돌리고 있다. 게다가 이들의 변절을 거세게 비난하는 옛 동지들도 찾아보기 힘들다. 한 예로 빔 콕 네덜란드 전 총리는 네덜란드 대기업 ING, 셸, KLM 등의 이사로 다시 전향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도 기업 세계로 복귀했다. 슈뢰더는 '노드스트림 AG'의 사장과 TNK-BP 석유그룹의 이사, '로스차일드 인베스트먼트 뱅크'의 유럽 담당 고문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언뜻 파란만장해 보이는 슈뢰더의 이력이 남다른 것은 아니다. 슈뢰더 내각에 몸담았던 독일 사민당(SPD) 의원들 중에는 공무원 옷을 벗고 기업인으로 변신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이를테면 오토 쉴리 전 내무장관은 현재 금융 트러스트 '인베스트코프'(바레인)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더욱이 이 기업에는 보수당 출신의 오스트리아 총리 볼프강 쉬셀과 유럽연합(EU) 헌법회의의 부의장을 지낸 줄리아노 아마토, 전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 등 쟁쟁한 인사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독일의 볼프강 클레멘트 전 경제노동부 장관도 '리버록 캐피털'의 출자자이자 독일 시티그룹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1999~2005년 재무차관을 지낸 그의 동료 카이오 코흐 베저도 도이체방크의 부사장이다. 마지막으로 앙겔라 메르켈 1기 정부에서 재정부 장관을 지낸 페르 슈타인브뤼크는 티센크루프의 이사가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국 마거릿 대처의 '충실한 후계자들'(3)과 옛 노동당 지도자들도 거대 금융에 충성을 서약했다. 한 예로 데이비드 밀리밴드 전 외무장관은 '밴티지포인트 캐피털 파트너스'(미국), '인더스 베이슨 홀딩스'(파키스탄)의 고문이 되었고, 피터 만델슨 전 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은 투자은행 라자드에 고용됐다. 앤서니 블레어도 스위스 기업 '취리히 파이낸셜 서비시즈'의 고문과 '랜스다운 파트너스'의 투자운용담당자를 겸직하는 한편, JP모건체이스 글로벌 자문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코피 아난, 헨리 키신저 등과 함께 일하고 있다.

다를 것 없는 사회주의 거물들

이처럼 일일이 관련 사례를 나열해가며 독자들을 괴롭힌 점은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매체들이 공직에 있는 인사들의 사적 이해관계를 거론하는 것을 고집스러울 정도로 기피하고 있으니 그저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언론은 늘 의도적으로 정치권력과 금융자본을 철저히 구분되는(심지어 상반되는) 별개의 세계로 그리려 한다. 하지만 두 세계를 가르는 장벽 여기저기에는 구멍이 무수히 많다. 금융시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려면 그저 그런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두 세계 사이에서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는 자가 누구인지 분명히 가려낼 필요가 있다.

요즘 금융계는 얼굴이 없다고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금융계는 분명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아니 오히려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옳을지 모른다.(4) 그렇다고 미국 플로리다에 거주하는 은퇴자나 종종 언론에 의해 희화화되는 유럽의 소액주주가 금융계의 실체는 아니다. 막대한 부를 굴리거나 소유하고 있는 과두세력이 진정한 금융계의 얼굴이다. 페를르바드는 "2005년 전세계 인구의 불과 0.2%가 세계 시가총액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5) 그런데 이 주식 포트폴리오를 관리하고 있는 것이 은행(골드만삭스·산탄데르·BNP파리바·소시에테제네랄 등)과 보험회사(AIG·AXA·스코르 등), 그리고 연기금 및 투자기금(버크셔해서웨이·블루리지캐피털·소로펀드매니지먼트 등)이다. 더욱이 이 기관들은 대부분 자기자금을 이용해 투자하고 있다.

금융 과두세력은 금융공학자의 창의력이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여실히 보여주는 수많은 파생상품을 이용해 주식·국채·원자재 등의 시가 변동을 노린 투기판을 벌이고 있다. 더 이상 시장은 성숙한 경제가 거치는 자연적 변화의 마지막 단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라르 뒤메닐과 도미니크 레비가 지적한 것처럼 "상류계층의 수입을 더 불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6) 그리고 이같은 소기의 목적은 훌륭하게 달성됐다. 한 예로 오늘날 전세계의 억만장자 수는 6만3천 명에 달한다. 더욱이 억만장자들이 보유한 자산을 모두 합하면 무려 40조 달러(연간 전세계 국내총생산 규모와 같음)에 이른다.

두 세계를 오가는 진짜 스파이들

이같은 시장의 민낯을 마주하는 일은 불편할 수 있다. 가끔은 (돈키호테처럼) '풍차'를 상대하는 쪽이 더 편할지 모른다. 지난 1월 22일 부르제(센생드니) 연설 중에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소속 대통령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한판 전투에서 나의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가? 그 적은 이름도, 얼굴도, 소속 정당도 없다. 그는 결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기에 결코 대통령에 당선되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그 적이란 바로 금융계다." 사실 올랑드가 진정으로 거대 은행과 대형 산업의 몸통을 공격하려 했다면, 어떤 결과가 닥칠지 뻔히 알면서 남유럽 국채에 대한 투기 공격을 결행한 투자기금 경영진의 이름을 낱낱이 밝히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자신의 고문 가운데 일부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서 다른 세계로 전향한 옛 유럽의 사회주의 동료들의 이중적 지위를 비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올랑드 사회당 후보는 프랑스 유수 산업체 경영자들로 구성된 로비단체 '산업서클'의 부회장 피에르 모스코비치를 자신의 선거 참모로 내세웠다. 이로써 사회당에 의한 정권 교체가 반드시 '위대한 밤'(Grand Soir·자본주의 사회가 끝나고 새로운 사회가 도래하는 것을 의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금융시장에 넌지시 알렸다. 실제로 모스코비치는 '긴축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장한 인물이 아니던가. 또한 "올랑드가 대통령이 되면 프랑스의 재정 적자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중략) 2013년에 3% 이하로 축소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필요한 조처를 취하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7)

금융시장을 공격하는 것은 정치선전술의 일종이다. 맹렬하지만 결코 위협적이지 않은 이 공격은 지금까지 공허한 말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과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위기의 원흉들을 사면해주었듯이, 유럽의 지도자들도 지금은 탐욕스러운 투기꾼들의 방종을 비난하고 있지만 얼마 안 가 깨끗이 죄를 용서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격에 맞지 않게 더럽혀진 금융 과두세력의 대표자로서의 지위를 이내 회복하려 들 것이다. 대체 어떻게? 바로 새로운 시장 규제안을 마련하기 위해 결성된 위원회의 수장직에 그들을 앉히는 것이다. 폴 볼커(JP모건체이스)에서 마리오 드라기(골드만삭스), 자크 드 라로지에르(AIG·BNP파리바), 어데어 터너 경(스탠더드차타드은행·메릴린치유럽), 알렉산더 람팔루시(CNP보험·포르티스)에 이르기까지 과거 금융위기의 해법을 마련하기 위해 모인 이들도 모두 하나같이 거대 금융기업과 돈독한 관계에 있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무책임한 작자들'로 불리던 이들은 하루아침에 신의 은혜를 입기라도 한 양 경제계의 '현자'로 떠받들어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행가의 '거만함'과 '아둔함'을 맹렬히 비난하던 언론계와 지성계까지 가세해 그들을 칭송했다.

투기꾼들이 최근 몇 년 동안 줄줄이 이어진 금융위기로 인해 큰 수혜를 입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문제의 '포식자들'이 기회주의적이고 파렴치하다는 사실만을 강조하는 데 급급해 이런 목표가 달성될 수 있던 이면에 금융계와 국가 최고위층의 유착관계가 있었다는 사실마저 잊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2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며 서브프라임의 수혜를 톡톡히 누린 존 폴슨은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그는 이미 미 국채를 보유한 민간 채권자 중 하나인 '핌코'의 고문을 맡고 있다)을 자기 회사에 영입하지 않았던가? 또한 헤지펀드에서 일하는 주요 국제투자 운용 담당자들은 어떠한가? 오바마 정부에서 국가경제위원회(NEC) 의장, 빌 클린턴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로런스 서머스도 'D.E.쇼'사의 이사로 활동했다. '시타델 인베스트먼트' 그룹을 창업한 시카고 출신의 켄 그리피스도 현 미국 대통령에게 선거자금을 지원했다. 조지 소로스 역시 노동당 출신의 전 유엔개발계획(UNDP) 총재 말록 브라운 경을 위해 돈을 받고 일하고 있다.

그렇다. 금융계는 얼굴이 있다. 오래전부터 권력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우리는 항상 그 얼굴들을 대면해왔다.

글•조프레 괴앙 Geoffrey Geuens 프랑스 리에주대학 부교수. <상상의 금융계: 자본주의 해부-금융시장에서 과두세력까지>(아당 출판사·브뤼셀·2011)의 저자.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Jean Peyrelevade, <완전한 자본주의>, 쇠유/라 레퓌블리크 데 지데 출판사, 파리, p.37·91, 2005.
(2) Anne Le Nir, ‘이탈리아 마리오 몬티, 전문인으로 내각을 구성하다’, 2011년 11월 16일, La-Croix.com/ Guillaume Delacroix, ‘이탈리아를 지휘할 준비가 된 몬티 내각’, 2011년 11월 16일, LesEchos.fr.
(3) Keith Dixon, <충실한 후계자: 블레어와 대처리즘>, 리베르/레종 다지르 출판사, 파리, 2000.
(4) ‘권력이 숨어 있는 곳’, <마니에르 드 부아르>, 제122호, 2012년 4∼5월(가판대 판매 중).
(5) Jean Peyrelevade, <완전한 자본주의>, 위의 책, 1%의 프랑스인이 50%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6) Gerard Dumenil, Dominique Levy, <신자유주의의 위기>, 미국 하버드대학 출판사, 케임브리지(매사추세츠주), 2011.
(7) ‘피에르 모스코비치, 긴축을 두려워 말라’, 2011년 11월 8일, www. lexpress.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