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반동, 옛 시절에 대한 향수?

미셸 우엘베크, 실뱅 테송과 그 선배작가들

2023-09-26     에블린 피예에 l 기자

희망이 희박해지면 세상에 환멸을 느낀 이들은―정치에서나, 문학에서나― 과거에 대한 향수를 소환한다. 이런 전통에 속한 작가들은 너무 부르주아적이며, 대중의 욕망에 쉽게 부응하는 사회질서에 대해 매우 비판적 입장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매우 보수적인 형태의 낭만주의는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다. 

 

무사태평하다. 느긋하다. 은근히 비관적이지만 용감하게도 굴복당하는 법이 없다. 위풍당당하게 세상의 환멸에 맞선다. 지난날의 위대한 꿈이 사라진 것을 몹시 슬퍼한다. 그리고 지도자들끼리 합의한 것에 과감히 반대하고 나선다. 우울하지만 강인한 명석함과 불온한 사상을 옹호하는 대담함을 갖고 있다. 주요 인사들이 옹호하는 가치를 거부하는 보기 드문 무례함을 보이기도 한다. 시대에 대한 혐오, 과거에 대한 향수와 파괴적인 현재에 대한 분노,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미래에 대한 깊은 불안감, 모든 것이 망가졌다는 느낌, 우리가 무력하다는 확신 등 그가 다루는 모든 주제는 뜨거운 화제가 된다.

 

반동적 상상력…이 슬픈 운명  

여기서 서술된 것은 하나의 선언이라기보다는 상상의 지표들이다. 반동적 상상력은 점차 확산되면서 파괴적 명성을 얻었고, 이제는 소수자의 고독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패배자의 편에서 말이다. 문학은 오랫동안 그 역할을 해왔다. 그렇게 문학적 미덕이라는 이름으로 냉철한 반(反)진보주의 작품을 써서 성공을 거두고, 독자를 확보하며, 평론가들의 관심을 끈 작가는 (좌파를 포함해) 수없이 많다. 로제 니미에(Roger Nimier), 에밀 시오랑(Emil Cioran), 앙투안 블롱댕(Antoine Blondin) 같은 옛날 작가들, 실뱅 테송(Sylvain Tesson), 미셸 우엘베크(Michel Houellebecq) 같은 요즘 작가들, 그리고 루이페르디낭 셀린(Louis-Ferdinand Céline)이나 피에르 드리외라로셸(Pierre Drieu La Rochelle) 도 빼놓을 수 없다. 모두 솔직함으로는 1위를 다툴 인물들이다.

이들 작가들의 작품 경향은 다양하지만 이들은 각자의 정치적 성향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몇 가지 특징적 지표를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전개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선, 이들은 현재뿐만 아니라 다가올 미래의 개탄스러운 상황을 성찰한다. 이들에게 미래는, 아마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슬픈 운명은 민주주의, 즉 모든 것을 평준화시키고 ‘부르주아’라는 이들에게 승리를 준 ‘평등’이라는 한심한 이상에서 초래됐다.

하지만 이 같은 운명은, 이룬 것이라고는 소비주의밖에 없는 자유주의의 결과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의 열망이 아닌 다른 열망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에서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영웅은 될 수 없고, 역사의 비참한 결과를 보면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권태와 영혼의 불안, 작은 개인보다 더 큰 이상으로 고양될 수 있었던 시대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을 뿐이다. 

『푸른 경기병(Le Hussard bleu)』의 저자 로제 니미에는 “지구의 주민들이 좀 더 어려워지면 나 자신을 인간으로 귀화시킬 것”이라고 썼다. 이들에게는 잃어버린 초월적 감각을 되찾고 세상과 정신의 상품화를 되돌리는 것, 명예와 신성을 존중하고, 삶의 생명력을 복원하고, 그것을 허용하는 사회 질서를 다시 세우는 것만이 지켜야 할 유일한 대의다.

 

귀족적 댄디즘, 소(小)부르주아의 고전적인 꿈

그 밖의 모든 것은 경멸을, 심지어 모욕을 초래할 뿐이다. 이들의 작품에서 잘 짜인 문장과 형식을 통해 묘사되는 각성한 존재(1)가 가진 무기라고는, “반(反) 부르주아적” 아이러니와 공화주의적 평등주의의 허약한 논리를 경멸하는 태도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 작품에서는 삶이 버거워 환상적인 과거로 회귀하려는 일종의 낭만주의와 “귀족주의”를, “엘리트”와 반란의 기운으로 대변되는 도덕적 타락과 대비시키는 상상력이 발휘된다. 여기에는 사춘기와 불복종의 기풍이 있고, 무리와 섞이지 않는 사람들의 댄디즘이 있고, 보편적 어리석음의 게임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필사적 우월함이 있다. 이는 소(小)부르주아의 고전적인 꿈이기도 하다.

평등주의에 대한 이런 경멸의 뿌리는 아주 고귀한 영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인간은 군대나 교회 등에서 관리하지 않는 한 별로 가치가 없다는 확신이다. 이런 확신은 우리를 허무주의로 이끈다. 평준화를 이루는 민주주의는 개인, 국가, 유럽 문명, 이 모두를 퇴폐의 길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단, 평등주의와 변덕을 부릴 천박한 자유로 인해 사라진 가치를 급진적 방법으로 되찾을 가능성이 있을지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래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실뱅 테송(Sylvain Tesson)은 프랑스의 NGO ‘유러피안 길드(La Guilde Européenne du Raid)’의 창시자를 영웅으로 내세웠다. “레지스탕스가 되기에는 너무 어려서 OAS(Secret Army Organization) 특공대에 들어간”, “68년 5월의 부르주아가 물렁한 바리케이드를 준비하는 동안 감옥의 담벼락 안에서 명예와 충성을 꿈꾸던 소년”(2)을. 테송은 그가 처형된 것은 우리 인류의 타락을 반증하는 것이라 봤다. 모험가 테송은 자연 그 자체에서 세계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확인했고, 알프스 산맥은 그를 받아들였다. “풍경은 그의 영예, 위계, 순결의 원칙에 응답했다. (…) 정치적으로 각성된 이들이 산의 풍경의 상징성에 기대 좀 더 일찍 봉기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수직성은 평등주의 이론에 대한 비판을 의미했다.”(3) 재미있다. 하지만 정말 어리석다. 그리고 분명하다.

테송 같은 작가들이 ‘타락’만큼 자주 언급하는 단어는 ‘쇠퇴’다. 부르주아의 승리는 존재의 공허를 나타내는 신호로, 항상 치졸한 탐욕에 굴복할 준비가 돼 있는 두 발 동물의 내적 비참함을 보여준다. 테송의 독창적 표현에 따르면, “개인주의의 지배”는 더럽고 비겁하고 비열한 인간 본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 같은 “반동주의자들”의 발언은 인간 본성에 대한 비극적 이해에서 나온, 무엇보다도 도덕적인 발언이다. 노력하지 않으면 쉽게 멍청해지고 나태해지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추악함을 극복하고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은 노력과 희생을 통해서다.

놀랍게도, 진부하지만 도발적 색채를 띤 이런 생각들이 대중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좌파를 비판하면서도 교조적이라는, 심지어 “스탈린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권력자들, 정치인, 언론의 비호를 받고 있다. 이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다. 한때 <르피가로(Le Figaro)>의 주필이었으며, 베트남 전쟁을 지지했고, 지혜롭고 현명한 삶의 표본으로 통하는 그리고, “전통은 성공한 진보”(4)라고 말한 장 도르메송(Jean d’Ormesson)이 2017년 사망했을 때, 국가적 애도가 이뤄졌다.

 

모호함을 창출한 반동주의자들

또한 “나는 유대인과 (...) 프랑스 혁명이라면 토가 나온다”(5)며, 확고한 신념으로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자크 샤르돈(Jacques Chardonne)을 보자. 그가 그토록 대중의 인기를 끌지 않았다면, 그가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라는 사실도 끝까지 비밀로 남았을 것이다. 샤르돈이 과거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의 열렬한 지지자로 반유대주의를 옹호한 과거 전력은 침묵에 부쳐지고, 2018년에는 그의 이름이 “국가 기념관(Commémorations nationales)” 목록에 올랐다. 사람들이 중요시한 것은 재능뿐이었다. 영화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Olivier Assayas)는 그의 소설을 각색해 <애정의 운명(Les Destinées sentales)>(2008년 개봉)이라는 영화까지 만들었다. 그 소설에는 의미심장한 대사가 나온다. “불행한 사람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믿게 만드는 것,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더 나은 세상은 없으니까요. 바꿀 수 있는 것은 외형뿐입니다. (…) 항상 똑같은 사람들이 지배하니까요.” 

작가는 자신의 정치적 선택과 겹치지 않는 세계관을 전달할 수 있다(입헌군주제를 지지한 오노레 드 발자크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로제 니미에나 에밀 시오랑 같은 작가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이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작품에 기독교를 다소 그리워하는 허무주의를 드러내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인해, 짐승 같은 천성이 더욱 악화되는 인간을 그린다. 이런 그들의 ‘주제’는 물론, 평소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칭송받고 기념된다. 이들 중 몇몇의 작품은 ‘플레이아드 총서(Bibliothèque de la Pléiade)’에도 포함됐다. 오늘날 논란의 여지가 있는 우엘벡은 예외로 하고, 스스로 “교양 있는” 인물을 자처하며 특정 극우파의 사상을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그들의 예술적 재능은 실로 감탄스럽다.

실뱅 테송이 라디오 쿠르투아지에서 여전히 방송 진행을 하면서 펴낸 『눈 표범(La Panthère des neiges)』(갈리마르 출판사, 파리, 2019년)은 70만 부 넘게 팔렸고, 극우인사 에릭 제무르(Éric Zemmour)와 조프루아 르죈(Geoffroy Lejeune)(6)에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았던 미셸 우엘벡의 『전멸(Anéantir)』(플라마리옹 출판사, 파리, 2022년)은 일주일 만에 7만 5,000부가 팔렸다. 이 책들을 극우 유권자들만 읽었을까? 반(反)자유주의와 정신성이 풍부한 ‘순수한’ 세상에 대한 열망은 좌파의 관심을 끌기에도 충분하다. 이들의 반항적, 반자유주의적, 반엘리트적 성향은 안전해 보인다. 이들 반동주의자들은 일종의 모호함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소렐이 ‘혁명’보다 ‘재생’을 선호한 이유는?

분명, 어떤 권위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인가가 되는 것”보다 “무엇인가를 가지는 것”에 시간을 쏟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부르주아가 대중(혹은 ‘민중’)을 경멸한다고 비난하는 것도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계몽주의 혐오가 집단 해방을 향한 강한 추진력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도덕성으로 시스템과 세계와 개인을 ‘재생’하기를 원한다면, 사회 문제와 정치적 과제를 피할 수 없다. 혁명적 조합주의의 이론가이자 열렬한 드레퓌스주의자였던 조르주 소렐(Georges Sorel, 1847~1922)은 노동계급이 “도덕성의 승리를 위해 세상을 재생할 것”(7)이라 생각했다. 

소렐은 분명 ‘혁명’보다는 ‘재생’이라는 용어를 선호했다. 그는 “진정한 사회주의는 반의회적, 반자유주의적, 반인도주의적, 반진보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금세기 최대의 실수라 여겼다. 소렐이 그 자신의 도덕 철학을 피력한 유명한 저서 폭력에 대한 성찰(Réflexions sur la violence)』(1908)을 “부흥의 날을 기다리는 동안, 분별력 있는 노동자들은 (...) 쩨쩨한 민주주의자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영혼의 힘을 길러야 한다”(8)는 권고로 끝맺었다. 권력의 컨베이어 벨트를 장악한 지식인에 대한 철저한 거부를 기반으로 하는 소렐의 사상은 그를 악시옹 프랑세즈(Action française)의 왕당파와 잠시나마 가까워지게 만들었고, 안토니오 그람시와 베니토 무솔리니로부터도 찬사를 받았다. 오늘날 소위 “교양있는” 극우파의 선구자로 꼽히는 알랭 드 브누아(Alain de Benoist)는 소렐을 ‘보수적 혁명가, 보수적이기 때문에 혁명가’라 부르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사회에 만연한 혼란은 문인들의 반동주의가, 더 광범위하게는 그런 반동주의가 퍼뜨리는 사상이 성공을 거두게 만들고, 그 가운데 사회에서는 “정치적으로 그릇된” 발언이 받아들여지고 과거에 대한 향수와 “진보”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았다. 이런 현상은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좌파는 미래에 대한 구상이 부족하다”는 사실, 그리고 “피해자들의 기억이 투쟁의 기억을 대체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피해자로 간주된 사회적 주체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바뀌었다.” ‘좌파’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도덕적 분노 외에 없는 게 아닐까?

 

가장 반동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신자유주의

극우파의 이런 주제, 기질과 정서는 설문조사에서도 드러났다. 장 조레스 재단이 2021년 장기간에 걸쳐 실시한 ‘프랑스의 균열(Fractures françaises)’ 설문조사 결과(2021년 10월 21일 발표)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의 75%가 프랑스는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10명 중 7명이 자신의 삶에서 “과거의 가치”가 더 중요하게 작용하고, “예전이 더 좋았다”라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3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프랑스 설문조사 기관 오독사(Odoxa)의 최신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프랑스 국민 중 21%만이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프랑스 주변 4개국 국민의 38%가 같은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응답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게다가 프랑스 국민 중 30%가 미래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응답했다.

그런데 2022년 파리정치대학 정치연구소(CEVIPOF)의 정치 신뢰도 조사에서 권위주의를 지지하는지 질문하자, 39%가 “의회나 선거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강한 사람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라고 답했다. 시대착오적이며 무분별한 극우파처럼, 스스로를 ‘금기(퇴행의 동의어)를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혁신가’라고 자부해온 에마뉘엘 마크롱은 지금까지 그랬듯 담담한 어조로 말할 것이다. “의무는 권리에 우선한다.” 그는 2023년 3월 <TF1>과 <France2>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공화국에서는 법을 너무 많이 만든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전투적이고, 영웅적이며, 거창하고 심지어 희생적으로 들리는 이 말은 분명 경고다. 

분명 마크롱 대통령은 카를 슈미트(1930년대 “방종한 의회주의의 월권이 공화제를 타락시켰다”라고 주장한 독일의 정치철학자이자 헌법학자-역주)의 저서를 열독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려면, 가장 격렬한 반동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신자유주의를 이 시대에 적극 도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바람직한 미래를 창조할 임무는 좌파에게 넘어갔다.

 

 

글·에블린 피예에 Evelyne Pieiller
기자

번역·김루시아
번역위원


(1) Vincent Berthelier, 『Le style réactionnaire. De Maurras à Houellebecq 반동주의적 스타일: 모라스에서 우엘벡까지』, Amsterdam, Paris, 2022년.
(2) Jean Mouzet, 『Éclats d’actions. La Guilde européenne du raid 행동의 파편. 유러피안 길드』(Stock, Paris, 2018년)에 실린 Sylvain Tesson의 서문. 다음 책에서 인용됨: François Krug, 『Réactions françaises. Enquête sur l’extrême droite littéraire 극우문학에 대한 프랑스 설문조사 결과』, Seuil, Paris, 2023년.
(3) Sylvain Tesson, 『Blanc 하양』, Gallimard, Paris, 2022년.
(4) 1981년 1월. 1981년 1월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열린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환영식 연설.
(5) 1940년 11월 장 폴랑(Jean Paulhan)에게 보낸 편지. 『Jacques Chardonne‒Jean Paulhan. Correspondance (1928-1962) 자크 샤르돈과 장 폴랑의 서신(1928~1962)』, Stock, Paris, 1999년.
(6) François Krug의 위의 책과 ‘Céline mis à nu par ses admirateurs, même 지지자들이 밝혀낸 셀린’, <Agone>, 54호, Marseille, 2014/2. 참조
(7) Arthur Pouliquen, 『Georges Sorel ou le mythe de la révolte 조르주 소렐, 반란의 신화』, Editions du Cerf, Paris, 2023년.
(8) Stéphanie Rosat, 『La gauche contre les Lumières 계몽주의자들을 반대하는 좌파』, Fayard, Paris, 2020년.